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기고 구긴다
왼발을 삐끗했다. 밤길, 움푹 팬 아스팔트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해 발을 헛디뎠다. 창피한 것도 잠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둠 속 허방이야말로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하는. 밝을 때 길을 걷는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웅덩이나 돌부리가 보이더라도 건너뛰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건 조금 다르다. 잘 보이지 않아 허방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확률이 낮보다 높다.
허방 자체는 밝으나 어두우나 그 자리 그대로 있다. 하지만 허방이 제 가치를 발하려면 인간이 그 속에 제대로 빠져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둠의 조건이 낫다. 헛디디지 않기 위해선, 환할 때보다는 눈조리개를 더 열고 무릎이나 발목 관절도 더 굽혀야 한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삐딱한 시선과 뻣뻣한 관절로 밤길 걷다가는 허방 앞에서 제대로 고꾸라지고 만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밝은 면이 펼칠 때는 앞도 잘 보여 뻣뻣한 발걸음이라도 허방을 쉽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흐린 날에는 장막이 눈앞을 가려 웅덩이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럴수록 무릎관절을 꺾어 조심스런 행보를 해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말처럼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에 이를 수 있도록.
미숙한 관용을 지닐수록 타인에게 엄격한 발소리를 내기 쉽다. 뻣뻣한 그 소릴랑은 제 속을 향할 때 제격이다. 허방 앞에서 고꾸라지는 건 내 무릎을 덜 굽혔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선 조심조심 부드러운 발걸음이라야 발밑 웅덩이를 제대로 보게 된다. 원칙보다 나은 건 상식이고, 상식보다 나은 건 이해이다. 원칙을 들먹이며 핏대를 올리기보다 이해할 수 있겠다며 손 맞잡는 일이 내겐 더 필요하다. 멋진 시가 적힌 뻣뻣한 책으로는 현실이란 똥구멍을 닦을 수 없다. 밑바닥 깊숙한 그곳을 닦기 위해선 그 종이 찢어 구기고 구겨야 한다. 마침내 부들부들해진 그것이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갈 수 있을 때 진짜 시의 날들을 맞는 거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2. 풍경을 읊는 재미
문학적 눈썰미를 키우는 데는 사진만큼 좋은 것도 없다. 전혀 낯선 분야지만 맘에 드는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다 마침내 지층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사진 읽기의 정서를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정의했다. ‘스투디움’ 은 사진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일몰 사진을 보고 ‘햐, 기막힌 풍경이구나.’ 단순히 이렇게 느꼈다면 이는 스투디움에 속한다. 반대로 사진의 구름 모습에서 어릴 적 술이 취해 살아있는 뱀 대가리를 조여잡고 휘두르던 옆집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에 해당한다. 스투디움이 보편적 일반적인 정서라면 푼크툼은 특수성과 개별성의 요소를 지닌다. ‘나를 끊임없이 찔러대는 그 무엇’이 푼크툼의 정서이다.
롤랑바르트의 이 두 개념을 문학에서의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른 것으로 빗댄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기 위한 교훈으로 기능한다. 이 알레고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다. 이는 롤랑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한 스트디움의 정서에 가깝다. 반면 상징은 좀 더 다의적이고 개별적이다. 김춘수의 ‘꽃’은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독자 개별자에게 가닿아 폐부 깊숙한 ‘찌름’을 유발한 채 저마다의 꽃으로 재탄생 된다. 롤랑 바르트 식 ‘푼크툼’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예술과 알레고리라는 양끝에서 예술 쪽에 가까운 게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을 이처럼 이분법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맞춤한 예시이긴 하다. 내 식으로 덧붙이자면 예술 옆에 괄호 열고 ‘상징’이라고 쓰겠다. 교훈을 일삼는 오른쪽과 완전한 예술인 왼쪽 사이에서 왼쪽으로 치우치는 자리에 문학이 있다. 이 문학이란 매혹적인 노동 가치를 위해 오늘도 눈썰미를 키우는 중이다. 나만의 푼크툼과 상징체계가 온전히 나를 찔러주기를 바라면서.
3. 감정 동물 사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단언컨대’ 내가 아는 한 이성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이성을 지녔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보기보다 허술하고 솔직하며 단순한 동물이다. 이성이란 갑옷으로 아무리 무장을 해도 부지불식간에 감정이란 빨간 내복이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하고, 괴물은 본능을 관장한다. 그러면 그 중간인 인간은? 본능을 억제하는 순간적 능력이 뛰어난 동물일 뿐이다. 짐승은 아예 번민이 없고, 괴물은 타자로 하여금 번민을 유발할 때 인간은 그 번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본능 억제 능력이 영구적이 아니라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빙자할 뿐 결코 이성적인 동물은 못 된다. ‘감정’에 따라 자신의 이성을 정당화하는 조작적 능력이 뛰어난, 이성적인 체하는 피조물일 뿐이다.
그 책임은 하느님도 면키 어렵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하느님조차도 온전한 이성으로 세상과 인간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당신 기준으로 인간을 비롯한 세상 피조물들의 생사를 관장했다. 이성보다 당신의 감정에 따라 그 잣대를 들이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기준이란 것도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결코 완벽히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당신 닮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 하느님의 말씀은 솔직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흔히 ‘감정 섞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성이 항상 실천적 행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성적 판단은 결국 감정을 덜 섞는 타협으로 행동화될 뿐 이성 그 자체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착각한다. 나는 감정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다. 행불행을 관장하는 인간적인 단어, 그 이름 감정!
