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꾸로 가는 시간

 

이 글로벌한 세상에 유독 우리 현실만 거꾸로 간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고서라도 이석기 사태를 둘러싼 정치권 및 언론의 여러 행태는 유행지난 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통진당 수뇌부의 ‘과대망상적’ 발언이나 국정원의 ‘내란 음모’ 카드나 일반국민에겐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구태의연한 두 과거가 그들만의 레퍼토리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국민들은 귀 후비거나 코 파는(곰발님 식 표현ㅋ) 지겨움으로 그것을 구경할 뿐이다. 두 쪽 다 신선하지도 않고, 21세기 정서와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국정원이 통진당 수뇌부를 향해 내란예비음모죄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석기 의원 및 통진당 쪽은 예상대로 날조, 왜곡이라고 맞선다. 이석기 그룹의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의 몇몇 움직임이 내란음모에 해당된다는 것이 국정원의 입장이고, 처음엔 모임 자체를 부정하던 통진당 쪽은 단순한 당내 모임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기본 틀에다 변주만 가한 형태인 이런 공안 정국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레퍼토리이다.

 

 

이석기 의원은 내란음모와 어울리기 보다 마음이 병든 자에 가깝다. 이미 그들 그룹은 국회에 입성할 때나 대선 과정에서 희한한 행보를 거듭해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동정의 대상이지 위협적 존재는 못 된다. 국정원이 확보했다는 내란예비음모 증거 자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들을 그 죄몫으로 엮기에는 어딘가 격이 맞지 않다. 그들의 정체가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주고, 국민을 호도할 만큼 위협적인가에 대한 생각도 회의적이다. 법조계나 언론의 분위기도 그들이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볼 정도로 명백한 목적과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쪽이다.

 

 

마음이 병든 자는 치료의 대상이지, 교화의 대상이 아니다. 비뚤어진 정치색이나 고착된 이데올로기는 가두어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선 개입이란 악재를 벗어나기 위한 국정원의 전환용 카드인지, 진짜로 내란예비음모를 할 만큼 그들이 통 큰 그룹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거꾸로 가는 시간 여행에 씁쓸해질 뿐이다.

 

 

 

 

2. 창의력이 필요해

 

하루 종일 단세포생물이 된 기분이다. 시쳇말로 뇌가 너무 청순해진 나머지 또릿또릿한 행보와는 거리가 먼 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만 그런 게 아니다. 실수투성이 일상을 꾸리는 건 내게 흔한 일이다.

 

 

우선 독서모임에서 활용한 CD를 기기 안에서 빼내지 못해 허둥거렸다. 몸집이 큰 전문 기기였다지만, 눈썰미만 좀 있다면 금세 CD 플레이어의 위치를 찾을 것인데 내 눈엔 그 데크가 그 데크 똑 같아 보인다. 기계치다 보니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자체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저녁에는 약속 장소를 찾느라 또 헤맸다. 자주 다니는 길인데도 주변 조명이 바뀌니 이 길이 아닌가 싶어 같은 곳을 몇 바퀴나 돌고 있는 거다. 당황하다 보니 선물로 준비한 책을 전하는 걸 깜박하고 만다.

 

 

여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그건 바람일 뿐이다. 집에 돌아 올 때는 식구들 간식을 사가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기다리던 식구들 표정을 보고서야 아차 싶은 거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한두 가지에 몰두하게 되면 나머지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운이 좋아 신경이 덜 쓰인 것들이 떠오르면 챙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다.

 

 

창의적이지 못한 일상이 아쉽기만 하다. 이참에 우스갯소리나 한 번 해야겠다. 곧 죽을 할머니, 내 생명을 구해준 오랜 친구, 꿈꾸던 이상형 여자(남자) 등이 급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자동차로 지나던 나는 오직 한 사람만 태울 수 있다. 누구를 옆자리에 앉힐 것인가? 단순 세포형인 나는 망설임 없이 오랜 친구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창의력 만점인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답을 내는 이도 있다. 자동차 키를 친구에게 주어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게 한 뒤, 자신은 이상형 여자와 함께 버스를 탄다. 여자가 자신을 좋아해줄 것은 차치하고라도.

 

 

두려워서, 당황해서, 예민해서 등의 핑계가 붙은 습관성 어리바리함을 벗어나고 싶다. 빠릿빠릿한데다 창의적이기까지 한 전천후 멀티플 인간형으로 거듭나고 싶지만 내 현실은 멀기만 하다.

 

 

 

3. 잡스라는 아이콘

 

스마트폰이 일상화되기 전이었다. 한 IT 업계의 대표가 스마트폰의 장점에 대해 설파하는 인터뷰 소식을 자주 접했다. 자신은 몇 년 전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는데 그야말로 휴대용 컴퓨터가 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인터넷 검색, 메일 송수신, 사진 촬영 및 편집, 심지어 쇼핑까지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했다. 불과 몇 년 전이야기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 사람 못지않게 스마트폰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이 빠르게 세계로 확산된 데는 애플사의 ‘아이폰’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배경에 스티븐 잡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도 지나치진 못한다. 안타깝게도 잡스는 이 세상에 없지만 명실공히 애플사는 세계 IT 업계의 왕좌가 되었다. 잡스 없이는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가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이 잡스의 전기문을 읽었다. 괴팍하고 특이한 그의 성정 이면에 버림받은 어린 시절이 있었고, 추진력 뒤에는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양부모와 절친 사업 동료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금만 관심 있다면 잡스가 어떤 인물이었다는 것을 대개는 알고 있다. 잡스에 관한 영화가 나왔다고 했을 때 약간은 기대감에 들떴다. 전기문을 넘어선 뭔가 강한 한 방이 있을 거란 예감 때문이었다. 예감이 언제나 맞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영화로 옮겼을 때의 말할 수 없는 지겨움 같은 게 화면에 흘렀다.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낀 영화였다. 세상을 뒤집어버린 천재괴짜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도, 하다못해 혼잣말이라도 들어볼 수 없었다. 버려진 자식으로서의 상실감, 도덕과 불화하는 내면의 혼란, 선불교와 인도에 관심이 많던 히피족으로서의 젊은 잡스, 까다로운 채식성과 어울리지 않는 다혈질 등, 섬세하게 짚을 수 있다면 충분히 많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도 뽑아내지 못했다. 방황하는 잡스,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 잡스를 그리지 못한 영화는 실패작으로 보였다. 차라리 다큐멘터리로 꾸렸다면 이만한 실망감에서는 멀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전에 잡스에 관한 정보가 없거나 잡스 전기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잘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만든 애플사에서도 쫓겨날 때 관객들은 왜 쫓겨 나는지 쉽게 이해하기 힘들게 구성했다. 그나마 봐줄만한 것은 잡스로 분한 애쉬튼 커처의 연기력이었다. 그것으로 커버하기엔 감독의 한계가 빤히 드러나는 영화였다.

 

 

잡스라는 아이콘은 너무 선명하고 그 콘텐츠 역시 참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것이나 영화에 와서는 그 캐릭터도 내용도 흐지부지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 별나거나 희한한 짓을 하면 흉보거나 손가락질하는 건 자유다.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 미친 천재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런 내용의 내레이션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영화였다.

 

 

 

4. 모든 것의 빌미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배우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의 치유 프로그램이 어느 한 쪽만 일방적인 혜택을 보는 경우는 없다. 공감대라는 공통분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끄는 쪽이나 따르는 쪽이나 서로 배우게 된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재소자들을 상대로 ‘마음상함’에 관한 주제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상처의 근원지인 가족과의 마음 상함에 대해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상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알래스카에 사는 생면부지의 아저씨와는 상처라는 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진솔하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 놓는다. 타인의 풍성한(?) 사례에 비해 비교적 다행한(!) 제 상처에 위안을 삼는 모습은 어디나 같다.

 

 

안에 있는 그들이나 밖에 있는 우리나 따귀 맞은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뜻하지 않게 우리는 유행가 가사의 총 맞은 것처럼 내 영혼에 흠집 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때 언제나 눈물짓는 피해자는 나이고, 몹쓸 가해자는 상대방이다.(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이라고, 자신의 잣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대는 내 영혼을 교란시키고 내 심장을 후벼 판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나도 상대의 뺨을 갈긴다. 순차적으로 쌍방의 영혼에 펑크를 내고 만다.

 

 

그 와중에 멋진 결론을 내 주는 한 분이 있다. 모든 상처의 빌미는 스스로에게 있단다.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생각만 많아졌는데, 모든 것이 부질없고 ‘나’ 아닌 원인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단다. 옆 사람이 날 모욕하는 건 내 작은 교만의 턱짓 때문이다. 옆집 아줌마가 내 눈빛을 거절하는 건 오늘아침 그미 발자국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바쁘단 핑계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모든 것의 빌미가 된다는 걸 잊지 마라. 이 편한 통찰에 이르게 되면 마음 상함 때문에 타인을 단죄할 필요가 없다. 그분이 한 말을 받아 적는 이 순간이야말로 ‘힐링’이란 말이 가장 어울린다.

 

 

 

5. 눈물

 

눈물샘에서 만들어진 눈물은 환경적,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밖으로 표출된다. 바람 또는 알레르기 현상에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환경적 요인의 눈물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한 자연 현상 같은 것이라 이해 받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심리적인 눈물은 그에 비해 복잡한 양상을 띤다.

 

 

최근 여성 아이돌 그룹이 토크쇼에 나와 차례로 눈물을 보인 것이 이슈가 되었다. 이것만은 피했으면 하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자신의 연애사를 들먹이며 사회자들이 약을 올리자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만다. 옆자리의 동료 아이돌도 뒤질세라 배턴을 이어받았다. 애교를 보여 달라는 주문에 난감해하자 한 사회자는 숫제 맡겨 놓은 돈 뺏어가듯이 윽박을 질렀다. 겁에 질린 아이돌 출연자는 넘치는 애교 대신 그 누구도 원치 않은 눈물을 보여주고 말았다.

