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고백록』을, 나의 라틴어 선생이 다른 어떤 시리즈보다 좋아했던, 오렌지색 표지에 두께가 얄팍했던 로마 고전판을 지금도 가지고 왔다. 그 책을 손에 쥔 채 여기 이렇게 서 있노라니 언제나 주머니 크기만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품고 다녔던 저 위대한 르네상스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어떤 동료 의식까지 느끼게 된다. 『고백록』을 읽을 때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정스레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던 그는 인생 말년에 가까워서는 그 성인과 상상 속에서 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나의 비밀』이 그것이다.(86쪽)

 

이 책은 그 먼지까지도 품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투에는 어떠한 비밀이라도 터놓고 나눠도 좋을 만큼 아주 편안한 친밀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 책을 펼치는 순간 내가 여백에 긁적거려 놓은 낙서가 눈에 들어오면서 사방 벽 색깔이 카르타고의 모랫빛이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대학의 널찍한 교실이 떠올랐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외우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회상하고 있었고, 그리고 정치적 책임과 형이상학의 본질을 놓고 벌이던 우리들의 오만했던 논쟁들(그때가 열네 살이었던가 열다섯, 아니면 열여섯이었을 것이다)도 아련히 되살아났다. 그 책은 아득한 청년기의 기억과 선생님(지금은 작고했음)에 대한 추억, 그 선생님이 우리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들려 주었던 페트라르카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교실, 그리고 폐허가 되었던 카르타고에 건설되었다가 또다시 파괴되고 만 도시에 대한 기억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폐허를 뒤덮고 있는 먼지는 이 책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의 것인데도 이 책은 그 먼지까지도 품고 있다.(86∼87쪽)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처럼 예리한 관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가 그렇게 억누르려고 노력했던) 그 예민한 감수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인생의 후반기를 깨달음과 마음의 혼란이라는 역설적인 상태에서 보냈는데, 그 기간 내내 그는 자신의 감각이 자신에게 가르치는 것에 감탄하면서도 신에게는 육체적 쾌락의 유혹을 뿌리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간청했다.(87쪽)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유사품에 지나지 않소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루스 사이에 오고 간 고대의 대화는 사랑의 본질에 관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대화가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돌다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간혹 문학의 역할로 옮아가기도 했다. 언젠가 한번은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루스에게 주사위, 체커, 숫자, 문자, 기하학, 천문학 등을 발명한 이집트의 신(神)인 토트가 이집트 왕을 방문해 이런 발명품을 이집트 국민들에게 넘겨 주자고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왕은 신이 줄 선물 하나하나를 놓고 저마다의 이점과 해악을 따졌는데, 마침내 토트가 문자의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토트는 "여기 이것은 국민들의 기억을 향상시켜 줄 배움의 한 종류요. 내 발명은 기억과 지혜 모두에게 유익한 비결을 제공할 것이오" 라고 설명했다. 이 말에도 왕은 전혀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는 신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신하들이 이걸 배운다면 그들의 영혼에 망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심는 결과가 되오. 그 사람들이 앞으로는 쓰여진 것에만 의존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이상 기억 속에서 무엇인가를 더듬어 내려 하지 않고 눈에 드러나는 기호에만 의존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기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거요. 당신이 발명한 것은 기억을 위한 비법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한 비결이오. 그리고 그대가 그대의 신봉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유사품에 지나지 않소. 왜냐하면 그대의 신봉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고 말만으로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오. 신봉자들 대부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할 텐데도 말이오. 그리고 신봉자들은 지혜가 아니라 지혜에 대한 자만심만 커질 것이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짐만 될 것이오."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루스에게 "독서가라면 쓰여진 글은 누군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만큼 순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89∼90쪽)

 

단어는 매우 지적인 듯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추론에 설득당한 파이드루스는 그 뜻에 동의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말을 이었다. "파이드루스, 글쓰기가 그림 그리기와 비슷하다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사실 때문이라는 점을 자네도 잘 알고 있어. 화가의 작품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우리 앞에 서 있지. 그렇지만 한번 그 그림에게 질문을 던져 봐. 그래도 그림들은 엄숙한 침묵을 지킬 뿐이야. 글로 쓰여진 단어들도 마찬가지지. 단어는 마치 매우 지적인 듯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하지만, 더 많은 것을 알려는 욕망에서 뭘 말하고 있는지 글에게 물어 보면 되풀이해서, 아니 영원히 똑같은 것만을 이야기할 뿐이야."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읽혀지는 텍스트는 기호와 의미가 당혹스러울 만큼 정확하게 포개지는 단어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해석, 주석, 주해, 요지 설명, 연상, 반론, 그리고 상징적·우화적 의미 등은 텍스트 자체에서가 아니라 독서가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텍스트는 화가에 의해 그려진 그림처럼 '아테네의 달'만 말할 뿐이다. 그 달의 상앗빛 얼굴과 시커먼 하늘, 소크라테스가 한때 걷기도 했던 길에 널브러진 고대의 폐허 따위로 장식하는 것은 독서가의 몫이다.(90∼91쪽)

 

구두 강의의 거장

 

소크라테스의 시대만 해도 글로 쓰여진 텍스트는 보편적인 도구가 아니었다. B.C. 5세기 아테네에는 상당수의 책이 존재했고 서적 교역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독서 관행은 적어도 한 세기 뒤 자신만이 이용할 목적으로 귀중한 필사본들을 수집했던 최초의 독서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배움을 얻고 그렇게 배운 것을 전파하는 수단은 대화였으며, 소크라테스도 모세, 부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두 강의의 거장에 속했다.(92쪽)

 

끼르륵 끼르륵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 미로

 

