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님들의 명절은 안녕하신지요?

 

  나처럼 명절을 편하게 보내는 며느리도 없다. 사남 일녀 집안의 막내며느리인 나는 명절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네 명의 며느리는 각자 할당된 음식 -나는 야채 전 담당이다. 파전, 부추전, 고구마튀김을 준비한다. 고기를 너무 싫어하고 야채 종류를 무척 좋아하는 집안이라 다른 집에 비해 많이 부치는 편이다. -을 해서 큰집에 모인다. 새벽 네 시에 출발하면 명절 당일 아침 9시 전후에 큰집에 닿는다. 역귀성이라 갈 때는 차가 막히지 않으니 에헤라디여~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휴게소에 들러 어묵 한 그릇 사먹는 호사마저 누릴 수 있으니 귀성 자체는 큰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설 차례에 앞서 세배를 하는데 아뿔사, 가장 중요한 인물인 어머님이 자리에 안 계신다. 다른 도시에 사는 어머님은 허리가 편찮아 장시간 차를 탈 수 없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본가를 사수하고 계실 수밖에. 그렇다고 구순이 가까워오는 노인네가 제사를 모실 수도 없고. 차례를 지내야 하는 후손들은 어쩔 수 없이 큰집에 모인다.

 

 

  이럴 때 드는 의문 하나. 죽은 조상이 먼저인가, 산 조상이 먼저인가? 아무래도 죽은 조상이 먼저인 거 같다. 죽은 조상한테 잘 보이기 위해 제사 지내러 큰집에 먼저 가지 산 조상의 안부를 여쭈러 어머님집에 먼저 들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다. 어머님은 평소에 자주 찾아뵈어라, 이런 뜻일까. 하지만 아시다시피 평소에 산 조상을 찾아뵙는다는 게 그리 쉬운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어른을 못 찾아뵙는 핑계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 차례상을 물리고 나면 말이 없는 네 형제는 오직 귀갓길 정보를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다. 가끔씩 지도까지 곁들여 어떤 길이 가장 ‘막히지 않는 길’인지를 놓고 공방(?)을 벌이는데 조용한 코미디 같다. 어쩌면 수십 년째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똑같은 레퍼토리를 지치지도 않고 덕담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성인 남자들이 교통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 며느리 네 명은 식탁에 둘러 앉아 밀린 회비(?)를 정산한다. 일 년에 네 번 있는(설, 추석 포함) 제사 비용을 똑 같이 분배해 연회비로 선납한다. 세 번은 큰댁에서 지내고 추석은 나머지 세 며느리집(?)에서 번갈아 지낸다. 그러니 삼 년에 한 번씩은 추석 명절 상을 막내며느리인 나도 차리는 셈이다. 물론 이때도 할당된 각자의 음식을 준비해온다. 철저한 분담이 원칙이다. 사람 사는 일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닌지라 명절이 아닌 일반 제사 때에는 지방에서 올라갈 여건이 못 되는 나(남편) 같은 경우는 야채 전을 못 보낼 때가 많다. 사람이 못 가는 게 아니라 야채 전이 못 올라가는 게 문제이다. 이 문제는 사연이 조금 있는데, 여기서 언급을 하고 싶지 않다.

 

 

  차례 상 물린 걸로 한 끼의 아점을 먹은 뒤 그렇게 오후 한 시경이면 각자 집으로 헤어진다. 결론은 우리집 명절은 지극히 형식적이라는 거다. 한 마디로 사람은 모이되 정은 모이지 않고, 말은 있되 정담은 없다. 음식은 많으나 미감은 떨어지고, 세뱃돈은 주고받되 온기는 오가지 않는다. 나부터 그 형식적인 것에 별 불만이 없다. 불만은커녕 적극 동조한다. 이 부조리한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온 가족 것이다. 누구나 그걸 알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정을 낼 기회도 없이 정을 뗄 일들이 운명처럼 먼저 다가오는 게 보통 며느리들이 겪는 시댁 문화이기 때문이리라.

 

 

  힘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정 나는 일도 없는 이 무덤덤한 명절 풍경. 이번 설에는 그마저도 방콕했다. 유행하는 신종플루에 딸내미가 감염되는 바람에 간호를 해야 했다. (딸내미는 며칠이 지난 아직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미열이 남아 있다.) 예의 숙제인 야채전을 부쳐 남편과 아들 편에 보냈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이때 어울리는 말이 될까.

 

 

  역귀성 행렬의 교통 사정도 귀가 때는 다르다. 갈 때보다 두 배나 걸린 시간을 뚫고 중간 기점인 어머님집에 들러 남편과 아들은 세배를 하고 왔다. 설 나시라고 드린 용돈의 몇 배가 넘는 세뱃돈을 손주에게 되챙겨 보내신 노구의 어머님. 짠하다는 말은 또 이때에 어울리렷다. 사람 자체야 무슨 죄인가? 영혼 없고, 명분만 남은 명절이 죄인 게지. 어느 누구도 쉬 거절하지 못할(특히 며느리 입장이라면) 한국적 정서가 우리를 지배하는 한, 저마다의 분분한 넋두리는 명절이 지속되는 한 되풀이될 것이다.

 

  님들의 명절도 여여하신지 조심스레 여쭤보고 싶다.

 

 

 

 

 

  2. 울화병

 

  명절 끝 카페엔 여자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오늘의 주제는 단연코 울화병이다. 한의학 용어에 ‘화병’(火病)이라는 게 있다. 울화병이라고도 하는데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온몸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며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병이다. 뚜렷한 실체가 없어 과학적으로 풀이할 수는 없지만 분명 앓는 이들이 있으니 생긴 병명이렷다. 지극히 한국적 정서의 소산물인 이 병은 명절과도 관련이 있는데, 여성들이 잘 걸리는 특징이 있다.

 

 

  명절의 좋은 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니 넘어가자. 지친 영혼들은 명절만큼 지긋지긋한 연례행사도 없다며 커피 잔을 마주한 채 저마다 손사래를 친다. 명절을 치르면서 성인남녀 누구나 육체적․감정적 노동에 시달린다. 하지만 늙으나 젊으나 며느리 입장인 여성들이 느끼는 피로감이 더한 것은 우리 명절문화가 시댁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그 집안의 노동에만 적극적으로 동원될 뿐, 정작 그 문화의 중심에는 가닿지 못한다. 기득권 시댁 문화에서 변방일수밖에 없는 여성들은 당당한 의견은커녕 ‘아니오’라는 최소한의 방어의 말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는다. 부당한 처사를 목도해도 안으로 삭이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강요받았다. 만약 부당함에 대해 거절이나 항의라도 한다면 ‘본대없는’ 출신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감정을 삭이고 삭인 착한 여성들은 울화병이란 달갑지 않은 병을 선물로 얻었다.

 

 

  화병은 단연코 약자들의 병이다. 그러니 약자의 화는 언제나 온당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홀대 받으면 수치를 느끼고, 억압당하면 분노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반면, 착한 행위에 대한 보답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잘못한 언행에 대한 감시는 얼음보다 차가운 것 또한 사람의 마음이다. 약자의 서글픈 굴욕은 강자의 이기적 욕심 앞에서 언제나 피해자다. 아니오, 라고 말하지 못해 울화병 난 여자들, 뒤늦은 방언 터지듯 말꽃 피우러 물안개 피어나는 카페 창가에 모여든다. 말로써 말을 치유하는 명절 끝 카페 풍광,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다.

 

 

 

 

  3. 어리석은 게 아냐

 

  세상에서 가장 맘대로 되지 않는 감정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사랑이라 말할 테다. 사랑은 어리석음이요, 유치함이요, 수치요, 절망이요, 나락이다. 사랑을 일컬어 현명함이요, 세련됨이요, 자긍이요, 희망이요, 천국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겉보기 사랑을 하거나 사랑이란 말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셰익스피어도 말했다. ‘사랑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사랑에 빠질 숱한 후대인들을 위한 그의 경고는 옳았다. 지구촌 어디에나 사랑 때문에 눈물로 지새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넘쳐 나기에.

 

 

  사랑에 눈시울 붉어진 개그우먼이 토크쇼에 나와 자신의 짝사랑 경험을 고백한다. 공감하되 웃음이 나온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누가 도와줄 수 없고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웃음보다 자기연민에 겨운 날이 더 많은 건 그 ‘대상’은 내 감정과는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과 별개인 그 대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니 얼마나 어리석을 것인가.

 

 

  사랑 자체는 환희의 꽃일지 모르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고행의 절벽과도 같다. 그래서 오늘도 사랑 때문에 힘겨운 누군가는 핸드폰 문자를 수십 번 확인하고, 울리지 않는 현관 벨 소리에 귀를 곧추 세운다. 무분별하지 않은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자는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흩어지는 분수거나 날아가는 포탄처럼 속수무책의 감정이어야 사랑이지, 고요한 찻잔 속의 물이거나 반듯한 나무 한 그루의 이미지라면 온전한 사랑일 수 없다. 감출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어리석음의 향연이라니!

 

 

  사랑에 빠지는 건 쉬워도 그것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누군들 어리석고 힘들지 않을 것인가. 일단 사랑에 빠지면 곁 사람들의 조언과 충고 따윈 소용없다. 자신이 투자한 에너지와 눈물이란 원석이 ‘시간의 흐름’이란 보석으로 가공 된 뒤에야 그 허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 보석은 고맙게도 평생 삶의 지침서 같은 반려의 반지가 되어준다. 그러니 까짓 것, 어리석은 그 사랑에 한 번쯤 된통 당한다 한들 진실로 어리석다 할 것인가.

