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속의 던적스러움

 

  ‘작은 패거리’에 속하려면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그건 그룹이 은연중에 내세우는 수칙 가운데 하나로, 그 해에 베르뒤랭 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부인 말처럼 ‘그토록 바그너를 멋지게 연주할 수는 없다!’ 거나, 플랑테나 루빈슈타인 ‘저리 가라 싶게’ 연주한다는 평가에 따라야만 했고, 또 코타르 박사가 내린 진단이 포탱 박사를 능가한다는 점을 수긍해야만 했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의 사랑」도입부에 나오는 말이다.

 

 

  프루스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까지 귀족 문화가 건재했던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는 살롱 모임이 유행했다. 위에 나오는 베르뒤랭 같은 유한마담이 주로 파티의 주관자였는데, 장소도 제공하고, 물주도 되면서, 참석자까지 선별했다. 시쳇말로 ‘오야붕 마음대로’ 마담 역할을 수행했다. 교양 있는 모임도 많았지만 패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그룹에서는 은근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곤 했던 곳이 살롱의 마담 자리였다.

 

 

  놓인 숟가락만 차지하면 되는 손님 입장에서는 베르뒤랭이 주도하는 패거리 분위기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부인의 드넓은 드레스 폭 한 자락을 잡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맘 깊이 안도하게 된다. 사람이 모이면 으레 편을 만들게 되는데, 권력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든 가진 자 위주로 재편된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이 결속감을 가지려면 거기에 걸맞은 적이 있어야 한다. 합치고 뭉치는 이면에는 ‘우리가 남이가’란 정서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결속을 위해서라면 없는 적도 만들어 내야 한다. 적이 없으면 뭉칠 이유가 없다. ‘끼리끼리’ 정서가 유지되는 최고의 비결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되기 두려운 우리는 오늘도 베르뒤랭 부인이 주최한 테이블에 앉아 그저 그런 피아니스트를 향해 휘파람 곁들인 환호를 보내고, 별 하자 없는 포탱 박사의 진단서에 이러쿵저러쿵 의문을 단다. ‘건전한 남’보다 ‘음험한 우리’가 주는 결속의 쾌감을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양심을 팔아 산 그 쾌락이 돌아서면 고대 환멸로 남을 것을 알면서도.

 

 

 

 

 

 

2. 흔들리지 않는 지침서

 

  주대환의 신간『좌파 논어』는 술술 읽힌다. 논어를 해체해 저자의 입맛에 맞게 재편했다. 498장 모두를 해석한 게 아니라 149장만을 골라서 해석했다. 저자의 그간 행보에 어울리게 전통적 해석과는 사뭇 다른 진보적 시각의 해석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기록에 남아있는 공자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난 시각을 견지하는 건 아니다. 조금은 알고 있는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과 학자로서의 자세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고 있어 금세 읽힌다.

 

 

저자가 안내하는 것처럼 공자는 당대 사람들에게 존경과 추앙만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절대적 인품을 보유해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배신도 당하고 비난도 받았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 험한 꼴을 자초하기도 하고 멸시도 당했다. 정치판에 기웃대다 비웃음을 사기도 했고 관계 맺기에 서툴러 헛발질도 일삼았다. 한마디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보를 한 이가 공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살이의 본질이 바뀐 건 아니다. 따라서 공자의 일상적 삶의 생각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공자가 위대한 것은 훌륭한 인품을 지녀서가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가치관이 시대를 떠나 보편타당한 깊이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건 성현들이나 나나 같은데, 그들은 자기 성찰적 사유를 남기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시간만 축낸다. 우리가 성현들을 존경하는 건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제대로 내기 때문이다. 공자 또한 그런 좋은 예이다.

 

 

  가장 보수적인 ‘논어’를 가장 진보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작가의 독창적 시도가 신선하다. 논어가 일반 독자에게 학문적 깊이를 강요하는 수단이 될 이유는 없다. 작가의 말대로 논어는 연대의 언어이다. 공자는 주저함이 없이 당을 만들었다. 인과 예가 그 강령이고 진성당원으로 군자라는 캐릭터를 구축했다. 서로 의지하고 격려해야 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끼리 지켜야 할 인예(仁禮)의 지침서인 논어, 다양하게 해석될수록 독자로서는 덤을 얻는 기분이다.

 

 

 

 

 

 

 

 

 

 

 

 

 

 

 

 

 

 

 

 

  3. 말의 외연

 

  공자의 언행 및 주변 문객과의 대화를 수록한 책이 『공자가어』이다. 거기의 한 장면. 초나라 공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활을 잃어버렸다. 신하들이 급히 나서 활을 찾으려 했다. 왕은 도리어 느긋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만둬라. 어차피 초나라 사람이 주울 것 아니냐. 훗날 이 일화를 들은 공자의 반응은 이랬다. 왕이 한 말에서 ‘초나라’를 뺐으면 좋았을 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사람이 주울 것이다, 라고 했다면 더 훌륭했을 걸.

 

 

  잃어버린 활을 대하는 초나라 공왕은 그 자세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하다. 평소 공왕이 지녔던 백성에 대한 기본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좋은 임금은 언제나 자신을 넘어선다.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 국가의 안위를 위해, 백성의 사기진작을 위해 그래서도 안 되지만 - 자신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백성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줄 안다. 왕 없는 백성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 없는 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화살에 대한 공왕의 가르침의 크기도 공자의 덧붙임 말에 비하면 약소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다스리는 초나라 사람들에게만 호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자의 생각 그릇은 초나라 사람을 넘어선 ‘사람’ 자체를 다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면 흥미 있는 기록 하나가 더 있다. 공자의 말에 이은 노자의 주석은 이러했다. 공자의 말에서 ‘사람’마저 빼는 게 더 낫겠다고. 그렇다. 잃으면 줍는다. 노자는 공왕과 공자를 뛰어 넘었다. 나라와 사람을 건너 천지우주를 보듬은 것이다.

 

 

  말은 곧 사람이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는 도구이다. 한 마디 말에도 그 사람이 드러난다. 실천적 행동으로 말을 말을 증명하는 사람들은 온전한 신뢰를 얻는다. 큰 사람은 넓게 말하고 크게 아우를 줄 안다. 아무리 정의를 외쳐도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면 잘 말한다고 할 수 없다. 내 것을 위해, 내 앞의 이익을 위해 큰 소리를 내는 것보다 전체를 위해, 모두의 화합을 위해 낮은 목소리로 조근거리는 것이 훨씬 나은 말의 사용법이다. 그걸 알면서도 말의 외연을 확장하지 못해 스스로에게 종주먹만 날리는 날들이다.

 

 

 

 

 

 

 

4. 천성으로 착한 이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는 자기 긍정 지수도 높다. 대개 천성이 밝고 명랑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앞뒤 재는 것이 없고, 이것저것 따지려하지도 않는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타자의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약점보다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해낸다. 언제나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한다. 비도적인 것이 아니고, 악행과 거리를 두기만 했다면 그 어떤 것과도 친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순정한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 곁에 있으면 인간사 갈등도 피할 수 있고, 괜히 흰소리나 낸 건 아닐까 하는 자기검열에서도 자유롭다. 긍정지수가 높은 이들은 타자와의 차이에 민감하지 않거나, 그 차이를 인정하는 선천적 센스가 장착된 사람들이다.

 

 

  새치름한 자만심도 분주한 이기심도 없는 그들 곁에 있으면 착하게 사는 게 얼마나 대단한 장점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건전한(?) 방식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믿는다.) 살인자도 강도도 그런 생각에서 멀지 않다. 그렇기에 누군가 제 삶의 리듬에 끼어들거나, 섣부른 충고라도 하게 되면 그것을 잔소리로 받아들이기 십상이다. 치명적인 실수를 했거나 기본적인 도리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닌데도, 충고자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고 그것을 따르기를 바라면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라 해도 듣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언짢고 부담스럽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관이 같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치관은 평생을 통해 시나브로 내 안으로 스며든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그 어떤 방해꾼이 나타나더라도 자신이 가진 장점인 천성의 착함을 급격하게 버리지는 않는다. 악행을 일삼는 이가 하루아침에 제 기질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들은 타자보다는 자신에 솔직하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 진솔하리만큼 객관화한다. 실수는 하되 그것을 곧장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한다. 말하기 전에 먼저 듣기를 즐기고, 약속한 것은 핑계 없이 지키려한다. 학습이 아니라 천성으로 타자와의 차이를 받아들인다. 진심으로 사람 사이의 차이를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처럼 될 수 없다면 그들 반만이라도 따라잡자,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5. 시간의 상대성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간다. 벌써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려 한다. 이렇게 쓰는 내 마음이야말로 시간의 노예라는 증거다. 시간을 느긋하게 대하고 있었다면 ‘올해의 절반이 지나려면 멀었네. 이 정도면 괜찮아. 뭔가 해야 할 시간이 아직은 충분한데.’ 이런 맘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게 본심이다 보니 저런 긍정의 태도가 나올 리 없다. 대개의 사람들이 시간에 내몰리며 살아간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확고한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시간에 휘둘려 허둥대는 것만은 분명한 이 아이러니.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제대로 부릴 줄 아는, 확신 서린 자기 관리법이 대견하게 보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시간을 부릴 줄 안다고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시간 관리를 철저하게 할수록 가장 확실한 시간의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한 시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강박이 시간을 시간 그대로 놔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그 아까운 시간에 뭔가를 프로그램화하고 스스로 만족도를 얻어야 한다는 압박을 자초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시간을 제대로 부린다 해도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될 뿐이다. 거기엔 즐기는 시간이 없고, 해결해야 할 시간만 남는다. 잘하는 자 즐기는 자만 못한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시간 없다고 말하는 건 진짜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기화해서 즐길 제대로 된 시간’을 찾지 못한 자기연민과 습관성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미녀에게 구애할 때는 한 시간이 일초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철판에 앉아 있을 때는 일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상대성이다.’ 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시간의 상대성은 시간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데서 출발한다. 시간 없다고 징징 대기에 앞서 시간을 자유롭게 풀었다 조였다 하는 마음 여유부터 찾아야겠다. 당장 달라지기는 힘들겠지만.