 

 

프로라면 두 경우 모두 농담으로 맛깔스레 받아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아이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연히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자연발생적인 환경적 요인의 눈물처럼 심리적 요인의 눈물도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중들은 그렇게 이해심이 넓은 편이 못 된다. 하지만 나는 그들, 아직은 어린 그녀들을 이해하고 싶다. 사람의 감정은 조절할 수 있는 거고, 그래야만 프로라고 생각하는 자체도 인간의 오묘한 심리를 덜 이해하는 데서 오는 단정적 언사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마음이 정리 되지 않고 복잡 미묘한데다, 잦은 스케줄로 스트레스 지수마저 높은데, 멍석도 깔아 주지 않고 내키지 않은 것을 하라니 서러운 눈물만이 솟구칠 수도 있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을 적절히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이십대 때의 여성 감성이 가장 섬세하고 다치기 쉬운데 현 상태가 얼마나 힘겹고 난감할지는 당사자가 아니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어린 여자의 눈물이 다 연민하고 동정할 일은 아니지만, 한때의 눈물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요청하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주는 이도 필요하다. 누구나 청춘의 강을 건너왔고, 건널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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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1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석기 사태를 보면서 "나는 이 방면에는 플라톤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때부터 플라톤주의자였다."라는 몽테뉴의 말이 떠오르더군요. 이런 '괴악한 사태'가 오래 전에도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을텐데 '아직도' 아주 가까이서 '현재진행형'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 뿐이지요.

* * *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

나는 이런 일에 참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진심으로 이런 가장 못된 사태를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행위를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택하며, 아주 확실하게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가장 명백한 원칙을 가지고 자기 영혼의 구제를 찾고, 하느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정부와 관리와 법률을 둘러엎고, 어머니(조국)의 사지를 찢어서 옛날의 적에게 갉아먹게 던져 주고, 동포애를 골육상쟁의 증오심으로 채우고, 마귀와 광귀들을 원군으로 청하면서, 하나님의 법의 거룩한 평화와 정의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이해력이 우둔한 수작을 본 자가 하나라도 있을까 자주 의심을 품어 본다.

야심과 탐욕과 잔인성과 복수심은 그 자체로서 본연의 기세를 충분히 갖지 않았다. 그런 것을 정의와 신앙의 영광스런 자격으로 뜨겁게 해 주고 부채질해 주자. 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함이 합법적으로 되고, 관청의 허가를 얻어서 도덕의 망토를 입는 꼴보다 더 괴악한 사태를 상상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미신보다 더 심한 기만은 없다. 그것은 신들을 구실 삼아 범죄를 은폐한다."(티투스 리비우스) 플라톤에 의하면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다크아이즈 2013-09-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언제나 이렇게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고전 철학자들의 말을 옮겨 오시니, 그 독서력에 감복할 따름인뎌^^*
오렌님의 책 소개 덕분에 제 교양의 지평도 아주 조금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고맙고 황송한 일입니다. 추석 잘 보내셨나요?
 

 

 

 

1. 플롯과 친구하기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인간관계의 원활한 소통과 한 대상의 전략적 홍보 수단 등에서도 스토리텔링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원래 스토리텔링은 문학적 성과, 특히 소설을 이루는 장치이자 재료로서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되지 않는 소설은 고전적 의미에서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수하거나 의도적으로 스토리텔링을 무시하는 작가가 있어왔지만 그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한때 나는 글쓰기에서 플롯을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았더랬다. 글은 플롯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심리 묘사에 의해서만 글의 흥미나 질이 판가름 난다고 믿었다. 근거 없는 편협의 우물에 갇혀 있었다. 하기야 스토리텔링 자체도 부질없고 소용없다고 여겼다. 오직 쓰는 자의 손가락 의지에 글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등장인물의 외적 내적 묘사의 장악력만 있으면 플롯은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플롯에 대한 신뢰감이 되살아난다. 단단한 플롯만이 독자를 만든다. 이야기의 뼈대나 구조, 즉 플롯은 단순한 이야기의 개념을 넘어선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그저 늘어놓는 것이 이야기라면, 플롯은 그것에 더해 당위인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힘이나 과정이 녹아 나야 제대로 된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너무 등장인물의 내적 또는 외적 패턴에 의해서만 글을 쓰려고 했다. 이제 자세를 좀 바꿔보고 싶다. 플롯의 대가라 해도 좋을, 작가 딘 쿤츠가 말했다. ‘플롯이 없는 소설처럼 이 세상에 우스운 것은 없다. 누가 뭐래도 플롯은 소설의 으뜸 조건이다.’ 태생적으로 광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라면 플롯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로 실험소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니. 하지만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구태의연하게 보일지라도 기본에 충실한 것도 나쁘지 않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쓰라는 내면의 요청이 들린다.

 

 

 

2.잔소리

 

제 앞가림하기도 버거운 나는  엄마 노릇에서는 빵점이다. 그만큼의 보상으로 아들딸에게 자율성을 부여했다고 위안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들녀석이 말한다. ‘엄마, 잔소리가 뭔지 아세요? 엄마들이 하는 모든 말이 잔소리가 아니라, 같은 소리를 계속 하는 게 잔소리예요.’ 한마디로 ‘엄마는 잔소리꾼’이란 얘기다. 은근히 서운하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식으로 생각하는 법. 별 잔소리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내 입장일 뿐, 아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테면 내가 아들에게 하는 레퍼토리는 이런 거다. ‘첫째, 어학이 기본이다. 딴 건 몰라도 어학 공부는 게을리하지 마라.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어학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둘째, 확실한 관심 분야를 개척하고,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았으면 좋겠다. 현대의 중산층 개념이 뭔지 아나? 아파트 평수도, 외제차 유무도, 명품 가방 살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그건 경제적 측면에서 본 것이고, 요즘은 문화적 잣대로 중산층을 가늠한다. 그러니 정신적 중산층이 되고 싶으면 자기계발에 신경 써라.’

 

적고 보니 잔소리 맞다. 아들 기준에 의하면 엄마가 이런 말을 두 번 이상, 어쩌면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잔소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한다. 그 걱정의 다양한 버전이 보통의 자식들에게는 잔소리로 들린다. 그 시절 나 역시 그랬으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부모는 말하고 자식은 거부하는 것, 그것이 잔소리의 속성이다. 엄마는 한두 번밖에 말한 기억이 없는데 자식은 여러 번 들은 것 역시 잔소리의 특징이기도 하다.

 

가만 생각하면 훈육 또는 길잡이라는 형식의 모든 군소리는 부질없어 보인다. 물이 자정작용을 하면서 흐르듯 인간 성장에도 그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부모의 잔소리와 무관하게 아이들은 크면서 스스로 깨닫는다. 시기의 늦고 빠름에 차이가 있을 뿐, 본인의 인생행로에서 자정능력을 발휘한다. 부모 스스로도 그리해왔지만 그 시행착오의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싶은 욕심에 부모는 잔소리를 하게 된다. 부모의 모든 옳은 소리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모자식 간이라는 걸 증명하는 천형의 매개물인 잔소리!

 

 

 

 

   

투 마더스 포스터 

 

 

 

 

3. 도리스 레싱 앤 투 마더스

 

상식과 기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도전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전통적 사고와 도덕적 관념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굳건한 힘이 되기는 하는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한 알싸한 답을 주는 작가가 도리스 레싱이다.『다섯째 아이』에서의 강렬하고 통렬한 통점 때문에 기억에 남는 작가인데 이번에 개봉하는「투 마더스(두 엄마)」도 그녀의 작품이 원작이란다.

 

『다섯째 아이』에서의 그녀의 메시지를 내 식으로 환원하면 이렇다. 장미와 백합향이 향기롭다고 그것만을 삶의 가치로 고수할 수 있을 것인가. 시궁창 냄새나 쓰레기장 냄새도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다. 평화로운 질서, 안온한 일상, 보장되는 미래 - 전통적 가치관과 건전한 윤리관에 충실한 젊은 부부는 이런 가정을 꿈꾼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인 ‘벤’이 태어나면서 그들의 신화는 무참히 부서진다. 가는 몸에 부서질 것 같은 사지, 거대한 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 괴물 같고 벌레 같은 외형에다 성격마저 괴팍한 벤은 중산층 삶에 대한 거리낄 것 없는 로망을 가졌던 부부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몰아넣는다.

 

행복의 기별로 가득했던 집안은 불행의 기운이 점령하고 만다. 파괴와 증오, 공포와 침울의 대상이 된 벤을 버려야 할 것인가. 가족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그들이 꿈꿨던 이상향이란 그림을 위해 또 다른 가족인 벤을 포기할 것인가. 해결 난망의 숙제이지만 도리스 레싱의 전언은 분명하다. 벤이란 상징을 통해 우리 스스로 믿고 있는 가치나 기준이란 게 얼마나 헛된 것이며 무너지기 쉬운가를 보여준다.

 

관계 또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바늘 끝 같은 감각으로 감지해낸 도리스 레싱의 철학이「투 마더스」에 와서는 어떻게 변주되는지 궁금하다.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적 시각의 영화라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구나 쌍방 친구 아들들과의 로맨스라니 막장 드라마로 빠질까 우려도 된다. 하지만『다섯째 아이』에서의 도리스 레싱을 기억하는 감독이라면 뭔가 선명한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해 애쓰지 않았을까. 작가의 기가 전해질지 기대 중이다.

 

 

 

4. 군더더기 없는 삶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강조했다. 군더더기 없는 글의 매혹에 대해서. 고교 시절 그는 한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늙은 편집자는 그가 제출한 원고의 대부분을 지워서 돌려주었다. 남은 것은 오직 킹이 처음에 하고자 한 내용 뿐이었다. 늙은 편집자는 어린 그에게 충고했다. 어떤 이야기를 쓸 때는 스스로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고 써라. 원고를 고칠 때에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모두 없애라. 그렇게 하면 핵심만 남을 것이다.

 

같은 맥락의 얘기를 사진 기초를 배울 때도 들었다. 한 수강생이 제출한 사진을 선생님은 화면에 띄웠다. 호수 풍경이었다. 드넓은 호수 가운데 오리 한 마리가 노닐고 언덕 주변으로는 화사한 붓꽃이 만개했다. 남은 오리 떼는 물풀에 가려 보일 듯 말듯 했고 그것을 정원 삼아 전원주택이 원경으로 잡힌 사진이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그 풍경 중 호수에 떠 있는 오리를 제외하곤 다 버리는 게 낫다고. 사람들은 핵심을 원하지 군더더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고.

 

무엇을 듣고 싶은가 또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에 대한 중심점은 하나이다. 이것저것 말하고 이리저리 보여주고 싶은 건 당사자 입장일 뿐이다. 어떻게든지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보여주고 싶은 풍경도 많은 게 내 입장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다. 다 알아 들을 마음도 없고, 다 볼 수 있는 눈을 키우지도 않는다. 타자화된 우리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건 언제나 단순한 핵심 그것이다.