 

 

 

 

 

  4. 거품은 제때 걷어내야

 

  뭇국을 끓인다. 간편해 보이지만 제 맛을 내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우선 양지 부위 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무는 반개 정도 어슷썰기 한다. 반듯한 깍둑썰기보다 자연스러워 보이는데다 맛도 잘 스며들기 때문이다. 찬물에서 건진 양지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끓는 물에 넣는다. 한소끔 끓으면 거기에다 무를 넣고 이십여 분 중불로 끓인다. 중간에 소금 간을 한다. 기왕이면 천일염이 좋다. 마지막에 다진 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오 분 정도 더 끓인다. 먹기 직전 식성에 따라 청양 고추를 넣기도 한다.

 

 

  쓴 글대로만 하면 제법 시원한 뭇국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몇 번의 뭇국을 끓이면서 실패한 경험이 이 단상을 쓰게 했다. 일견 완벽해 보이는 저 레시피에 실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뭇국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제때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다.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해 충분히 고기 핏물도 뺐고, 주재료도 일부러 기름에 볶지 않았다. 그래도 아차하면 텁텁한 맛이 난다. 바로 거품 때문이다. 불순물이 모여 몽글몽글 거품으로 끓어오르는데 귀찮다거나 깜박한 나머지 제때 걷어내지 않으면 실패한 뭇국이 되고 만다. 때깔도 지저분하고 맛 또한 텁텁하다. 제 맛을 내기 위해선 지키고 선 채, 넘치기 전에 불을 조절하고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타이밍을 놓쳐 국물이 넘치면 가스레인지와 냄비 뚜껑이 지저분해지고, 거품 또한 걷어내지 못하면 국물맛이 엉망이 되고 만다.

 

 

  끓어오르는 화는 넘치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걸러야 하고, 해야 할 숙제와 미뤄둔 인사는 그때그때 하는 게 몸과 맘에 가볍다. 결심한 그때가 최적의 타이밍이다. 때를 놓치는 것만큼 찜찜한 것도 없다. 이미 식은 국 앞에서 그 맛을 원망해봤자 소용없다. 국물 맛을 잘못 낸 건 거품 제대로 걷지 않은 내 잘못이지 식재료 탓이 아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제때 거품을 걷어내지 못하고 빈둥거리다 허둥대는 자화상 하나 식은 뭇국 속에 얼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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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4-02-04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결혼해서 시댁(시가라는 말이 참 안 나와요. 우린 언어부터 시가를 시댁으로 높여 부르는 게 익숙해서, 시가라고 해야지 하면서도 말을 할 때도 글 쓸때도 언제나 시댁이네요)를 두 번 뒤집어 엎으니깐 이제 울화증도 홧병도 안 생기고 명절인가 보다란 여유가 생겼어요. 결혼 16년차의 인생 만만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가 드니 무서울 게 없네요. 시댁에 못 한다고 남편이 헤어지자고 하면 까짓 거 헤어지지 뭐 이런 배짱도 생기니 어느 정도는 할말 다 하고 살아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세대부턴 변해야해요. 저도 아들 있지만 시댁 위주의, 남성 위주의 문화를 바꾸고 싶어요. 전 지금부터 남편을 세뇌시키고 있어요. 어머님 돌아가시면 우리 일년에 명절 한번 보낼거고 아들 며느리 안 와도 서운해 하지 말아라... 명절 때 아들며느리 손주 안 와 서운하고 속상할 거 없다...명절은 취미 생활하는 날로 알면 더 흥에 겨울 것이라고요... 결혼 후의 명절은 인생의 저주 같은 것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요?

팜님네 명절은 심플해서 좋네요. 전날 각자 음식해서 명절 당일 아침에 모여 차례 지내니. 저도 나중에 동서랑 이렇게 해야겠어요. 전날에 오니 마니 서로 한 집에 복달거릴 필요 없이...

다크아이즈 2014-02-05 09:37   좋아요 0 | URL
기억님, 어쩔 수 없이 (서서히) 변화가 오긴 하겠지만 저부터 노력하려구요.
막상 제가 시어머니 입장이 되면 서운할지 모르지만 제가 자처한 개혁이 될 터이니 꿋꿋하게 버텨 볼게요. 기억님도 동참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들 내 것 아니고, 며느리 내 맘대로 해선 안 된다. 이게 제 미리 시엄마로서의 모토입니다.^^*

심플하긴 한데, 뭔가 빠진 것이겠지요. 정, 마음, 진심 기타 등등 ㅠ
심각한 갈등 있는 집에 비하면 행복하다 생각하고 쿨하게 넘어 가야지요.
기억님의 명절도 그러하셨겠지요?

단발머리 2014-02-04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시댁 쿨한 분위기 너~~~ 무 좋은데요. 물론....

"음식은 많으나 미감은 떨어지고, 세뱃돈은 주고받되 온기는 오가지 않는다."가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요. 시댁에서 따뜻한 분위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걸까요. 생각해 보니, 잘못된 거네요. 시댁 식구들 중에 아~~주 미운 사람이 없는 것만도 나름 다행이라 여겨지네요. ㅎㅎ

저는 아직 시어머니가 젊은셔서 (60대 중반ㅋㅎ) 대부분 어머니가 하시구요,
아래 동서랑 저는 전만 부친답니다. 하는 게 별로 없는데도, 시댁에만 가면 참 피곤하네요. 동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해서... 제가 말했지요.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야. 공기 자체가 피곤해." ㅋㅋㅋ

다크아이즈 2014-02-05 09:42   좋아요 0 | URL
아휴, 단발님 너~~~무 좋은 건 아니지요.
젤 중요한 정이 빠졌잖아요. 그것까지 기대하면 우리 시댁 문화가 천년만년 지속되겠지요?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 정이라면 없어도 무방하다는 제 쿨한 생각이
맞아 떨어진 건가요? 희생하길 원하지 않는데 희생을 강요해서라도 정을 얻겠다고 생각하면 갈등이 생긴다고 봐요. 어쨌거나 명절은 여자에게 언제나 딜레마^^*

비로그인 2014-02-04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습니다. 음식과 일상이 책과 잘 어울려졌네요 ..~~

다크아이즈 2014-02-05 09:42   좋아요 0 | URL
새벽숲길 만하겠습니까. ㅋ
서재 갔다가 깜놀하고 눈이 번쩍 뜨였답니다.
좋은 친구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세실 2014-02-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형님과는 소원해요. 워낙 말이 없는 분이기도 하고.....
애써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주버님이 더 편합니다. ㅎ
제 담당도 전이라 동그랑땡 속재료 가지고 일반 동그랑땡, 깻잎전, 표고버섯전 부치고, 호박전, 고기전 부치면 끝! 신랑, 규환이랑 같이 하니 세시간이면 끝나네요.
그래도 설 명절은 부담스러워요.




기억의집 2014-02-05 10:37   좋아요 0 | URL
저도 시누하고 소원해요. 워낙 시누랑 결혼해서 사연도 많고 두번 엎는 것도 다 시누때문에 엎은 거라.. 안 보고 사니 편하긴 하더라구요. 저는 시누 전화번호도 몰라요. 그 면상 안 보려고 명절에도 일찍 올라와요. 다 집안마다 소원한 사람 한명 정도는 있는 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4-02-05 11:54   좋아요 0 | URL
세실님이 말하는 형님은 손위 동서일듯^^
전 한 분밖에 없는 손위 시누이가 천사예요^^ 마구 자랑질 ㅋ
못난 올케 탓한 적도 얼굴 붉힌 적도 없이 늘 물적 정신적 도움만 주는 분.
여기서도 울 시누님 자랑한 적 있는 듯 ㅋ

피 안 섞인 가족 관계가 완전 밀착형이 되길 바라는 게 모순이죠
물 흐르듯 섞이면 좋고 아니면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래야 피차 덜 피곤하지요.

아주버님들이 더 편한 건 여자들만큼 세세하고 민감하지 않으니 그럴 거예요.
세실관장님 오늘도 즐건 파이팅하시어요. 귀엽고 우아한 에너자이저^^~
기억님도 얼굴은 못 뵈었지만 멋진 분이시겠지요.
즐건 점심 시간 맞이하시어요^^

감은빛 2014-02-0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닥 안녕하지 못했어요.
입안 두 군데와 코안이 크게 헐었는데,
아침마다 코에서 피가 나오고, 세수 할 때 코에 손이 닿으면 무척 아파요! ㅠ.ㅠ

다크아이즈 2014-02-06 08:19   좋아요 0 | URL
피곤하면 신체에 무리가 오지요. 운전하시느라 힘드셨을 것 같아요. 감은빛님, 감히 토닥토닥^^*
입안이 펑그 나는 사람, 코안이 허는 사람, 입주변에 헤르페스 현상 돋는 사람, 엉덩이 부풀어 오는 사람 등등. 명절 한 번 치르고 나면 흔한 증상인데, 단순히 육체만 힘들다기보다 심리적으로도 부대끼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이제 좀 괜찮아지셨는지요?^^*

페크pek0501 2014-02-0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명절은,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즐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절 전날에 시어머님의 집에서 음식을 다 만들고 시누이형님의 집에 놀러가서 만두를
만들어 해 먹고 놀았어요.
아무리 즐겁다고 해도 명절이 돌아오는 게 싫은 건 꽤 고단하다는 것 때문이에요.
이번에 3박4일 갔다왔는데, 그 고단함의 후유증이 며칠 가더라고요.
서울과 대구를 오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음식 만들기까지 이어져서 말이죠.
시집 중심의 문화가 언제까지 갈까요?

