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청구권 문제는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과 대한민국 간 협정(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양국 정부가 합의했다. 게다가, 청구권 자금은 한번에 현금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10분의 1 정도의 경제적 가치를 10년에 걸쳐서 일본의 물품이나 역무로 제공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구체적으로 무상 3억 달러는 3천만 달러씩 10년에 걸쳐 공여하고, 유상 2억 달러의 경우 2천만 달러씩 10년 동안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한일 간의 대립 쟁점의 해결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의미에서의 ‘촉매catalyst’에 지나지 않았고, 한일 간의 대립 쟁점을 표면에 나서서 중재, 조정하는 의미에서의 중개자mediator, middleman가 되지는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한일 양국의 국내에서 미국의 개입이 편향되어있다는 인상을 남겨, 반미감정을 분출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은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을 실질화하기 위해 ‘식민지지배 잔재 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다만, 적어도 출발점에서는 그러한 식민지배의 유제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요약하자면 식민지지배의 유제를 계승하면서 그것을 청산하는 일이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식민지지배 청산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었다.

한국전쟁에 따라 반공 진영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미국은 일본을 철저하게 ‘비군사화’시키겠다는 애초의 방침을 포기했다. 일본의 보수 정권도 그에 호응하여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여 그것을 후에 보안대, 자위대로 개조시킴으로써 사실상의 ‘재군비’로 키를 돌렸다.

한일회담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식민지지배기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왕래한 경제적 가치에 관한 것으로 특히, 일본 정부나 개인이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이전한 경제적 가치의 내역과 그 총액을 금전적으로 평가한 후, 원상 복귀를 위한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전후 처리가 연합국에 의해 대일 배상 포기라는 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대일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했다. 더욱이, 식민지지배가 식민지에 손해를 입힌 것이며, 그에 대해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국제사회에 정착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와 관련하여 또 하나 한일 간의 쟁점이 된 것이 1910년의 ‘병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법적 성격이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로서 ‘병합’이 진행된 만큼 법적으로도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한국 정부는 이 한국병합조약 및 그에 이르기까지 한일 간의 협정체결이 일본의 강제로 이뤄졌다는 의미에서 ‘병합’은 위법한 것이고, 따라서 지배 자체도 위법 상태가 계속되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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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J. 토마스 쿡 지음, 김익현 옮김 / 서광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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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카>는 어떤 삶이 인간 존재에게 최선의 삶인가 그리고 어떻게 개인은 그런 삶을 방해하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설명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70 


 J. 토마스 쿡 (J. Thomas Cook)의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Spinoza's 'Ethics': A Reader's Guide>은 기하학적 구조로 정리-증명-주석이라는 기하학적 구조로 건축된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1675)의 <에티카 Ethica>를 보다 평면적으로 보여주는 입문서다. 신(神), 정신, 정서, 지성, 이성으로 이어지는 논의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앞서 말한 기하학적인 논증 구조 안에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용어를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증명을 통해 앞선 정리로부터 끊임없이 확장해 가는 구조는 강력하지만, 간결한 도형 대신 명제로 구성된 <에티카>는 그만큼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은 구조에 대한 좋은 도면을 보여주며 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책이다. 이번 리뷰에서는 다소 거칠지만 <에티카>의 구조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려 한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세계는 결과가 그것의 원인으로부터 질서 있게 따라 나오는 그리고 결과가 그것의 원인을 이해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세계다. 그리고 그 원인 또한 그것의 원인을 이해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렇게 계속된다... 만약 스피노자의 실재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 기하학과 같은 전적으로 합리적인 명료성을 가지려 한다면, 체계를 위한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선행하는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 스피노자가 이러한 출발점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낱말이 '실체'(substance)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45


 <에티카>의 제1부에서 다루는 대상은 실체(實體), 신(神)이다. 결과를 가져오는 모든 것의 원인으로 자기 원인(causa sui)을 스피노자는 실체라고 이름짓는다. 세계는 신의 활동 역량에 의해 생겨나며 이를 생산하는 자연(natura naturans)과 생산된 자연(natura naturata) 의 관계로 표현된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因果)관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의 법칙으로, 스피노자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의 구조에 따라 필연의 세계를 보여준다. 