 

글에서 군더더기를 버리는 것이나 사진에서 불필요한 풍경을 버리는 것만큼 삶에서 던적스러움을 버리는 건 어렵다. 단순한 핵심에 이르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자기 훈련을 필요로 한다. 복잡하고 거창하고 요란한 것은 내 안에 깃든 욕망의 실체일 뿐, 타자에게 비치는 그것은 피로와 지루함의 허상일 뿐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쾌한 것 그 중심에 닿으려 하는 건, 그만큼 우리 삶이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5. 사랑하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상대의 목소리나 문자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어쩌다 상대가 건네는 한 마디 말에 심장이 오그라든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아니 사랑에 빠져있다.

 

사랑에도 구별이 있다. 덜 사랑하는 자와 더 사랑하는 자. 사랑에 덜 사랑과 더 사랑이 어디 있냐고? 천만에!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다.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당사자들에게 똑 같이 할당되는 것이라면 애초에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입술이 부풀고, 이별 때문에 치통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대상을 객관적·보편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덜 사랑하는 쪽이고, 대상에 주관적·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쪽이다. 덜 사랑하는 쪽은 그 순도가 탁하기 때문에 덜 다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게 버겁지 않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쪽은 순도 백퍼센트이기 때문에 더 다치고 버겁기만 하다.

 

사랑의 단상에 관한 롤랑 바르트의 전언을 보자.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철새이고 사라지는 자이다. 반면 사랑하는 자의 천직은 외곬이자 처분을 기다리는 자이다. 설거지하기 성가셔 싱크대 한쪽에 미뤄둔 프라이팬처럼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세이다. 언제나 부재중이거나 안개처럼 존재하는 그 덜 사랑하는 존재가 사랑인줄 알고 창을 연 채 반쯤은 얼이 빠진 채 기다리는 것이다. 결코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하지만 어쩌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갈망하고 집착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을. 찔러대고, 나약했던 그 순간을 겪기 전까지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환상으로 남을 몹쓸 그 사랑!

 

 

 

6.레미콘 차를 보며

 

달리는 레미콘 차 몸뚱이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그 안에는 이미 섞인 콘크리트가 들어 있다. 모래, 자갈, 시멘트, 물 등 적절히 배합된 그들은 몸 섞어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 목표점에 도달할 때까지 제 몸을 굴리지 않으면 내용물이 제대로 섞이지도 않을뿐더러 심하면 굳어버릴 수도 있다. 안착하여 타설될 때까지 돌고 돌아야 한다.

 

레미콘 차 뒤꽁무니가 잘 돌아간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건설 현장 비리에 관한 텔레비전 고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관리가 잘 되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입구에 담당자가 나서서 레미콘을 점검한다. 불량 레미콘이 들어 있는 차를 발견할 경우 그 자리에서 되돌려 보낸다. 반면 허술한 공사 현장에서는 퇴짜 맞은 그 레미콘 차를 형식적인 점검만 거친 채 그대로 투입시키고 있었다. 완공되었을 때 두 아파트에 대한 안전도는 극과 극이 될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의 본질은 관계이다. 일단 잘 반죽해야 한다. 어긋나고 흐트러진 배합률로 제 인생의 내용물을 반죽한다면 아무리 잘 돌려도 몹쓸 것이 되고 만다. 잘 굳은 축조물을 얻으려면 두 가지 다 충족해야 한다. 배합이 맞아야 하고 잘 섞을 줄 알아야 한다. 정치 구도, 문화 방식, 소통 의지 등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 바탕에는 관계망이란 사회적 운명이 부여된다. 그 사회적 약속을 잘 배합하고 잘 융합할 때 굳건한 구조물을 얻을 수 있다.

 

삶의 핵심은 인간 대 인간에게 있다. 일찍이 그것을 알아 낸 인류는 철학이라는 인간에 대한 위대한 학문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하루하루의 삶이 모여 일생을 만든다. 내 삶을 어떻게 반죽하고 돌릴 것인가에 따라 완공된 건축물이 달라진다. 불량 반죽은 아무리 돌려도 불량일 뿐이다. 운 좋아 그 레미콘으로 층층이 타설한다 한들 부실 건축물이 되고 만다. 반죽은 굳기 마련이다. 문제는 잘 굳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단한 구조물로 남을 것인가, 부실한 건축물로 부서질 것인가는 기초인 반죽과 돌리기에 달려있다.

 

 

 

7. 예의라는 폭력

 

제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가 크게 보인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하여 ‘잘 아니까 똑바로 말해주는 거야.’ ‘뒤끝은 없으니 서운해하지마.’라며 상대에게 거침없이 말한다. 맞는 말처럼 들리는 저런 어법이야말로 부당한 말투 중의 하나이다. 사람은 상처의 동물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것을 고려치 않은 채, 제 눈의 들보 든 지도 모르고 충고랍시고 권력자들은 남의 약점을 캐는데 일가견이 있다.

 

선인들이 타인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를 조심하라고 가르친 건 제 안에 더한 그 왈가왈부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리라. 말하지 않는 약자는 타인의 약점을 몰라서가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예의 상 알 뿐이다. 자중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선인들은 가르쳐왔다.

 

하지만 예의 또는 예절이라는 게 동양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약자가 강자에게 취하는 복종의 기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공자가 말했다. ‘다른 이를 존중하면 모욕당할 일이 없다’고. 애초에 그 말은 지위상하와 관계없이 태어난 말일 게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연예계에서 선배에게 깍듯이 인사하지 않는 것은 큰일날일이지만 먼저 상대를 발견하고도 선배가 후배에게 곁눈질조차 주지 않는다고 해서 예의에 어긋난다고 흥분하는 사람은 없다. 구석구석 살피면 예절은 언제나 약자 또는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권력 가진 자가 예의 부족 구설에 오른 예는 단연코 들어본 적이 없다.

 

예절은 마음의 진정성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갑의 위치라 해서 진정성과 형식을 표현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옛말에 ‘인사에 선후 없다’라고 했다. 예절에도 선후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예절은 언제나 강자 앞에서 표하는 약자의 리액션에 머물고 만다. 그러다 보니 잘 안다는 이유로, 뒤끝 없다는 핑계로 갑은 을에게 폭력적 언사를 일삼는다. 예절에서 인간 동격 개념을 적용하기엔 무리인 세상을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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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3-09-1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안녕하세요^^

<소설쓰기의 모든 것>은 도서관에서 1권만 빌려서 읽다가 다 못 읽고 반납했었거든요. 님 글 읽고 보니, 전체를 꼼꼼히 읽어보고 싶어요.

현대의 중산층 개념 너무 좋은데요. 저도 엄마잖아요.
요즘에 딸롱이가 바이올린을 거부해서요, 조금만 더 배웠음하는데, 팜므느와르님 애기 해줘야겠어요. 다른 것보다 정신적인것, 문화적인 것에 중점을 두자 하면서요.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날씨가 선선하다 못해 서늘하네요. 또 놀러올께요~

다크아이즈 2013-09-16 07:00   좋아요 0 | URL
전 이 책 유익하게 잘 보고 있어요.
선전지 딸려 온 것 보고 당장 샀잖아요.
미국 환경에 맞는 거라 우리 상황에 다 적용할 순 없지만 읽어 볼 필요는 있었어요.

중산층도 못 되지만 그런 정신적 마인드는 중요할 것 같아 강조하는데
아이들에겐 잘 안 먹혀 들어요. 머리 굵으면 지들 생각이란 게 있잖아요.
단발머리님 추석 잘 보내시고, 스트레스는 알라딘에서 같이 풀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1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포스트 참 좋습니다. 팜므 님 글은 확실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딘 쿤츠가 플롯이 팔 할'이다, 라고 했다면 스티븐 킹은 정반대로 말한 기억이 나네요. 아마... 유혹하는 글쓰기인가 아니면 죽음의 무도인가에서 플롯은 개나 줘 ! 그냥 플롯에 골몰하지 말고 그냥 써 !!! 이런말을 했거든요...ㅎㅎㅎㅎㅎㅎㅎㅎ.

사랑의 단상 띠지'에 <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 라는 문장 제가 정말 좋아했던 문장입니다. 사랑의 단상은 늘 꺼내서 보는 책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한편의 서사시 같아요. 가장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레미콘에 대한 비유 정말 좋습니다. 저도 이거 좀 써먹어도 되나요 ? 써먹게 해주세요..

다크아이즈 2013-09-16 07:04   좋아요 0 | URL
그간 제가 그랬다니까요. 플롯은 개나 줘, 이런 마인드였죠.
근데 재능이 없으니 개 줄 플롯도 없더라구요.ㅠ 해서 초심으로 돌아가볼까 싶어서 방향을 바꿔 보려구요.

레미콘 비유 제발 좀 써먹어주세요. 곰발님이라면 멋진 사유가 깃든 살아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가끔씩 들어오는 알라딘, 곰발님 글맛에 취하는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신통방통하게만 보이는 곰발님, 아흐 다롱디리~~

노이에자이트 2013-09-1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의보다는 위계질서를 더 중시하는 이들이 많죠.아랫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 골치 아픕니다.

'예의라는 폭력'에서 "저런 어법이야말로 불편부당한 말투 중의 하나..." 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지요? 문장의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09-16 07:07   좋아요 0 | URL
노이자님 고맙습니다.
제가 빨리 발견하고 고쳤어야 했는데, 게으름을 핑계로 이제 님의 귀한 덧글을 접수했다는 사실.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방치한 죄 크옵니다.
첫 댓글이신 것 같은데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래서 알라딘이 좋습니다.
많은 것 배우러 노이자님 서재에 놀러 가겠습니다.^^*
 

 

 

 

 

 

 

 

 

 

 

 

 

 

 

 

 

 

  1. 틈

 

  오전과 오후 일 사이 약간의 공백이 있다. 집까지 다시 갔다가 나오기엔 먼 거리이고 무엇보다 그 때야말로 나만의 오롯한 휴식 시간이니 내 식으로 즐기는 편이다. 일터 근처 비빔밥집이나 분식점을 찾아 대충 끼니를 때우고 얼른 카페를 찾아 나선다. 대개 주문한 신간을 꺼내 읽지만, 피곤이 뒤따를 땐 구석자리에서 손수건 한 장 덮어쓰고 과감하고 짧은 낮잠까지도 청한다. 그야말로 나만의 황금 시간을 갖는다.