님의 글 읽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

다크아이즈 2014-02-11 19:58   좋아요 0 | URL
대구가 시댁이네요. 저도 그래요. 친정도 시댁도 대구입니다.
이번 설에는 가지 못했지만 일주일 뒤에 인사하고 왔어요.
가서 음식 만드는 즐거움이 귀성의 고단함을 묻어 준다고 생각할 정도면 아름다운 맘씬데 전 고단함이 먼저 다가오니 그냥 만들어서 모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아무래도 편한 것만 찾나 봐요.^^*
저야말로 님께 많이 배우는 걸요~~

노이에자이트 2014-02-0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끝난 직후 이혼이 증가한다고 하더군요.친인척끼리 싸우기도 하고요.팜므 님처럼 여기에 자랑할 수 있으면 행복하죠.정을 너무 좋아할 것도 없어요.더럽고 질척거리기도 하는 게 정이니까요.

다크아이즈 2014-02-11 20:00   좋아요 0 | URL
울 아저씨 왈, 명절 마치고 둘 부부가 차 안에서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 뭔지 아나?
나 - 몰라. 수다? 등 두드려주기? 설마 키스?
울 아자씨 - 이혼하자, 이 네 마디 말이란다.
나 - 맞다. 글켔다 ㅋ

노이에님 덕분에 며칠 전 상황이 떠올랐어요. ㅋ

꿈꾸는섬 2014-02-12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저도 편한 명절 보냈어요. 오고가는 차 안이 불편하긴 했지만요.
저흰 결혼초에는 큰댁가서 차례지냈었는데 요샌 시골에 계신 부모님 찾아뵙고 맛난 것 먹고 이런저런 얘기하고 놀다가와요. 워낙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집이라 재밌어요. 아버님의 보수적인 정치성향만 피하면요.ㅎㅎ
 

 

 

 

 

 1. 제대로 본다는 것

        - 이정재와 신동엽 사이

 

  사진 한 장이 화제다. 배우 이정재의 어떤 사진을 거꾸로 놓고 보면 진행자인 신동엽의 얼굴로 보인단다. 호기심에 사진을 검색해봤다. 정말 그랬다. 착시 현상일 뿐인데도 신기하게 보이는 건 심리학 책 속의 장면이 아니라 친근하게 느껴지는 연예인이 그 예시가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제대로 본다고 하지만 실은 잘못 볼 때가 있다.

 

 

  같이 바다 구경을 가도 누군가는 갯바위 사이의 불가사리를 보고 누군가는 수평선에 걸린 고깃배를 본다. 살아있는 불가사리의 색깔이 환상적인 보랏빛이었다는 걸 고깃배를 주목한 사람은 모르고, 고깃배를 밀어내던 노을빛 구름의 잔상이 얼마나 황홀했는지는 불가사리를 주시한 사람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한다. 누구나 보이는 대로 보며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걸 합해도 ‘제대로 보는 것’에는 한참 못 미친다.

 

 

  양면을 본다는 것, 즉 제대로 본다는 건 삼자의 입장일 때나 가능하다. 당사자는 절대로 양면을 다 볼 수 없다. 당사자가 다 본다는 건 아무 것도 보지 않은 것과 같다. 인간에게 변명이 필요하고, 억울한 감정이 생기는 이유이다. 만약 당사자가 다 볼 수만 있다면 변명할 필요도 억울할 일도 없다. 변명과 억울한 감정은 내 입장의 진심을 말해주는 것이긴 하지만 사안의 실체적 진실과는 무관하다. 이정재의 얼굴을 신동엽 얼굴로 인식하는 건 내 눈이 판단한 진심이지만 그렇다고 그 얼굴의 실체가 신동엽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람의 머릿속은 제 나름으로 바쁘고 눈썰미는 저마다의 방향이 있어 모든 걸 다 보지는 못한다. 내 눈의 들보보다 다른 이의 티끌이 먼저 보이고, 내 떡보다 상대 떡이 커 보이는 이유이다. 누구나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자기식대로 판단한다. 그게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 ‘자기 식’이 언제나 옳은 게 아니라는 자각은 새길수록 좋다.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겸허한 두려움을 상비약처럼 지니고 다니고 싶다. 숱하게 노출되는 판단의 실수 앞에서 그 약 한 알 삼킨 뒤, 한 호흡을 쉬어 갈 일이다.

 

 

 

 

 

 

 

 

 

 

 

 

 

 

 

 

 

 

 

  2. 물살 건너기

 

  SNS나 블로그에 올라오는 사진과 글이 나 자신을 말해주는 전부는 아니다. 친한 친구가 동유럽 여행을 갔다 치자. 운치 있는 블타바 강의 석양빛이 실시간으로 SNS 상에 오르고, 혀끝에 감도는 네보지젝 레스토랑의 감칠맛이 블로그를 도배한다. 그렇다고 그 친구 삶이 전적으로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친구가 남긴 멋진 흔적은 아주 부분적인 것일 뿐이다.

 

 

  생은 전면과 이면으로 구분된다. 각각의 축적된 양은 개별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 반반이다. 삶에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보여주고 싶은 부분도 있고 감추고 싶은 부분도 있다. 과시하고픈 장면도 있고 수치스러운 장면도 있다. 우리가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것은 단연코 전자이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알라딘 서재에 커피숍 가서 탐나는 찻잔을 훔쳐왔다거나, 아버지한테 반항하다 가죽허리띠로 맞았다거나, 매일 밤 지치지도 않고 사랑을 나눈다거나 하는 내용만 줄곧 올린다면 그보다 끔찍하고 불편한 것도 없다. 그런 일은 일기장에나 담길 일이다. 정도가 심하면 심리상담소를 찾을 일이지 만천하에 공개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공개하는 개인 정보는 근본적으로 일기장에 기록되는 것들과는 많이 다르다. 은밀하고 내밀해서 보여주기 싫고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것들이 아니라, 더 이상 비밀스러울 것이 없어 보여줘도 되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공개한다. 따라서 올라오는 타인의 정보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체코의 레트나 언덕의 아침노을 을 배경으로 한 SNS 속 당신도 알고 보면 나열할 수 없는 숱한 아픔과 좌절과 번민을 안고 가는, 나와 다를 바 없는 소시민일 뿐이다.

 

 

  다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공개된 소통 공간의 그 속성을 잠시 놓칠 때 사람들은 잠시 심리적으로 흔들린다. 돈 없다 징징 짜던 자야는 그새 곗돈으로 명품 가방을 샀다고 자랑하고, 어제까지 우울하다던 축이는 시댁의 배려로 훌쩍 괌으로 날아갔단다. 만날 나처럼 남편 흉만 보던 인이는 결혼기념일이라고 남편이랑 호텔 뷔페에 갔다며 인증샷을 날린다. 이쯤 되면 도대체 난 뭐지? 이렇게 스스로를 친구들이랑 비교하게 된다. 이게 인간이다. 이런 심리적 낭패감을 맛보지 않기 위해 잘 나가는 모 작가는 절대 SNS나 블로그를 하지 않는단다. 호호헤헤거리며 선플로 서로의 우의를 결속하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끼는데다, 그것이 지나치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철학 또는 심리용어 중에 ‘대조효과’라는 게 있다. 같은 대상을 두고 확실하게 비교되는 두 상황이 제시되면 인간은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말한다. 예를 들면 같은 원피스를 옆집에서는 오백 원에 파는데 이집에서는 삼백 원에 판다면 별 망설임 없이 우리는 후자를 택한다. 그 원피스가 삼백 원의 가치가 있나 없나 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순히 값을 비교한 것만으로 이백 원을 벌었다고 만족해한다. 실은 두 가게 주인이 같고 판매 전략상 그렇게 했을 뿐인 데도 우리는 싸게 샀다고 믿는다.

 

 

  공개된 소통 공간에서도 우리는 인간심리의 이런 단면을 볼 수 있다. 해외여행이다, 고급 레스토랑이다, 비싼 공연이다 등에 관한 정보를 수시로 올리는 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가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내 뜻과는 반하게 내 여건과는 맞지 않게 무리수를 둬 그들을 뒤따라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이 어울릴 리 없다.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않고 어색하다. 원해서 한 행위가 아니라 상황에 떼밀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효과는 상대적인 현상이다. 비교하는 상황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내 선택은 확 달라진다. 위를 보고, 겉을 보는 것보다 아래를 보고(그게 아니라면 곁을 보고) 속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집중력과 심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듯 상대도 어떤 한 면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 없는 상대에게 내 심리적 낭패감을 보상하라고 기대할 순 없다. 내가 건전하고 바른 눈을 가지는 만큼의 심리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누군가 말했다. 무심히 강건해지기, 이 요법은 대조효과라는 각종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이다.