 신의 역량은 구조화된 역량이고, 사물들은 이 구조화된 역량에 의해 생겨나게 되며 이 역량으로부터 질서 있게 따라 나온다. 만약 양태의 계열 전체가 연장 속성 아래에서 그 역량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연장된 사물의 무한 계열이 잘 구조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의해 생기고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양태의 계열 전체가 사유 속성 아래에서 그 역량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관념 혹은 사유의 무한 계열이 잘 구조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의해 생기고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동일한 구조적 역량이 양태의 두 계열 -연장과 사유 - 모두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88


 신(자연)의 세계는 이처럼 완전한 세계지만, 인간의 세계는 이와 같지 않다. 인간 또한 실체이고 인간 자체로 완전하지만, 신의 부분인만큼 부분적으로 완전하다. 신의 속성에 대해 부족한 만큼 인간은 무지와 오류를 갖고 있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상상지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스피노자는 신체나 뇌의 변용을 통해 어떤 것의 현존을 지각적으로 기록하는 과정 전체를 '상상지'(imaginatio)라고 부른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상상적 관념이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물체의 본성 못지않게 적어도 우리 자신의 신체의 본성을 반영한다는 사실은 오류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p110)... 제2부 정리18에서 약술된 상상지(imainatio)론은 인간 인식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일 뿐만 아니라 허위, 인간의 무지와 오류에 대한 설명의 기초이기도 하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15


 인간은 고유의 특성인 상상지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그는 사물들의 보편적 특성인 '코나투스'라는 자기보존 특성도 함께 갖는다. 자기보존을 하려는 '욕망' 그리고 긍정적 정서인 '기쁨'과 부정적 정서인 '슬픔'이라는 세 기본 정서는 다른 관념 및 정서들과 결합하여 수많은 감정을 끊임없이 창출해간다.  


 제3부에서도 중심이 되는 정리는 제3부 정리6으로, 거기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의 원리를 소개하고 그 원리가 모든 사물들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코나투스의 원리는 <에티카>의 나머지 부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스포노자의 주장은 각각의 것(unaquaeque res)이 자신의 존재 보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53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결정된다.' 그 다음 문장에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욕구를 의식할 때 그것은 욕망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물리적 유기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우리의 근본적인 코나투스적 노력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질적 노력이 우리의 모든 욕망과 행동의 뿌리를 이룬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62


  부분적인 실체인 인간이 구조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상지'의 한계 안에서, 자기보존의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통해 더 많은 덕(virtus), 탁월함(arete)을 가지려는 노력을 강조한다. 이러한 노력은 최고선(崔高善)과 신에 대한 인식을 지향하며,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성에 의해 느끼는 정신이, 이성에 의해 자신을 진정으로 인식하면서 최종적으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자신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피노자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능동적인 한 우리는 자유롭지만, 반면에 수동적인 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예속적 상태에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것이 스피노자 논증의 핵심이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73


  <에티카>는 분명 기하학적인 구조로 구성된 건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축물이 조금은 위태롭게 보인다면 이는 건축물을 스피노자 시대의 사상적 기반이 아닌 현대의 기반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필연의 법칙이 적용되는 실체의 세계와 우연의 법칙이 적용되는 부분적 실체의 세계를 같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욕망이라는 변수로 인해 생겨나는 곡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적 구조로 설명했다면, <에티카>가 보다 설명력있는 기하-윤리학책이 되었겠지만, 자기원인의 세계가 아닌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개체는 존재 보존을 위해 노력하며(제3부 정리6) 그렇게 함에 있어서 기쁨을 주는 것을 추구하고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제4부 정리19 증명). 이러한 노력이 바로 개인의 코나투스적 본질 혹은 본성이다.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일수록, 그 사람은 더 많은 역량을 표출한다. 스피노자는 개인의 역량을 그의 덕과 동일시하며(제4부 정의8) 개인이 존재 보전 노력에 있어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그는 덕을 더 많이 갖게 된다고(제4부 정리20) 결론내린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84