 

 

 

 

 

 

6. 운세의 심리학

 

  신문이나 잡지 한 귀퉁이를 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것이 있다. 한 수 더 떠 요즘은 전화 한 통에 사주나 운세를 봐준다는 광고가 실릴 정도이다. 사주나 운세 등에 관한 기사나 광고 등이 예삿일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거기에 의존한다는 말도 된다. 우리 전통 문화의 토양이 사주나 운세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도 이런 현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운세나 혈액형으로 보는 성격 유형 등에 나오는 서술 내용은 사실 변별력이 거의 없다. 대개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이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바넘 효과 (Barnum effect)라 한다.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특징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학생들에게 각각의 성격 테스트를 한 뒤, 결과와는 상관없이 똑 같은 내용의 결과지를 나누어준다. 그것을 모르는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테스트 결과가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대답한다. 사람에게 있는 보편적 특성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각종 점술은 바넘 효과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불안한 심리 상태의 내방자는 이미 상담자가 들려주는 얘기를 믿을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상태에서 막연하고 일반적인 특성이나 확률적으로 높은 사항을 묘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특징이 있다는 사실은 인식할 겨를이 없고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만다. 더구나 그런 보편적 얘기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좋은 것들이라면 그것을 정당화하는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운세 서비스나 점술 등에 의지하는 게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합리적 대안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한 현대인들은 자신을 맡기고 조력을 구할 만한 데가 없기 때문이다. 단, 유명 철학관이니 족집게 점집이니를 찾아다니는 우리들 불안의 행보도 바넘 효과의 진실을 인식하는 선이라면 과하지 않다는 뜻이다.

 

 

 

 

 

 

  

7. 인권 수난 시대

 

  문명은 발달하고 문화는 확장 되어간다. 지구촌 한마당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니 편 내 편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게 현대 사회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늘 변화가 요구된다. 거기에 맞춰 지적 ․ 물적 토대 역시 날로 풍성해진다.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허울 좋은 꽃일 뿐이다.

 

 

  풍요의 노래가 넘쳐날수록 환희의 축포가 터질수록 그 이면에 인권유린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인권 유린은 자연 재해 앞에서 인재 앞에서 사고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일어난다. 불가항력의 산사태로 생겨난 주검들, 뒤집어져가는 여객선 안에서 고통으로 끝내 생을 마감한 영혼들, 납치와 폭력 앞에 고스란히 숨죽일 수밖에 없는 어린 여학생들. 어쩜 그리 인권이란 보호의 보자기는 약자와 여성들만을 잘도 알고 피해 가는지.

 

 

  실시간으로 중계해주는 지구촌 뉴스를 대하다 보면 우리 인류의 미래가 밝기만을 바라는 건 지나친 희망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수단에서는 개종 및 배교를 했다는 이유로 임신 중인 여성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삼일 간의 개종 시간을 부여했는데도 이슬람교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교수형에 처해 마땅하다는 논리다. 기독교 남성과 결혼한 여동생이 배교했다며 오빠가 당국에 고발하고 처벌을 원했다. 이슬람 율법 샤리아에 따르면 아버지가 무슬림이면 자식인 딸도 같은 종교여야 한다. 나이지리아의 무장 단체 보코 하람의 여학생 단체 납치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우울한 얘기들만 들려오니 망연자실해질 뿐이다. 삼백여 명에 이르는 어린 여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열망과 힘이 없었다는 두 가지 이유만으로 죄 없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있다.

 

 

  인권 침해는 약자들이 그 표적의 대상이 된다. 가진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당당한 자들보다는 소심한 이들에게,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수난의 화살이 꽂힌다. 가진 것 없고 힘없다고 인권 또한 없는 건 아닌데 왜 이런 일이 되풀이 되는지 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8. 기억이라는 고통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나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자의식과잉이란 파도에 휩쓸리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다. 던적스럽게 달라붙는 오염된 해초 같은 일상의 찌꺼기, 시도 때도 없이 증식하는 감염된 치어 같은 잡념들. 스스로를 괴롭히는 그 물결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쓸 수 있다. 자의식의 바다에서 눈물콧물 범벅인 채 가쁜 숨을 내쉬기만 하면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흔들리되 평정심을 유지할 것, 힘들어도 유머를 잃지 않을 것, 연민을 품되 객관적 시선을 확보할 것. - 프리모 레비의『이것이 인간인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이 세 가지로 정의해보았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레비는 운이 좋았다. 화학 전공자였기에 죽음의 가스실 대신 실험실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을 지녔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기록했다. 악몽 같은 수용소의 기억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그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을 기록 문학으로 남겼다.

 

 

  홀로코스트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그는 무조건 분노하거나 적개심을 드러내는 않는다. 그저 갇힌 자들의 운명에 대해 동지적 연민으로 관찰하고 묘사했다. 인간 심연 깊숙한 본질에 대해 사색하고 통찰했다. 극한 상황에서 얼음 칼 같은 문장을 조각한 프리모 레비의 문장을 보면서 절망한다. 서늘한 칼날이 심장을 파고드는 순간 피톨이 뛰쳐나와 수만 송이 장미꽃으로 피어오르는 이 느낌. 차디찬 칼날로 벼린 기억의 고통을 수만 송이 장미꽃으로 피워내는 레비의 힘, 자의식을 제대로 제어한 그의 문장으로 내 오월의 허기를 채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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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4-05-23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정말 팜님 책상은 9첩 진수성찬이예요.
매일 편식만 일삼는 저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신랑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시리즈를 샀는데, 저는 쳐다도 안 봤거든요.
님 리뷰 읽고 나니 저도 시작해볼까, 그런 마음이 드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다크아이즈 2014-05-24 08:09   좋아요 0 | URL
단발님, 스완의 사랑 편, 섬세하게 읽으니 무지 재밌네요.
프루스트는 상남자가 아니라 결 고운 여자 스똬일이에요.
들은 이야기로, 기억에 의지해서 이토록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을 건져내다니요.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제대로 보이네요.
책에 관한한 저도 편식주의자입니다.ㅋ

페크pek0501 2014-05-2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님의 재주는 여전하고!!!
공감 수가 많은 것도 여전하고!!!

아, 저는 오월의 허기를 어떤 책으로 채울까요?

다크아이즈 2014-05-24 08:09   좋아요 0 | URL
시간에 쫓길수록 공포에 가까운 허기 - 쉬 내려놓지 못하는 욕망의 들끓음. 누가 찬물을 끼얹든지, 그 들끓음 속으로 스스로 빠지든지. 이도 저도 아니니 쫓기면서 허기만 남는다는... 부디 페크님은 평안하소서 ^^*


성에 2014-08-17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 >,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는 때때로 ' 나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게 편해'
라고 생각해요, 나쁜 짓을 하려면 온갖 머리를 굴리고 힘을 쓰고 하는게
귀찮고 마음이 불편할텐데 그게 나로선 안 되는거지요.
그래서 때로 내게도 ' 동기유발 '---이란게 생기면 평소 순하고 착한데서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럭비공이 되는거죠. 거기까지의 통제가 자신이 없어요.

팜므님 정말 책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모든 글이 내게 의미있게 다가오는데
그 중 하나만 썼어요. 공자님의 시대를 초월한 보편타당한 사유의 기록,
인과 예의 강령으로 이루어진 군자당, 이런 새로운 시각도 인상 깊습니다.

오늘도 톡톡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다크아이즈 2014-08-19 09:35   좋아요 0 | URL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삶의 철학이 담백하지 못합니다.
어쩐지 찌질하고, 확실히 다혈질이며, 언제나 쪼개지기 쉽고, 자주 옹졸하며...
그래도, 그래도 단단히 견딥니다.
성에님도 잘 지내시지요?

라로 2014-08-19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저저는,,,천성적으로 착한 사람 같아요;;;;;(이 글 써놓고 다른 댓글 달 염치가 없다는;;;;ㅎㅎㅎㅎㅎ후다닥3=3=3===3=33===3==3333333)

다크아이즈 2014-08-19 09:32   좋아요 0 | URL
4번 페이퍼가 아롬님을 맘에 두고 쓴 건 줄 어찌 아셨단 말입니까! ㅋㅋ
 

 

 

 

  

 

 

 

 

 

 

 

 

 

 

 

 

 

 

 

1. 너무 쉬운 효도법

 

  엄마가 아는 최고의 회는 붕장어회이다. 젊은 날 부산의 당신 언니네서 먹은 첫 회가 소위 ‘아나고’라 불리는 붕장어였다. 추억 또는 회한으로 버무린 그 맛을 잊지 못한 나머지 엄마는 그 회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 나는 걸로 아신다. 다른 회를 잘 먹어보지 않은 엄마만의 기준으로는 아나고야말로 으뜸 회가 되는 셈이다.

 

 

  뼈를 발라내 부드러워진 붕장어를 탈수기에 돌리면 꼬들꼬들해진다. 그것을 초고추장에 버무려 야채에 싸서 먹는데 엄마 입에는 그보다 더한 천하일미가 따로 없다. 회 종류도 잘 모르고, 회 각각의 고유 맛도 구분할 줄 모르는 나는 엄마의 그 서민적 미감을 ‘익숙한 것에 대한 찬양’의 입맛 정도로 치부하곤 한다. 다만 한 대상의 본질과 주관적 느낌은 다를 수 있다는 걸 ‘엄마의 아나고 회’를 통해서 깨칠 뿐이다. 한 주체가 애정을 느끼는 그 무엇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사자에겐 충분한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다.

 

 

  연휴를 맞아 엄마한테 들렀다. 효도하는데 창의성을 발휘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어쩜 해마다 그리 똑 같은 매뉴얼의 효도법만 떠오르는지. 출발 전, 바닷가 시장에 들렀을 때 엄마께 뭘 드시고 싶으냐고 물었다. 엄마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나고 회 한 접시’면 된다고 했다. ‘할마시 과부’가 된, 평소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는 이웃들과 함께 나눠 드실 거란다. 회 종류가 얼마나 다양하며 맛난 회가 얼마나 많은데 그것만 찾느냐고 핀잔을 해보지만 회에 대한 엄마의 취향은 요지부동이다.

 

 

  마루에서 예의 할마시들과 윷놀이를 하다말고 엄마는 우리 네 식구를 맞았다. 앉은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얼른 시댁에 가서 효도나 하라며 다그친다. 당신은 건강한데다 이웃과 이토록 재미시리 지내니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챙기는 게 도리란다. 나는 안다. 건강하다고 큰소리치지만,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엄마도 실은 성당에 갈 때 지팡이 없이는 안 되고, 그나마 도중에 서너 번은 쉬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이 나이에 큰 병 없고, 자식 우애 있고, 정 낼 이웃이 있으니 더 바랄 게 무어냐’고 진심으로 말씀하신다.

 

 

  사위가 건넨, 알량한 용돈을 그나마 절반 뚝 떼 한사코 마다하는 아이들 주머니에 다시 챙겨 넣는 호호백발의 엄마. 우리 네 식구 탄 차가 골목을 꺾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점 소실점으로 서있는 엄마.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참으며 나는 기어이 ‘아나고 회, 다 식겠다, 얼른 들어가셔!’ 라고 냅다 소리나 지른다. 깊은 손사래가 있는 흔들림 없는 모성 앞에서 이토록 흔하고 뻔해빠진 아나고 회 같은 효도법이라니!