 

 

 

 

 

 

3. 모든 건 작은 것에서

 

  작은 것이 큰 것 된다. 모든 문제는 그렇게 시작된다. 당신의 사소한 눈빛 하나, 떨리는 손끝 하나에도 당신의 마음이 들어 있다. 그 마음이 품은 ‘감정의 결’을 제대로 읽는다는 건 쉽지 않다. 내가 읽는 당신의 마음이 실존하는 당신의 마음과 같을 수 없다. 이 두 마음의 간극을 선인들은 ‘착각’ 또는 ‘오해’라는 말로 이름 지었다.

 

 

  우선, 착각이란 말은 여간 귀여운 데가 있는 게 아니다. 상대에 대해 눈치 볼 것 없이 주체의 감정에 보다 충실한 단어이다. 그 대상이 주로 자기 자신인데다 긍정적 평가를 내릴 때 활용되는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잘생겼다는 착각 속에 산다.’ 라거나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착각한다.’라는 말 등이 좋은 예이다. 당사자의 감정에 충실할 뿐, 상대의 감정과는 그리 상관없는 게 착각 현상이다. 해서 우리는 ‘자뻑’하는 당신에게 여유 띤 웃음을 보여줄 수 있다.

 

 

  오해는 좀 다르다. 똑 같이 뭔가를 잘못 지각했을 때 쓰이는 말이지만 그 느낌은 ‘착각’일 때와는 다르다. 오해는 주체자의 감정뿐만 아니라 상대의 감정까지를 포괄한다. ‘내가 오해했다면 미안해.’, ‘우리는 서로의 오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등의 예문에서 보듯 오해에는 반드시 그 당사자들이 등장한다. 착각이 자유일 수 있는 건 대상의 눈치를 볼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해에는 자유가 없다. 누군가를 오해하는 순간, 또는 누군가의 오해를 받는 순간 그보다 더한 마음의 지옥은 없다.

 

 

  아침 텔레비전에 연륜 깊은 연예인이 나왔다. 자신은 멋있고, 날씬하고, 섹시하게 늙어가는 중이란다. 보는 이에 따라 주책이고, 뚱뚱하고,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반기를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모습이 당당하고 귀엽게 보이는 건 그 착각이 내 감정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잘못된 이해라도 착각과 달리 오해가 치명적인 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착각에는 자유가 허용되지만 오해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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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28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알찬 리뷰... 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신동엽과 이정재 정말 기가 막힌데요.
신기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다크아이즈 2014-01-29 11:28   좋아요 0 | URL
제가 컴맹인 관계로다가 캡처를 제대로 못했어요ㅠ
원본 사진은 거꾸로 보면 진짜 신동엽으로 보여요ㅋ
투베어원풋님? !도 설 잘 보내시어요~~

세실 2014-02-02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NS는 만천하에 공개되니 부담스럽긴 하더라구요.
그나마 카카오 스토리는 지인들만 보게되니 일상을 적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포장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누누히 강조하는 건. '보이는게 다는 아니다'......ㅎㅎ
팜므님 편안한 설 명절 되셨죠?
수상한 그녀 가족과 함께 꼭 보시길요^^

다크아이즈 2014-02-02 13:12   좋아요 0 | URL
당연히 포장해야지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그건 끔찍해요. 보는 이에 대한 예의도 아니지요.ㅋ

편안하지 못했어요. 딸내미 신종 플루 걸려서 방콕했답니다. 간호한다는 명분 하에^^*
수상한 그녀 좀 미뤄야 될 것 같아요. 꼭 볼게요.
편한 휴일 보내시어요. 세실 관장님^^*

순오기 2014-02-0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페이퍼, 공감 꾸욱~~~~

다크아이즈 2014-02-04 13:08   좋아요 0 | URL
순정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기 언냐, 명절 뒤끝 없지요?
전 가로늦게 몸살 오려해요.ㅠ
 

 

 

                                  

    

   1. 슈퍼마켓 안에 갇히기

 

  사람 사이에 이상적인 궁합은 무엇일까. 충고하기 보다는 들어주는 관계일 때가 가장 바람직하다. 거기다 맞장구까지 쳐주면 더 바랄 게 없다. 옳은 말은 아낄수록 좋다. 어쩌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상대가 받아들이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이때도 원칙은 될 수 있으면 바른 말은 하지 않는 거다. 정답은 이미 너나 나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옳은 말을 하는 이가 아니라 내 말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모든 이로부터 옳은 말을 들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한 스트레스는 없다. 그래서일까. 누구든지 빈틈없는 사람이 쏟아내는 충고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또한 내 말에 무심한 리액션으로 화답하는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 그건 인지상정이다. 자고로 사람이라면 흉도 보고 욕도 하면서 살아야 제격이다. 어딘지 맹탕이고, 알고 보면 허당이고, 배워도 기계치고, 작심해도 사흘파인 범부범부들에게 완벽한 사람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자중자애하는 사람들은 말문을 트기 어렵다. 흉도 잘 보고 욕도 거하게 하는 맘 편한 사람이 제일이다.

 

 

  사람 사이에는 궁합이란 게 있다. 흔히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사람과 만나면 나는 슈퍼에 갇힌 피의자이고, 상대는 투명 창을 사이에 둔 슈퍼 주인 같다는 느낌. 한 마디로 궁합 맞지 않는 관계일 때 이런 기분이 든다. 이 감정은 상대적이라 내가 피의자 역할일 때도, 상대가 피의자 역할 일 때도 있다. 물론 감정이입이 더 잘 되는 쪽은 아무래도 내가 피의자 입장일 때다. 왜냐면 잘난 슈퍼 주인 입장일 때는 사방 천지가 열려 있어 거리낄 게 없다. 하지만 코너에 몰린 피의자 입장 일 때는 사방이 벽이니 갑갑할 수밖에 없다. 당당하거나 잘났다고 생각할 때보다 수치심이 일거나 자괴감이 들 때 생각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다.

 

 

  슈퍼 주인은 피의자를 감히 덮치지는 못하고 경찰을 부를 기회만 엿본다. 슈퍼 안 물건에 손댈 의향이 전혀 없던 피의자는 무슨 잘못을 한지도 모른 채 자책한다. 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피의자는 자포자기한 채 급기야 슈퍼 안 물건에 눈을 돌린다. 진열된 에이스나 다이제 비스킷을 먹고, 나아가 냉장고안 박카스와 콜라마저 마셔버린다. 시간이 지나면 슈퍼 안의 모든 물건을 해치우고 만다. 슈퍼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봤자 때는 늦다. 쌀 다 퍼먹은 독안의 쥐가 주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슈퍼 안팎의 느낌이 드는 관계일 때는 맹렬히 맞설 자신이 없으면 서서히 정리하는 게 맞다. 얼굴 맞대고 힘들어 하느니 덜 보고 자유로운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맞는 사람 만나기에도 우리 생은 너무 짧다.

 

 

 

 

   

2. 각질은 없애는 게 아니더라

 

  뒤꿈치가 갈라졌다. 부옇게 각질도 일었다. 찬바람 몰아치고 공기가 건조한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 현상이다. 물기 부족한 뒤꿈치에는 부스스한 각질이 돋고 나뭇잎맥 같은 잔금이 서렸다. 심한 곳은 골이 푹 파였다. 뒤꿈치가 거칠어지고 지저분해지는 데는 짧은 시간만이 필요하다. 각질이 증식하지 못하도록 연화제 화장품만 발라주면 되는데 그조차 귀찮다고 방치하다 생긴 일이다.

 

 

  어릴 적 풍경 하나, 겨울 대중탕에는 둥근 돌이 비치되어 있었다.(원래 있었는지 개인이 준비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년의 엄마들은 물에 불린 뒤꿈치의 각질을 일차로 면도칼로 도려냈다. 그런 뒤엔 뒤꿈치를 돌에다 대고 문지르고 문질렀다. 고정 그라인더 역할을 하는 돌 위에서 뒤꿈치를 갈고(?) 나면 일주일은 개운할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번 목욕탕을 찾을 때 각질은 다시 증식하고 골은 더욱 파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엄마들은 다시 물에 불린 뒤꿈치를 돌 위에다 갈곤 했다. 뒤꿈치 갈기의 악순환이었다.

 

 

  젊었을 때는 엄마들의 그런 풍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건강한 청춘의 뒤꿈치에는 각질이 잘 생기지도 않았고 골이 패지도 않았다. 해서 생업에 전력투구하는 엄마들의 고단한 땀이당신들 발을 거칠게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꿈치가 망가지는 건 열심히 산 흔적이라기 보단 노화 현상의 하나라는 걸 알겠다. 그 시절 엄마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온한 일상이지만 내 뒤꿈치는 그때의 엄마들처럼 물기를 잃고 살비듬을 만들었다.

 

 

  게을러서 방치한 뒤꿈치에다 보습제를 바른다. 뒤꿈치 보호용 양말도 챙겨 신었다. 물기 품은 화장품은 하룻밤 새 발을 파고들어 온 발바닥이 부들부들해졌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점점 생기를 잃기 마련이다. 푸석해지고 거칠어진 그것들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달래서 함께 가야 한다. 그 옛날 엄마들이 면도칼로 도려내고 돌에다 문질렀지만 근본적으로 각질이 사라지진 않았다.

