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한일관계사 - 한일 대립은 언제 끝날 것인가. 과연 관계 개선은 가능할까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기미야 다다시 지음, 이원덕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일관계는 냉전 시기와 같이 비대칭이지만 상호보완적으로 협력하는 관계에서 대칭적인 관계로 변용해왔다. 따라서 냉전 시기 남북 분단 체제하의 체제 경쟁에서 한국 우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보장, 경제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계는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그 사명을 다했다. _ 기미야 다다시, <한일관계사> , p71/105

기미야 다다시 (木宮正史, 1960~ )는 <한일관계사>를 통해 현대 한일의 역사 속에서 두 변곡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한일 수교로 성립된 '1965년 체제'로서 비대칭적 관계의 시작점이며, 다른 하나는 '1998년 체제 - 한일파트너십'으로 대칭적 관계의 출발점이다. 본문에서

저자는 양국을 바라보는 양국의 인식차이를 언급한다. '안보'를 중심의 일본과 '역사' 중심의 한국의 인식. 이러한 인식 차이는 근대 개향(開港) 이후 오늘날까지 변화한 적이 없었다. 다만, 서로의 필요에 의해 비대칭적 관계에서는 드러나지 않았고, 대칭적 관계에서는 나타났을 뿐이다.

현재 한일 양 정부, 사회의 대응을 보면 비대칭에서 대칭으로의 변화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비대칭의 관계에 기반한 한일관계하에서 형성된 한일 양 정부와 사회의 사고나 행동 양식과 대칭적인 관계에 기반한 사고와 행동 양식이 혼재하여 서로가 관계 악화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함으로써 어느 쪽도 먼저 나서서 타협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 않고 있다. _ 기미야 다다시, <한일관계사> , p87/105

저자는 <한일관계사>에서 현재 한일 간의 관계 문제가 관계를 바라보는 인식 차이가 있어 왔으며, 이러한 차이는 수교 후 60여년 간 달라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침묵이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만, 2000년대 이전까지 양국은 서로의 이익 앞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줄여왔을 뿐이고 이를 우호증진, 관계개선이라고 착각했을 뿐이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을 단순히 갈등이라고 치부해야 할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차이를 확인하고 인정하면서 입장을 좁혀간다면 진정한 이웃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일관계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협력이 쉬운 측면도 있었다. 1980년대까지와 같이 한국이 비민주적인 체제였기 때문에 한일 협력에 대한 저항을 상당 정도 억제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원만한 한일 협력이 가능했다. 또 한일 협력의 성과로 한일 간 국력 격차가 좁혀졌다고 일본이 그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 서로 비대칭적이었던, 바꿔 말하면, 서로 너무도 달랐던 점이, 상호 협력에 따른 손익계산에 관해, 누릴 이익에는 민감했지만 부담할 비용에는 그다지 만감해야 할 필요성을 없애주었다. _ 기미야 다다시, <한일관계사> , p49/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다가 이 문제는 일본 측에서는 영토 문제이지만 한국에는 영토 문제라기보다도 역사 문제였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일본 고유의 영토였던 것을 1905년 시마네현이 영토 편입을 선언함으로써 법적으로도 영유권이 명확해졌는데도 불구하고 1952년에 이승만 정권이 불법 점거를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에 대해 한국 정부에 따르면 원래부터 한국 고유 영토였던 것을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의 첫걸음으로 억지로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 동시에 당연히 한국의 영토로 되돌아온 것으로 본다.

한일관계는 냉전 시기와 같이 비대칭이지만 상호 보완적으로 협력하는 관계에서 대칭적인 관계로 변용해왔다. 따라서 냉전 시기 남북 분단 체제하의 체제 경쟁에서 한국 우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보장, 경제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계는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그 사명을 다했다.

한국과 일본은 안전보장상의 공통이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경우, 대립을 억제하는 메커니즘을 실행으로 옮긴다. 양국이 함께 실행하는 경우도 있고 한쪽만인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함으로써 대립은 표면화하지 않고 억제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센티브가 실행되지 않을 경우, 바꿔 말하자면 양국의 안전보장상의 이익에 괴리가 보이거나 외교정책 방향에 갈등이 보이게 되면 한쪽 또는 양국 모두 대립을 억제하고 관리하는 메커니즘을 실행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 메커니즘을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국내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대칭화가 문화의 상호 침투 현상을 촉진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거의 무관심이었던 한국문화에 일본 사회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해하게 된 것도 확실하다. 그것은 상당히 바람직하고 또한 한일관계의 미래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같은 ‘정의’라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일본에서는 ‘약속이나 합의를 지킨다’라는 것과 같은 ‘절차적 정의’가 상대적으로 중시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약자, 피해자를 포함하여 관계 당사자가 납득하고 동의했다는 의미에서 정의에 부합한다’라고 보는 ‘실질적 정의’가 상대적으로 중시된다.

