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슨 매컬러스,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요?」

 

 

텅 빈 페이지가 눈앞에 놓이기 시작했을 때 켄은 여러 방법들을 시도해보았다. 잠자리에서 글을 써보기도 했고, 한동안은 타자기 대신 손으로 직접 글을 쓰기도 했다. 코르크나무를 붙인 방에서 프루스트에 대한 생각도 했고 한 달 동안 귀마개도 사용했다. 하지만 작업하는 데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고무 때문에 귀에 곰팡이균이 피기 시작했다. 브루클린 하이츠로 이사를 갔지만, 그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토머스 울프가 아이스박스 위에 원고지를 놓고 선 채로 썼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켄은 심지어 그 방법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아이스박스를 열고 먹어댈 뿐이었다……. 술에 취해 글을 쓰는 것도 시도해보았다. 술에 취해 있을 때엔 훌륭해 보이던 아이디어나 영상들이 나중에 읽어보면 가여울 정도로 형편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맨 정신으로 글을 써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아주 비참했다.

파티는 온수 설비도 없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건물 맨 꼭대기 층에서 열렸는데 각 층마다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벽에는 줄줄이 캔버스가 기대어져 있었고 이젤 하나에 자줏빛 쓰레기장과 두 개의 녹색 행성을 그린 그림이 놓여 있었다. 켄은 갈색 가죽점퍼를 입고 있는 뺨이 붉은 젊은이 앞에 가서 바닥에 앉았다. “당신도 화가세요?” “아닙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작가예요. 그러니까 글을 쓰지요.” “이름이 뭐죠?” “아마 제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없을 겁니다. 내 이름으로 출간된 소설은 없으니까요.” “어째서 당신이 작가라고 생각하시죠?” 젊은이의 얼굴에서 열의가 사라졌고 확 붉어진 뺨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하얀 자국이 남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죠. 지금까지 아주 열심히 작업했고 내 재능을 믿으니까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물론 십 년이 흐르도록 잘 알려지지도 않은 잡지에 단편 하나 실렸으니 별로 화려한 출발은 아니죠. 그렇지만 거의 모든 작가들이 겪는 악전고투를 생각해봐요. 심지어 대단한 천재들도 그렇잖아요. 나한테는 시간도 있고 단호한 결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작업중인 이 소설이 마침내 인쇄되어 나오면 세상 사람들이 나의 재능을 인정하게 되겠죠.”

켄은 젊은이가 진지하게 본심을 드러내는 게 못마땅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걸 이 젊은이는 가지고 있었다. “재능이라.” 켄은 냉혹하게 말했다. “조그만, 단편 하나짜리 재능이라. 신께서 아주 부실하게 주셨군. 희망을 갖고 계속해서 작업하고 또 하고 마침내 젊음이 모두 다 소모될 때까지 신념을 가지고 일한다 이거죠? 그런 건 수도 없이 목격했죠. 작은 재능은 신의 가장 큰 저주라 이겁니다.” “그렇지만 내 재능이 작은지 어떻게 아시죠? 당신은 내가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없잖아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젊은이는 벌컥 화를 냈다.

 

작가 / 카슨 매컬러스

1917년 조지아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났으며, 19세에 쓰기 시작한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을 1940년에 발표하고, 메리트 상을 수상함. 29세부터 휠체어에 의지해 지내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으며, 1967년 작고함. 지은 책으로 『결혼식 멤버』『황금 눈에 비친 영상』『슬픈 카페의 노래』 등이 있음.

낭독 / 김소연 - 시인.

이재인 - 배우. '관객모독' '맥베드' 등 출연.

이진선 - 배우. '세일즈맨의 죽음' '눈먼 자들의 도시' 등 출연.

출전 / 『불안감에 시달리는 소년』, 열림원

음악 / 배기수

프로듀서 / 김태형

 

 

     

자신의 남편을 모델로 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네요. 작가로서의 좌절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남편을 이렇게 적실하게 그려내다니. 비록 삶의 냉혹함을 섬뜩하게 느낄 수 있는 수작이긴 하지만, 소설가라는 사람들, 참 잔인하죠? 제가 등단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작가의 이혼 소식을 듣고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이혼했어? 이제 그 사람 소설  좋아지겠군.” 심각함을 덜어주려고 던진 농담이었겠지만 고지식한 저는 내심 충격을 받았지요. 좋은 작품을 쓰려면 반드시 불행해져야 하는 걸까, 하지만 다 잘 살자고 하는 짓인데…….

제가 아는 가장 무서운 영화 중 하나인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피와 공포와 악령과 저주와 미스테리…… 그러나 제가 비명을 질렀던 장면은 그쪽이 아니었어요. 작가 지망생인 잭 니콜슨이 몇 날 며칠 책상에 붙어 앉아 소설을 썼는데, 아내가 가서 보니 종이 가득 문장 하나만이 반복해서 타이핑돼 있는 거예요!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잭은 바보가 된다). 정말 소름이 끼치더군요.

글이 안 써질 때 책상으로 다가가는 것이 형틀에 앉는 것 같다고 말한 소설가도 있지요. 그런 고통 속의 작가들에게 ‘작은 재능은 신의 가장 큰 저주’라는 켄의 표현, 얼마나 가혹한 말인지! 재능이 아예 없다면 헛수고도 하지 않을 수 있는데, 그놈의 ‘작은 재능’이 문제라니까요. 잔인함에서 신은 소설가보다 한 수 위군요.

더위가 한풀 꺾였나요. 곧 가을호 문예지가 나오겠군요. 다들, 고생했습니다.

 

2009. 9. 17. 문학집배원 은희경 

 

이 페이퍼는 은희경의 문장배달에서 스크랩했습니다. 저작권은 문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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