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면 나는 호들갑스럽다. 어머어머어머 * 1000만배 

이매지님 서재에서 저항과 아만이라는 책이 옆에 보이기래 무심결에 클릭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 나온다. 

이언진. 

그는 누구인가? 

그는 역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역관으로서 유명하다기 보다 뛰어난 문장가로 ~ 

유명한가? 유명할 수가 없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 시대. 중인인 그가 뛰어난 문장가라는 걸 조선시대 양반들이 용납하겠는가? 

그냥 책 소개만 보고도 반한 책과 인물. 

이언진은 누구인가?

이언진(李彦?, 1740∼1766)은 20세인 1795년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역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중국에 두 번, 일본에 한 번 다녀왔다. 역관 이전의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63년의 일본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면서부터이다. 조선 통신사가 오면 일본 문인이나 학자들은 조선인의 시나 글씨를 얻으려 하거나 필담(筆談)을 통해 양국의 학술문화를 교류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응대하는 일은 서기(書記)와 제술관(製述官)의 몫이었다.
이언진은 한학 압물통사(漢學押物通事)의 직책으로 일본에 갔다. ‘한학’은 중국어, ‘압물’은 물건 관리, ‘통사’는 통역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직책으로 본다면 이언진은 일본 문사나 학자들과 시를 주고받거나 필담을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언진은 성대중(成大中), 남옥(南玉) 등 유수의 서기, 제술관을 제치고 일본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그의 문학적 천재성 때문인데, 이언진은 일본인이 시를 청하면 즉석에서 시를 지어 주었는데 하루에 수백 편이나 되는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점은 박지원의 「우상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언진은 1764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일본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다는 소문은 서울의 사대부 사회에 쫙 퍼져나갔지만,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기에 이언진이 문학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차별과 부조리에 이언진은 깊은 좌절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이언진은 원래 몸이 건강하지 못했는데, 일본에 다녀온 후 급격히 병이 악화되었다. 지나친 독서와 공부로 몸을 상했으며, 역관으로서의 잦은 해외 출장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신분차별로 인해 그가 느껴야 했던 좌절감과 분노는 그의 병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지 채 2년이 못 되어 죽고 만다. 향년 27세였다.


1. 이언진에 대한 당대 문인의 평가

일본 사행(使行)에서 높은 문명(文名)을 거둔 이언진에 대한 평가가 당대 조선 문인들의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당대의 보수 지배층은 이언진에 대해 일말의 위기위식을 느꼈다. 금석(錦石) 박준원(朴準源, 1739∼1807)이 그 형인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 1734∼1799)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다음 말이 보인다. “이번 통신사행에 역관 이언진이라는 자가 있는데, 나이가 스무 살 남짓이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귀국했다는군요. (…)지금 여항에 이런 기재가 있을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월사(月沙)나 간이(簡易)의 시대에 외국에서 홀로 문명을 날린 역관배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거늘, 이로 보면 세도가 낮아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의 기이한 재주에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역관배 따위가 외국에서 독보하다니, 참으로 말세야’ 하는 개탄의 소리가 들린다.
당대인 가운데 이언진의 스승인 이용휴, 그리고 성대중, 박지원, 이덕무, 김숙 등의 문인이 이언진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이용휴는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이언진을 사랑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언진의 재능에 대해 묻자 벽을 가리키면서, “벽을 어떻게 걸어서 통과할 수 있겠소? 우상은 바로 이 벽과 같소이다”라고 말했다.
성대중은 1763년에 이언진과 함께 일본에 통신사절로 다녀왔다. 그는 이때 처음 이언진을 알게 되었는데, 귀국 후에 이언진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며 원고를 보여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성대중은 이렇게 해서 얻은 이언진의 글을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유통시켰다.
박지원과 이언진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박지원은 이언진보다 세 살 많다. 박지원이 스물아홉일 때 이언진은 그에게 몇 차례 자신의 글을 보낸 적이 있다. 박지원은 그 글들에 대해 ‘자잘하여 보잘것없다’라고 혹평하였고, 이언진은 박지원의 이런 혹평을 전해 듣고 분노하고 또 낙담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하직하였고, 박지원은 「우상전」을 통해 이때의 일을 기록하며 이언진의 재능이 자못 크고 높아 짐짓 눌러주려 한 것이라며 그의 요절을 안타까워한다.
이덕무도 이언진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책 《이목구심서》에는 이언진에 대한 기사가 종종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 또한 성대중처럼 이언진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2. 저항과 아만의 시인 이언진