 

 

  한 줄기 소나기라도 퍼부어준다면 바깥 풍광에 시선을 저당 잡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휴식이 된다. 이 집 저 집 떠돌며 과외를 하던 젊은 시절부터 혼자 점심 먹고 혼자 시간 때우는 일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혼자 노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렇게 쓰려는데, 우연히 내리 연속 지인들의 점심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고 글 길을 틀고야 마는구나. 혼자 먹는 점심도 나쁘지 않지만, 기막힌 타이밍으로 나를 찾아준 친구들이 구세주 같았다고.

 

 

  쏜살같이 달려온 지인들과 카페에 앉아 와플 세트 곁들인 천국표(?) 김밥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지인은 작은 유리병 하나를 내놓는 걸 잊지 않는다. 콩잎절임이란다. 도회지로 나온 이후, 처음 먹어본 콩잎절임의 오묘하고 경이로운 맛에 매료된 적이 있었는데 그 추억담을 기억한 지인이 부러 챙겨온 것이다. 섬세한 맘 씀에 괜히 울컥해지는 것이었다.

 

 

  그 잠깐 동안 ‘틈’ 이란 말을 생각했다. 적당한 거리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우정이다. 계단에 앉은 커플 사이에 놓인 물병,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한 잔, 발 담근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큼의 틈을 인정해야 사람 관계는 건강하고 오래 간다. 저 물병만큼의 여유, 저 찻잔만큼의 배려, 저 물소리만큼의 타자화 등이 서로의 것이 될 수 있을 때 모든 관계는 빛난다. 틈을 유보한 채 성급히 내달리거나, 적정 거리를 놓친 채 보채는 모든 만남은 구라거나 신의 영역 둘 중의 하나다. 구라도 신도 원치 않는다. 다만 한 호흡이란 ‘틈’을 새기고 새길 뿐이다.

 

 

 

  

 메리트씨산,메리트 C,

 

 

 2. 비타민보다 운동

 

  사람마다 체질과 체력이 다르다. 건강 체질에다 운동으로 몸을 관리한 사람들은 이 무더위에도 그리 지치지 않는다. 반면에 저질체력에다 운동마저 기피하는 나 같은 이들은 사계절 피곤의 연속이다. 체력에 비해 내가 가진 에너지와 기를 무리하게 쓴 날은 어김없이 탈이 난다. 채우지도 못했는데 퍼내 쓰니 쉬 지친다. 충분한 잠으로 보충해도 입술이 부르트고 잇몸은 부어오른다. 운동 부족이란 숙제를 해결하면 컨디션 회복에 도움이 되련만 쉽지가 않다.

 

 

  모임에 나갔더니 간호사 지인이 비타민을 먹어보란다. 백퍼센트 비타민은 체력 유지에 도움이 될 거란다. 단맛과 각종 첨가물로 범벅이 된 무늬만 비타민인 제품과는 다를 것 같아 그미가 추천해준 비타민을 곧장 샀다. 너무 시고 제법 써 삼키기에 고역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 신뢰가 가기도 한다. 혼자 먹기 미안해 온 식구를 끌어들인다. 지친 몸이 나쁜 쪽으로 금세 반응하는 나는 열심인데, 다른 식구들은 비타민에 별 관심이 없다. 청춘인 아들딸은 시큰둥해하고, 나름 운동으로 제 몸을 유지·관리하는 남편도 그리 반색하지는 않는다. 챙겨주면 먹기는 하지만 나처럼 진지하지는 않다.

 

 

  누구든지 경험하고 느낀 것만큼 반응한다. 제 몸에 이상 징후가 없으면 스스로 비타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기에 건강에 대해 그다지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반면, 감당하지 못할 몸 기운을 느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비타민 같은 의지처라도 찾게 된다.

 

 

  건강은 누구에게나 예측불허이다. 내 몸이 피로를 느끼면 마음까지 힘들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몸이 아무런 불편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고 건강을 자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 이상으로 ‘신체의 안녕’에 관한 건 영원한 숙제이다. 비타민 같은 활력의 정점을 찍으려면 당장 뛰쳐나가 운동부터 해야 한다. 백퍼센트 비타민에만 의지하며 뒹굴뒹굴 게으름을 피우는 건 아직 급하지 않다는 걸 말한다. 굳건한 의지로 규칙적 운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만 보인다.

 

 

 

  3. 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

 

「바람의 풍경, 이창연 전」이 열리고 있다. 이곳 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선생의 유작전이다. 돌아가진 지 3 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선한 미소와 처연한 눈빛으로 남루의 풍경 끝자락까지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고, 생활과 그림이 별 다를 바 없이 소박한데다 유머가 넘치던 분이었다.

 

 

  선생님과 인연이 있던 지인들과 전시회장을 찾았다. 생각보다 조촐한 규모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전시장의 크기가 선생의 입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마음만은 전우주적 공간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폈다. 사모님의 안내 덕에 그림 속에 담긴 선생님의 예술혼과 가치관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게 선생님은 화가이기 전에 스승이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으로 먼저 만났다.『엄마 찾아 삼만 리』를 읽어주던 순정한 모습도, 화가로서 승승장구하던 모습도 모두 존경 받아 마땅했다. 어린 제자들을 사랑했지만 그림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초중고 교과서에도 몇몇 그림이 실릴 만큼 선생님은 유명 화가가 되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담배가게」이다. 70년대 풍의 그 담배포 풍경에는 삶에 대한 철학이, 그림에 대한 예술관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런 선생님의 자세한 우주관은 유작 전시회 기념으로 출간된 시화집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르코 출판사에서 나온 이창연 화백의『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는 ‘이창연 화가의 작가 노트’라는 부제가 딸린 시화집이다.

 

 

  그림을 삶의 꽃으로 비유한 선생님은 ‘그림이 그림이라면 그림이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삶의 현장 그 리얼리티를 보듬지 못하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절대 고독의 에너지로 당신만의 예술적 행보를 내디뎠던 그 흔적이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아, 슬픈 노랫가락 같고 유쾌한 농담 같은 선생님의 작가노트『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에 관심 좀 가져주시라.

 

 

 

 

4. 노익장(老益壯)

 

  ‘노익장을 과시하다’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에 뒤지지 않는 노년의 굳건한 패기를 표현할 때 쓰는 관용구이다.『후한서』「마원전」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노당익장(老當益壯)의 준말이다. 말 그대로 비록 늙었지만 기운이 더욱 씩씩함을 일컫는다.

 

 

  후한 광무제 때의 명장 마원은 예순두 살, 지금 같으면 상노인에 해당하는 나이에 광무제를 도와 군대를 일으켜 반란을 평정하고 흉노를 토벌했다. 말 그대로 대기만성을 이뤘다. 평소 친구에게 ‘대장부는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고,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며 노익장을 역설했다. 굳이 역사서를 들먹이지 않아도 현실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지인의 경우, 백수(白壽)였던 당신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 일터에 나가셨고, 텃밭 가꾸기까지 거뜬히 하셨다고 했다. 내 친정 엄마도 마찬가지이다. 미수(米壽)가 멀지 않았건만 아직도 혼수방에서 일하신다. 천생이 부지런한 분이라 일 하지 않으면 못 견뎌 하신다.

 

 

  며칠 전 또 다른 노익장을 과시하는 분을 만났다. 일흔을 넘긴 그분은 매일 원고지 스무 장에 가까운 글을 쓰신다. 내 짧은 소견으로 힘들고 벅차지 않으시냐고 여쭈었다. 그렇긴 하지만 글쓰기가 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견딜 만하다고 하신다. 원고를 채운다는 스스로와의 약속 때문에 맘대로 술도 못하고 여행도 못하지만 얻는 게 더 많단다.

 

 

  일반적으로 일을 접고 느긋이 여가를 즐기는 것이 노년을 잘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할 일이 있어야 늙지 않는단다.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거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노화는 걷잡을 수없이 빨라진다. 늙어서 일을 놓는 게 아니라, 일을 놓으면 늙게 되는 것이다. 젊다는 게 글 쓰는 데 유리한 건 사실이겠지만, 나이 많다는 게 글 쓰는 데 불리한 것만도 아니다.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그분처럼 열정이 넘치는 내 노년의 글쓰기를 그리며 오늘도 성심껏 자판을 두드린다.

 

 

 

 

5. 혀

 

  많은 사람들이 소통에 힘겨워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부부끼리의 교감, 자녀와의 대화, 친구와의 교류 등등에서 온전한 승리를 맛보기란 쉬운 게 아니다. 소통은 인류 탄생 이래 가장 힘든 숙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기장이 왜 생겨났겠는가. 소통 때문에 자괴하는 자들의 쓰라린 꽃 무덤이 그곳 아니던가.

 

 

  다행히 요즘은 소통 덕에 환희할 수 있는, 발랄한 꽃다발 역할을 해주는 SNS도 생겨났으니 숨통을 틀 만하다고 여기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 둘의 경중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매 순간마다 우리 삶은 내밀한 상처의 꽃 무덤과 드러나는 환희의 꽃다발을 오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상처를 주고받을까? 서로 다르다는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건 내 맘이니 식은 죽 먹기이다. 하지만 타자에게 나를 똑 같이 대접해달라고 강제하는 건 어렵다. 그건 타인의 마음일 뿐이다. 무한대로 뻗어있는, 자유롭기만 한 타자를 내 식으로 규제하려 할 때 우리는 필연의 상처와 대면하게 된다.

 

 

  상처를 옮기는 가장 큰 도구는 혀(말)이다. 사람의 혀는 환희이자 보약일 수도, 상처이자 독이 될 수도 있다. 일찍이 그것을 갈파한 선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다. ‘임금이 지혜로운 두 신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해오라고 했다. 각각의 신하는 상자 하나씩을 가져왔다. 첫 번째에도 두 번째에도 사람의 혀가 들어있었다.’

