전출처 : 숨은아이 > 미처 불러주지 못했던 이름들을 알려주었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박남일 지음 / 서해문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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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05년) 정월부터 하루에 한 장씩 읽기로 한 책이다. 그냥 한 장씩 쭉쭉 읽어나가지 않고, 매일 어제 읽은 부분을 복습(^^)한 다음 새로 한 장을 더 읽기로 했다. 찾아보기를 제외한 본문은 437쪽이니 하루에 한 장, 곧 두 쪽씩 꼬박꼬박 진도 나갔다면 진작 책씻이를 했을 터인데, 주말 휴일엔 건너뛰고 또 바쁠 때는 며칠씩 거르기도 해서 겨우 오늘에서야 마쳤다. 그래도 올해를 넘기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 책 덕분에 나는, 우리가 많은 것들의 “이름”을 잊고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조금 내리는 비는 먼지잼, 밤의 딱딱한 겉껍질 속에 있는 불그스름한 속껍질은 보늬, 채 익지 않은 과실은 똘기, 책갈피에 끼우는 긴 끈은 보람줄, 뜨거운 볕을 가리려고 눈썹 위에 손바닥을 대고 작은 그늘을 만드는 짓은 손갓, 죽이나 풀의 표면에 엉긴 엷은 막은 더껑이... 우리 곁의 자연물, 우리가 행동 하나하나에는 모두 이름이 있었는데, 그걸 지금까지 몰라주고 살았다.

왜 그랬을까? 획일적인 도시 생활에 사로잡혀 살다 보니 자연의 변화에는 둔감해져서 굳이 이름을 구별해서 불러줄 필요가 없었을 테고(안개와 는개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나?), 또 독서의 경향도 번역 문학에 치우치다 보니 어휘의 폭이 좁아졌을 테고(해당 외국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 쓰는 번역가는 매우 드물다), 교과서나 언론에서 쓰는 공식 용어는 한자말 위주라서 뜻이 같은 토박이말 어휘는 묻혀버리기도 했을 터이다(이를테면 “무수기”라는 토박이말 대신 “조수간만의 차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오늘날 도시에서도 큰비가 오면 물마(비가 많이 와서 사람이 못 다닐 정도로 땅 위에 넘쳐흐르는 물)가 지고, 4월 구름 끼고 포근한 날은 잠포록하다(날이 흐리고 바람기가 없다). 이런 말을 모르고 살아온 게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표현하지 못하면 감성도 잃는가. 잃어버린 감성을 찾아준 듯해 고마운 책이다.

그러나 가끔 북한 말과 남한 말을 뒤바꾸어 표기하고, 때로는 낱말 해설에 미묘하게 틀린 점도 있고, 앞에서는 안 그러려고 꽤 노력한 듯하지만 뒤에서는 역시나 성 관계에 대해 차별적인 말을 지은이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점(이를테면 “논다니 계집의 몸뚱이”를 “살꽃”이라 한다는 등. 기생의 성을 사는 것을 풍류로 보는 이성애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이게 아름다운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말에서 그 “몸뚱이”의 주인은 풍류의 대상일 뿐 인격체가 아니다)이 거슬려서, 별 하나를 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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