 

 

 

     

 

   2. 빨간 셔츠와 갈색 바지

 

  망망대해, 외항선이 파도를 헤치며 나아간다. 해적선 한 척이 나타나 그 배를 포위한다. 선원들이 허둥댈 때 선장이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위엄을 잃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라고 말한다. 빨간 셔츠를 입은 선장은 선원들과 힘을 합쳐 배에 오르려는 해적들에 맞선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선원들이 생기긴 했지만 무사히 해적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며칠 뒤 망루에 있던 파수꾼이 이번엔 두 척의 해적선이 나타났다고 외친다. 공포에 질린 선원들은 몸을 웅크려 숨을 곳만 찾았다. 선장이 예의 위엄을 갖춘 채 소리쳤다.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 저번에 비해 사상자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날 밤 갑판에 나온 선장과 선원들은 별을 바라보며 승리를 자축했다. 존경에 찬 낯빛으로 누군가 선장에게 물었다. “왜 빨간 셔츠를 입으시는 겁니까?” 선장만이 지을 수 있는 위엄한 표정으로 그가 답했다. “빨간색 셔츠를 입으면 부상으로 피를 흘려도 들키지 않는다. 그러면 너희도 두려움 없이 싸움을 할 수 있지 않느냐.” 선원들은 선장에 대한 자신들의 신뢰가 헛되지 않은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다음날 새벽 이번엔 해적선이 떼거지로 몰려왔다. 모두 열 척이었다. 선원들은 당황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빨간 셔츠’의 용감한 선장이 있지 않은가. 침착하게 선장의 지시만 기다렸다. 드디어 선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갈색 바지를 가지고 오라!”

 

 

   비교적 평화 또는 약간의 위험 상태에서는 누구나 본심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다급할 때 그 본심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약하고 비겁하며 위선에 가득 찬 경우라면 저부터 살기 위해 갈색 바지를 찾을 것이고, 원래 강하고 정의로우며 참된 길을 도모하는 경우라면 끝까지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고 명할 것이다. 갈색 바지를 숨기고 있으면서 빨간 셔츠를 잘도 말하는 곳, 뼈아픈 참사 이면을 들여다보면 곳곳이 이런 현상들로 얽혀 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인 걸 어쩌란 말이냐.

 

 

 

 

 

 

 

3. 풍경의 우호성

 

  누구나 자신이 보는 대로 느끼고 자기가 경험한 대로 생각한다. 따라서 누군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기록한 것이 다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느낌의 진정성까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특히 모든 이국적 시선은 진실과는 별개로 신선한 시각이 될 수는 있다.

 

 

  펄 벅 여사는 우리나라를 무한 애정의 시각으로 바라본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작가의 장편『살아있는 갈대』는 그 좋은 예이다. 구한말에서 해방될 때까지 한국의 근대사를 살아간 4대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외국인의 시선에 비친 우리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0년대 초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 차 우리나라를 방문한 작가의 에피소드 한 자락이 자못 흥미롭다.

 

 

  여사는 지프를 타고 경주 안강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황혼녘 지게에 볏단을 가득 진 농부가 역시 볏가리를 잔뜩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묵묵히 들길을 가더란다. 미국인 시각으로 봤을 땐 농부가 무겁게 지게를 질 게 아니라 달구지에 짐을 다 싣고 편하게 소잔등에 올라타 채찍이나 휘둘러야 상식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농부는 소와 짐을 사이좋게 나눈 채 나란히 들길을 가고 있었으니 여사 눈에는 그것이 무척 신기하게 보였나 보다. 여사는 그 한 장면을 보고 급기야 ‘고상한 국민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격찬까지 하게 된다. 여사의 우리나라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우호적인 시선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사실 그 목가적 풍경이 ‘고상한 국민적 정서’와 그리 큰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드넓은 땅에다 도로 사정이 좋은 그들 입장에서는 마차에다 곡식과 사람이 동시에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말 달구지도 아니고 소달구지인데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은 우리 입장에서는 볏짐을 하나라도 더 옮기기 위해서 농부도 지게를 질 수밖에 없다. 거창하게 자연이나 동물과 공생하겠다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구한말의 농부는 주어진 환경에 맞는 행동 패턴을 취했을 뿐이다. 그것이 작가의 눈에 신선하게 비춰졌을 뿐이다.

 

 

  ‘마차(carriage - 이 경우 이 단어가 맞는지 모르겠다)의 경험’을 가진 눈이 ‘소달구지(oxcart)의 풍경’을 보고 한없이 낭만적 우호성을 펼쳐 보이는 것. 문학이나 예술이 과장된 희망이나 과도한 서정을 조장해서는 안 되겠지만 가끔 이런 대책없고 무한정으로 따스한 눈길이 싫지는 않다. 모두 지쳐 있는 요즘 대한민국 상황이라면 더더욱.

 

 

 

 

 

4. 주는 만큼 받는 상처

 

  사람들을 만나면 의외로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만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쉽게 주고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사람 관계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건 여러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사람 사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다만 개인적인 좋고 나쁨이 있을 뿐이다. 그가 옳고 그른지는 사실 나와 무관하다. 호의적인 그가 좋게 느껴지면 그 사람은 내게 좋은 사람이다. 비호감인 그가 미우면 그 사람은 내게 나쁜 사람이 될 뿐이다. 만인에게 좋은 사람도 없고, 만인에게 나쁜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찍이 심리학자들은 모든 이를 사랑하겠다거나, 모든 사람에게서 인정받겠다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친구가 삼겹살집을 차렸다 치자. 내게 호의적인 그미를 위해 나는 신발 벗고 나설 수 있다. 그미 가게의 번창을 위한 것이라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다른 친구들과 일부러 시간을 내 삼겹살을 먹으러 가고, 반상회에 나가 적극적인 입소문도 내준다. 생고기인지 냉동고기인지, 맛은 좋은지 나쁜지, 국내산인지 수입산인지 등은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미에게 필요한 것은 미주알고주알 맛 판별하는 맛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자신의 사업을 응원해줄 친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만약 삼겹살집을 차린 이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미의 가게에 발을 내딛기는커녕 신경조차 쓰고 싶지 않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되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 보다 깊은 아픔은 없다고 스스로를 결박한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타인에게 상처 준만큼 내가 그 상처를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받은 상처는 가슴팍에 착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지만, 준 상처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사람이다. 따라서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치유법은 내가 받은 상처로 아파하는 만큼 내가 준 상처로 누군가 아파하고 있겠구나, 하는 셈법을 잊지 않는 것.

 

 

 

 

 

 

  5. 후하다는 것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은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데는 서투른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호의를 얻을 자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신선함을 느끼면서도 혼란스러움을 맛보게 해주는 말이다.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답게 몽테뉴가 대단한 통찰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신선하고,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그의 시선이 어딘지 삐딱하게 보인다는 면에선 혼란스럽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후자는 판단유보해도 되겠다. 내가 잠시 혼란을 느낀 것은 내 통찰력이 위대한 사상가에는 터무니없이 못 미쳤기 때문이란 걸 알겠다. 인간의 다양한 속성을 자유자재로 파악한, 불편한 진실을 꿰뚫은 그의 눈길 앞에서 다만 뜨끔해질 뿐이다.

 

 

  천성 깊숙이 선한 사람들은 태생적 유전자가 ‘주책없이 후하게’ 굴도록 설계된 자들이다. 호의나 베풂은 그들의 자연스런 친구이다. 진심에서 오는 그 호의가 서툰 것인지 영악한 것인지 그들은 생각조차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좋아서 나눔을 실천할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일부의 시선이다. 호의를 베푸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잠시다. 간사한 게 사람인지라 그 다음의 호의가 이전만 못하거나, 기대하는 호의에 다음 것이 못 미치면 이내 실망하고 의심한다. 몽테뉴의 다음 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받아버린 것은 이미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은 앞으로 후대 받을 것밖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왕은 남에게 주다가 줄 것이 없어질수록 그만큼 심복을 잃는다.”

 

 

  받는 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그 유효 기간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지나친 베풂은 사람들로 하여금 후대를 기약하게 하고, 그럼에도 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선행을 하리라는 것. 한편으로는 호의를 기대하는 그 사람들을 잃을까, 주는 것조차 조절해야 하는 군주까지 있게 된다는 무섭고 서늘한 통찰. 몽테뉴의 저 한 마디는 순한 사람과 탐욕스런 사람이 함께 살아가도록 운명적으로 조직화된 게 인간사라는 것을 깊숙한 찌름으로 보여주고 있다.

 

 

 

 

 

 

  6. 이 봄날

 

  온 나라가 슬픔의 도가니다. 며칠 째 집단 우울에 감염된 사람들로 넘쳐난다. 직접 고통을 당한 분들에 비할까만 근래에 이토록 안타까움과 갑갑함에 절망해본 적도 없다. 세탁소 옷걸이에 걸려 있는 실종 학생들의 교복들. 며칠 째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처연한 그것을 방송사 카메라가 클로즈업한다. 말없이 비춰주는 그 장면만으로도 또 눈시울이 붉어진다. 슬픔을 덜어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일부러 과장된 명랑을 낯빛에 심는다. 독서모임이 있는 날이다. 자유 토론에 들어가면 오늘도 어김없이 눈물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 웃음을 되찾을 묘안을 짜본다. 애송시 낭송 대회를 열기로 한다. 떨어지는 봄꽃에게도, 날아드는 꽃가루에게도, 또한 그 봄을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시간이다. 속울음 삼키며 저마다 준비한 시를 읊는다. 가슴 가득 쌓인 절망의 켜들이 조금이나마 낮아지는 기분이다. 이 시간만큼은 슬픔의 그림자는 잠시 미뤄 놓기로 한다.

 

 

  ‘이 봄바람을 어찌할 거나? / 나름 수양했다는 수양버들도 / 저리 흔들리는데 / 대충 산 나야……. /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지.’ 중년의 나이에도 사랑의 불씨는 살아 있더라, 며 누군가 이 시를 읊었다. 성급한 박수와 환호가 이어질 만큼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기야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던가. 어쩐지 사랑 앞에 시시해진 나 같은 목석파도 시구가 외워질 정도로 이 시는 참말로 진솔하게 와 닿는다. 제목도 시인 이름도 출처도 모른다는 낭송자를 대신해 누군가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수동 화백의 그림 에세이『오늘, 수고했어요』에 나오는「이 춘풍」이란 시다.