 

 

  흔히 잘못 놀린 혀는 세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혀를 놀리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과 그 대상이 되는 사람 모두. 하지만 인간에게는 양심이란 게 있기 때문에 혀를 놀린 사람의 상처가 가장 크고 깊을 수도 있다. 오죽하면 맞은 자는 뻗고 자도 때린 자는 모로 잔다는 말이 있을까. 속으로야 나라님도 팔아먹고 전 우주도 갈아치울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언어는 타인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걷잡을 수 없는 상처라는 꽃 무덤을 만든다. 그 무덤 썩어 한 줌 거름이 되어, 언젠가 보상으로 되돌아올 환희의 꽃다발이 되는 순간까지도 그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현명한 소통을 하는 자들은 타자를 향한 시선이란 끈을 느슨하게 잡을 줄 안다. 팽팽한 줄잡이야말로 상처의 근원이라는 것을 누적된 학습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혀 놀림도 훈련하면 줄일 수 있고, 소통의 문도 노력하면 언젠가는 열린다. 무더위를 이기는 것만큼의 사투지만 자기체면 걸듯 이런 훈련과 노력은 내게 필요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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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3-08-17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서재 놀러왔다가 좋은 글, 제가 제일 먼저 보네요. *^^*
모든 글이 마음에 와 닿고 좋지만, 첫번째 글 너무 좋아요.
저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남편과 나, 아이들과 나, 부모님과 나, 시부모님과 나, 친구들과 나, 동네 아줌마 친구들과 나.
우리가 저지르는 소소한 잘못과 실수가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건 다른 말로 '물병만큼의 여유'를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찻잔만큼의 배려를 하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이 부담스럽고, 싫어지죠.

방학 마지막 토요일이에요. 이야호~~ 외치면 나쁜 엄마인가요?
팜므느와르님 방에서 외치고 갈래요.
이야호~~~

다크아이즈 2013-08-18 08:42   좋아요 0 | URL
아뇨, 아뇨 ㅋ 엄마에게 방학은 짧을수록 좋아요.
이야호, 저도 넘 좋아요.
담 주면 아들 딸 기숙사로 돌아간답니다.
단발님과 저의 자유를 위해 브라보^^*

마녀고양이 2013-08-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언니, 더운 여름 잘 지내시지요?
저는 오늘 시험이 또(!) 있는데, 목이 부었네요, 구술 면접 시험인데.. ㅠㅠ

'혀', 의사 소통은 정말 어려워요.
남들에게는 이렇게 하면 된다고 쉽게 말하면서도
제가 제 속 마음을 얘기하려면 어찌나 어려운지요! 더구나 일단 벽을 깔고 있는 사람에게
나를 활짝 열어보인다는 것은, 제게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주기도 하구요...ㅠㅠ

현명한 소통, 타인에 대한 기대가 커질수록 어려운거 같아요. 그래서
때론 끈을 느슨하게 잡아야만 하는데도, 그래야만 할 때 더욱 팽팽해지니.... ^^

다크아이즈 2013-08-18 08:41   좋아요 0 | URL
와우, 달여우님, 아니 마녀고양이님...
제가 마녀고양이 시절의 님보다 달여우 때의 님이 더 익숙하니 누구신가 했네요.
공부하시느라 힘드시지요?
마고님 글을 보면서 내면의 통점이 어쩌면 저랑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해요. 근데 타인이든 자신이든 오래 들여다보면 더 고통스럽더라구요.
공부 분야가 그러니 더 자책하고 더 스스로를 객관화할 것 같아 힘든 학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소개 받아 심리상담을 받으면 참 위안 되겠다 이런 엉큼한 꿈도 가끔 꾼답니다.^^* 더운데 학문 갈무리 잘 하시어요.

프레이야 2013-08-17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는 당장 담아갑니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그 스승님의 책이군요. 그림에대한 그분의 철학도 마음에 와 닿아요. 요즘 저도 전반적으로 몸이 처지고 기운 없는데 운동이 좋은 처방이라고 하더라구요. 적당히 몸을 써주는 것! 댄스 배우고 싶어라ㅎㅎ 혀가 죽이고 살리는 세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과일 적당히 많이 드시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전 좀있다 외출해요.

다크아이즈 2013-08-18 08:35   좋아요 0 | URL
댄스 꼭 배우시어요.
왜 부부끼리 배울 수 있는 스포츠댄스(?) 맞나, 그거 저도 엄청 하고 싶은데
(요즘 야간 강좌도 많던데) 남푠이 안 받쳐주니ㅠ
그림 좋은 이창연 화백이 널리 세상에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세실 2013-08-1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생일 선물로 보내준 비타민 열심히 먹고있어요.
이젠 몸 생각할 때.
가끔 틈이 생길때 혼자 커피숍에 가서 책 읽으면 진도가 빠르네요. 요즘 즐기고 있어요^^

다크아이즈 2013-08-18 08:30   좋아요 0 | URL
비타민 꾸준히 먹으면 도움 될까요?
첨가물 있는 것 말고 백퍼센트 비타민은 많이 시어요. 그래서 쓰게 느껴져요.
물 한모금에 눈 감고 톡 털어 넣어야 ~~

라로 2013-08-19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 방금 언니에게 땡투하고 주문했어요!!!!^^
그런 멋진 선생님을 은사로 두셔서 언니도 그렇게 멋지시군요!!!!!ㅁ(이 자판은 포스용이라 하트가 안 나와요,,,저 네모를 하트라 생각해주세요~~.^^;;)
저도 저 책의 제목처럼 저 바다의 끝이 어딜지 궁금해요,,,그리고 이창연선생님의 그림을 직접 보고싶네요!!!!!>.<
그림을 보니 선생님의 성품이 고스란히 느껴져요~~~~.^^

다크아이즈 2013-08-21 22:53   좋아요 0 | URL
너무 재바른 아롬님...
그림은 진짜 좋아요.
그림자를 버린 정신적 사실주의를 고수하시는데 볼수록 빠져들어요.
글은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분이 아니었으니 뭐라 말씀 드리기 그렇구요.
진정성 하나 만은 믿을 만합니다.^^*

순오기 2013-08-2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팜므님 글은 참 좋아요~ 이런 글쓰는 분이 오공주 멤버라 더 좋아요!^^
3천만원어치 구매리스트를 뽑아야 하는데 좋은 책 추천도 해주세요!
이창연 선생님 책 리스트에 넣을게요.
정식으로 페이퍼 올릴거에요~~ 일을 사서 만드는 나를 누가 좀 말려줘요.ㅠ

다크아이즈 2013-09-11 09:22   좋아요 0 | URL
순오기 언냐, 잘 계시나요?
제가 요즘 정신 못 차리고 헬렐레하고 있어요. 알라딘도 잘 못 와요.
10월에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어요.
삼천 만원어치 책 다 구비하셨는지 궁금해요.
시간 내서 서재에 들를게요. 오늘은 이만 또 나가 봐야 해요 ㅠ
 

 

 

 

  

 

   더 테러 라이브(2013)   설국열차 개인적인 감 

 1. 영화관이라는 피서지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피서지는 영화관이다. 피서지에 대한 합리적 대가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시원함의 호사뿐만 아니라 입 호사 눈 호사까지 누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이다. 땅 좁은 우리나라에서 보통 사람들이 활동적인 여가를 즐기기는 쉽지 않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면서 보통 사람들은 영화관을 적절한 여가 장소로 활용할 줄 알게 되었다. 그나마 편하고 경제적인 여가 활용 중의 하나가 영화 보기이기 때문이다. 한 영화당 관객 천 만 시대를 가뿐히 넘기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이런 여가 활용법도 한몫했다.

 

  피서지로도 그만인데 영화가 좋으면 금상첨화이다. 신인감독 김병우의「더 테러 라이브」는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다.  원래 분탕질이 심한 영화를 체질적으로 싫어해 영화 시작 십 분이면 졸기 일쑤다. 개연성도 없이 눈요깃감으로 쏘고, 부수고, 때리는 장면들이 어쩐지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감정 이입이 쉽게 되지 않았다. 한데 이번 영화는 달랐다. 실시간 속보라는 긴장감에다 비루함과 비열함이 뒤섞인 인간군상의 아이러니 앞에서 절로 서늘해졌다.

 

  고립된 스튜디오 안이 장면의 대부분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테러리스트와의 대화를 중계한다는 독창적인 상황도 눈길을 끌었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긴장감으로 엮여 있어 더욱 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소박한 영상으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급 영화를 뛰어넘는 관객 시선 고정을 이끌어낸 것에 점수를 주고 싶다. 등장인물에 군더더기가 없고, 대사 처리에도 늘어짐이 없으며, 내용면에서도 과장이 덜 했다.

 

 

  다만 결론 부분이 약간 신파로 옮아간 것이 아쉬웠다. 파죽지세이던 감독의 진격에도 호흡이 달렸는지 다소 급하고 억지스러웠다. 90 여분 동안, 라이브로 중계되는 테러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다보면 관객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긴박감과 울분에 온몸이 저려온다. 더위 피하기 위한 잠시의 여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쐬었으니 이보다 더한 여름나기가 어디 있겠는가.

 

   *** 더 테러라이브가 설국열차 보다는 내게 낫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더 테러라이브가 개연성 넘치는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내 취향이 그나마 전자쪽이라 더 테러라이브 단상만 올려본다.

 

 

 

  

2.  사랑의 속성 - 애지욕기생에 붙여

 

 

  느지막이 영어 공부에 매혹당한 친구가 카톡으로 영어 문자를 보내왔다. 동양고전을 쉬운 영어로 풀어쓴 것을 하루에 한 문장씩 익히는데 영어도 늘고, 마음공부도 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란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가 살기를 바라고,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그가 죽기를 바란다. 과거에는 그가 살아있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그가 죽기를 바란다. 이거야말로 자기기만이다.’ 이런 내용인데, 자신의 요즘 심경을 대변해주는 말 같아 맘에 새기고 있단다.

 

 

  첫 문구를 보니 어딘가 익숙하다.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이란 글을 풀어 쓴 것 같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살기를 바라는 것’이란 의미로 사랑에 관한 단상을 말할 때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고 장영희 선생의 수필에서 그 말을 처음 접하고 공감했던 기억이 났다. 출처를 찾아보니 ‘논어’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애지욕기생’ 이 부분만을 인용해서 사랑의 충만함에 대한 메시지로 활용한다. 근데 따라온 뒷말을 보니 일종의 반전이 있었다는 걸 알겠다.

