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슈퍼마켓 안에 갇히기
사람 사이에 이상적인 궁합은 무엇일까. 충고하기 보다는 들어주는 관계일 때가 가장 바람직하다. 거기다 맞장구까지 쳐주면 더 바랄 게 없다. 옳은 말은 아낄수록 좋다. 어쩌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상대가 받아들이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이때도 원칙은 될 수 있으면 바른 말은 하지 않는 거다. 정답은 이미 너나 나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옳은 말을 하는 이가 아니라 내 말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모든 이로부터 옳은 말을 들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한 스트레스는 없다. 그래서일까. 누구든지 빈틈없는 사람이 쏟아내는 충고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또한 내 말에 무심한 리액션으로 화답하는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 그건 인지상정이다. 자고로 사람이라면 흉도 보고 욕도 하면서 살아야 제격이다. 어딘지 맹탕이고, 알고 보면 허당이고, 배워도 기계치고, 작심해도 사흘파인 범부범부들에게 완벽한 사람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자중자애하는 사람들은 말문을 트기 어렵다. 흉도 잘 보고 욕도 거하게 하는 맘 편한 사람이 제일이다.
사람 사이에는 궁합이란 게 있다. 흔히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사람과 만나면 나는 슈퍼에 갇힌 피의자이고, 상대는 투명 창을 사이에 둔 슈퍼 주인 같다는 느낌. 한 마디로 궁합 맞지 않는 관계일 때 이런 기분이 든다. 이 감정은 상대적이라 내가 피의자 역할일 때도, 상대가 피의자 역할 일 때도 있다. 물론 감정이입이 더 잘 되는 쪽은 아무래도 내가 피의자 입장일 때다. 왜냐면 잘난 슈퍼 주인 입장일 때는 사방 천지가 열려 있어 거리낄 게 없다. 하지만 코너에 몰린 피의자 입장 일 때는 사방이 벽이니 갑갑할 수밖에 없다. 당당하거나 잘났다고 생각할 때보다 수치심이 일거나 자괴감이 들 때 생각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다.
슈퍼 주인은 피의자를 감히 덮치지는 못하고 경찰을 부를 기회만 엿본다. 슈퍼 안 물건에 손댈 의향이 전혀 없던 피의자는 무슨 잘못을 한지도 모른 채 자책한다. 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피의자는 자포자기한 채 급기야 슈퍼 안 물건에 눈을 돌린다. 진열된 에이스나 다이제 비스킷을 먹고, 나아가 냉장고안 박카스와 콜라마저 마셔버린다. 시간이 지나면 슈퍼 안의 모든 물건을 해치우고 만다. 슈퍼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봤자 때는 늦다. 쌀 다 퍼먹은 독안의 쥐가 주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슈퍼 안팎의 느낌이 드는 관계일 때는 맹렬히 맞설 자신이 없으면 서서히 정리하는 게 맞다. 얼굴 맞대고 힘들어 하느니 덜 보고 자유로운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맞는 사람 만나기에도 우리 생은 너무 짧다.
2. 각질은 없애는 게 아니더라
뒤꿈치가 갈라졌다. 부옇게 각질도 일었다. 찬바람 몰아치고 공기가 건조한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 현상이다. 물기 부족한 뒤꿈치에는 부스스한 각질이 돋고 나뭇잎맥 같은 잔금이 서렸다. 심한 곳은 골이 푹 파였다. 뒤꿈치가 거칠어지고 지저분해지는 데는 짧은 시간만이 필요하다. 각질이 증식하지 못하도록 연화제 화장품만 발라주면 되는데 그조차 귀찮다고 방치하다 생긴 일이다.
어릴 적 풍경 하나, 겨울 대중탕에는 둥근 돌이 비치되어 있었다.(원래 있었는지 개인이 준비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년의 엄마들은 물에 불린 뒤꿈치의 각질을 일차로 면도칼로 도려냈다. 그런 뒤엔 뒤꿈치를 돌에다 대고 문지르고 문질렀다. 고정 그라인더 역할을 하는 돌 위에서 뒤꿈치를 갈고(?) 나면 일주일은 개운할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번 목욕탕을 찾을 때 각질은 다시 증식하고 골은 더욱 파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엄마들은 다시 물에 불린 뒤꿈치를 돌 위에다 갈곤 했다. 뒤꿈치 갈기의 악순환이었다.
