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의 시각

‘넓이’만 남는 100만부 대신 1만명의 독자와 ‘깊게’ 소통을

10년 전 출판계의 화제는 ‘밀리언셀러’였다. 일간지 하단의 5단 10㎝, 15㎝ 책 광고가 사라지고 ‘5단 통’과 전면 광고가 등장하면서 100만 부 돌파, 300만 부 돌파라는 경이적인 숫자들이 책 제목이나 내용을 소개하는 글보다 더 크게 박히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경험한 에피소드가 있다. 탄탄한 글쓰기로 정평이 난 작가의 신작이 한 해에 2만 부가 조금 넘게 팔렸다. 어느 날 술집에서 만난 작가의 표정은 침울했다. 30대 젊은 여성 작가들의 신작들이 수십만 부씩 팔리던 그 시절, 있을 수 있는 비애였다. 그러나 비애를 넘어 한탄에 이르자 참았던 내 말문이 터졌다. “선생님, 민가협에서 주최하는 양심수를 위한 행사에 한 번은 가보셨죠? 장충체육관에서 하잖아요. 김일 레슬링 경기 중계하던 곳, 아시죠? 선생님의 신작을 사서 읽은 독자들이 다 모이면 장충 체육관 터져요. 하루에 3번을 넘게 행사를 열어야 겨우 꽉 채우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에요?” 100만 부, 300만 부는 아차 하면 저자, 독자, 편집자 모두 잃어버릴 수 있다. 출판의 방향과 줄기는 사라지고 부수만 남는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5년 출판계의 화두는 무엇일까? 대형 서점의 2005년 베스트셀러 50위 안에 든 국내 저자의 책들을 둘러본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쏘주 한잔 합시다> <글쓰기의 전략> <달려라 아비>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조선 왕 독살 사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대담>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 산문, 역사서, 소설, 인문서, 실용서 등 분야가 다양하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엔 ‘소통’이다. 저자들의 직업은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에서 대학 교수까지 다양하지만, 글쓰기의 배경엔 모두 일상의 삶과 세상에 대한 평범하면서도 각별한 문제의식이 배어 있다. 책은 쓰는 이, 만드는 이, 읽는 이 모두에게 ‘깊이’라는 소중한 체험을 갖게 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공감, 곧 새로운 넓이를 만들어낸다. 열거한 책들의 판매부수를 난 모른다. 50만 부, 100만 부 돌파라는 광고 카피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의 출판은 10년 전보다 더 깊고 다양해졌다. 깊고 넓어졌다는 점에서 분명 반가운 진보다.

앞으로 10년, 출판의 화두와 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깊게 소통하기’다. 인터넷 미디어의 핵심은 속도와 넓이만이 아니라 ‘커뮤니티’로 상징하는 새로운 소통 방식에 있다. 출판이 100만 부라는 수치의 넓이를 포기하고 1만 명의 독자와 소통하는 길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더 빠르고 더 넓을수록 더 깊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만 명의 독자와 만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가 독자가 되고 독자가 저자가 되는 길을 터주는 일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100명, 1000명의 저자를 키워내자. 그러면 1만 명의 독자가 양산된다. 복잡할 것 같지만 간단하다. 읽는 저자, 쓰는 독자가 많아져야 사유와 소통이 깊어지고 깊은 만큼 풍성해진다. 100만 부보다 1000명의 독자와 만나야 한다. 가요계의 용어로 말하면 저자와 독자의 언더그라운드 활동, 최신 용어로 말하면 저자와 독자의 커뮤니티의 공간을 만들어보자.

<한겨레>의 책·지성 섹션 <18.0>은 그래서 반가운 지면이다. <한겨레>가 ‘70, 80년대의 깊이’가 ‘90년대의 넓이’로 확장한 결과였다면, <18.0>은 넓어진 만큼 다시 깊어지는 지면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100만 부를 포기하고 1만 명을 만나는 길, 2006년에는 책을 통해 당대의 지성을 다루는 출판계와 <18.0>이 더 깊게, 더 즐겁게 그 길을 찾아보자.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 한겨레신문발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