 

 

  원문과 해석을 찾아봤다. 덕 쌓기의 숭고함과 미혹의 어리석음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예시 중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사랑하면 상대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면 죽기를 바란다. 이미 그가 살기를 바랐으면서 다시 죽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혹이다.’ 인간 사랑의 숭고함이나 낭만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 심성의 간사함에 대해 공자는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사람의 마음을 경계하는 가르침인 셈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 주고 상처 받기 쉽다. 상대를 그러안는 동안에는 모든 게 사랑스럽다. 하지만 미운 마음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자제가 어렵다. 인간의 나약함을 선현들은 일찍이 갈파하고 있었다. 친구 역시 스스로를 단속하기 위해 이 경구를 새기고 있는 중일 게다. 사랑의 솔직한 속성은 할 때는 쉬워도 끊을 땐 비루해진다는 것이다. 그걸 뛰어넘으려는 안간힘을 가리켜 인간적이다, 라고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3. 해리엇 제이콥스

 

  휴가는 게으르게 보내야 제격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빈둥빈둥 시간을 축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달콤한 휴가이다. 잠시 지루한 타이밍에 집어들 수 있는 책 몇 권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이번 휴가 때 가장 눈에 들어온 책은 해리엇 제이콥스에 관한 것이었다.

 

  흑인 노예였던 그녀는 주변의 도움으로 『린다 브렌트 이야기』라는 가명 자서전을 출간할 수 있었다. 1861년 나온 이 책은 어린 주인의 재산으로 양도된 노예 제이콥스의 처절한 투쟁기이다. 그녀는 성적 괴롭힘을 당하지만 당당하게 맞섰고, 사랑 앞에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7년이란 긴 독방 생활을 처절하지만 잘 버텨냈다. 얘기에 쉽게 몰입되는 건 그녀의 글 솜씨도 한몫했다. 감각적이고 유려한 그녀의 문체 때문에 발간 당시에는 여성 편집자의 소설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을 정도였다. 여주인의 배려로 글을 배울 수 있었던 건 노예인 그녀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그녀는 폭군 주인을 피해 사랑하는 백인 남자와의 사이에 두 명의 아이를 낳고 숨어서 지냈다. 그렇게 7년을 분투한 끝에 아이들도 되찾고 북부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여성 노예 신분으로 자신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이런 모습에 당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단순히 제 처지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쓴 건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노예들을 위해 힘이 돼줄 수 있는 깨친 여성들의 힘이 필요했다. 처절한 환경 속에서 속박 받는 2백만 남부 여인들의 처지를 북부 여성들이 깨닫기를 바랐다. 기본 인권에 대한 그녀의 정신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여권권리신장으로 이어졌다.

 

 

  개인적 차원이라면 침묵해도 좋을 고난사를 그녀가 기록으로 남긴 건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은 인식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한다. ‘오직 경험해본 자만이 악의 나락이 얼마나 깊고, 어둡고, 추악한지 깨달을 수 있다’고. 세상의 악행 앞에서 저항하는 모든 개별자들의 의지는 끝내 유의미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제이콥스 여사였다.

 

 

 

  

4.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는 영화 제목이 있다. 불안에 대한 인간의 제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영화와는 상관없이 그 제목 한 번 멋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로 우리 삶은 불안하고 그 불안 때문에 영혼이 야금야금 잠식당하는 기분이 드는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자족의 빛이 넘쳐나는 것만큼 불안의 그림자 또한 짙다.

 

 

  불안과 친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한 예를 들자. 입시생 엄마들이 모이면 관심사 중의 하나가 ‘용한 점집 찾기’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풍경일 텐데 불안의 정서와 관계가 깊다. 자식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 대학입시야말로 부모가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궁금증이자 불안감일 수 있다. 수험생들 속 타는 것 이상으로 엄마들도 노심초사한다. 섣불리 허심탄회하게 드러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삭이자니 속병이 날 지경이다. 그 와중에 ‘잘 본다’는 소문이 도는 역술인들의 정보라도 얻으면 성지 순례하듯 길을 나선다. 내 불안을 위무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 정서 밑바탕엔 기본적으로 샤머니즘적 유전인자가 깔려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진 종교와 관계없이 입시철이 되면 역술인들을 찾는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우리식 종교 정서는 기복신앙에 가깝고, 그 기복 대상 또한 내 가족, 내 핏줄이 우선이다. 내 자식의 앞날이 궁금하고, 내 남편의 재복과 건강이 궁금한 것이지 거창한 주제인 인류공영 따위는 인심 쓰는 덤에 지나지 않는다.

 

  불안의 제일 원인은 욕심이다. 사회는 급변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당연히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여유를 가질 시간이 없다. 오직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자족만을 삶의 목표로 삼기에도 벅찬 시대가 되어버렸다. 점집을 순례한다고, 그곳에서 내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고 근본적인 불안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맘 잃고 헤매는 영혼들에게 그보다 나은 위안처가 없으니 사람들의 귀가 솔깃해진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니 그렇게라도 위로를 간구하는 것이다.

 

 

 

 [주의] 우리 준이가 태   휴대폰 소액결제 사기

  5. 스미싱 주의보

 

  ‘우리 준이가 태어난 지 벌써 일 년이 되었어요. 축하해주세요.’ 낯선 번호에 수상한 문자이다. 링크도 걸려 있다. 접속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잠시 한 호흡 쉬어가기로 한다. 주변에 돌을 맞는 지인도 없거니와, 있다 해도 느닷없이 저런 형식으로 문자를 보낼 것 같지는 않다. 궁금한 건 포털 사이트 지식 창에 물어 봐, 라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얼른 검색을 해본다. 아니나 다를까 문자 피싱이다.

 

  이런 신종 사기 문자를 ‘스미싱’(Smishing)이라 한단다. SMS(Short Message Service)와 피싱(Phishing)의 합성어인데 안내장, 무료쿠폰, 요금 명세서 등의 문자로 가장해 첨부된 링크에 수신자가 접속하도록 해 돈을 빼가는 수법이다. 링크된 주소를 클릭하는 순간 악성 코드가 깔리고 소액 결제를 유도하는 메시지가 뜬단다.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만 걸려들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전자기기에 능숙한 젊은 세대들도 피해를 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바일 초대장이나 무료 쿠폰 문화 등에 익숙한데다, 이름도 그럴듯한 신제품 아이스크림 ‘악마의 쇼콜라’ 무료 시식권을 다운받으라는데 어찌 유혹당하지 않을 것인가.

 

 

  스미싱 피해 사례가 점점 늘어나는 건 그 수법 또한 날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한 방법에 대처할만하면 다른 기발한 방법으로 유혹한다. 깊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순간적으로 클릭을 유도하는 새롭고 희한한 문구들이 등장한다. 알고도 당하고 모르고도 속는다. 소액 결제 피해액이라 당하고도 귀찮아서 넘어가기도 하고, 요금 내역서를 제대로 보는 경우가 없으니 모르고도 지나는 경우도 제법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보다 그들의 교묘한 수법이 한 수 위이니 당분간은 스미싱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는 수상하거나 낯선 문자에 포함된 링크는 접속하지 않는 것이다. 혹시 그들의 낚시질에 휘둘렸다면 즉시 요금 결제를 막아달라고 통신사에 연락을 취하는 방법과 함께.

 

 

  

6. 행복 유예

 

  실로 다양화되고 다변화하는 시대이다. 한데 그 변화무쌍한 것들에도 일정 패턴이 있다. 한 해 발생한 트위터 문구 15억 건 이상을 모 소프트 회사에서 분석했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행동에는 시간대별로 일정 패턴이 있단다. 예를 들면 커피 마시는 시간은 물론 마시는 행위도 유형화할 수 있다. 하루 세 번 특정한 시간에 ‘커피’라는 말이 등장하고, 그 각각은 속성별로 모닝커피, 테이크아웃 커피, 카페 커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 마디로 수집 분석 된 자료는 우리에게 적절한 ‘때’를 알려준다. 데이터 중 흥미 있는 부분은 요일별 감성 지수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떤 요일에 기분이 가장 좋을까? 월요일 최악의 상태였다가 금요일로 갈수록 기분 좋음의 최절정 상태를 맞이한다. 그러다가 토요일 저녁부터 급격하게 우울 모드가 된다나. 월요일 해야 할 일이 생각나 느긋하게 휴일을 즐기지 못한다.

 

 

  연구에 의하면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우리만큼 걱정을 앞당기지는 않는다. 그들의 토요일은 우리의 그것에 비해 훨씬 즐겁다. 미리 걱정하는 우리 정서로는 금요일 저녁이 기분 좋음의 절정이다. 오죽하면 ‘불타는 금요일’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토요일 저녁만 되면 월요병이 소급되어 텔레비전도 제대로 시청하지 못한다. 심지어 일요일 저녁에는 외식조차 꺼리게 된다. 다음날 맞닥뜨릴 일거리가 걱정되어 최대한 움츠리게 된다.

 

 

  행복을 유예하는 것도 일종의 문화적 관습 같다. 서구사람들은 일 년 번 돈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소비할 것인가를 구상한다. 한 달 간의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일 년을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하루 삶의 무게만으로도 벅찬데 제 평생의 삶을 미리 얹어 걱정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 정도는 유예하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미뤄진 행복이 먼 훗날에는 온다는 보장이 있기는 하던가. 다음날의 안녕을 위해 휴일 정서까지 방해 받는 소시민들에게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너무 먼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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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8-13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더위에 무사하셨군요! 어쩐지 망망대해에서 등대 불빛을 만난 것 마냥 반가워서 흔적 남겨요.

장영희 선생의 글에서 저 문구를 보고 갸웃, 했더랬습니다. 살기를 바랐던 이가 죽기를 바라는 그 시점에서, 전 제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코요테 어글리의 자학 버전이랄까요. 이런 너를 사랑했다니 내가 미쳤다+이런 나를 사랑했다니 너도 만만치 않다 의 잡탕 이데아였던 것 같아요. 하긴, 남자의 긴 손가락에 반하는 능력을 잃은 지금에야 돌이켜 보며 괴상하게 웃을 뿐이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편리한 존재인듯 해요. 무슨 일에나 이유를 갖다붙일 수 있어서. 어쩌면 내가 바라본 이들은 정확하게 그들 인격 그대로를 보였을 뿐인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구나, 하고 팜므 느와르 님 친구분의 문자 메세지로 생각해 봅니다. 죽은 정자와 죽은 난자가 만나 죽은 아이를 만들어내기를 바라는 그런 일이요.