 

 

  집단으로 우울해지는 것과 봄은 어울리지 않는다. 집단으로 꽃바람이 나, 이 춘풍 하면서 맘껏 까불대고 한껏 발랄해져도 좋을 이 봄날, 여전한 상실감이 우리 곁을 맴돈다. 수양 쌓았다는 수양버들조차 저리 흔들리고, 대충 산 필부필부들은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 할 이 봄이건만, 지독한 슬픔의 바리게이트는 절벽이 되어 바위가 되어 가슴에 부딪는다. 누가 이리 만들었나.

 

 

 

 

 

 

 

 

 

 

 

 

 

 

 

 

 

  7.어쩜 이다지도 영리한

 

  그림 형제 민담집 중에「영리한 엘제」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리한 딸 엘제를 결혼시키려 하는 남자에게 한스라는 청년이 나타난다. 엘제의 영리함을 전제로 한스가 청혼하자 남자의 아내까지 거든다. ‘저 애는 골목에 바람이 부는 것을 볼 수 있고, 파리가 기침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저녁 식탁에 오를 맥주 심부름을 하러 지하실에 간 엘제는 머리 위 벽에 걸린 곡괭이를 보고 슬피 운다. 한스와 결혼 뒤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 역시 맥주 심부름을 왔다가 곡괭이가 떨어져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식구(엘제의 아빠, 엄마, 하녀, 머슴 등)와 청혼을 하러 온 한스까지 똑 같은 생각으로 ‘어쩜 이다지도 영리한 엘제일까!’하게 된다.

 

 

  드디어 한스와 결혼하게 되고 그 이후에도 엘제 식 영리함은 발휘된다. 죽이 식을까 염려 되어 일하는 것에 앞서 죽을 먼저 먹고, 배가 부르니 곡식 거두는 것보다는 잠을 먼저 자버린다. 결코 영리하지 않은 엘제에게 실망한 한스는 방울 달린 새잡이 그물을 잠자는 그녀 주변에 친다. 잠에서 깬 엘제는 어리둥절해진다. ‘난 나일까, 아닐까?’ 엘제는 고민하며 방울 소리를 울리며 집으로 달려간다.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스를 향해 집안에 엘제가 있냐고 물어본다. 한스는 태연히 그렇다고 답한다. ‘그럼 난 내가 아니구나.’ 놀란 엘제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방울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은 문을 닫아건다. 결국 엘제는 마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 이후 엘제를 본 마을 사람은 없었다.

 

 

  이 이야기의 첫 문장은 ‘옛날 어떤 남자에게 영리한 엘제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다. 분명 엘제 이야기인데 ‘어떤 남자’인 아버지가 주체로 나온다. 남성적 시각으로 바라본 엘제를 그리는 셈이다. 엘제는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욕망(어쩌면 피해의식일지 모를)과 거기에 동조한 엄마, 또 다른 아버지 격인 한스의 눈으로 본 엘제가 있을 뿐이다.

 

 

  엘제는 영리했을까? 동화나 민담의 일반적 해피엔딩을 따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가면을 벗어 던지고, 외롭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고 믿고 싶다. 남성적 욕망의 덫에 걸려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결말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8. 보너스

 

 

 

 

   **좋아하는 알라디너 분이 소장한 책을 내놓았다.  갖고 싶은 책들이 꽤 많았다. 조금의 망설임없이 그 중 몇 권을 주문했다. 대여섯 권 쯤 되었을까? 그런데 배달된 책은 무려 한 박스!  애초에 내가 주문한 책이 무엇인지 까먹을 정도로 다 맘에 드는 책 뿐이었다. 원서부터 시집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나긋나긋하고 여리여리한 목소리까지 덤으로 선사해주신 그미 전화를 수업 중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받지 못했다. 더구나 난 갱상도 토박이 아닌가. (사투리 컴플렉스 있어서, 주눅이 마구마구 들었다. ㅠㅠ)  박스를 뜯었을 때 감동했던 건 맘에 든 책들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미의 섬세한 마음결이 담긴 소품도 한몫했다.  저 독서용 미니플래시를 보라!!  - 내가  책을 받은 건 한 달도 훨씬 지난 것 같다. 이제나저제나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지 했는데, 이렇게저렇게 바쁜 날들에 엎어지다 보니 이제 겨우 알라딘에 접속했다.

 

어여쁜 알라디너님, 늦은 안부 여쭙니다. 여여하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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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4-05-11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집단으로 우울한건 봄에 어울리지 않는데 이번 봄은 봄도 아닌가봐요.
어머님, 좋아하시는 회 앞으로도 많이 많이 드시고 계속 행복하시기를 바래요~~~

페크pek0501 2014-05-13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리신 글, 잘 읽었어요.

"따라서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치유법은 내가 받은 상처로 아파하는 만큼 내가 준 상처로 누군가 아파하고 있겠구나, 하는 셈법을 잊지 않는 것." - 좋군요...

저는 이런 생각을 취한 적이 있어요. 내가 받은 상처라서 다행이지 이 상처를 내가 남에게 주었으면 어떡할 뻔했나, 하는 생각이요. 때린 사람은 다리 뻗고 못 자는 법... 입장을 바꾸어 보면 차라리 제가 상처 받는 쪽이 낫더라고요.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은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데는 서투른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호의를 얻을 자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 중요한 것 배워 갑니다. 몽테뉴는 천재인 듯...

2014-05-18 0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문학서 번역 단상

 

  잘 번역된  문학서는 창작품 못지않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고 그 번역이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서 생산된 문학작품이 우리 정서나 문투에 꼭 맞게 옮겨지기를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다. 그들 문법으로는 허용되는 말이 우리말에 와서는 막히는 부분이 있고, 그들 풍습과 일상이 우리와 미묘하게 달라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안나 카레니나나』,『롤리타』,『위대한 개츠비』등은 번역자에 따라 책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담백한 문체에 경제적인 문투를 담은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산문체에다 설명적인 문투로 되어 있다. 또 어떤 책은 의역이 심해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번역서마다 개성이 다르니 독자로서 호불호를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 번역서가 엉터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문 번역가 그 누구도 크고 작은 오류는 범한다. 처한 환경에 따라  문화와 언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인정한다면 같은 작품을 두고 번역자마다 조금씩 달리 해석하는 것은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이방인』번역을 두고 한창 논쟁 중이다. 새로운 번역서를 낸 출판사의 도발적인 선전문구가 독자로서 불편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이방인』은 카뮈의『이방인』이 아니다.”라나. 기존의 김화영 작품이 엉터리라는 논리에는 전혀 수긍할 수 없다. 부분적인 문장, 상황의 의미 해석, 특히 등장인물의 캐릭터 등이 잘못되었다고 새 번역자는 격앙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가 지적하는 오류는 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이건 누구 번역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 번역이 낫고, 어떤 상황에서는 새로운 번역자의 의미 해석에 타당성이 있는 정도이다. 싸잡아 기존 번역이 공격당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번역서를 만나는 건 독자로서 유쾌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해당될 실수를 엉터리라고 매도하는데 동참하면서까지 새 작품을 응원하고 싶지는 않다. 번역서의 호불호를 견주는 건 독자의 몫이다. 출판사가 설레발 칠 일은 아니다.

 

 

 

 

 

 

 

 

 

 

 

 

 

 

 

 

 

  2. 마들렌느 조개 과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른 데다 내용은 방대하고 문체 또한 산만하다. 고만고만한 등장인물이 수시로 드나드는데다, 문장은 접속사와 반점의 향연일 정도로 부담스럽다. 고전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정복하려 하지만 십여 권이 넘는 이 대하소설을 아직도 1, 2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 읽은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아마 1부「스완네 집 쪽으로」에 나오는, 마들렌느 과자를 홍차에 적셔 먹는 장면에서 독자로서의 호기심을 충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마들렌느가 어떤 과자일까, 하는 소설 외적인 호기심이 생긴 적이 있었다. 마침 만화로 된 책도 나왔기에 얼른 샀었다. 완간 소식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마들렌느 과자를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작은 기쁨이었다. 평범한 조개 모양 과자 하나로도 우리는 잊고 지냈던 기억을 복원할 수 있다. 홍차에 찍은 마들렌느 과자, 그 향과 촉감에 주인공 마르셀은 불현듯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일요일 아침, 이모가 권하던 그 마들렌느 맛이 겹치면서 마르셀은 완전무결하게 제 어린 시절을 글로 복원하게 된다. 마들렌느라는 소박한 촉매제 하나가 위대한 소설을 탄생시킨 셈이다.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는 작가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홍차 적신 마들렌느의 맛과 냄새와 촉감은 마르셀을 감미로운 행복감으로 몰아넣는다. 고립감을 느낄 정도의 극도의 희열감을 맛보게 해준다.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은 과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홍차에 적신 과자가 뭔가를 일깨”웠다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이런 섬세한 감각의 영혼이라니.

 

 

  저마다의 감각에 겨운 봄꽃은 저리도 앞 다퉈 피고 지는데, 내 온몸과 마음에 숨어 있는 오감의 꽃은 피어날 줄 모른다.

 

 

 

 

 

3. 사랑한다면 직접 말하기

 

  ‘비판이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 비판 속에 비판자의 비난이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판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은 그 비판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하는 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만일 그 비판이라는 것이 비난을 내포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과 염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공지영 소설의 『높고 푸른 사다리』중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사람은 이성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실은 감정에 지배당할 때가 많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막상 뚜껑을 열게 되면 한없이 흔들리기만 한다. 인간 존재의 바탕엔 용기와 관용뿐만 아니라 나약함과 비겁함이란 속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직함과 너그러움을 동시에 지닌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곤 대개 우리는 나약함과 비겁함의 생활 패턴에 쉽게 길들여져 있다. 금세 후회하면서도 약해지는 의지력 앞에서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이처럼 약점 많은 게 인간이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레 타인을 비판하거나 타인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공교롭게도 인간에게는 양심이나 염치라는 게 있다. 그러다 보니 비판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건강하고 온전한 의견일지라도 드러내놓고 상대를 향해 목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대개의 비난의 목소리가 에둘러서 오고 바람결에 감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자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그 비판은 직접적일수록 좋고, 비판 자체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 백 마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뭐하나. 한 마디 에둘러서 오는 비난의 목소리에 그 사랑이 의심 받는데. 아무리 건전한 비판이라도 몇 번의 고개를 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처음의 알맹이는 온데간데없고 어이없는 인신공격이란 허울만 남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면 그 대상에 대한 비판은 삼가는 게 최선이다. 해야만 할 때는 에두르지 말고 정공법을 쓰는 게 좋다. 직접 말할 수 없는 모든 비판 속에는 그 사람에 대한 비난이라는 심술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4.도리언의 경우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정의에서 빠지지 않는 기본 요소는 ‘아름다움’이다. 한마디로 미적 탐색이 없는 예술의 본질은 무의미하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에 꼬리를 물다 얻은,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에 대한 내 정의는 ‘진실로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거나 혹은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개별자의 인식’ 이다.