젊었을 때는 엄마들의 그런 풍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건강한 청춘의 뒤꿈치에는 각질이 잘 생기지도 않았고 골이 패지도 않았다. 해서 생업에 전력투구하는 엄마들의 고단한 땀이당신들 발을 거칠게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꿈치가 망가지는 건 열심히 산 흔적이라기 보단 노화 현상의 하나라는 걸 알겠다. 그 시절 엄마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온한 일상이지만 내 뒤꿈치는 그때의 엄마들처럼 물기를 잃고 살비듬을 만들었다.
게을러서 방치한 뒤꿈치에다 보습제를 바른다. 뒤꿈치 보호용 양말도 챙겨 신었다. 물기 품은 화장품은 하룻밤 새 발을 파고들어 온 발바닥이 부들부들해졌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점점 생기를 잃기 마련이다. 푸석해지고 거칠어진 그것들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달래서 함께 가야 한다. 그 옛날 엄마들이 면도칼로 도려내고 돌에다 문질렀지만 근본적으로 각질이 사라지진 않았다.
맘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없앤다고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다. 없어진 것 같은 그것은 어느 순간 증식해 어김없이 우리 곁에 와있다. 각질은 잘라내고 갈아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숨죽여 함께 가야할 동반자이다. 연화제를 바른 뒤꿈치가 부드러워진 건 각질이 떨어져 나가서가 아니라 그것을 부드럽게 진정시킨 화장품의 원리 덕이다. 부끄러움이나 회한이나 까칠함이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게 내 것이 아니라고 도려내고 깎아낼수록 더 두툼한 삶의 각질이 내 안에 자리 잡는다. 불편하고 까칠한 것들도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다.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함께 가는 것이란 걸 부드러워진 뒤꿈치가 말해준다.
3.춥지 않아도 떨리는 것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 작품집『디어 라이프』의「아문센」단편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말이다. 앨리스 먼로의 그 선언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결핵 요양원의 교사 일자리를 찾아 나선 나는 토론토에서 시골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기차역에서 열한 살의 메리라는 수다쟁이 여자애를 만나고 그 아이가 요양원에서 일을 돕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육적 의미 부여보다는 하루하루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그곳이 지리멸렬하지만 숨통 틀 곳은 있다. 평판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흉곽 수술을 전담하는 외과의사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까지 약속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결혼 의사를 번복한다. 발목에 쇠사슬을 감은 심정으로 나는 그곳을 떠나는 기차를 타게 된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메리 일행을 만난 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고마울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기차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은, 수치심을 막는 계기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여러 해 동안 나는 언젠가 그와 마주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토론토 북적대는 길에서 그와 재회한다. 별일 없는 것처럼 덤덤히 얘기하지만 그곳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낀다. 격한 울음도 없고, 내 어깨를 잡는 손도 없지만 멍한 상태의 나를 기차가 태우고 떠나올 때와 같은 감정을.
사랑의 감정이 시간이 흘렀다고 없어지진 않는다. ‘팽팽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기쁨’, ‘춥지 않아도 몸의 떨림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그 한때의 사랑! 하지만 운명처럼 헤어짐 앞에서 어느 한쪽은 ‘이 날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 될 거라고 발뺌을 하게 되리라. 그렇다고 그 사랑이 잊힐 리가. 어느 날 문득 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기차안의 심정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건 없다. 변하는 건 현실이지 사랑했던 그 감정이 어떻게 변할까.