그런데 너무 더워요. 더워요. 더워요 ㅜㅜㅜㅜ 모쪼록 저처럼 더위먹지 마시고, 건강하셔야 해요.

다크아이즈 2013-08-13 16:37   좋아요 0 | URL
에뷔테른님 살아?!계셨군요. ㅋ 넘 더워서리... 안부 여쭙니다.^^*
확실히 장영희 선생 글은 반만 인용하셨더군요. 선생이 말하고 싶은 쪽으로만...ㅋ

아,에뷔테른 님다운 생각이에요. 대개 살기를 바랐던 이가 죽기를 바라는 게 사람 마음이거든요. 근데 자의식 강하거나 수치에 내공이 없던 순결한 영혼이라면 에뷔님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지나친 자학은 그 누구를 위해서도 도움 되지 않는다고 봐요. 차라리 치졸한 인간 본성 그대로를 내다본 공자님 말씀처럼 되는 게 더 인간적이라고 봅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 고유의 성질대로 존재하는 건 맞습니다. 보는이가 그것을 가공하고 확대하거나 때론 왜곡하거나 축소하는 거지요. 죄 있다면 타자가 아니라 제대로 못 본 자신인 거죠. 뭐. 살아낸다는 건 항상 힘겨운 투쟁입니다.

더울 땐 더더욱... 빨리 이 여름 지나가기를 바라고 바랄 뿐입니다. 테른님도 무사히 폭서의 강을 건너시길^^*

곰곰생각하는발 2013-08-1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구 사람들이 한 달 바캉스를 위해서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밑바탕에는 케어(복지) 시스템이 든든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무너지면 국가가 어느 정도 책임진다는 생각이 깔려 있죠. 그런데 한국은 아시다시피 모든 것은 개인이 해야 해요. 일본인들이 재난에 대처하는 자세를 보십시요. 담담하잖아요. 집이 떠내려가도 말이죠. 복지가 잘된 국가는 일종의 보험을 든 것과 같아요. 그래서 크게 울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집 떠내려가면 대성통곡을 해요.
왜 ? 국가는 개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죠. 경제 10위권 국가입니다.
그만큼 이윤이 남는데 이 이윤은 모두 몇몇 재벌들이 가지고 가죠. 세금은 모두 그들 이권 사업으로 들어갑니다. 복지로 들어가야 할 것을 말이죠. 아이고 하여튼 더운 이야길 했네요
시원한 이야길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무지막지하게 덥군요.

다크아이즈 2013-08-13 16:45   좋아요 0 | URL
이래서 제가 곰발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요.
복지시스템이 든든한, 한 마디로 조상 잘 만난 덕에 노후 걱정 안 해도 되는 그들 삶을 잠깐일도 엿보고 왔으면서도 단순한 기질 차이라고만 보려 한 제 시각을 깨뜨려 주시는... 감사합니다,곰발님^^*
보험 든든한 사람들은 실은 미래 걱정할 필요가 없죠. 가까운 예로 부부 교사 친구는 해외 여행 가도 심리적 위축이 덜 되지요. 퇴직후 육백만원? 정도 되는 연금이 보장되니까요. 하지만 일개 월급쟁이 아내인 저는 쫄 수밖에 없어요. 퇴직하면 뭐 먹고 사나 하는 걱정 때메 느긋할 수가 없는 거지요.
기질 상 걱정을 더하고 덜 하고도 있겠지만 확실히 미래 보장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나 없나에 따라 걱정의 순도치가 영향을 받겠네요.

오늘도 좋은 걸 가르쳐주신 곰발님, 더위 잘 견디시어요.^^*
 

 

 

   

1. 맏딸 콤플렉스

 

 

  ‘큰딸은 살림 밑천’이란 속담이 있다. 솔직히 한 번도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친정에서나 시댁에서나 오남매의 막내 입장이다 보니 맏이들이 느끼는 의무감이나 부담감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들이 느끼는 무게감 못지않게 막내들이 맛보는 피해의식이나 상실감 또한 크다고만 생각했다. 한데 맏딸 입장인 친구 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얼음주머니로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다.

 

 

  딸에 대한 서운함의 토로가 발단이었다. 내 입장은 오랜 만에 집에 온 동생 밥 한 끼 정도는 바쁜 엄마 대신 차려주고, 취직하면 동생 운동화 정도는 사 줄 수 있는 게 ‘누나’ 아니냐고 했다. 그들은 정색을 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딸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친정에서나 시댁에서나 맏딸 역할이 어떻다는 걸 알기에 그들은 맏딸더러 동생 밥을 챙기라거나, 농담으로라도 돈 벌면 동생 용돈 주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단다.

 

 

  가부장적 효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맏딸들은 자신들의 숙명을 익히 알고 있단다. 말하지 않아도 맏딸로서 느끼는 의무와 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단다. 하기야 큰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이야말로 얼마나 폭력적이고 위압적이던가. 살림 밑천이 될 수 있도록 맏딸은 집안의 조력자가 되어야 했다. 맏딸이 가정 경제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산업 현장에 뛰어 든 예는 흔해도, 맏딸을 위해 동생들이 희생정신을 발휘했다는 얘기는 드물다.

 

 

  나아졌다 해도 아직 우리 유전 인자 속에는 맏딸들에 대한 기대치가 있다. 개별자부터 그런 시각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심리적 부당함을 느끼고 저항하는 사회일수골 건강한 사회이다. 오히려 힘들고 지치고 억울해하면서도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시각에 갇혀 있는 맏딸들의 불행을 자처하는 고집이 문제이다. 그들이 행복하지 않은 심리적 압박을 가지게 된 건 사회 인식 탓이다. 맏딸로서의 의무만 강조한 채, 맏딸  콤플렉스를 심어 준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지금이라도 해야 할 일은 부당함은 함께 바꿔도 좋다고 설득하는 일이다. 이 무더위에 의무감과 강박에 시달리는 모든 맏딸들에게 응원을!

 

 

 

2.옳고 그름은 의심에서

 

 

  정민 선생이 쓴『오직 독서뿐』에는 옛사람 아홉 명의 독서 전략이 담겨 있다.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독서(학문)에 대한 선인들의 자세를 알 수 있다. 그 중 실학자 이익의 단상에 눈길이 간다. 성호사설을 비롯한 여러 저서 중에서 몇 가지 생각을 가져왔는데 통찰이 깊고 생각이 서늘하다. 정민 선생의 번역이 원체 군더더기가 없어서 그런지 한 눈에 쏙 들어온다.

 

 

  이익 선생은 학문은 반드시 의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의문 없는 학문은 내 것이 되어도 여물지가 않단다. 한 예로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의심이 생긴다나. 착한 사람은 너무 착하고, 악한 자는 너무 못됐단다. 역사책을 쓸 때 권선징악을 염두에 두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안타까워한다. 착하게 그려진 사람이야 당연하다 해도, 악한 사람이 원래 지독했겠냐고 흥분하신다. 실제로는 선함 속에 악이 있고, 악 가운데 선함이 있게 마련이라고 적었다.

 

 

  어디 역사에만 그럴 것인가. 모든 시시비비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기울어지는 쪽은 있어도 완전히 옳거나 아주 나쁜 건 없다. 시와 비, 선과 악은 언제나 함께 한다. 그런 시비와 선악이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니 학문하는 자는 끊임없이 의심(탐구)해야 한다. 선생의 비유에 의하면 복숭아나 살구를 먹을 때 살은 먹고 씨는 버린다. 반대로 개암이나 밤이 생기면 씨만 먹고 껍질은 버린다. 복숭아는 살이 맛있고, 개암은 씨가 고소하다는 걸 혀의 의심(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만약 혀가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밤 껍질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그대로 믿고야 만다.

 

 

  세상은 필연보다 우연이 관장할 때가 많고, 시비나 선악을 가릴 수 없을 때가 허다하다. 필연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하면 우리는 무딘 단정에 길들여지고, 우연의 가능성을 열어두면 날카로운 핵심이 보인다. 역사든 현상이든 진실에 닿는 어려움을 통찰하는 이익 선생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일은 놓인 형세가 가장 중요하고, 운의 좋고 나쁨이 그다음이며, 옳고 그름은 가장 아래이다.’

 

 

 

 

 

 

 

미술 정보 썸네일

 

  3. 이중섭의 아스파라거스

 

  <아름다운 열정 박수근·이중섭> 전이 한창이다. 경주 우양미술관이 기획전으로 한국 근·현대 미술 거장전을 마련했다. 동시대를 산 두 화가는 각각 서민들의 애환을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마티에르 기법이 우뚝한 박수근과 은지화로 개성을 구축한 이중섭은 한국의 미의식에 가장 맞닿은 작가군 중의 하나이다. 소박한 그림 속에 화가의 숨결이, 창작의 고뇌가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느낌이다.

 

 

  입체적이고 풍성한 이야기가 소설의 재미를 보장하듯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전시된 작품 중 유독 웃음과 슬픔과 짠함 등 복잡 미묘한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 있다.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그림엽서 한 점이었다.「사랑」이란 제목이 붙은 그림은 여자의 가늘고 긴 발이 남자의 사타구니 사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자의 오른발 붉은 발톱과 남자의 왼손 붉은 손은 닿을락 말락 부드러운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을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은 장난기와 진지함이 반반이다. 사랑의 진솔한 감정을 이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당연히 그림의 주인공은 이중섭과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였다.

 

 

  이중섭은 크고 긴 아내의 발을 ‘아스파라거스 군’이라 불렀고, 자신의 별호는 ‘아고리’라 칭했다. 생활고로 두 아이와 아내를 일본의 친정으로 보내야 했지만 누구보다 그들을 사랑했다. ‘아스파라거스 군이 춥지 않도록 두텁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아고리가 화를 낼 거요.’라고 아내의 발을 의인화해서 엽서에 적을 정도이다.

 

 

  당신을 사랑하오, 이런 말과 하트 하나를 그렸다면 아무리 깊어도 그 사랑은 얕게 보인다. 하지만 아내의 발을 아스파라거스라 애칭하며 그 발을 그렸다면 아무리 얕아 보여도 그 사랑은 깊다. 작은 그림 하나가 온몸으로 들어와 저 먼 우주를 적시는 느낌이랄까. 사랑이 오면 사랑한다고 말해선 안 된다. 다만 자기만의 ‘아스파라거스 군’을 만들 일이다. 물론 가난하고, 지친 자의 그것이 더한 감동을 주는 것은 당연할 테고.