연장된 개별 사물이 연장(extension)이라는 속성 ‘안에‘ 있으며 그것을 ‘통해 파악되는‘ 것처럼, 개별 관념과 정신 상태도 사유(thought)라는 일반적 범주 ‘안에‘ 있으며 그것을 ‘통해 파악될‘ 수밖에 없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p52)... 무한하고 실존하는 하나의 실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실체가 단 하나의 속성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증하고 나서, 무한한 실체는 무한히 많은 수의 속성(attribute)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각 속성 자체가 무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피노자는 추론한다. 정리 11에서 그는 이 모든 주장을 함께 제시하면서 처음으로 ‘신‘이라는 낱말을 끌어 들인다. - P53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따라 나오는 무한하고 영원한 양태를 이해하고자 할 경우, 양태가 신/실체의 역량이 활동으로서 표현되는 방법 내지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경우 연장의 무한하고 영원한 양태는 신의 역량이 무한히 연장된 영역 전반에 걸쳐 표현된 무시간적 방식이다. - P68

능동적인 것을 수동적인 것으로부터 구분하거나 생산된 것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을 구분한 후에 스피노자는 정리31에서, 특정한 사유와 의지는 사유라는 속성의 양태들이며 사물의 ‘생산된 측면‘ - 생산된 자연 natura naturanta -에 속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와 의지는 그것들을 생산한 활동적 역량에 의해 지금 상태로 존재하도록 결정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 P75

스피노자는 제3부 정리9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노력이 정신에만 관계될 때, 그것은 의지라 불리지만, 정신과 신체 모두에 관계될 때, 그것은 욕구라 불린다. 그러므로 욕구는 바로 인간의 본질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결정된다.‘ 그 다음 문장에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욕구를 의식할 때 그것은 욕망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물리적 유기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우리의 근본적인 코나투스적 노력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질적 노력이 우리의 모든 욕망과 행동의 뿌리를 이룬다. - P162

만약 우리가 역량 내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충분히 마음에 새겨 두고 있다면, 우리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데서 오는 좌절의 고통을 겪지 않는 방식으로, 충분한 노력을 통해, 욕구와 욕망을 제한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견해로는 우리 역량 내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적합한 관념은 그 자체가 우리 역량을 넘어서는 것을 우리가 소유하고 완성시킨다는 생각에 대한 부정을 포함하며, 따라서 후자를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으로서 그리고 욕망의 상상적 대상으로서 약화시킬 것이다.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필연적인 것만을 욕망할 수 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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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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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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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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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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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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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에서 그때 단 한 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p154)...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55/232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1909~1948)의 <인간실격 人間失格>에서 주인공 요조가 돌아본 자신의 인생이다. 그는 신에게 묻는다. 공포에 대한 무저항이 자신이 저지른 죄(罪)이며 불행의 근원인가를. 요조는 어떤 공포를 느꼈던가. 다른 이들과 자신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 이를 피하기 위해 요조는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닌 '주변에서 원하는 나'가 되고, 그는 모든 이들에게 사람받는 듯 보이지만 정작 자신으로부터는 사랑받지 못한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p18)...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20/232


 겉으로는 웃음과 미소짓고 있지만, 가면 속 자신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겉과 다른 자신 안의 괴물을 발견했기에, 그는 그는 괴물을 닮은 자화상을 보며 진(眞)정한 아름다움(美)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다른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추(醜)의 미학을.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46/232


 세상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요조는 결국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는 죽지 않는다. 그는 대신 죽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세상이란 결국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닐까 하는. 요조는 사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사회는 신뢰할만한 곳이라고 회심(metanoia)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새롭게 태어나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에게 관심을 갖는다. 요조의 사회는 아버지와 같은 무서운 곳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로, 다시 사회 계약론의 사회로 옮겨간다. 이처럼 요조의 사회는 죽음을 통해 달라졌다.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78/232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15/232


  요조의 변화는 호리키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죄(罪)의 반의어를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법(法)과 선(善)에서 찾는 호리키와 그렇지 않은 요조. 호리키에게 법과 도덕은 다르지만, 요조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법과 선악(善惡)은 분리된 개념과 현실의 세계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의 인식은 곧 깨지고 만다.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법이지."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뭔데? 신이야?"

 "설마....... 죄의 반의어는 선이지. 선량한 시민. 즉 나 같은 것이지."

 "농담은 그만두자고. 그러나 선은 악의 반의어지 죄의 반의어는 아니야."

 "악과 죄는 다른가?"

 "다르다고 생각해.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도덕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한 거지."