이렇게 한일 협력의 ‘성지’였던 경제와 안전보장에서의 한일대립이 발생한 것은 한편으로 한일 간의 역사 문제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뿐만 아니라 대북 인식과 미중관계 인식을 둘러싼 한일의 괴리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외교나 안전보장 분야에서 한일의 괴리가 역사 문제를 풀어가려는 양측의 의욕을 저하시키며 나아가서는 역사 문제를 둘러싼 마찰을 격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외교·안전보장의 괴리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짜 세부적인 것에는 여러 면이 있어서 서로 붙어 있는 진실의 조각들 사이에서밖에는 끼어 있지 못하는데도 그녀는 그중 하나를 제멋대로 뽑아내 자기가 꾸며 낸 세부적인 거짓말 사이에 끼워 넣으려 했고, 그 꾸며 낸 세부적인 거짓말이 어떠하든, 거기에는 지나친 면과 채워지지 않는 면이 있기 마련이어서, 바로 이점이 진짜 세부적인 진실이 있을 곳이 그녀가 꾸며 낸 거짓말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했다.

스완은 오데트가 겁도 없이 그에게 맡긴, 그만큼 그의 양심에 대한 그녀 신뢰가 절대적인 봉투 앞에서 잠시 비통하고도 당혹스러우며 그렇지만 행복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봉투의 투명한 유리 너머로, 그가 알게 되리라고 결코 생각해 본 적 없던 사건의 비밀과 더불어 오데트 삶의 일부가, 마치 미지의 세계로부터 오려 낸 좁고 빛나는 단면인 듯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러자 그의 질투심에는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생명력이 있어 질투를 부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기라도 하듯, 비록 스완 자신을 희생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질투심은 필요한 양분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마음의 병이라는 화학 작용에 따라 자신의 사랑으로 질투를 만들어 낸 다음, 다시 오데트에 대한 다정함과 연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다시 귀엽고 착한 오데트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벨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것은 오로지 여러 개체에 공통되는 일반적인 개념과 개체 들을 가리키는 이름들뿐이라고 보았다.

엘로이즈의 시대를 지배하던 도덕적 관념의 실제적인 위상은 일반적으로 중세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종교적 윤리관, 즉 전적으로 교회의 권위와 강압적인 규례에 의존하는 윤리관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세기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문화혁명을 사실상 주도했던 나라는 프랑스다. 랑과 오를레앙, 랭스, 오세르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학교들이 세워졌고 파리는 ‘새로운 아테네’라는 신화를 탄생시키면서 수도원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한 세속적 지혜mundana sapientia의 수도로 등극했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가장 순수한 앎의 형태로 그를 이해하는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신을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성찰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낳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에 대한 사랑은 생 빅토르 신학의 특징 중 하나인 이성과 의지와 욕망의 조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찰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르시아 -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세계 10대 문명 7
안나 반잔 지음, 송대범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헤로도토스는 ˝어떤 나라들도 페르시아만큼 외국관습을 기꺼이 채택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페르세폴리스에서는 다양한 인종요소들이 통합되어 아케메네스 양식을 구성하는 독창적인 종합양식을 형성했다. _ 안나 반잔, <페르시아>, p80

안나 반잔의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문명의 유적, 유물들을 통해 이란-페르시아 문명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책에 담긴 사진들은 시간에 따라 정렬되어 독자들을 마치 박물관으로 인도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책의 핵심은 이 부분이지만, 리뷰로 옮기기에는 한계가 이어 아쉽게 느껴진다.

아케메네스 제국을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어느 정도 제국의과업을 지속하려고 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실로 빠르게 ‘이란화‘되었다. 그는 사트라프피 체제를 토대로 아케메네스의 통치체제를 유지햇다. 그리고 그는 이란 고원의 지배자들을 부유하게 했던 교통망과 교역의 확장 노력을 모방했다. _ 안나 반잔, <페르시아>, p130

이란 고원에 형성된 중앙아시아의 제국(帝國)의 역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글로벌-로컬 global-local‘의 순환이 아닐까 생각된다.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은 중앙집권화된 다리우스의 제국이 없었다면, 그토록 짧은 시기에 확장될 수 없었을 것이고, 이전 시기의 융합정책이 없었다면, 헬레니즘 시대의 코스모폴리탄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글로벌 global‘이라고 한다면, 이어지는 ‘파르티아-사산조‘의 역사는 ‘로컬 local‘이라는 반동(反動)의 움직임이다.

파르티아인들의 도래는 이란 고원의 헬레니즘을 종식시키고 ‘이란다움‘의 부활로 이어졌다(p132)... 사산 왕조는 이란의 심장부인 파르스 출신인 자신들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적통을 잇는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가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와는 달랐다. 서쪽으로는 강력한 로마 제국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박트리아에 정착해서 기원전 100년에 최종적으로 그리스인들을 몰아낸 쿠샨 왕국이 있었다. 또한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서쪽으로 밀고 나오는 헤프탈족, 즉 백인 훈족들의 위협도 있었다. _ 안나 반잔, <페르시아>, p144

이란-페르시아 문명의 ‘글로벌-로컬‘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은 이슬람화된 이후 역사 속에서도 이어진다. 세계종교인 이슬람교 내에서 소수파인 시아파가 다수인 아랍과는 다른 이란만이 갖는 독특함을 발견하게 된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가 결혼했다는 <쿠시나메>의 이야기에서 보여지듯 세계와 연결되었으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함을 간직한 이란-페르시아 문명의 성격을 생각하게 되는 도록이었다...

그 이후 사산 왕조의 문화는 일본에까지 건너갔다. 나라[奈良]에 있는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서 우리는 중국을 통해 전해진 각종 악기, 식기, 상자들과 특히 사산 왕조의 영향을 받은 직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_ 안나 반잔, <페르시아>, p1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