3. 통제라는 시선
가끔 텔레비전 국제 뉴스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지역에 주민들 소요 사태가 생긴다. 건물 곳곳에 방화가 일어나고 거리엔 부서진 집기들로 가득하다. 거리로 몰려나온 수많은 인파 사이에 꼭 남의 물건을 약탈해가는 군상들이 있다. 무단이나 불법으로 취한 그 물건들을 카메라 앞에 들이대며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 나날들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질서와 규범이라는 합의 체제 안에서 세상은 별 탈 없이 굴러간다. 하지만 그 합의 체제에 조그만 균열이 생기면 그 틈새를 비집고 인간의 비양심적 근성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만다. 위의 장면은 인간의 온전한 양심이 얼마나 유지, 발휘하기 어려운가를 말하는 좋은 예시가 되어준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통제’를 부르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인간의 행동 양식이 양심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재해 앞에서, 또는 질서 유지가 전제된 공공 서비스에 혼란이 오면 인간 세상에는 약탈과 폭력이 급증한다.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몇몇 집단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혈안이 되고 안달을 한다.
들킬 염려가 적거나 처벌 받을 확률이 낮을수록 일탈 행위에 가담하는 횟수나 강도가 높아진다. 멀쩡한 배기통을 새것으로 갈아야 한다고 정비사는 거짓말을 하고, 실수로 거스름돈을 덜 줬다는 걸 알고도 가게 주인은 그냥 넘기며, 거리에 휴지를 버리고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강력한 통제가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게 그 어떤 동물보다 통제나 강제된 규율을 싫어하는 게 인간이란 피조물인데, 막상 통제가 없거나 그것이 느슨한 경우에 양심 불량을 자청한다는 것이다. 양심만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인간 스스로 인정하기에 통제라는 사회적 규율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양심 불량이 되는 인간 심리의 오묘함.
4. 도덕적으로 보이고 싶을 뿐
학교 때 가정 선생님이 말했다. 가구 파트 부분을 공부할 때였다. 침대의 길이는 180센티미터니 그것을 교과서 아랫부분에 적어 넣으라고.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지만 혹시라도 대입시험에 나올까 첨가하는 형식으로 선생님은 참고 교재에 나오는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적어 넣기를 강요했다.
몇몇 학생이 그 내용을 적지 않고 군소리를 했다. 아마는 이런 웅성거림이었을 게다. 키가 180센티미터 넘는 사람도 많은데, 왜 침대 길이를 180센티미터라고 규정하는 것일까. 설사 참고서에 그렇게 적혀 있더라도 선생님 선에서 그런 건 걸러버리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시험에 이런 불합리한 내용이 나올 턱도 없는데. 뭐 이런 내용의 불만이었을 게다. 물론 침대 길이를 교과서 밑 여백에 적으라는 선생님 지시 내용을 따르지 않은 학생들은 손바닥을 맞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학 시간이면 선생님은 일명 ‘ 빡빡이’라 불리는 숙제를 검사했다. 연습장 앞뒤로 빡빡하게 몇 장씩 수학 문제를 풀어오는 것이었다. 역시 몇몇 학생들은 일찌감치 숙제를 포기하고 손바닥 맞는 길을 택했다. 나머지 숙제를 해온 학생들도 제 스스로 문제를 풀어온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습관처럼 참고서 풀이내용을 그저 앞뒤로 빡빡하게 베꼈을 뿐이다.
이제 도덕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군사부일체에 대해 열변을 토하신다. 좀 부당하고 불합리하더라도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인간이며, 나아가 애국하는 시민이라는 논리이다. 앞선 두 시간에 손바닥을 맞지 않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뿌듯한 심정이 된다. 자기들도 가정선생님과 수학선생님이 불합리하고 부당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선생님이 시킨 것은 그게 옳든 그르든 일단 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뭐 이런 취지에서 오는 뿌듯함이다.
그들은 순간적이나마 손바닥을 맞은 친구들에 비해 훨씬 도덕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날 아침 집단상담 시간에 그들의 개인적 가치를 물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손바닥 맞은 친구들에 비해 그다지 도덕적이라고 자부하지는 않았다.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그것을 따랐을 때, 그것에 응원이 실릴 경우 우리는 스스로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포장하게 된다. 인간은 그저 비도덕과 도덕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간적인’ 존재일 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