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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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인 여러 좋음들에는 지나침이 있다

 

이제 어떤 즐거움, 예를 들어 고귀한 즐거움은 대단히 선택할 만한 것이지만 무절제한 사람들이 관계하는 육체적인 즐거움은 선택할 만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즐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그것은 왜 육체적인 즐거움에 반대되는 고통이 나쁜가 하는 것이다. 물론 좋은 것이 나쁜 것에 반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수적인 [육체적] 즐거움들은 나쁘지 않은 것은 좋은 것이라는 이유에서만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느 정도까지만 좋은 것인가? 더 나은 것으로의 지나침이 불가능한 모든 품성상태와 운동에는 즐거움의 지나침도 없는 반면, 더 좋은 것으로의 지나침이 가능한 곳에서는 즐거움의 지나침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육체적인 여러 좋음들에는 지나침이 있다. 또 열등한 사람은 지나침을 추구하기에 열등한 사람인 것이며, 필수적인 것을 추구하기에 열등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음식과 술, 성적인 것들에서 어느 정도 기쁨을 느끼지만, 모두가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고통의 경우는 사정이 이와 반대다. 열등한 사람은 지나친 고통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고통을 피한다. 지나친 즐거움에 반대되는 것은 고통이 아니지만, 지나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하기 [고통이기] 때문이다. (273쪽)

 

 

 

육체적인 즐거움이 어째서 더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그런데 우리는 참된 것뿐만 아니라 그릇된 것의 원인도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확신(pistis)에 도움이 되니까. 실제로는 참이 아닌 것이 어떻게 해서 참인 것으로 보이게 되는지를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 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것을 더 잘 확신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육체적인 즐거움이 어째서 더 선택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273∼24쪽)

 

 

 

즐거움이 신실하지 않은 이유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우선 육체적인 즐거움이 고통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지나친 고통으로 말미암아 마치 치료인 양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지나침으로 나아가고, 일반적으로 육체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치료가 고통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치료'는 강렬해지며, 그런 까닭에 [즐거움이] 추구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던 것과 같이, 즐거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신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즐거움이 열등한 본성들의 행위라는 이유에서이다. (열등한 본성이, 짐승들의 경우처럼 나면서 그러한 것이든, 열등한 인간의 경우에서처럼 습관에 의해 그러한 것이든 간에.) 둘째 이유는 즐거움이 결핍에 대한 치료이며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리로]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완성으로 가는 회복 과정에서 생겨 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우연하게만 신실할 뿐이다. (274쪽)

 

 

 

생물은 늘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또 육체적인 즐거움들은 강렬하기에, 다른 즐거움에서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추구된다.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 안에 스스로 일종의 갈증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이러한 갈증이 해가 없는 것일 경우에는 탓할 것이 없지만, 해가 될 경우라면 나쁜 일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고, 즐거움도 고통도 아닌 상태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주장하는 자연학자들 또한 증언하듯이, 생물은 늘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에는 [육체의] 성장이 진행되는 까닭에 젊은이들은 마치 술에 취해 흥겨운 사람의 상태처럼 되고, 그래서 젊음은 즐거운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 본성에 있어 '성질이 불같은' 사람들은 늘 치료를 필요로 한다. 신체는 수축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으며, 항상 강렬한 욕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은 그것에 반대되는 즐거움에 의해 쫓겨날 뿐만 아니라, 충분히 강력하기만 하다면 그 어떤 즐거움에 의해서든 쫓겨난다. 이런 까닭에 무절제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다.(274∼275쪽)


 

고통 없는 즐거움들은 지나침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 없는 즐거움들은 지나침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즐거움들은 본성상 즐거운 것들에 속할 뿐, 우연히 즐거운 것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치료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운 것들은 우연히 즐거운 것들이다. 치료받는다는 것은 아직 건강하게 남아 있으면서 행위하는 부분에 속하는 일이며, 그렇기에 즐거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본성적으로 즐거운 것들은 바로 그러한 [건강한 ] 본성의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들이다.(275쪽)

 

 

 

동일한 것이 언제나 즐겁지는 않은 까닭

 

동일한 것이 언제나 즐겁지는 않은 까닭은 우리의 본성이 단순하지 않으며,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한 우리 안에 무엇인가 다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안의 [둘 중] 어느 하나가 행위하면 이 행위는 나머지 다른 것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반면에 두 요소가 서로 균형을 이루었을 때는 행한 것이 고통스러운 것도, 또 즐거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 단순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나 똑같은 행위가 가장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니까.(275∼276쪽)

 

 

   

즐거움은 오히려 운동보다는 정지 속에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

 

이런 까닭에 신은 언제나 하나이며 단순한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운동이라는 활동뿐만 아니라 '운동하지 않음(akinésia)'이라는 활동도 있으며, 즐거움은 오히려 운동보다는 정지 속에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변화는 무엇이든 달콤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일종의 나쁨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변하기 쉬운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것처럼, 변화를 필요로 하는 본성 또한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본성은 단순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니까.(276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7권 제14장 「육체적 즐거움과 인간 본성」 중에서

 

 

 * * *

 

사람들은 즐거운 것은 선택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은 피하니까

 

이것들 다음으로는 아마도 즐거움에 관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즐거움은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친밀하고 고유한 것이니까. 그런 까닭에 즐거움과 고통을 방향타로 삼아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또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대해 기뻐하고, 마땅히 혐오해야 할 것에 대해 혐오하는 것은 성격적 탁월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즐거움과 고통은 삶 전체에 뻗어 있으며 탁월성과 행복한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즐거운 것은 선택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은 피하니까.(349쪽)

 

 

 

이러한 주제들은 많은 논쟁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주제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로 보이는데, 이러한 주제들은 많은 논쟁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즐거움이 좋음이라고 말하는 반면,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즐거움이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아마 실제로도 그렇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다른 일부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즐거움을 나쁜 것들 중의 하나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우리 삶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다중]이 즐거움으로 기울어지며 여러 가지 즐거움들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중간에 도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349∼350쪽)

 

 

그래서 참된 말들은 앎에 있어 유용할 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가장 유용한 것 같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올바른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감정들이나 행위들에 관해, 말들(logos)은 실제 행동들(ergon)보다 신뢰할 만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들이 우리의 지각에 따른 것들과 일치하지 않을 때, 말들은 무시당하며, 참된 것을 훼손하다. 즐거움을 비난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 목격된 경우, 그런 즐거움에 이끌린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이끌리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구별은 다중들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참된 말들은 앎에 있어 유용할 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가장 유용한 것 같다. 실제(ergon)와 잘 부합하는 말은 신뢰받고, 그런 까닭에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그 말에 따라 살도록 북돋우기 때문이다.(350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10권 제1장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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