 

 

집착이나 열망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일어나 밥 먹고 일하고 웃다가 허기지면 또 먹고 일하고 울다 잠자리에 드는 것, 이런 단순한 패턴을 일러 예술이라 하지는 않는다. 예술이 되려면 일상성이 개인의 고유한 내면 정서와 충돌해야 한다. 그 양상은 평범한 삶에 대한 염증, 도덕적 일탈, 평정을 넘어선 의식의 과잉 등의 행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예술은 도덕이나 선함과는 무관하다. 심미안에 눈 뜨면 추함과 아름다움엔 경계가 없고, 행과 불행의 사슬도 실은 그 엮임에 경계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추함과 불행까지도 포괄하는 게 예술이다.

 

 

  오스카 와일드의『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예술의 본질과 인간의 고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미주의에 대한 예찬과 동시에 윤리적 알레고리를 품고 있는 이 소설은 예술과 예술적 삶은 별개라는 것을 보여준다. 쾌락주의와 감각을 앞세워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위선을 질타한다. 그렇다고 주인공 도리언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하는 삶이 결코 최선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삶을 경계 없는 예술로 인식하고 개인적 감각만을 추구하던 도리언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제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가 젊음을 유지하고 그 대신 초상화가 늙어간다 해서 제 영혼의 충족까지를 보장 받는 건 아니다.

 

 

  도리언의 파멸 과정을 통해 와일드가 말하고자 한 것은 예술과 도덕은 무관하다는 것. 그럼에도 예술과 예술적 삶은 별개의 영역이란 것. 예술과 예술적 삶이 맞장 뜨는 그 자리엔 공허와 허무만이 가득하다는 것. 그렇지만 예술의 본질인 아름다움은 인간과 함께 영원하리라는 것. 예술과는 별개로 우리 삶 또한 나름 지속된다는 것.  것.                                                                                                                                 문                                                                                                   

 

 

 

5. 슬픔에 꽃불을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온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밤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온다. 너는 웃고 나도 웃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숲에 이른 문장을 보리라. 몇 개의 문장을 더 쓰고 어둠이 오면.’

이준규 시인의「문장」(『네모』,문학과 지성사) 전문이다.

 

 

  이 짧은 산문시를 발견하는 순간 온몸으로 화르르 벚꽃이 피었다. 빠르게 퍼지는 술기운처럼 전신이 달아올랐다. 멀리 누워있던 그림자마저 제 심장에 펌프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문장을 벼리는 시인의 순간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문장으로 저녁을 기다리고 문장으로 밤을 지새우며 문장으로 겨울을 나고 문장으로 봄을 맞고 문장으로 웃음 강을 건너 문장으로 숲에 이르는 시인의 시간. 다시 저녁은 오고 그 순환되는 문장 속으로 내딛는 시인의 영혼.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옷깃에 묻은 얼룩 같은 허물을 탕감할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눈물로 국숫발을 삼키던 당신의 설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계단 앞 주춤하던 당신의 무릎 관절이 내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한 생애에 드리운 눈썹 밑의 슬픔을 읽어낼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내 무딘 눈동자가 놓친 당신 손끝의 피로를 만질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울분 서린 당신 연둣빛 스카프에 내 연민의 방점을 보탤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너무 빨리 피고 지는 저 봄꽃이 야속타는 당신의 혼잣말을 되뇔 수 있을까. 감춰둔 오금 밑 당신 슬픔과 내 슬픔이 같음을 눈 맞출 수 있을까. 저렇게 숲은 멀리 있는데.

 

 

  시인의 말처럼 삶은 들여다볼수록 슬픔만 남는다. 삶을 슬픔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몇 개의 문장을 쓰는 순간 저녁은 온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웃음 같은 봄을 맞으면 남는 건 문장이 아니라 몇몇의 슬픔이다. 몇 개의 문장을 지워야 섣불리 지나친 먼지 낀 시간들을 살릴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워야 기꺼이 껴안지 못한 슬픔의 영역에 꽃불을 놓을 수 있을까. 여전히 숲은 멀기만 한데.

 

 

  

 

                                                       

 

 

 

 

 

 

 

 

 

 

 

 

  6. 현명하게 말하기  

 

  “군주가 아첨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사실대로 말해도 그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들의 존경심을 잃고 만다.” 마키아벨리도 군주, 아니 인간의 심리에 대해 어지간히 파악한 자였다.

 

 

  현명한 리더는 제 약점을 맘껏 말해도 좋다고 주변인들을 안심 시킨다. 누군가 리더 자신의 허물에 대해 말한다면 요즘말로 쿨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 나아가 프로젝트 실패에 대한 리더로서의 책임을 물어 누군가 객관적이고 냉철한 논평을 한다 해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것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리더의 현명함은 여기까지다. 모든 약점과 온갖 실패에 대한 충언까지 감당할 수 있는 군주는 없다는 뜻이다. 세상 대부분의 CEO들이 왜 저마다의 근엄함으로 제 권위를 지키려 하는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저 명언은 이렇게 풀어 쓸 수 있다. 현명한 군주는 열린 마음이 준비 되어 있다. 그렇다고 제 명예심을 해칠 정도로 사람들의 솔직한 언행을 바라는 건 아니다. 존경 받고 있다는 자존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한다. 어디 군주만 그럴까. 세상 누구나 자의식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의견 또는 평가나 비난을 받아들인다. 상대가 발 들일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잣대만을 고집하는 이도 있으니 이 정도의 열린 마음만 있어도 모두 현명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언행의 한계치는 누가 정하나. 현명한 사람 곁에 현명한 친구가 모인다는 전제하에 그것은 발언하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그들은 상대의 맘을 손상시키지 않는, 다시 말하면 서로의 자존에 폐가 되지 않는 정도의 진솔함이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고 있다. 타자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제 자존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아첨과 진솔함의 경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말을 현명하게 부릴 줄 안다. 넘친다거나 모자란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군주가 그것을 알아채도록, 제 현명함의 한계치를 잘 활용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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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4-1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첫 댓글의 영광을 안는 건가요?

오랜만의 출현에 반가움을 표합니다. 잘 지내셨나요?
글이 좋습니다. 특히 3번과 6번에 꽂히는군요. 여러 번 읽게 만들어요.

3번 "비판이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 비판 속에 비판자의 비난이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6번 열린 마음이 있으되 자존을 지킬 정도로만... 이것 어렵겠네요.
늘, 무엇과 무엇 사이에 존재하는 게 어렵지요. 뛰어난 기술을 필요로 해요.
저는 비판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혹시 지적할 게 있으면(틀린 게 있으면) 비밀댓글로 직접 말합니다. (틀린 걸 그냥 놔둘 순 없잖아요. 의리가 있지... ㅋ)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건 망신 주기, 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글 읽을 수 있도록 자주 나타나 주시길... ^^

다크아이즈 2014-04-12 10:39   좋아요 0 | URL
모두 게으름의 소치지요.
시간을 쪼개가며 알라딘을 접수하는, 페크님을 비롯한 바지런한 알라디너들이 새삼 위대하게 보입니다.
봄날, 잘 지내시지요?
늦은 안부 여쭙니다.^^*

세실 2014-04-1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외국문학작품 읽을때는 한 출판사 책만 읽게 됩니다. 안나 카레니나, 개츠비로 마음을 굳혔어요^^
님 마음의 꽂을 활짝 피게 해드려야 하는데.....ㅜㅜ

다크아이즈 2014-04-13 01:18   좋아요 0 | URL
안나 카레니나는 어디 걸루요? 박형규(문동) 번역 골랐을 것 같구요.
개츠비는 누구 걸 선택하셨을까요? 저 수수께끼 풀어라고 어떤 출판사 걸로
읽으셨다는 걸 안 밝혀 주시네ㅋ

세실 관장님 그날 볼일 잘 봤어요?^^*
세상사 어디 지 맘대로 되기나 하던가요? 제가 만날 하는 말이지요.ㅋ
나날이 짙어 가는 봄 잎들... 이쁜 모습 눈에 선해요~~


세실 2014-04-15 10:43   좋아요 0 | URL
호호 문동!!
개츠비도 당연히 김영하 문동으로!!!! 읽었답니다.

그날 관장님이 매우 흡족해하셨어요^^
돌아가셔서는 메일도 보내주셨는데,

'예쁘고 글 잘쓰는 관장님!
오늘 매우 감사했습니다.
연가도 미루고 환대해 주시고
점심도 아주 즐거웠습니다.
도서관을 참 섬세하게 관리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관장님의 하루가 온통 기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감동했답니다. 언니들께는 죄송했지만요. ㅠㅠㅠ
조만간 꼭 뵈어요~~~

다크아이즈 2014-04-16 08:36   좋아요 0 | URL
암만요, 그랬을줄 알았어요.
이쁘고, 글 잘 쓰고, 도서관 관리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세실님...
좋은 인상 남겼다니 아쉬움이 다 보상 받은 기분인걸요.
날로 정진하는 대단한 세실관장님, 파이팅~~^^*

2014-04-13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4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연아아, 힘들었지?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 높고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명이란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낸 그의 이력이 이 한 마디 말 안에 다 들어 있다. 철강 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카네기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자신의 능력 덕이라고 보지 않았다. 자신이 많이 알고, 잘 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뽑아 쓸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그를 성공한 사업가로 거듭나게 해주었다. 나아가 기부와 자선의 실천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증거로 삼았다.

 

 

  누구나 카네기처럼 부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정성, 이런 마인드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이라는 생각을 앤드류 카네기는 경험으로 깨쳤다. 카네기는 어릴 때 토끼 한 쌍을 선물로 받았다. 한두 마리 토끼를 키울 때는 제 이름을 짓고 불러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번식력 강한 토끼가 열 마리, 스무 마리로 늘어나면 그 이름을 짓고 기억하고 불러주는 건 쉽지 않다. 카네기는 출석부에서 힌트를 얻어 반 친구들의 이름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각 토끼마다 걸어주었다. 그러자 제 이름 팻말이 걸린 토끼에게 친구들은 관심을 가지고 먹이까지 챙겨 주는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존재 증명을 바란다. 카네기는 경험을 통해 그것을 실천했다.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토끼 키우던 시절을 잊지 않았다. 직원이 다섯 명이었을 때나 오백 명으로 늘어났을 때나 카네기는 그들 개개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그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를 강조하는데 앞장섰다. 평생을 거쳐 그가 가장 즐겨하고 자주한 말은 ‘자네, 힘들었지?’라는 한 마디였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내 맘을 헤아려주는 것만큼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것도 없다. 카네기는 인간의 이런 근본 정서를 기업 경영에 접목한 셈이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 획득이고,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이다. 하지만 그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바탕은 누가 뭐래도 사람이다. 현명한 카네기는 사람이 최선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돈을 먼저 벌기보다 사람을 먼저 벌어라. 그러면 돈은 따라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멋진 명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친 누군가의 얼굴에 그걸 감당하려는 안간 미소가 보인다면 무심한듯 다가가 가만히 손 잡아주고 싶다. 오늘 그대 힘들었지? 아주 뜬금없지만 지금 당장 그 한 마디 하고 싶다. 연아야, 힘들었지? 심판 판정 논란이나 재심 청원 따위에는 개인적으로 전혀 관심 없다. 다만, 계급장 없는 평범한 아줌마도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연아아, 힘들었지?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다. 같은 맘으로 마오야, 너도 힘들었지?