 

 

  맘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없앤다고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다. 없어진 것 같은 그것은 어느 순간 증식해 어김없이 우리 곁에 와있다. 각질은 잘라내고 갈아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숨죽여 함께 가야할 동반자이다. 연화제를 바른 뒤꿈치가 부드러워진 건 각질이 떨어져 나가서가 아니라 그것을 부드럽게 진정시킨 화장품의 원리 덕이다. 부끄러움이나 회한이나 까칠함이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게 내 것이 아니라고 도려내고 깎아낼수록 더 두툼한 삶의 각질이 내 안에 자리 잡는다. 불편하고 까칠한 것들도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다.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함께 가는 것이란 걸 부드러워진 뒤꿈치가 말해준다.

 

 

 

 

 

 

3.춥지 않아도 떨리는 것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 작품집『디어 라이프』의「아문센」단편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말이다. 앨리스 먼로의 그 선언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결핵 요양원의 교사 일자리를 찾아 나선 나는 토론토에서 시골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기차역에서 열한 살의 메리라는 수다쟁이 여자애를 만나고 그 아이가 요양원에서 일을 돕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육적 의미 부여보다는 하루하루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그곳이 지리멸렬하지만 숨통 틀 곳은 있다. 평판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흉곽 수술을 전담하는 외과의사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까지 약속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결혼 의사를 번복한다. 발목에 쇠사슬을 감은 심정으로 나는 그곳을 떠나는 기차를 타게 된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메리 일행을 만난 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고마울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기차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은, 수치심을 막는 계기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여러 해 동안 나는 언젠가 그와 마주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토론토 북적대는 길에서 그와 재회한다. 별일 없는 것처럼 덤덤히 얘기하지만 그곳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낀다. 격한 울음도 없고, 내 어깨를 잡는 손도 없지만 멍한 상태의 나를 기차가 태우고 떠나올 때와 같은 감정을.

 

 

  사랑의 감정이 시간이 흘렀다고 없어지진 않는다. ‘팽팽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기쁨’, ‘춥지 않아도 몸의 떨림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그 한때의 사랑! 하지만 운명처럼 헤어짐 앞에서 어느 한쪽은 ‘이 날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 될 거라고 발뺌을 하게 되리라. 그렇다고 그 사랑이 잊힐 리가. 어느 날 문득 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기차안의 심정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건 없다. 변하는 건 현실이지 사랑했던 그 감정이 어떻게 변할까.

 

 

 

 

 

 

 

3. 통제라는 시선

 

  가끔 텔레비전 국제 뉴스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지역에 주민들 소요 사태가 생긴다. 건물 곳곳에 방화가 일어나고 거리엔 부서진 집기들로 가득하다. 거리로 몰려나온 수많은 인파 사이에 꼭 남의 물건을 약탈해가는 군상들이 있다. 무단이나 불법으로 취한 그 물건들을 카메라 앞에 들이대며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 나날들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질서와 규범이라는 합의 체제 안에서 세상은 별 탈 없이 굴러간다. 하지만 그 합의 체제에 조그만 균열이 생기면 그 틈새를 비집고 인간의 비양심적 근성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만다. 위의 장면은 인간의 온전한 양심이 얼마나 유지, 발휘하기 어려운가를 말하는 좋은 예시가 되어준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통제’를  부르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인간의 행동 양식이 양심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재해 앞에서, 또는 질서 유지가 전제된 공공 서비스에 혼란이 오면 인간 세상에는 약탈과 폭력이 급증한다.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몇몇 집단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혈안이 되고 안달을 한다.

 

  들킬 염려가 적거나 처벌 받을 확률이 낮을수록 일탈 행위에 가담하는 횟수나 강도가 높아진다. 멀쩡한 배기통을 새것으로 갈아야 한다고 정비사는 거짓말을 하고, 실수로 거스름돈을 덜 줬다는 걸 알고도 가게 주인은 그냥 넘기며, 거리에 휴지를 버리고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강력한 통제가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게 그 어떤 동물보다 통제나 강제된 규율을 싫어하는 게 인간이란 피조물인데, 막상 통제가 없거나 그것이 느슨한 경우에 양심 불량을 자청한다는 것이다. 양심만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인간 스스로 인정하기에 통제라는 사회적 규율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양심 불량이 되는 인간 심리의 오묘함.

 

 

 

 

 

 

   4. 도덕적으로 보이고 싶을 뿐

 

  학교 때 가정 선생님이 말했다. 가구 파트 부분을 공부할 때였다. 침대의 길이는 180센티미터니 그것을 교과서 아랫부분에 적어 넣으라고.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지만 혹시라도 대입시험에 나올까 첨가하는 형식으로 선생님은 참고 교재에 나오는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적어 넣기를 강요했다.

 

 

  몇몇 학생이 그 내용을 적지 않고 군소리를 했다. 아마는 이런 웅성거림이었을 게다. 키가 180센티미터 넘는 사람도 많은데, 왜 침대 길이를 180센티미터라고 규정하는 것일까. 설사 참고서에 그렇게 적혀 있더라도 선생님 선에서 그런 건 걸러버리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시험에 이런 불합리한 내용이 나올 턱도 없는데. 뭐 이런 내용의 불만이었을 게다. 물론 침대 길이를 교과서 밑 여백에 적으라는 선생님 지시 내용을 따르지 않은 학생들은 손바닥을 맞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학 시간이면 선생님은 일명 ‘ 빡빡이’라 불리는 숙제를 검사했다. 연습장 앞뒤로 빡빡하게 몇 장씩 수학 문제를 풀어오는 것이었다. 역시 몇몇 학생들은 일찌감치 숙제를 포기하고 손바닥 맞는 길을 택했다. 나머지 숙제를 해온 학생들도 제 스스로 문제를 풀어온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습관처럼 참고서 풀이내용을 그저 앞뒤로 빡빡하게 베꼈을 뿐이다.

 

 

  이제 도덕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군사부일체에 대해 열변을 토하신다. 좀 부당하고 불합리하더라도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인간이며, 나아가 애국하는 시민이라는 논리이다. 앞선 두 시간에 손바닥을 맞지 않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뿌듯한 심정이 된다. 자기들도 가정선생님과 수학선생님이 불합리하고 부당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선생님이 시킨 것은 그게 옳든 그르든 일단 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뭐 이런 취지에서 오는 뿌듯함이다.

 

 

  그들은 순간적이나마 손바닥을 맞은 친구들에 비해 훨씬 도덕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날 아침 집단상담 시간에 그들의 개인적 가치를 물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손바닥 맞은 친구들에 비해 그다지 도덕적이라고 자부하지는 않았다.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그것을 따랐을 때, 그것에 응원이 실릴 경우 우리는 스스로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포장하게 된다. 인간은 그저 비도덕과 도덕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간적인’ 존재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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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1-2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은 말하는 사람에 관한 어떤 사람이 그 사람 말이 전적으로 다 맞긴한데, 그 사람이랑은 관계맺기가 싫더라. 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땐 옳은 말하는 사람이랑 왜 관계 맺기가 싫지 했는데, 피곤한거겠더라구요. 그냥저냥 넘기도 싶은 일들까지 시시콜콜 따지고드니 스트레스 받겠더라구요. 전 요새 말을 많이 아껴야겠단 생각을 많이 하는데도 여전히 잘 따지고, 여전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들어요.ㅜㅜ 조심해야겠어요. 더더욱.

다크아이즈 2014-01-23 10:19   좋아요 0 | URL
ㅋ 저도 옳은 말 잘 안 하려고 노력해요.
옳은 말은 상대가 더 잘 알거든요. 알고 있는 그 말을 리바이벌하면 상대를 찌르는 것과 같잖아요. 잘 들어주려고 노력해요. 노력하는데도 물론 잘 안 될 때도 있어요.
(도저히 내 저질 인격으론 못 받쳐주는 상황이 발생할 땐) 조용히 접어요.
잘 들어주기, 공감하기 이것만 되어도...
해서 저는 제가 말해야 하는 쪽보다 제가 말을 들어야 하는 쪽 사람들이 더 편해요.
침묵은 싫으니 누군가 말은 해야겠고, 근데 상대가 말이 없으면 제가 해야하니 그런 상황이 너무 싫은 거예요. 해서 말 많고 잘하는 사람들 무리가 훨씬 제겐 편하답니다. 참고로 저도 말을 잘하고 많은 편이거든요. ㅋ

oren 2014-01-22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제목을 단 팜므 님의 이 글을 읽으니 "빈말은 친구를, 진실은 증오를 낳는다."는 말이 문득 떠오르네요. 이 말은 자신의 친구(테렌티우스)가 쓴 희곡 《안드로스에서 온 아가씨》에 나온다고 키케로가 알려주던데, 그 작품을 직접 읽어보려고 《테렌티우스 희곡선》을 샀더니 정작 그 책에는 엉뚱한 작품들만 여럿 담겨 있더군요.

다크아이즈 2014-01-23 10:36   좋아요 0 | URL
오렌님, 정말이지 어떨 땐 제가 슈퍼마켓에 갇힌 용의자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니까요. 아, 어쩐다, 어쩐다 이러면서 그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고플 때가 있어요.
빨리 집에 가서 잠자고 싶다, 이런 느낌 드는 상황 누구나 경험하잖아요.