4. 이해와 소통을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다. 인문학 열풍을 타고 여기저기 좋은 강좌들이 넘쳐난다. 더 이상 의식주 해결만이 목적이 아닌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이 느꺼운 호사. 신나고 감사할 일이다. 내게 관심 있는 주제거나 입소문이 난 강사의 강의는 아무래도 눈여겨보게 된다. 바지런을 떨어 강연장을 찾을 때도, 메모했다가 텔레비전으로 시청할 때도 있다. 타이밍을 놓친 경우는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보게 된다. 내용에서 명약관화니 그 명성이 명불허전임을 맛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쩜 하나 같이 저리도 똑떨어지면서도 유쾌한 강의를 하는지.
사실 인문학 강좌라 해서 특별히 어려운 철학적 이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이나 학술을 위한 강의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한 목소리다 보니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쉽게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 인문학이란 게 결국 ‘소통과 이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에 소통과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실생활에서 나온 예시들만으로도 훨씬 공감도를 높일 수 있다. 사람답게 소통하고 이해하는 데는 인간 자체에 대한 경험적 사유가 필요한 것이지 거창한 이론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대중 강연에서 성공적 데뷔를 하는 일반인(?)들이 많다. 그 중 유명세를 타는 분 중에 김창옥 강사가 있다. 변변한 스펙조차 없이 ‘언변과 사람에 대한 이해’ 하나로 이 업계에 뛰어든 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의 미니 특강을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어떤 격조 높은 인문학 강좌 못지않게 울림을 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문학도 결국 소통과 이해와 공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깊게 파고들어 학문이란 미로로 이끄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고, 현실과 접목시켜 숨통 트게 하는 역할은 김창옥 같은, 이제는 전문 강사가 된 이들의 몫이 되어도 좋다. 노랫길 보다는 말길이 트여버린 그의 쉽고, 유머 깃든 말들의 향연 앞에서 너무 편안하게 ‘위로’라는 선물을 받아가는 게 어쩐지 미안해지는 하루다.
5. 케이크는 어떻게 나눌까?
사람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다르다. 부자는 부자의 논리에 따라, 빈자는 빈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 모순적 상황을 없앤 정의의 원칙으로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했다. 이를 ‘무지의 베일(the vail of ignorance)’이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거지일지 백만장자일지, 장애자일지 건장한 사람일지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계급장도 떼고, 지갑도 없앤 채 발가벗은 상태라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하게 될 최악의 상태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공정한 룰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된 합리적 생각은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지녀야 한다. 존 롤스는 이를 평등의 원칙과 차등 분배의 원칙으로 나누었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동동한 권리를 누린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균등한 기회 속에서라면 사회적 ․ 경제적인 차등 분배는 인정될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원칙이다. 단, 불평등의 전제조건으로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보장될 것’을 강조한다.
쉬운 예로 케이크를 어떻게 나누는 게 좋을까? 존 롤스의 답은 이렇다. “칼을 잡고 케이크를 나눈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남은 조각을 가지는 것이 정의다.” 칼자루 쥔 자가 케이크를 많이 가져가는 세상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가진 자들이 최소 수혜자, 즉 약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한다는 전제하의 차등 분배를 인정하겠다는 존 롤스의 이론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인간의 선택된 능력이나 조건이 우연의 산물이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는 게 존 롤스의 생각이다. 필연이 아닌 시대나 상황이 만들어준 ‘칼자루 쥔 자’는 자신의 케이크를 약자에게 좀 더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인간사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정의와 분배의 문제 때문에 누군가는 차디찬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찬바람 맞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 현실이니.
6. 소크라테스의 질문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아고라 광장에서, 지중해 바닷가에서, 또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격렬한 토론을 할 때 애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말을 문자로 생중계했다. 그것이 플라톤의『대화편』이다. 철학을 골방 깊숙한 사색의 장에서 본격적인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이끈 장본인이 소크라테스이다.
왜 철학이 거리로 나왔을까. 소크라테스의 주장 요지는 이렇다.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들판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건 더 이상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말을 문자로 기록한다면 그것 역시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보았던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지 못한 문자를 빌린 철학 방식은 소크라테스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플라톤이 스승의 말을 대화 형식으로 옮긴 건 스승을 따라 한 셈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을 흔히 대화법 또는 산파술이라 한다. 산파가 산모로 하여금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도록 돕듯이 소크라테스는 대화상대자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질문하는 형식을 취했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답을 내놓는 자가 아니라 오직 질문하는 자였다. 가르치려는 자가 아니라 질문으로써 답을 숨기는 자였다.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대화 상대자가 제 모순에 빠져 우물쭈물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당혹감과 혼란에 빠진 상대방은 지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입만 바라본다. 결론을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답을 내놓을 리 없다. 찜찜한 미완의 숙제만 떠안은 채 뚜렷한 결론 없이 대화는 마감되고 만다.
해결되지 않고 끝난 문제, 이것을 철학 용어로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단다.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인데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어준다. 통로 없는 그 지점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 이유도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대화의 막장까지 내려가 봐도 속 시원한 출구가 보이는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 지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