 

 

 

 

 

 

 

 

 

  2. 몸으로 하는 말

 

  <힐링 캠프>에 이상화 선수가 나왔다. 명랑하고 확신에 찬 모습에다 가족애도 넘쳤다.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한데 뭔가 모르게 불편했다. 성급한 편성을 한 방송사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을까. 아직 다른 선수들의 경기가 남아 있는데다, 그들이 안을 심적 고충을 헤아린다면 올림픽이 끝나고 방송을 해도 좋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상화 선수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마저 불편하게 다가왔다.

 

 

  토크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자족감에 찬 표정으로 자주 턱을 괴었다. 메달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나머지 선수의 심정이 이상화 선수의 표정에 투사되었다. 겸손이 미덕은 아니지만 저 땐 겸양의 페르소나도 필요한데 하는 맘이 들었다. 이게 다 심리학 책 탓이다. 인간 행동 패턴으로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책들의 잔상이 내 심사를 건드렸다.

 

 

  말만이 언어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말보다 몸의 언어, 즉 비언어적 태도가 더 많은 정보를 준다고 강조한다. 행동 심리학 책들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몸동작 하나하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친절하게 분석해준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타인의 몸말을 허투루 보지 않게 된다. 저 사람이 입구 쪽을 바라보는 건 빨리 이곳을 뜨고 싶다는 제스처야. 손을 책상 아래로 감추는 걸로 보아 저이는 자제심을 발휘하는 중일 거야. 다리를 갑자기 흔드는 저 남자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책의 영향으로 타자를 향해 이런 분석을 하게 된다. 한데 이런 면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심리학 서적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심층적이라 해도 타자의 몸 언어를 명확하게 분석해주지는 못한다. 반은 받아들일만하고 나머지 반은 무시해도 좋다.

 

 

 

  인간 행동 패턴에 관한 심리서는 필요악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긍정의 수단도 되지만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봤을 때는 공감도 된다. 내 실수를 줄이고 더 나은 행동을 하기 위한 지침서로 삼을 만하다. 타인을 적극 수용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한 목적이라면 인간의 몸 언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3. 모두가 피해자 - 쇼트트랙에 관한 짧은 생각

 

  소치 동계올림픽이 중반을 넘어섰다. 우리 선수가 등장하면 맘부터 졸인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정서와 근원적 모성이 절로 발동한다. 특히 쇼트트랙 경기에서는 그런 맘이 더하다. 아시다시피 쇼트트랙은 스피드보다 경기 운영의 묘미에서 승패가 좌우되는 경기이다. 눈치작전도 필요하고 그만큼 몸싸움도 치열하다. 관전하는 이도 덩달아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다. 숱한 변수들을 살펴가며 가슴 졸이는 그 재미에 개인적으로 쇼트트랙을 좋아한다.

 

 

  사랑받는 국민 스포츠인 쇼트트랙에 관한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올림픽 때만 되면 단골메뉴로 회자된다. 파벌 싸움이란 큰 틀은 이제 온 국민이 알 정도가 되었다. 잘못은 빙상연맹 관계자들에게 있고 책임 또한 그들 몫이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고, 그들 싸움의 제일 희생양은 선수들이란 사실만 남았다. 실력 보다는 팀워크를 중시하는 경기다 보니 선수들은 여러 요구 사항으로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그 사항이 합당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끝내 갈등과 반발과 상처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번 올림픽에서 보란듯이 성과를 낸 안현수 선수는 그나마 심리적․경제적 보상을 얻게 되었다. 다행이다. 빙상연맹 관계자들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국민정서 또한 그러한 안현수를 응원한다.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인, 한 때는 선수였거나 지금 선수인 이들이 받을 상처는 누가 치유해주나? 선수들 입장에서는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일 수 없다. 모두 피해자들일 뿐이다.

 

 

  성과 최고주의, 금메달 지상주의, 스포츠 국가주의를 조장하는 한 이런 부조리한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한 자아의 건전한 성취욕이나 올곧은 투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올림픽은 충분한 감동을 선사한다. 개인의 영광이 타인에게 긍정의 자극을 주는 선만으로도 스포츠의 역할은 충분하다. 나부터 자국 선수가 나오면 떨려서 제대로 경기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정서와 과격한 스포츠 국가주의와는 다르다. 금메달을 애국이나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런 사태를 방관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4. 깨지기 쉬운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약고 발 빠른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눈치 없는데다 느리기까지 한 사람은 위기가 왔다는 것조차 모른다. 일반적으로 위기에 닥치면 당황하고 허둥대다 무너지기 쉽다. 나심 탈레브는『안티프래질』을 통해 이러한 위기의 본질과 속성, 그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인식의 전환이란 관점에서 기술한다.

 

 

  탈레브는 프래질(fragile,깨지기 쉬운)과 안티프래질의 개념에 대해 촛불과 장작불을 예로 든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쉬 꺼진다. 외부 충격에 약한 프래질 상태가 된다. 반면에 장작불은 바람이 셀수록 더 세게 타오른다. 외부 충격에 강한 안티프래질이 되는 것이다. 저자 자신이 조합한 용어인 이 안티프래질의 특성을 갈파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프래질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이다. 예측가능한데다 선형적 구조를 지닌다. 이에 반해 프래질은 예측불가능하고 비선형적 형태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위기 상황, 이를테면 IMF 사태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프래질이 되어 버린다. 반대쪽에 안티프래질이란 공고한 영역이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 사이 프래질을 예측하고(어쩌면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 대비한 이들은 고스란히 반사이익을 챙긴다. 유용한 정보를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안티프래질의 사람들은 위기의 주범이지만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비선형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면죄부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무지한 일반인들일 뿐이다.

 

 

  프래질을 감지하는 완벽한 방법은 없다. 익숙해지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자각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평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안주에 자족하지 않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단다. 한마디로 속아 넘어가지 않는 전략이 요구되며, 우리 스스로 안티프래질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밖에 없다. 깨지기 쉬운 일반인이 단단하기만 한 글로벌 이익 집단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알고 대처하려는 투지만으로도 안티프래질의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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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3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3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4-02-23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쓰신 글 중에

"같은 맘으로 마오야, 너도 힘들었지?"<이 부분 읽고 왜 눈물이.. ㅠㅠ >

"토크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자족감에 찬 표정으로 자주 턱을 괴었다. 메달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나머지 선수의 심정이 이상화 선수의 표정에 투사되었다. 겸손이 미덕은 아니지만 저 땐 겸양의 페르소나도 필요한데 하는 맘이 들었다. "


이걸 보실 줄 아시는 분, 이것이 행위에 담겨 있으신 분, 비록 글이지만.. 그걸 뵐 수 있었고.. 아.. 그건 큰 가르침이셨어요.. 팜므느와르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4 17:39   좋아요 0 | URL
연아도, 마오도 다 짠하고 고마울 뿐.
세상에 태어나 한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든 분들께 감정이입이 되면서 울컥해지네요.
오래 한 분야에 몰입하다 보면 연아처럼 그릇이 커지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못한 나는 뭔가, 이런 자조도 따라오네요. 새벽님의 정감어린 댓글에 힘을 얻어 조금씩 나아지려 노력하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래질 하니 김영하의 굴비낚시가 생각나네요.
개인적으로 에세이가 참 마음에 드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김영하인데 ( 하루키보다 잘쓴다고 생각합니다. ) 깨지기 쉬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전 김연아는 자랑스러운데 그 김연아'를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상품 가치로 팔려는 장사꾼과 정치꾼 그리고 그녀를 애국심으로 바라보려 하는 무조건 지지'가 참 촌스럽더라고요...
박근혜도 참 소갈머리없으신 게 아니 지금 한창 경기 펼치고 있는 와중에 빙상 연맹 어쩌구저쩌구하는 거 자체가 부덕의 소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남자 쇼트트랙 노메달은 아마도 이러한 여론의 공격에 의한 부담감이 적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4 17:43   좋아요 0 | URL
김영하의 에세이라, 곰발님이 추천하시면 무작정 믿고 찾아 읽는 거지요.^^*
동계 올림픽 포함한 스포츠 관련 일련의 곰발님 페이퍼 다 읽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완벽하게 해주시는 바람에 공감하고 또 공감했답니다.

곰발님이 아무리 명석하게 분석해 주셔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이 훨씬 많다는 게 서글픈 현실이긴 하지요. 우린 너무 길들여졌고, 여전히 길들여지고 있어요ㅠ. 맛난 저녁(술?) 드시길^^*

Jeanne_Hebuterne 2014-02-24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동 심리학이나 인지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몇몇 책을 읽어보았는데도 제가 여러번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찾았더랬습니다. 제겐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없었나 봐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세히 보려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누가 얼른 장소를 벗어나고 싶어 계속 출입구 쪽을 바라본다 한들, 그 사람의 얼굴을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면 말은 늘 자신을 가두죠. 음악이나 몸짓이 더 정확하지 않은가, 나 자신조차 말로 나를 잘 풀어낼 수 없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요즈음, 팜므 느와르 님의 정성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4 17:48   좋아요 0 | URL
어쩐지 에뷔테른님은 자신에게 몰입하는 타입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분들이 진짜 고수지요. 타자로부터 너무나 자유로워 거리낄 게 없는 영혼, 여기서 자유롭다는 건 무대뽀가 아니라 타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에게 몰입하는 유형이라는 거지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지표지요.
자신을 가두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에 최선을 다하는 분이라는 게 맞겠지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생각은 분산되고, 에너지는 고갈되고, 체력은 저질이고...
여하튼 핑계만 많아요. 나자신조차 나를 풀어낼 수 없다는 말, 제게도 해당됩니다.^^* 미세 먼지는 물러설 줄 모르고 이른 저녁니 오고 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4-02-23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학에 속지마라>는 요즘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심리상담 열풍의 문제점을 진단해 볼 수 있는 책이라고 봅니다.저자는 독일인인데 심리학을 통속적으로 이용하여 피상담자 위에 사이비 교주처럼 군림하는 유명강사들을 비판하고자 저 책을 썼더군요.전세계에 널리 퍼진 심리치료용 문답지의 문제점도 파헤쳤다고 합니다.IQ테스트의 문제점이 드러나니까 EQ라는 것을 개발해내는 약삭빠름도 지적하구요.요즘 유행하는 감성 혹은 공감 열풍을 차분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 믿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4 17:56   좋아요 0 | URL
저 책은 아직 안 읽었어요. 근데 웬체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 금세 사서 읽게 될 것이야요. 심리학 서적이 다 옳지도 않고, 거기에 온전히 영향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다만 많은 참고로 삼으면 좋은 점이 꽤 많다는 걸 알았어요.