빈말은 친구를, 진실은 증오를 낳아요. 확실해요. 현명한 테렌티우스에 더 현명한 키케로 할배 ㅋ
진실은 실은 상대도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 잘 들어주는 게 더 필요하지요.^^*

Shining 2014-01-2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글은 정말 좋아요 매번 언제나 항상. 단단하고 온도가 분명한데도 보들보들한 느낌이 구멍위로 따뜻한 숨이 퐁퐁 올라오는, 그런 기분이 들어요. 오늘처럼 심란하고 울적한 날, 팜님의 글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

다크아이즈 2014-01-23 10:27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ㅠ
제가 꼽은, 글 잘쓰는 십대 알라디너에 속하는 님께서 이런 말씀 하시면 기분 좋아지잖아요. ㅋ
특히 님은 섬세한 사람의 감정에 대해 묘파를 잘하시지요. 깜짝깜짝 놀라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한두 번이 아니란 걸 제가 고백한 것 같은데요.
자주 알라딘 들러주시어요. 저도 노력할게요.^^*

페크pek0501 2014-01-2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 맞대고 힘들어 하느니 덜 보고 자유로운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불편하고 까칠한 것들도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다.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함께 가는 것이란 걸 부드러워진 뒤꿈치가 말해준다. "

팜 님의 글은 저로 하여금 여러 번 읽게 만들어요. 아니 베껴쓰기를 하고 싶게 만들어요.
어느 정도로 공부하면 이런 필력을 보여 줄 수 있는 건가요?

저는 그런 역량이 없으니 요즘 글에 '재미'를 넣는 것에 치중하고 있사와요. ^^
많이 배우고 갑니다. ^^

다크아이즈 2014-01-23 10:34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 제가 좀 덜 떨어졌지요? 적극적 해결법을 모색해라, 가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힘들어 하느니 덜 만나라> 이런 요지는 심리학에서 치유하는 방법에 나오는 공식 같아요. 시간을 벌어라, 덜 만나라, 자신을 돌아봐라, 치유 되면 만남을 재개해라, 뭐 이런 식의 공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도가 심하면 아예 안 만나면 되니 그건 더 쉬운 방법일까요?

글 역량하면, 필력하면 페크언닌데, 거기다 재미까지 섭렵하시면 페크님 블로그 난리 나는 거 아네요? 저야말로 언니 글에서 많은 걸 얻습니다. 서로 힘을 얻자요~~~^^*
 

 

 

 

   

 

  1. 구기고 구긴다

 

  왼발을 삐끗했다. 밤길, 움푹 팬 아스팔트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해 발을 헛디뎠다. 창피한 것도 잠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둠 속 허방이야말로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하는. 밝을 때 길을 걷는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웅덩이나 돌부리가 보이더라도 건너뛰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건 조금 다르다. 잘 보이지 않아 허방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확률이 낮보다 높다.

 

 

  허방 자체는 밝으나 어두우나 그 자리 그대로 있다. 하지만 허방이 제 가치를 발하려면 인간이 그 속에 제대로 빠져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둠의 조건이 낫다. 헛디디지 않기 위해선, 환할 때보다는 눈조리개를 더 열고 무릎이나 발목 관절도 더 굽혀야 한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삐딱한 시선과 뻣뻣한 관절로 밤길 걷다가는 허방 앞에서 제대로 고꾸라지고 만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밝은 면이 펼칠 때는 앞도 잘 보여 뻣뻣한 발걸음이라도 허방을 쉽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흐린 날에는 장막이 눈앞을 가려 웅덩이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럴수록 무릎관절을 꺾어 조심스런 행보를 해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말처럼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에 이를 수 있도록.

 

 

  미숙한 관용을 지닐수록 타인에게 엄격한 발소리를 내기 쉽다. 뻣뻣한 그 소릴랑은 제 속을 향할 때 제격이다. 허방 앞에서 고꾸라지는 건 내 무릎을 덜 굽혔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선 조심조심 부드러운 발걸음이라야 발밑 웅덩이를 제대로 보게 된다. 원칙보다 나은 건 상식이고, 상식보다 나은 건 이해이다. 원칙을 들먹이며 핏대를 올리기보다 이해할 수 있겠다며 손 맞잡는 일이 내겐 더 필요하다.  멋진 시가 적힌 뻣뻣한 책으로는 현실이란 똥구멍을 닦을 수 없다. 밑바닥 깊숙한 그곳을 닦기 위해선 그 종이 찢어 구기고 구겨야 한다. 마침내 부들부들해진 그것이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갈 수 있을 때 진짜 시의 날들을 맞는 거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2. 풍경을 읊는 재미

 

  문학적 눈썰미를 키우는 데는 사진만큼 좋은 것도 없다. 전혀 낯선 분야지만 맘에 드는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다 마침내 지층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사진 읽기의 정서를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정의했다. ‘스투디움’ 은 사진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일몰 사진을 보고 ‘햐, 기막힌 풍경이구나.’ 단순히 이렇게 느꼈다면 이는 스투디움에 속한다. 반대로 사진의 구름 모습에서 어릴 적 술이 취해 살아있는 뱀 대가리를 조여잡고 휘두르던 옆집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에 해당한다. 스투디움이 보편적 일반적인 정서라면 푼크툼은 특수성과 개별성의 요소를 지닌다. ‘나를 끊임없이 찔러대는 그 무엇’이 푼크툼의 정서이다.

 

 

  롤랑바르트의 이 두 개념을 문학에서의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른 것으로 빗댄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기 위한 교훈으로 기능한다. 이 알레고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다. 이는 롤랑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한 스트디움의 정서에 가깝다. 반면 상징은 좀 더 다의적이고 개별적이다. 김춘수의 ‘꽃’은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독자 개별자에게 가닿아 폐부 깊숙한 ‘찌름’을 유발한 채 저마다의 꽃으로 재탄생 된다. 롤랑 바르트 식 ‘푼크툼’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예술과 알레고리라는 양끝에서 예술 쪽에 가까운 게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을 이처럼 이분법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맞춤한 예시이긴 하다. 내 식으로 덧붙이자면 예술 옆에 괄호 열고 ‘상징’이라고 쓰겠다. 교훈을 일삼는 오른쪽과 완전한 예술인 왼쪽 사이에서 왼쪽으로 치우치는 자리에 문학이 있다. 이 문학이란 매혹적인 노동 가치를 위해 오늘도 눈썰미를 키우는 중이다. 나만의 푼크툼과 상징체계가 온전히 나를 찔러주기를 바라면서.

 

 

 

 

  3. 감정 동물 사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단언컨대’ 내가 아는 한 이성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이성을 지녔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보기보다 허술하고 솔직하며 단순한 동물이다. 이성이란 갑옷으로 아무리 무장을 해도 부지불식간에 감정이란 빨간 내복이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하고, 괴물은 본능을 관장한다. 그러면 그 중간인 인간은? 본능을 억제하는 순간적 능력이 뛰어난 동물일 뿐이다. 짐승은 아예 번민이 없고, 괴물은 타자로 하여금 번민을 유발할 때 인간은 그 번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본능 억제 능력이 영구적이 아니라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빙자할 뿐 결코 이성적인 동물은 못 된다. ‘감정’에 따라 자신의 이성을 정당화하는 조작적 능력이 뛰어난, 이성적인 체하는 피조물일 뿐이다.

 

 

  그 책임은 하느님도 면키 어렵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하느님조차도 온전한 이성으로 세상과 인간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당신 기준으로 인간을 비롯한 세상 피조물들의 생사를 관장했다. 이성보다 당신의 감정에 따라 그 잣대를 들이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기준이란 것도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결코 완벽히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당신 닮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 하느님의 말씀은 솔직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흔히 ‘감정 섞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성이 항상 실천적 행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성적 판단은 결국 감정을 덜 섞는 타협으로 행동화될 뿐 이성 그 자체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착각한다. 나는 감정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다. 행불행을 관장하는 인간적인 단어, 그 이름 감정!

 

 

 

  

 

 

4. 이해와 소통을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다. 인문학 열풍을 타고 여기저기 좋은 강좌들이 넘쳐난다. 더 이상 의식주 해결만이 목적이 아닌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이 느꺼운 호사. 신나고 감사할 일이다. 내게 관심 있는 주제거나 입소문이 난 강사의 강의는 아무래도 눈여겨보게 된다. 바지런을 떨어 강연장을 찾을 때도, 메모했다가 텔레비전으로 시청할 때도 있다. 타이밍을 놓친 경우는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보게 된다. 내용에서 명약관화니 그 명성이 명불허전임을 맛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쩜 하나 같이 저리도 똑떨어지면서도 유쾌한 강의를 하는지.

 

 

  사실 인문학 강좌라 해서 특별히 어려운 철학적 이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이나 학술을 위한 강의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한 목소리다 보니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쉽게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 인문학이란 게 결국 ‘소통과 이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에 소통과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실생활에서 나온 예시들만으로도 훨씬 공감도를 높일 수 있다. 사람답게 소통하고 이해하는 데는 인간 자체에 대한 경험적 사유가 필요한 것이지 거창한 이론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대중 강연에서 성공적 데뷔를 하는 일반인(?)들이 많다. 그 중 유명세를 타는 분 중에 김창옥 강사가 있다. 변변한 스펙조차 없이 ‘언변과 사람에 대한 이해’ 하나로 이 업계에 뛰어든 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의 미니 특강을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어떤 격조 높은 인문학 강좌 못지않게 울림을 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문학도 결국 소통과 이해와 공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깊게 파고들어 학문이란 미로로 이끄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고, 현실과 접목시켜 숨통 트게 하는 역할은 김창옥 같은, 이제는 전문 강사가 된 이들의 몫이 되어도 좋다. 노랫길 보다는 말길이 트여버린 그의 쉽고, 유머 깃든 말들의 향연 앞에서 너무 편안하게 ‘위로’라는 선물을 받아가는 게 어쩐지 미안해지는 하루다.