이언진은 저항시인이다. 이언진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그의 시에 담아냈다. 그러므로 ‘저항’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호동거실’은 바로 이 저항이 빚어낸 아름다운 보석이다. 이언진은 저항함으로써 당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언진은 이 당당함 때문에 결국 요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작(詩作)은 거대한 벽을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병은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고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펼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그의 육체를 피폐하게 만든 듯하다.
이언진의 요절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하나의 새로운 의식, 하나의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의미한다. 시작(詩作)을 통한 이언진의 저항으로 인해 조선의 정신사는 그 심부에서 심각한 균열과 파열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껏 조선의 근간을 이루는 주자학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이탁오를 대놓고 찬양한 이는 없었다. 오로지 유교만이 최선은 아니며, 유불도 삼교 회통을 주장한 이도 없었다. 마치 사대부의 철학담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인과 평민들의 삶에서 도(道)를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성체제에 대한 저항인 셈이며, 균열과 파열의 시작인 셈이다. 이 균열과 파열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을 향한 기나긴 도정의 값진 출발점이다. 이 점에서 이언진의 저항은 헛되지 않고 소중하다.

이따거의 쌍도끼를
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
손에 칼을 잡고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제104수〕

‘호동거실’에서 보여주는 ‘저항’은 시인의 ‘아만’(我慢)과 표리관계를 이룬다. ‘아만’은 불교 용어로, 자기를 믿으며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을 이른다. 불교에서의 ‘아만’은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부정정인 의미로 쓰이지만, 이언진에게서 느껴지는 아만은 자의식 내지 주체의식이 아주 큰 것이다.
이언진은 강한 자의식과 높은 자존감,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으려는 태도, 좀처럼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함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부처라고 했으며, 시선(詩仙) 이백과 자신을 동급이라 하였다. 그의 이런 면모는 단순이 ‘높은 주체성’ ‘강렬한 자의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아만’이라는 용어는 이언진이 지녔던 넘쳐흐르는 주체성과 강한 주체에 동반되는 그의 그늘까지 포괄한다.

이백(李白)과 이필(李泌)에다
철괴(鐵拐)를 합한 게 바로 나라네.
옛 시인과 옛 산인(山人)과
옛 선인(仙人)은 성이 모두 이씨라네. 〔제111수〕

이언진에게 있어 저항과 아만,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그의 저항은 아만에서 나오며, 아만은 저항의 내적, 심리적 원천이다.
이언진은 종래 ‘천재문인’으로 불려왔다. 이언진이 천재인 것은 맞지만, ‘천재’라는 단어는 자칫 이언진의 인간적, 사회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당대 사회에서 이언진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며 문제적 ‘현상’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그에게는 ‘천재’라는 수식어보다는 ‘괴물’ ‘이단아’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이언진이 이단아인 것은 조선 왕조의 근간이 되는 이념과 위계적 질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언진과 같은 이단아는 조선 시대 역사에서 달리 발견되지 않는다.
역관 출신의 문인은 이언진이 처음은 아니다. 그 이전에 홍세태(洪世泰, 1653∼1725)라는 저명한 문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언진 사후 한 세대 뒤에는 중인층 출신의 문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문학활동을 전개하는데 그 대표적인 집단이 18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이다. 이들의 시문에도 신분적 제약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심사가 종종 발견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들은 양반이 되고자 했고, 그들을 따라하고자 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이언진처럼 자신을 체제 밖에 세우고 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19세기에도 중인층 문인들의 문학적 동인활동은 활발히 이루어졌지만, 역시 이언진 같은 인물은 발견되지 않으며, ‘호동거실’ 같은 시집이 나오지도 않았다. 이 점에서 이언진은 공전절후의 문학가이다.

 

책 소개에 나온 내용들은 정말 이언진을 매력적으로 볼수 밖에 없는 내용이다. 

와우. 

그런데 책 값 비싸네. 적립금 생기면 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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