"말이 많군. 그렇다면 역시 신이겠지. 신, 신. 뭐든지 신으로 해두면 틀림없어."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2/232


 엄청난 불행이 닥쳤을 때, 그는 사회에 대한 신뢰가 처절하게 깨져 나가면서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리바이어던이 다시 뛰쳐나왔음을 실감한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깨졌을 때 그는 신에게 묻는다. 신뢰는 죄인가? 선량한 상대에 대한 믿음의 대가가 과연 공포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그때 저를 엄습한 감정은 노여움도 아니고 혐오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그것은 묘지의 유령 따위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신사(神社)의 삼나무에서 흰 옷을 입은 신령과 부딪쳤을 때 느낄지도 모를, 아무 소리도 안 나오게 만드는 고대의 거칠고 난폭한 공포였습니다. 저의 새치는 그날 밤부터 나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점점 더 인간을 한없이 의심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삶에 대한 일체의 기대, 기쁨, 공명 등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7/232


 그렇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요조는 선과 악, 죄에 대한 신의 대답을 기다린다.  자신의 불행이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면 그에 대한 신의 해명을 요조는 기다리지만, 신의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기되는 심판 속에서 그는 불안감을 느끼고, 이제 그는 '익살'이라는 끈으로 사회에 맞춰 사람 사이에(人間)사는 대신 비합법의 영역에서 사람(人)으로 머문다. 이제 그가 생각하기에 감당할 수 없이 커져버린 죄로 인해 그는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요조는 결국 어렸을 때부터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공포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사회에 대한 신뢰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거절하지 못하는 무저항이 문제였을까.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59/232


 요조는 죽음으로부터의 귀환에서 선악이라는 도덕적 관념과 죄악은 구분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죄에 대한 요조의 질문과 신의 침묵, 그 사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요조는 죄인이자 악한이 되버리고 말았으며, 결국 자신 스스로 선악이라는 도덕과 죄악이 분리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 말았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p138)...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9/232


 <인간실격>에서 요조는 신에게 신뢰심과 무저항에 대해 묻는다. 그렇지만, 먼저 요조는 자신의 불행이 죄의 결과인지에 대해 먼저 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에 앞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직시(直視)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실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에 맞춰 변화되는 불안정 속에서 근원적인 실체에 대한 추구 -  인간이란 무엇인가 - 란 덧없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느낌이 드는 것이다.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잘도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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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23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인간실격>을 호랑이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 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저하고 다른 포인트를 잡으셨네요~ 신선한 리뷰 잘 봤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23 10: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인간실격>은 뒤늦게 읽은 만큼 더 강렬하게 다가오네요. yamoo님 활기찬 한 주 여시기 바랍니다! ^^:)
 

"대통령과 핫라인이 있다"라고 여러 차례강조했다. 그 결과 "기초 지자체 226개 중한 곳"이라던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전국구급 선거가 되었다. 대통령과의 ‘핫라인‘을 부각시키는 게 영리한 선택이었을까. 그렇게 보기 힘들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지 않아서다. 부정 평가의 주요 이유로 경제 상황, 이념 전쟁, 일방적 국정 운영 등이 꼽힌다.경기·인천에 비해 서울 지지율이 나은 편이라고 해도, 평균을 맴돌고 있다. - P13

민주당 친이재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여당이 정권심판론을 자초한 이유를모르겠다고 말했다. "정권심판론은 야당으로서는 너무 좋은 구도다. 일개 구청장선거로 끝날 수도 있는 선거판을 정부·여당이 키웠다.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본 건가? 판돈도 세게 걸었다.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 - P13

그는 "권리 행사를 위해 투표하긴 했지만 절망스러운 마음이다. (진교훈과 김태우) 두 후보 중누가 구청장이 되건 구민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을 거다. 특히 두 후보의 연설을기사로 보다 보면, 강서구청장이 되기 위해 선거를 치르는지 아니면 상대 정당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선거를 치르는지 헷갈렸다"라고 말했다. 구청장은 구민 삶의 현장과 민원에 밀착해야 할 ‘생활 정치인‘이라는 지적이다. - P15