                     

 

 

 

4. 절실하면 가식도 진심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인정의 욕구가 있다. 포만감으로 따뜻해진 배를 두드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SNS야말로 인간의 그런 욕구를 위한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그것의 속성은 ‘나를 알아봐 줘.’이다. 당연히 허세와 겉치레가 친구로 따른다. ‘스프링컴레인폴’ 카페에서 ‘새싹 곁들인 닭가슴살 샐러드’와 ‘두부 라이스’로 ‘브런치 타임’을 즐긴 것을 SNS에 올린들 내 삶의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현실은 개수대에 담긴 설거지거리와 바구니에 담긴 빨랫감들에 한숨짓는 내 모습이다. 나를 알리고 싶은 욕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그것들을 버리고, 과장된 일상일지라도 SNS에서 만이라도 자족감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일기장처럼 그곳에다 제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다. 별 생각 없이 걸러지지 않은 말을 내뱉을 경우 ‘무개념’의 좋은 표본이 된다. 유명인들이 구설에 오르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SNS에 올린 글 때문이 아니던가. 최근 모 뮤지컬에 출연 중인 배우도 곤혹을 치렀다. “사인회 싫어, 사인회 싫어. 공연 끝나고 피곤 피곤한데 방긋 웃음 지으며 ‘재미있게 보셨어요? 성함이?’ 방실방실, 얼굴 근육에 경련 난다.” 라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그곳에다 넋두리를 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사과하기에는 이미 늦다.

 

 

  누군가 말했다. 아마 퍼거슨 전 축구 감독이었을 게다.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고. 그 말에 완전 수긍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SNS는 필요악이나 계륵쯤은 된다. 과장된 자기 소개서와 진솔한 일기 사이의 그 무엇이 SNS이다. 그러니 절실하거나 위안이 되거든 SNS를 계속하라. 다만 하거들랑 진심인 것처럼 하자. 절실하면 가식도 진심이 된다. 기부 천사 콘셉트를 유지하는 연예인도 언젠가는 진심 천사가 되는 날이 온다. 징징대고 투덜대는 것보단 건전한 가식이 한결 낫다. 캔디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은 건 눈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남몰래 운만큼 남 앞에서 씩씩해지는 거다. 가식도 훈련하면 진심이 된다.

 

 

 

   

  5. 약자를 위한 연대

 

  아침방송에서 한 중견가수가 우스갯소리를 한다. 부부가 함께 늙는다는 것에 대해 진솔한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은 송해 씨란다. 아내 입장에서 보면 그는 구십 연세에도 돈을 벌어온다. 지방에서 녹화할 일이 많으니 집에서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을 일이 거의 없다. 귀가할 때에는 지역 특산물을 양손 가득 들고 온다나. 송해 씨도 잘 알고 있다는 이 유머를 처음 듣는 순간 너무 공감 되고 웃기는 거다. 이 기발한 얘기를 남편에게 재전달했더니 언제 적 이야긴데 이제 와 웃느냐고 한다. 자조 섞인 그 유머를 남자들끼리 주고받으며 씁쓸해한지 오래란다.

 

 

  남성연대의 상임대표가 한강 투신 이벤트를 벌이다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상대적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정부 지원금을 받으며 운영되는 여성부 및 각종 여성단체들을 상대로 무일푼으로 싸워왔단다. 시민들에게 호소해 모자란 일억의 활동비를 빌리고자 이런 이벤트를 벌였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남성연대의 시각이 모든 여성을 적으로 본 게 아니라 약자 여성을 배려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여성부가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듯 남성연대도 여성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연대의 대상으로 봐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여성부, 남성연대 이런 식으로 성 대결을 해가며 언쟁을 하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는다. 배려의 차원이라면 세상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지어지는 게 아니라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져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약자가 배려의 대상이어야 한다. 남자가 항상 강자이고 여자는 항상 약자인 세상도 아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무시당해도 좋을 이유가 없듯,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배려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여성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 남자의 권위가 살아있다곤 하지만 그 짐 역시 무겁기만 하다. 남자, 여자로서가 아닌 강자와 약자가 상생하는 게 조화로운 삶이다. 남성연대 성재기 대표의 실종 사건이 단순 해프닝이길 바라며 약자를 위한 연대가 늘어나는 세상이길 바란다.  (*안타깝게도 이 글이 완성된 뒤 언론을 통해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

 

 

 

호반새

 

  6. 육추(育雛)

 

  벗들이랑 계곡에 물놀이를 하러 갔다. 배려하고 솔선수범하는 마음들 모여 유쾌한 수다를 떨었다. 수다의 연장으로 산책하는 길에 재밌는 장면을 보았다. 장정 허벅지보다도 크고 긴 렌즈가 달린 카메라들이 일제히 한 나무를 가리키고 있다. 그 모습이 위압적이면서도 호기심이 인다. 말로만 듣던 단체 출사(出寫) 현장이다. 한데 무엇을 찍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호기심 많은 한 벗의 권유로 기어이 현장 구경을 하기로 한다.

 

 

  호반새의 육추 장면을 찍는 중이란다. 육추란 말 그대로 ‘새끼를 기르는 것’이다. 조류의 경우 그것은 어버이새가 새끼새를 위해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을 말한다. 호반새는 관심이 필요한 등급에 해당하는 귀한 새로, 그 화려한 자태 때문에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궁금해 하는 불청객을 위해 사진가들은 몇 시간을 기다려 찍은 호반새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단단하고 큰 부리부터 온통 주황빛인 호반새의 순간 포착 파노라마는 황홀경 그 자체였다.

 

 

  그들의 권유로 부모새가 둥지로 날아왔다 사라지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순식간이라 눈으로는 그 움직임의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카메라에 찍힌 어미 호반새는 살찐 비단개구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찰나의 손맛 그 짜릿함을 잊지 못해 사진가들은 조류 사진 찍기에 매료되나 보다. 새를 찍는 것은 돈이 생기는 것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날랜 새들을 순간 포착하는데서 작은 기쁨을 누릴 뿐이다. ‘새 관찰자’들은 그 단순한 자족을 위해 며칠씩 야영하는 수고를 감내한다. 그들에겐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자유의 시간이다.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자연은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먹이를 물어오고 받아먹는 새들의 입은 정직하다. 새를 찍는 그들은 그 자연에서 온갖 우주의 법칙을 발견한다. 일견 무의미하게 보이는 기다림의 짜릿한 미학, 육추의 순간을 포착하고 난 뒤의 저릿한 마음, 이런 숭고한 향연은 잠시나마 인간의 못된 분별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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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8-08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스엔에스와 남성연대에 대한 글은 참 좋군요. 균형을 잃지 않은 글인 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3-08-09 06:08   좋아요 0 | URL
곰발님, 진짜 좋은 글 쓰는 사람들은 균형을 잃지요ㅠ
균형을 놓아버림으로써 그 균질한 통찰에 이르더군요.

곰발님 글을 마음으로 필사하는 일인~~
덜 보챌 때 빨리 전국구 언계를 접수하시길.
기왕이면 소설계와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순오기 2013-08-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맏딸과 육추로 한편의 글이 멋진 완성이네요!
송해씨 유머에 백배공감,
요즘 혼자 사는 여자가 된 나를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며 이웃들이 부러워한답니다.ㅋㅋ

다크아이즈 2013-08-09 06:13   좋아요 0 | URL
하춘화 씨가 나와서 그 유머를 이야기하는데 저 입술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넘 웃어서.
송해 씨에 버금 가는 남편을 둔 순오기 언냐, 에헤라디여~~
저야말로 격주말 부부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부부다, 라고 외치는데
불경기라 그런지 출장도 없다는 ㅠ
전생에 좀 더 분발할 걸 ㅋ

단발머리 2013-08-10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중섭과 아내 이야기, 그림 너무 좋네요. 술술 풀어주시는 팜님 이야기도 좋구요.

"하지만 아내의 발을 아스파라거스라 애칭하며 그 발을 그렸다면 아무리 얕아 보여도 그 사랑은 깊다."

이 세상 사람 모두 깊은 사랑의 주인공이길 원하지만, 하트뿅뿅 그리는게 편하고 쉬우니까, 그냥 그렇게 사는것 같아요. 저두 그런 거 같구요.

이중섭 화가의 깊은 사랑에 느낀 점이 많아요.

다크아이즈 2013-08-12 01:32   좋아요 0 | URL
아스파라거스, 자신의 물건을 지그시 누르는 아내의 발...
이런 걸 표현하는 자야말로 예술가지요.
누구나 다 말하는 것, 누구나 다 그리는 것을 표현하는 건 ㅇㅖ술가가 아니라 생활인인 거지요.^^*

라로 2013-08-1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균형잡힌 멋진 글빨!!!!
최고에요~~~. 알라딘에 흥미를 잃을 때쯤 나타나셔서 저를 다시 알라딘에 묶어 놓으신 그 글빨~~~~. 언제나 고맙게 생각해요~~~. 모르셨죠!!!ㅎㅎㅎ

다크아이즈 2013-08-12 01:31   좋아요 0 | URL
균형 잡힌 글빨이라고 좋게 말해주시지만 저는 늘 모자람에 통탄할 지경이니 글이야말로 사랑을 얻는 것만큼 어렵다는 생각이 여전합니다.
알라딘이 좋은 점, 방치했다가도 찾아오면 그리운 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래도 꾸중 듣지 않고 탓하는 이 없다는 점. ~~~
오늘 하루도 아롬님 잘 출발하시어요.^^*

세실 2013-08-12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맏딸들이 성토하는 바람에 당황하셨지요~~~~ ㅋㅋ
sns에 대한 님의 생각. 공감합니다^^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하니 가식일수도....ㅎ
제가 카스를 하는 이유는 특별한 날의 기록을 적어놓고 잊을만하면 보는거죠.
보림이 맹장수술은 언제 했더라? 내가 제주도에는 언제 다녀왔지? 하면서......그런 면에서 카스가 좋아요^^

다크아이즈 2013-08-13 11:2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인생 공부 많이 했지요.
누구나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대상을 보는 경향이 있잖아요.
내 딸한테, 내 언니한테 나아가 이 세상 모든 맏언니들께 잘해야겠다는 반성문이 위의 글이라면 답이 될까요?
그나저나 너무 덥습니다. 오전부터 이래야 쓰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