내 경우를 말하면, 책을 읽다가 남기게 되는 해설이나 메모는 타인의 기억력을 대신해 주는 워드 프로세서에 보관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만의 기억의 궁전을 떠돌며 인용구나 이름을 끌어낼 수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처럼, 나도 화면 뒤편에서 끼르륵 끼르륵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 미로로 들어간다. 워드 프로세서의 기억력의 도움으로 나는 저 유명한 나의 선조들보다 더 정확하게(정확성이 중요하다면) 그리고 더 많은 양을(양이 가치있는 것이라면) 기억할 수 있지만, 수많은 해설 가운데서 중요도를 판단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일은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아 있다.(95쪽)

 

페트라르카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도 젊은 시절에 꽤 혼란스런 삶을 살았다. 단테의 친구였던 그의 아버지는 단테처럼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페트라르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을 아비뇽에 있던 클레멘스 5세 교황의 궁정으로 옮겨야 했다. 페트라르카는 몽펠리에와 볼로냐의 대학들을 다녔으며 아버지가 죽고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는 다시 아비뇽에 정착했다. 이때 그는 이미 돈 많은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富)도 젊음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방탕한 생활 몇 년 만에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대부분을 탕진하고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키케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들은 새로 서품을 받은 성직자의 말에 잠재해 있던 문학 취미를 일깨워 주었고, 그는 여생을 걸신들린 듯이 책을 읽어댔다.

 

그는 30대 중반에 두 개의 작품 『저명한 남자에 대하여』와 시 『아프리카』를 창작하면서 신중하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실토했으며, 이 작품으로 그는 로마의 국민과 상원으로부터 월계관을 얻는 영광을 누렸다.(96쪽)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나의 비밀』에서 페트라르카(그의 기독교 이름인 프란체스코로)와 아우쿠스티누스는 '진리 부인'이 뚫어져라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정원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프란체스코가 자신은 도시의 공허한 번잡스러움에 지쳐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란체스코의 삶에 대해, 시인인 프란체스코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이긴 하지만 아직 프란체스코가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할지 방법을 모르고 있는 책과 같다고 대답하면서 그에게 미쳐 버릴 만큼 성가시게 구는 군중을 주제로 한 텍스트를 몇 권 상기시킨다. 그 중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것도 들어 있다. "이런 책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묻는다. 그 질문에 프란체스코는 책을 읽을 때는 매우 유익하지만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라고 대답한다.

 

아우구스티누스 : 그런 식의 독서는 지금 매우 보편적이라네. 학식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으니까. ······ 하지만 자네가 적절한 여백에 약간의 메모를 간결하게 적어 놓으면 아마 독서의 열매를 쉽게 즐길 수 있을 걸세.

 

프란체스코 : 어떤 종류의 메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우구스티누스 : 책을 읽다가 자네의 영혼을 뒤흔들거나 유쾌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자네의 지적 능력만을 믿지 말고 억지로라도 그것을 외우도록 노력해 보게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 보라구. 그러면 어쩌다 고통스런 일이 닥치더라도 자네는 고통을 치유할 문장이 마음 속에 새겨진 것처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걸세. 자네에게 유익할 것 같은 어떤 문장이든 접하게 되면 분명히 표시해 두게. 그렇게 하면 그 표시는 자네의 기억력에서 석회의 역할을 맡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멀리 달아나고 말 걸세.

  

(페트라르카의 상상력으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암시하는 독서법은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사고를 위한 버팀목으로 책을 이용하지도 않고, 또 사람들이 현인의 권위를 믿는 것처럼 책을 믿지도 않으면서, 책에서 사고와 문장과 이미지를 취한 뒤에 그것을, 오래 전부터 머리 속에 담고 있던 다른 텍스트로부터 정제해 낸 또 다른 사고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거기다가 독서가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곁들여서 사실상 전혀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해 내는 독서 방법이었다.(97∼98쪽)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페트라르카의 말을 빌리면 이런 독서법도 그 자신이 '신성한 진실'이라 부르는 그 어떤 것을 고려하다 우연히 터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신성한 진실'이란 책장의 유혹에도 전혀 흔들임 없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해석해 내기 위해 독서가들이 꼭 갖춰야 하는 감각이었다. 어떤 텍스트를 평가하는 데는 심지어 작가의 의도마저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런 작업은 독서가 자신이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가능하며, 그런 기억을 통해 작가가 책장에 담은 기억이 자연스레 흘러 나온다고 페트라르카는 암시한다.(98∼99쪽)

 

우리가 결코 똑같은 책으로, 아니면 똑같은 페이지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유

 

수많은 편지를 남긴 페트라르카는 어느 편지에서 "만약 '신성한 진실'이라는 빛이 독서가의 머리 위를 비추면서 어떤 것은 읽고 어떤 것은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독서는 좀처럼 위험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라고 쓰고 있다. (페트라르카의 심상을 비추는) 이 빛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비출 뿐 아니라 인생 여정의 단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는 결코 똑같은 책으로, 아니면 똑같은 페이지로 되돌아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다양한 빛에 싸여서 우리도 변하고 책도 변하고, 그리고 우리의 기억도 밝았다가 쇠해졌다가 또다시 밝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배우고 까먹고 또 기억하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도 한다.(99쪽)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읽혀지고 기억되는 하나의 텍스트는, 구원이라 이름할 수 있는 그런 반복 독서에서는 마치 내가 오래 전에 기억했던 그 시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호수-대지만큼이나 단단해서 독서가의 횡단을 받쳐 줄 수 있다-같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텍스트의 유일한 존재의 터가 마음 속이기 때문에 글자들은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늘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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