 

 

 

 

5. 케이크는 어떻게 나눌까?

 

  사람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다르다. 부자는 부자의 논리에 따라, 빈자는 빈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 모순적 상황을 없앤 정의의 원칙으로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했다. 이를 ‘무지의 베일(the vail of ignorance)’이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거지일지 백만장자일지, 장애자일지 건장한 사람일지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계급장도 떼고, 지갑도 없앤 채 발가벗은 상태라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하게 될 최악의 상태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공정한 룰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된 합리적 생각은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지녀야 한다. 존 롤스는 이를 평등의 원칙과 차등 분배의 원칙으로 나누었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동동한 권리를 누린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균등한 기회 속에서라면 사회적 ․ 경제적인 차등 분배는 인정될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원칙이다. 단, 불평등의 전제조건으로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보장될 것’을 강조한다.

 

 

  쉬운 예로 케이크를 어떻게 나누는 게 좋을까? 존 롤스의 답은 이렇다. “칼을 잡고 케이크를 나눈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남은 조각을 가지는 것이 정의다.” 칼자루 쥔 자가 케이크를 많이 가져가는 세상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가진 자들이 최소 수혜자, 즉 약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한다는 전제하의 차등 분배를 인정하겠다는 존 롤스의 이론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인간의 선택된 능력이나 조건이 우연의 산물이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는 게 존 롤스의 생각이다. 필연이 아닌 시대나 상황이 만들어준 ‘칼자루 쥔 자’는 자신의 케이크를 약자에게 좀 더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인간사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정의와 분배의 문제 때문에 누군가는 차디찬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찬바람 맞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 현실이니.

 

 

 

 

6. 소크라테스의 질문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아고라 광장에서, 지중해 바닷가에서, 또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격렬한 토론을 할 때 애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말을 문자로 생중계했다. 그것이 플라톤의『대화편』이다. 철학을 골방 깊숙한 사색의 장에서 본격적인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이끈 장본인이 소크라테스이다.

 

 

  왜 철학이 거리로 나왔을까. 소크라테스의 주장 요지는 이렇다.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들판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건 더 이상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말을 문자로 기록한다면 그것 역시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보았던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지 못한 문자를 빌린 철학 방식은 소크라테스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플라톤이 스승의 말을 대화 형식으로 옮긴 건 스승을 따라 한 셈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을 흔히 대화법 또는 산파술이라 한다. 산파가 산모로 하여금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도록 돕듯이 소크라테스는 대화상대자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질문하는 형식을 취했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답을 내놓는 자가 아니라 오직 질문하는 자였다. 가르치려는 자가 아니라 질문으로써 답을 숨기는 자였다.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대화 상대자가 제 모순에 빠져 우물쭈물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당혹감과 혼란에 빠진 상대방은 지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입만 바라본다. 결론을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답을 내놓을 리 없다. 찜찜한 미완의 숙제만 떠안은 채 뚜렷한 결론 없이 대화는 마감되고 만다.

 

 

  해결되지 않고 끝난 문제, 이것을 철학 용어로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단다.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인데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어준다. 통로 없는 그 지점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 이유도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대화의 막장까지 내려가 봐도 속 시원한 출구가 보이는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 지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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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1-1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오랜만에 들러 정말 멋진 페이퍼에 넋을 빼고 읽었네요.^^

다크아이즈 2014-01-18 09:36   좋아요 0 | URL
뭐, 멋지진 않고 건조한 스똬일이죠 ㅋ
꿈섬님 무척 오랜 만이에요. 잘 살고 계시지요?

oren 2014-01-1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 님께서는 글을 한번씩 올릴 때마다 한 보따리의 책을 풀어놓으시는군요. ㅎㅎ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아포리아'를 통해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낸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군요. 등산에 있어서도 그런 철학을 도입한 사람이 있었어요. '머메리즘'의 창시자이며 1895년에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8,125m)에서 영원히 잠든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가 주인공이지요.

그가 남긴 명언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등산은 시작된다."였어요.

다크아이즈 2014-01-19 02:07   좋아요 0 | URL
제 단상에서 보다시피 오렌님처럼 깊이 있게 다 다루는 건 아니고, (제 글이 짧은 글이니)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끼적이고 있어요. 그래서 오렌님이 대단하게 보이는 거랍니다.^^* 머메리즘 관심 가네요. 일단 검색부터 들어갑니다. ㅋ

oren 2014-01-19 13:53   좋아요 0 | URL
저는 머메리를 '산'에서 처음 만났어요.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요. 제가 등산학교에 입학해서 암벽 등반을 배울 때 '이론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로부터 그 분의 '등산 철학'을 배웠었지요. 그리고 그가 쓴 명저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도 그때 사서 읽었고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쓴 명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책을 읽을 때, 그 속에 그가 여러 훌륭한 논문을 쓴 '경제학자'로서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는 수많은 옛시인들의 시를 줄줄 암송하던 사람이었고 여러 철학자들의 책을 두루 섭렵한 인물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은 그저 그를 '불세출의 등반가'로만 알고 있지만요.

2014-01-19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9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9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새해엔 안녕하기를

  ‘안녕’ 패러디 열풍이 식질 않는다. 지난 연말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내용의 공감 유무를 떠나 답답한 현실을 토로한 그 패기와 용기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사실 대자보란, 소셜 네트워크가 구축되지 않았던 70,80년대에 그 정점을 찍고 점차 사라져 가던 표현 방식이었다. 컴퓨터의 발달로 각종 세련된 문명 소통의 이기들이 속속 등장하자 대자보 형식은 대화의 장이라는 고유의 빛을 잃어갔다. 그렇게 잊혀 가던 대자보가 어느 날 아날로그적 감성과 진중함으로 무장한 채 대중들의 폭발적 공감대를 불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대자보의 시발점이 되었던 고려대학교 담벼락은 아예 대자보길이 만들어질 정도란다. (여전히 그런지 궁금하다!!)

 

 

  새해가 된 지금도 수많은 ‘안녕’ 시리즈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단순 대자보로 그치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넘어온 대자보 열풍은 급기야 ‘페이스북’에 안녕하십니까, 라는 코너를 만들게까지 했다. 정책의 불합리, 공권력의 부당성, 노동자의 권익 등 묵직한 주제뿐만 아니라 살림살이의 힘겨움, 취업의 어려움, 연애사의 고달픔 등 개별자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내용은 다양하기만 하다. 이성과 감성에 적절히 기댄 대자보가 전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는 마음 어루만지기 프로젝트가 된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지난 한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체적 정서가 ‘안녕들 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대내외적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수십 년 째 이어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망언,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북한 정권의 위협적인 언사 등 외적인 스트레스 받는 것도 모자라 내적으로는 정부와 국민 간의 매끄럽지 못한 소통 때문에 곳곳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난무했다. 대자보가 나오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이다.

 

 

  새해엔 제발 안녕들 하시냐는 자조 섞인 인사말이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말로만!) 실현되기 힘든 꿈이 될지라도 명랑 사회가 가까웠으면 하는 바람이 단순한 새해 인사가 아니기를 바라본다.

 

 

 

 

 

2.아직 멀었다

 

  별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어제 뜬 태양이 오늘 그 자리에 다시 솟고,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그대로 겨울 나목에 스친다. 마음가짐이야 조금 달라졌겠지만 새해라고 별달리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으니 갑자기 일상이 변할 리 없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변한 것 없는 새 하루가 지나간다. 그저 누군가 신년 메시지를 희망차게 전할 때 다른 누군가는 절망의 장탄식을 호소하는 것,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점진과 급속이란 완급의 페달을 조절하며 우리 삶은 그렇게 나아간다.

 

 

  가끔씩 잔잔한 파문 같은 뉴스에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는 것,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의 단신 기사 하나.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생도를 퇴학시킨 육군사관학교의 처분은 위법하다는 항소심 내용이 눈길을 끈다. 도덕적 한계를 위반했다는 이유 등으로 임관을 앞두고 퇴학 처분을 받은 피고가 일반병으로 입영하라는 통지를 받자 소를 제기했다. 위법 판결이 내려졌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한데 학교 측 반응이 가관이다. 품위유지 의무 위반을 한 피고의 퇴학처분은 정당하다며 상고할 계획이란다.