심리치료용 문답지, IQ,EQ 이런 것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는 공감합니다. 그러니 더욱 이 책이 읽고 싶어지네요.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4-02-2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익숙해지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자각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 글쓰기에도 꼭 필요한 자세겠지요.
낯설게 하기, 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을 잘 읽고 갑니다. ^^

다크아이즈 2014-02-24 18:00   좋아요 0 | URL
낯설게 하기, 라고 하니 갑자기 생각나네요.
낯설게 하기 기법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때 어떤 책에서 좋은 예시로 말해준 것이 '우산과 침대'라는 말이었어요.
우산과 침대는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잖아요. 그 어울리지 않은 것들이 만나
그럴듯한 묘사를 이루면 그건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될 수 있는 거지요.
이젠 문학에서 낯설게 하기도 익숙한 것이 되어 버려 더 새롭고 자극적인 것이 아니면 시큰둥해져버리는 시대가 되었지 뭡니까?^^*

감은빛 2014-02-2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순간부터 올림픽, 월드컵 뭐 이런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이 불편해요.
의식하지 않을 때는 당연히 우리나라 팀을 열심히 응원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내가 저들을 응원할 이유가 또 뭔가 싶기도 해요.
혹 상대국가에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있다면 그들을 응원해도 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언급해주신 책들 중 몇 권에 관심이 가네요.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즐거운 저녁 되시길~ ^^

다크아이즈 2014-02-24 18:08   좋아요 0 | URL
저는 맘 졸이며 우리 선수를 응원합니다. (그건 본능에 가까운 거지요.)
하지만 그게 스포츠 애국주의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연아가 잘 하기를 바라는 만큼 마오가 욕 먹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지요.
연아더러 <대한민국>이 되어 주기를 갈망하는 건 폭력이지요. 연아는 연아일 때 가장 연아답잖아요.
점점 나아지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멀었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감은빛님도 맛난 저녁 드시길. 전 콩나물밥을 할까, 콩나물을 무칠까 고민 중입니다.^^*
 

 

 

 

 

 

1. 중간 자리는 힘들어

 

  한창 회자되는「겨울왕국」을 보러 갔다. 남들보다 한 박자 늦었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볼 날만 잡고 있었는데 설이다, 딸내미 신종플루 앓는다 어쩐다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물론 영화 이야기는 아니다. 자리에 관한 거다.

 

 

 

  영화를 볼 때 내가 선호하는 자리는 뒤쪽 중앙의 왼쪽 통로 쪽이다. 일반적으로 중앙의 중간 자리부터 예매되는 것에 비하면 내 취향은 약간 특이하다. 한데 이번「겨울왕국」을 볼 때는 예외였다. 꼼짝 않고 일주일을 앓고 난 딸내미와 첫 동반 외출로 잡은 스케줄이 ‘겨울왕국 관람하기’였다. 딸내미의 주장에 의하면 애니메이션은 치밀한 스토리가 아니라 화려한 영상 자체가 감상의 포인트가 되어야 한단다. 더구나 3D 영화를 제대로 맛보려면 가운데자리가 그만이란다. 이번만은 내 취향이 아닌 지 소신대로 중간 자리를 예약하잔다. 일리 있는 말 같아 두 말 없이 동의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중앙의 중간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한데 내가 우려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중간에 꽉 낀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하니 몸과 마음은 갑갑해져왔다. 화장실은 가고 싶고, 덩치 큰 앞사람이 자꾸 고개를 흔드는 바람에 자막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피곤한 상태여서 그런지 그 좋은 화면을 앞에 두고 초반 몇 분은 졸기까지 했다. 딸내미가 창피하다며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래서 가운데자리는 싫다니까, 하는 자조가 절로 나왔다.

 

 

 

  중간 자리를 꺼리는 나름의 이유는 오직 개인적 경험에 연유한다. 우선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다. 깜깜한 곳, 전후좌우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를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건강 검진 때 MRI 기계 안에서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끔찍한 경험과 유사한 느낌이랄까. 숨구멍이 막히고 심장은 조여오고 맥박은 빨라진다. 뭉근하게 주리 틀리듯 온몸은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다. 장시간 비행기 탈 때의 느낌도 이와 비슷하다. 해서 웬만하면 기차나 비행기를 탈 때 자리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창 쪽보다는 통로 쪽을 선점한다.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잘 모르겠다. 다만 별로 착하게 살아오지 않은 자의 괜한 자격지심 같은 게 누적되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예를 들면 오래 전, 아부지의 죽음 앞에서 불효했다는 자책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경험이 있다. 자책은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공포로 변해갔다. 온몸에 한기가 들 정도로 전신이 떨려왔다. 따뜻한 봄날이었건만 솜이불을 꺼내 덮어도 전신에 감도는 두려움의 한기는 쉬 가시질 않았다. 세세한 불효의 내역들은 돌이켜보면 별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당시로는 아부지나 나 둘 다 심리적 뾰족탑을 쌓던 시절이라 나름 심각했었다.

 

 

 

  엉뚱한 데로 새버렸도다. 각설하고 두 번째는 요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혹시 콜라와 팝콘이라도 먹게 된다면 긴장도와 몸 상태에 따라 중간에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중간 자리에 앉는 건 민폐가 아닐 수 없다. 다음 세 번째는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유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 자리가 화면을 보기에 안정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는 앞사람들의 빽빽한 몸피와 들쑥날쑥한 머리 라인 때문에 화면이 잘 안 보일 수도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단신이면서 앉은키만 높은 저질 체형이라 그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 머리통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듯, 나 또한 뒷사람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어깨를 움츠리고 엉덩이는 밀어 내리게 된다. 그렇게 엉뚱한데 신경을 쓰다 보면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졸음도 그 이유가 된다. 피곤한 날인데다 취향마저 내 것이 아닌 영화 앞에서는(나는 영화를 잘 모른다.) 십중팔구 초반 십 분 이내에 졸게 된다. 중간이 아닌 한쪽 자리에 앉았다면 내 창피함이 덜 들킬 것이다. 같이 간 사람들조차 민망해지는 그런 그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통로 가까운 왼쪽 뒷자리가 내겐 안성맞춤이다.

 

 

 

  오늘의 내 결론, 누가 꼬시더라도 절대 영화관에서는 중앙의 중간 자리에는 앉지 말자. 무조건 왼쪽 뒤 통로 쪽이라고 학씰하게(!) 외치자. 편하게 또는 이기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의 이 익숙함과 무서움이라니!

 

 

 

 

 

 

 

2. 실패 없는 성공 이야기라니

 

  성공과 실패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할까? 일견 명백해 보이는 답 앞에서 가끔은 이런 질문도 하고 싶다. 성공담이 넘치는 사회이다.

 

 

  한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업종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예술계든, 산업계든, 학계든, 연예계든 현실적인 성공을 눈앞에 둔 사람이어야 한다. 대중들이 그에게 열광하기 시작한다. 매의 눈을 가진 출판 업계가 가만있을 리 없다. 속된 말로 ‘물건 되겠다’ 싶으니 재빨리 움직인다. 기획, 집필, 편집해서 한 권의 책을 낸다. 이름값에 비례해서 책은 순식간에 동이 난다.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쏟아진다. 저자는 하루아침에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어 바삐 불려 다닌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어느덧 신화의 경지에 이른다. 또 다음 책을 기획하고 집필해야 한다. 대중의 관심을 지속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효 기간 5년 미만인 그 성공기는 또 다른 기획품에 의해 제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운명을 맞고 만다. 대중은 누군가의 성공담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하지 그 성공담 자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공만을 바라는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 사회상일까. 성공담 못지않게 중요한 건 실패담이다. 누구나 성공만을 얘기한다면 나머지 대다수의 성공하지 못한 삶은 잘못된 것일까. 남의 성공을 보면서 희망의 자긍심 못지않게 열패감도 생기는 게 사람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자식 자랑하는 옆집 아줌마는 한 사람이고, 들어주는 아줌마는 아홉 명이다. 옆집 아줌마의 나 홀로 큰 목소리 때문에 나머지 아홉의 풀죽은 목소리가 ‘소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성공이다, 스펙이다, 신화다 등등으로 흉흉한 현실이 안타까울 때도 있다. 충분히 소시민적 행복을 누리는 이들 앞에 너무 많은 ‘성공담 기획 상품들’이 쏟아지는 건 아닌지. 99퍼센트의 실패담이 깃털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성공담이라면 무슨 소용일까. 실패 없는 성공이 어디 있나. 성공만 권하는 사회에 괜히 종주먹 한 번 날리고픈 아침이다.

 

 

 

 

 

 

 

3. 평판에 대하여

 

  절대 도덕을 실천하는데다 완벽한 염치를 가진 이가 있을까. 반대로 절대 모순을 보여주거나 완벽한 악행만 일삼는 이가 있을까. 누군가를 일컬어 옳은 삶만 산다고 규정할 수 없듯이 또 다른 사람더러 나쁜 삶만 산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에는 평판이란 게 따라 다닌다. 불완전하기만 한 존재들끼리 서로를 판단하는 우습고 유일한 동물이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평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소한 것에서 타자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진다. 자신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내리기 어려워도 타자에 대한 평판은 무서우리만치 객관화하는 게 사람이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타인의 누적되는 양심 불량의 행동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좋아질 수가 없다. 한 번 잘못된 평판은 되돌리기 어렵다. 좋은 말은 십리를 가다 끊기지만 나쁜 말은 천리를 가고도 힘이 남는다. 찬란한 타인의 미덕에는 덤덤해질 수 있지만, 사소한 남의 실수는 악행으로 번지기를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보이다.