온라인 투표 방식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실은 계속 온라인 투표로 국민여론을 수렴했다. 올해 1월부터는 도서정가제적용 예외 허용, 3월부터는 KBS 수신료 분리 징수, 6월부터는 집회·시위 제재 강화 등 논쟁적이고 이해관계가 첨예한 주제를 온라인 국민투표에 부쳤다. 투표 시스템상 동일인이 아이디를 여러 개 만들어 중복 투표할 수 있고, 유튜브나SNS에서 조직적 투표 독려가 발생한 사례 등이 지적되면서 여론조작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대통령실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세 주제 모두 ‘추천‘에 압도적으로 많은 표가 몰렸고 정부는 이 결과를 실제 국정 운영에 반영했다.  - P21

중대재해처벌법은 기업의 경영책임자 등이 안전조치를 안 해 사람이 죽으면1년 이상 징역에 처하게 한 법이다. 고용노동부 산업안전감독관들이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아 수사한다(과실치사 혐의가인정되면 해당 부분은 같은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아 경찰이 수사한다). 수사 개시와 종결, 기소여부 판단은 검찰이 한다.  - P23

문제는 응급의료체계의 꼭짓점인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도 상당수가 증상에 따라 소아 응급진료가 불가하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권역응급의료센터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당 ‘권역‘에서 응급환자에 대한 최종 진료가 가능하도록전국에 40곳이 지정돼 있다. 최소 300병상에서 최대 1700병상까지 갖춘 규모 있는 종합병원 혹은 상급종합병원들이다. 그런데 권역응급의료센터 40개 가운데19개 병원이 소아 응급진료에서 치료가불가능한 증상이 있다고 답했다. - P27

 투자자들(시장)은 물가 인상이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올해 하반기에 기준금리의 동결, 심지어 인하까지 기대했다. 그러나 연준은 안심할 수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지난해부터 미국의 경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고용 실적이 사상 최대의증가율을 시현하고 임금도 따라 오른다. 경제성장률도 높아졌다. 이런 호황이라면, 기준금리 인상을 중단하겠다는 신호만으로 물가 급등이 재개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인상을 밀어붙이려니 경기침체가 두렵다. - P37

 케빈 워시 전 연준 이사는<월스트리트저널>(10월4일) 칼럼에서기준금리 관련 논란에 매우 냉소적인 의견을 개진했다. 미국 정부와 월스트리트는 연준이 하반기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더 올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만, 이는 "미국 국채수익률의 변동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라는 것이다. "연준은 지난 5월 이후 ‘단기 정책금리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렸지만 10년물 국채수익률은 봄 이후 1.5%포인트나 상승했다." - P37

미국채 수익률 상승이 ‘뉴노멀‘이라면, 그동안의 ‘싼 돈‘에 익숙해져 있는 글로벌 경제엔 격변이 불가피하다. 우선 자동차나 주택 관련 대출에서 설비투자에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차입비용이 크게오르며 가계와 기업의 지출을 제약할 것이다. 각국 정부들의 경우, 이자 부담이급증해 재정건전성이 악화된다. 이렇게 되면 국채를 발행할 때마다 점점 더 높은금리를 약속해야 한다. - P39

EU 규정을 보면,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구체적인 거래 공정화 방안을 마련했다. 판매업체의 상품 공급을 제한·유보·중단할 때 사전에 고지하도록 했다. 투명성 강화 방안도 두었다. 검색 결과로노출되는 순위를 결정하는 알고리즘의 핵심 매개변수를 공개하도록 하는 조항이 눈에 띈다. 아울러 피해구제 방안으로조정절차의 지원과 단체소송 제도를 도입했다.  - P43

독일 언론은 이번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이 연방정부 내 연정 파트너 사이의불협화음과 물가상승, 에너지 가격 상승, 주거 문제 등 대응 실패를 심판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올라프 숄츠 총리의 연방정부는 향후 정책 추진에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또한 AfD가 독일 정치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AfD가 옛 동독 지역을 넘어 옛 서독 지역의 주요 선거에서 실제로 2위를 거둔 것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P49

배출원이 다양하고 피해도 광범위한 생태계 오염 통제에 비하면, 작업 현장에서 수은을 관리하는 것은 훨씬 쉽다. 수은증기를 흡입하거나 수은 액체가 피부에닿지 않도록, 용기와 공정을 밀폐하고 배기장치와 호흡보호구를 활용하면 된다. 주기적으로 실내 대기와 노동자 소변의수은 농도를 모니터하는 것도 혹시 모를노출을 감시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쉬운 일보다 더 쉬운 것은, 아예 그 일을 하지않는 것이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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