 

 

  기사만 보자면 학생은 퇴학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다. 성폭행을 한 것도, 교내에서 풍기문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주말 외박 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퇴학당할 일인가? 국가인권위원회는 금주·금연·금혼 등 이른바 ‘3금 제도’ 위반자에게 내린 육사의 퇴교 조치를 인권침해로 규정해 개선 요구를 했다. 중요한 건 이것을 학교 측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성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규제하는 웃지 못 할 사회를 살아가는데,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직은 많다. 질서유지라는 명분하에 개인의 기본 인권까지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 이런 상황이 온당한 것일까. 재판부의 말처럼 ‘국가가 내밀한 성생활 영역을 간섭하고 제재하는 건 개인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

 

 

 

 

 

 

3.비인정(非人情)의 풀베개

 

  우리 일상의 큰 축은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달리 말하면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에서 벗어날수록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인은 갈등 속에 그 둘을 업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고, 예술가는 그 두 짐을 과감하게 놓아버리려고 시도하는 자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완전하게 일상성에서 벗어나기도 힘들기 때문에 예술이 위대하게 보이는 거다. 따라서 예술과 일상은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일상과 불화하는 예술인의 내면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작가군 중의 한 명이 나스메 소세키이다. 예술가 소설에 속하는『풀베개』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을 보자.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세파에 영향 받는 인간 갈등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설득시켜주는 작가가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사람 관계를 유지하는 소시민은 이지만을 따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주변과 삐거덕거리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타심을 발휘하면 제 기가 다 빠져버린다. 둘 다 힘겹다. 이제 그만 악다구니와 눈치만 있는 돌베개 벤 것 같은 인간사를 벗어나, 시와 그림이 있는 풀베개 베도 좋을 신선의 세계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소세키는 인정(人情)에서 떠나 비인정(非人情)의 세계, 즉 자연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감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행을 감행한다. 화공이 되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비인정의 세계에서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객관화될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새로운 연민이 생기고, 새로운 갈등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 다만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그 과정이 예술혼이 된다는 걸 알겠다. 소시민은 일상과 사투하고 예술가는 비인정의 세계를 갈망한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

 

 

 

 

 

 

 

 

 

 

 

 

 

 

 

 

 

 

 4. 수많은 밥

 

  내 행동과 말은 내가 한 것이되 내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자의 것일 뿐이다. 나는 궁궐을 지었지만 상대는 초가를 보고, 한 번 뱉은 말은 발 없이도 천리를 내달린다. 무지개란 진실은 하나로 뜰 뿐인데(가끔 쌍무지개가 뜨긴 하는구나!) 그걸 전하는 자나 해석하는 자는 각자 다르게 말한다.

 

 

  내 의도와 상대방의 해석은 같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의도는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꽃을 꽃이라고 말할 땐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그처럼 명명백백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은 우리 삶은 수많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빗대 말하는 그것의 최종 목표도 결국은 진실 그 하나이다. 하나인 진실을 두고 말하는 이나 받아들이는 자 각자 ‘다르게’ 말한다. 그러다 보니 그 둘 사이엔 완벽한 심상의 합일점을 찾기가 어렵다. 말하는 자는 돌려 말하고 이해하려는 자는 의중이 담긴 그 수수께끼를 제 식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소통은 그만 너와 나의 게임이 되고 만다.

 

 

  봉준호 감독의 걸작 ‘살인의 추억’ 마지막 신에서 송강호가 내뱉는 한 마디는 ‘밥은 먹고 다니냐?’이다. 명대사 중의 명대사로 뽑히는 이 말을 두고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한 수로 그 의미를 해석했다. 형사 역할인 송강호가 유력한 용의자 역할이었던 박해일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껴 한 말이란 게 당시 관객의 대체적 정서라고 했다. 지난 가을 영화 개봉 십 주년 행사 때 송강호가 그 대사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를 내놓았다. 자신의 의도는 터널 속에 있을지도 모를 진짜 범인에게 ‘이런 짓 하고도 밥이 넘어 가느냐’라는 의미로 한 애드리브 였다고 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돼도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느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라는 덧붙임 말이 눈길을 끈다. 내가 한 언행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공감하는 순간이다. 내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은 순전히 상대에게 달렸다. 내 언행의 전부를 상대가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욕심이다. 나는 말하고 상대는 해석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것이 정답이다. 세상엔 수많은 밥이 있고, 그 밥을 먹는 방식은 입맛마다 다르니.

 

 

 

 

 

5. 찔레엔 가시

 

  찔레덩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보편적 정서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얗게 핀 찔레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반면에 오줌소태나 불면증으로 밤잠을 설치는 이라면 빨간 찔레 열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천식이나 치통으로 고생하는 어른들이라면 그 효험을 상기하며 일찌감치 찔레뿌리라고 맞받아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가정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일 뿐이다. 찔레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찔레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꽃과 열매 뿌리 모두 중요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가시’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느냐고 항의할지도 모른다. 성가시고 위협적이라서 부러 피했다고 변명하는 것이야말로 찔레의 화를 돋우는 일이다. 찔레 입장에선 가시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될 터이니. 질곡의 환경에서 제 한 몸 유지 보존케 하는 최소한의 보호막으로 가시는 필요했다.

 

 

  쌍둥이 소녀가 엄마랑 산책을 했다. 향기로운 찔레덩굴 앞에서 큰아이가 말했다. 여긴 이상한 곳이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왜 그러냐고 엄마가 물었다. 흰 꽃을 둘러싼 가시가 성가시다고 했다. 당황한 엄마가 대답을 놓치자 동생이 다가와 말했다. 여긴 참 좋은 곳이라고. 엄마가 다시 왜 그러냐고 묻자 동생이 답했다. 가시 사이에 흰 꽃이 피었지 않느냐고.

 

 

  긍정의 자세, 선한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이런 비유가 진부하거나 조금은 불편하게 보이는 건 왜일까? 뭐든 한쪽 시선으로만 보면 교훈이나 길들이기 식이 되어 버린다. 좋은 소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칼날은 칼등에 우선한다. 칼날이 위험하다고 칼등으로 스케이트를 탈 순 없다. 마찬가지로 멧돼지 앞의 찔레는 제 가시가 꽃보다 우선한다. 따가운 가시가 성가시다고 찔레꽃으로 멧돼지를 막을 순 없다. 찔레의 속성은 꽃과 가시를 모두 포함한다. 찔레덩굴에서 흰 꽃만 보는 건 제대로 본 게 아니다. 숨은 가시의 의미까지 보듬어야 제대로 보는 거다. 약자에게 가시는 위협용이 아니라 실존적 생존의 방식이다.

 

  왜 정치하는 사람들만 그걸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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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1-10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 님, 잘 지냈나요? 화제 글 보고 들어왔어요.
필력은 여전하시네요.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 " -에 동의합니다.

『풀베개』의 그 유명한 구절을 잘 읽었어요. 저는 나스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작가에게 반해 버렸죠.

새해엔 자주 뵙기를...

다크아이즈 2014-01-13 11:40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의 꾸준한 서재행보를 응원합니다.
저도 새해에는 꾸준하고 싶어요.
도려님도 좋지요. 독서클럽에서 읽은 기억이...
소세키의 매력을 느끼는 동지들이 많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에요.
그렇게 쓸 수만 있다면, 그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1-1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은 먹고 다니냐... 정말 촌철살인이었죠. 애드립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송강호는 종종 정말 염통이 쫄깃해지는 순간에 엉뚱한 애드립을 해서
효과를 100배 더 올리는 재주가 있습니다.
< 복수는 나의 것 > 에서는 신하균 죽기기 전에 " 내가 너 미워하는 거 아닌 거 알지 ? " 하면서
죽이는데.. 아, 이건 진짜 송강호 아니면 생각할 수 업는 애드립 같더라고요..


+

소새키 읽으면서 정말 깜작 놀랐던 것은 구닥다리 옛날 분이니 구닥다리 소설이겠네, 라고 읽었다가 그 문장의 현대성에 깜작 놀라서 정자세르 하고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소세끼,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크아이즈 2014-01-13 11:47   좋아요 0 | URL
송강호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서 전 놀랐어요.
제가 설경구 다음으로 별로 안 좋아하는 배우가 송강호예요.ㅋ
이유 같은 건 없어요. 답이 된다면 이병헌 같은 배우를 좋아해서랄까. 좋아하는 배우 성향이 다르다는 게 이유가 되는지조차 모르겠네요. 어쨌든 연기자 이병헌의 눈빛을 제가 무척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마치 개그계의 신동엽을 제가 유재석보다 천만 배는 좋아하는 것처럼요. ㅋ 사설이 길었네요.

맞다, 신하균의 저 말도 있네요. 저것도 송강호의 에드리브란 말이지요? 못 말리는 송강호 ㅋ 그나저나 송강호 없는 한국 영화계의 흥행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네요.

소세키는 현대적이다,에 절대공감이요. 소세키처럼만 쓸 수 있다면 지금도 통하지요. 언제나 글쓰기는 힘겹습니다. 즐건 작업이 되어냐 하는데...
곰발님은 새해엔 쭉 이대로만 가신다면 대박 터질 것입니다.^^*


2014-01-10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3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4-01-10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강호는 애드립을 잘한다고 들었어요. 내가 한 어떤 말이나 행동이 의도와는 달리 해석되고 과녁을 벗어날 때 당황스러워요. 그치만 과녁의 재질이나 각도를 내가 잘 못 이해한 경우일 수도 있겠거니 하지요. 오늘 점심 같이 하며 안녕들하십니까,와 가시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했는데 또 보네요. 바쁘신 중에도 다양한 단상들을 이렇게라도 정리하며 넘어가는 팜므님.♥♡ 저도 오늘 분발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어요. 열다섯살 연상의 청춘에게서요.

다크아이즈 2014-01-13 11: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러려니의 생활화... 그게 안 되면 스스로 힘들어지지요.
이건 나이가 들면서 훈련한 결과이지, 원래 성정과는 큰 관계가 없는 것 같아요.
박선생님에 대한 최대의 찬사 - 열다섯살 연상의 청춘, 맞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