 

 

 

  한 예를 들자. 음식 값을 내지 않고 나간 한 사람에 대해 한 부류에게는 그가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했고, 다른 부류에게는 원래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깜박 잊은 거라고 변명해줬단다. 마지막 부류에게는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정보를 접한 참가자들은 그가 지불하지 않은 음식 값을 실제보다 높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단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집단적 교류 속에서 이뤄지고 부정적 평가일수록 날개가 빨리 달린다. 평판은 맞장구에 그 운명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누군가를 안 좋게 얘기했을 때 그 얘기에 맞장구를 치는 순간 집단 전체는 그를 나쁘게 보게 된다. 반면 맞장구 대신 그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를 한다면 처음 부정적인 말을 꺼낸 사람의 말은 어느 정도 힘을 잃고 만다. 하지만 타자에 대해 소극적인 부정의 평판에 가담하긴 쉬워도,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평판을 위해 팔 걷어 부치기는 얼마나 어렵던가?

 

 

 

 

 

 

 

  4. 괴물 되기는 순간이지

 

  인간은 결속의 동물이다. 무리 만들기를 좋아하고 니 편 내 편 구별하기를 좋아한다. 나아가 유교권 국가일수록, 단일종족이라는 환상이 깊을수록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로 경계 짓기를 즐기기도 한다. 그것이 지나치면 객관성을 잃게도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스포츠와 관련 있다. 예를 들면 김연아의 완벽한 점프에 일본인들이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면, 아사다 마오의 불완전 점프에 우리 중 누군가는 조목조목 반박하게 된다. 이 정도야 사실 관계 증명을 하는 것이니 넘어간다 치지만 대개 서로 인신공격성 발언에다 국가 간 모독성 발언으로 넘어가고 그 수위도 높아진다.

 

 

  괴물 되는 건 순간이다. 괴물은 우리 맘속에 분명 존재한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그것은 오로지 행동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모습만큼 괴물의 형상에 가까운 것도 없다. 그것의 형식은 옹졸한 국수주의나 지나친 애국주의 나아가 위험한 호전주의로 나타난다. 내가 너보다 옳고, 우리가 너희보다 낫다는 그릇된 신념이 그렇게 만든다. 나는 그르지 않고, 우리 가족은 부도덕하지 않으며 우리 국민성은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상대라고 성급히 결론 내릴 때에 그만큼 쉽게 괴물이 되는 것이다. 욱일승천기 번득이며 온 거리를 뛰어다니고, 독도는 저들 땅이라고 지치지도 않고 우기는 일본의 극우자들 모습이 그 좋은 예이다.

 

 

 

  자애며 가족애며 조국애도 현상 자체를 보는 눈에 앞설 수는 없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은 인류 공영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느 특정 집단의 옳음과 우위를 한정하는 뜻으로 쓰일 수는 없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는데 능통한 인간이긴 하지만 불멸의 신념처럼 그것을 한쪽에선 주입하고 다른 한쪽에선 세뇌당해야만 하는 사회여서는 곤란하다. 사람은 사람이고,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패 짓는 것의 가치와 긍정 위안은 분명히 인정할 만하다. 적당한 무리 짓기야 인간사 권장할 일 아니던가. 다만 도가 지나치면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금세 괴물이 되는 것이다.

 

 

 

 

 

 

5. 폭설 단상

 

  오랜 만의 폭설이다. 한낮이 가까웠음에도 사위가 온통 흰빛 적요의 난무이다. 창을 통해 보이는 가까운 대로엔 차들이 서다 가다를 반복한다. 이마저 고요한 풍경화 같다. 꼭 닫힌 창 너머로 움직임만 보일 뿐 소리 한 점 들리지 않는다. 이 모순적 평화가 낯설기만 하다. 차들의 느린 행렬, 갓길에 멈춰선 트럭, 이차선에서 비상등을 켠 채 옴짝달싹도 못하는 미니밴, 헛바퀴 굴러 갓길과 삼차선에 비스듬하게 꽂혀버린 버스 등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눈 오는 날의 실상은 낭만적 정서보다 현실적 불편함이 더 크구나. 폭설은 사람을, 풍경을 삼킨다.

 

 

 

  오디세우스는 10년간 끌어 온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부하들과 귀향선에 오른다. 온갖 시련들이 그들을 기다렸다. 그 중에 바다 요정 세이렌이 사는 섬을 지날 때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현혹되어 배가 좌초되거나 사람들이 물에 뛰어내리기 때문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았다. 노랫소리를 포기하지 못하겠기에 자신의 몸은 밧줄로 돛대에 묶어 줄 것을 부탁했다. 만일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겨워 스스로 풀어달라고 청한다면 더 단단히 묶으라고 명령했다. 그 결심 덕에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노래도 들으면서 무사히 그 섬을 지날 수 있었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오디세우스 군단이 현혹되듯이 일 년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한 눈을 우리는 내심 낭만적 정서로 기다린다. 하지만 그 눈의 꼬임은 현실적 불편함이 되어 자칫하면 생명에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처럼 제 몸을 묶어 외적 결속을 꾀하면 좋으련만 밥벌이의 현실이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속을 위해 그저 길을 나서야 한다. 게다가 원치 않아도 암초를 만나거나 물에 뛰어내려야 하는 위험이 떡하니 기다리기도 한다.

 

 

 

  낭만적 정서만 기대한다면 내 몸을 묶어서라도 눈 구경을 할 수 있으련만 현실 속 눈 풍광은 그것과는 한참 멀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차들은 거북이 운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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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1 2014-02-1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글입니다. 형식은 같되 내용은 매번 다른...
같은 그릇에 다른 맛있는 음식을 매번 담는 이 유능함을 읽고 갑니다.

아, 저 페크입니다.

다크아이즈 2014-02-13 11:24   좋아요 0 | URL
홋홋, 가끔씩 저도 로긴 안 하고 덧글 달 때 있는데, 스맛폰으로 급하게 알라딘 찾을 때.또는 로긴이 제대로 안 될 때... 페크언냐님도 그런 상황일까요?
글쓰기는 저 못지 않게 페크님께도 큰 숙제인 듯. 모쪼록 페크의 유익함에 미치기를 바랄 뿐입니다. 늘 성실한 언냐님^^*

2014-02-12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3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4-02-1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 폭설의 풍경글은 영화처럼 그려지도록 생생합니다.

 글이 아름답습니다. ~~^^ 

다크아이즈 2014-02-13 11:28   좋아요 0 | URL
어휴, 새벽님. 폭설 풍광에 몰입해서 써야 했는데, 마침 세이렌 이야기를 접하던 중이라 연결하느라 약간은 횡설수설했지 뭡니까. 제가 서정적인 글에 많이 약합니다.
의도적으로 쓰지 않는한 그쪽은 좀 오글거려요. 근데 필요하기 때문에 될 수 있음 시집이나 감성적인 글도 접하려고 노력합니다. 새벽님 서재가 제 그런 노력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예감이옵니다.^^*

꿈꾸는섬 2014-02-12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맨뒷자리 중앙 통로쪽 예매하는 사람 저요.ㅎㅎ
극장 정중앙 자리는 저도 불편하고 싫더라구요.

신종플루 엄청 고생했겠어요.

다크아이즈 2014-02-13 11:30   좋아요 0 | URL
앗, 동지를 만났습니다. 에헤라디여~~
뒷자리 중앙 통로쪽 콜!

덕분에 신플은 다 나았어요.
딴 얘긴데 이제 그거 이름 구종 플루래요.흐흣~~

단발머리 2014-02-1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내리기 어려워도 타자에 대한 평판은 무서우리만치 객관화하는 게 사람이다. >

이 구절 너~~ 무 좋아요. 내 자신에 대한 변명은 얼마나 세밀하고 꼼꼼한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쉽게 평가를 내리는지...
아침부터, 고개 숙여지는 페이퍼예요.
언제나 그렇지만, 역시 오늘도 님 글 잘 읽고 갑니다~~

다크아이즈 2014-02-13 11:32   좋아요 0 | URL
진짜 저 말 제가 만든 거지만 실감해요.
저부터 자신을 알면서도 자신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기 전 타자에 대한 평가는 객관화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누가 누구를 평할 수 있단 말일까요?
지 한 몸, 지 한 영혼 간수하기도 벅찬 세상이고만... 늘 경계하고 다독입니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게 인간사이지요. 단발님, 오늘도 눈눈, 벌써 닷새째네요.ㅠ

oren 2014-02-12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딧세우스의 이야기 가운데 저는 '로터스의 열매'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요. 그 열매를 먹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잊어버린다던 식연족(食蓮族) 이야기 말이지요.

이번 폭설때 '귀농'해서 고향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보내온, 온통 하얀 눈으로 가득 뒤덮인 '고향 풍경'이 담긴 사진을 보고는 얼마나 사무치게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던지요.

다크아이즈 2014-02-13 11:36   좋아요 0 | URL
식연족이라. 첨 들어보지만 제가 또 호기심은 있는 편이니 마구 검색 들어갑니다.
오렌님의 고전 경지의 끝자락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알라딘에 없어서는 안 될 분^^*

전 향수가 없는 부류에요. 그렇게 말해놓고도 힘들고 지치면 달려갑니다. 일년에 한 번 정도는 그저 물 밑에 잠긴 고요 속 풍광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오곤 합니다. 저얼대 향수병 같은 건 없음에도요, 이 무슨 조화일까요ㅠ

기억의집 2014-02-1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극장에 예약하면 언제나 가장자리 예약해요. 그래야 드나들긴 편해서요. 전 영화보는 게 너무 싫어서 극장 잘 안 가는데 요새 변호인하고 또하나의 약속은 극장 가서 보는데... 몸이 베베꼬이지 않아서 다음부터는 영화 나들이 자주 와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극장 가서 영화 안 본지 꽤 되었는데 두 영화는 절 극장으로 불러줍니다~ 저의 애들은 3디 볼때 젤 앞좌석에 앉아요. 거기가 젤 좋다고...

자기계발하니 생각나는 글 중에 누가 이런 댓글을 쓴 적이 있어요. 한국에선 김난도 공병호 이지성 글은 피해라. 재탕삼탕 자기 복제의 달인 공병호 원래 젊으면 그래 자위의 달인 김난도 R=VD 자계서의 종교화 이지성...핵심을 찌르는 댓글을 읽으면서 큭 진짜 공감되더라구요.
실패 없는 자기계발이 어딨겠어요. 그쵸!

다크아이즈 2014-02-14 12:44   좋아요 0 | URL
동지 또 만났네, 그려. 에헤라디여2~~
기억님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통로쪽 선호하는 분 의외로 많네요.
근데 예매 상황보면 중앙의 중심부터 차 들어가요. 신기하지요.
저 세 분다 패스하는 것도 저랑 같네요. 덧글 쓴 분 넘 예리하십니다.

근데 저런 책 읽고 긍정의 자기 선언으로 연결시키는 분도 많으니 인정하고 또 인정합니다. 저부터 저렇게 열심히 못 산 건 분명하니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