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새해엔 안녕하기를

  ‘안녕’ 패러디 열풍이 식질 않는다. 지난 연말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내용의 공감 유무를 떠나 답답한 현실을 토로한 그 패기와 용기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사실 대자보란, 소셜 네트워크가 구축되지 않았던 70,80년대에 그 정점을 찍고 점차 사라져 가던 표현 방식이었다. 컴퓨터의 발달로 각종 세련된 문명 소통의 이기들이 속속 등장하자 대자보 형식은 대화의 장이라는 고유의 빛을 잃어갔다. 그렇게 잊혀 가던 대자보가 어느 날 아날로그적 감성과 진중함으로 무장한 채 대중들의 폭발적 공감대를 불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대자보의 시발점이 되었던 고려대학교 담벼락은 아예 대자보길이 만들어질 정도란다. (여전히 그런지 궁금하다!!)

 

 

  새해가 된 지금도 수많은 ‘안녕’ 시리즈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단순 대자보로 그치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넘어온 대자보 열풍은 급기야 ‘페이스북’에 안녕하십니까, 라는 코너를 만들게까지 했다. 정책의 불합리, 공권력의 부당성, 노동자의 권익 등 묵직한 주제뿐만 아니라 살림살이의 힘겨움, 취업의 어려움, 연애사의 고달픔 등 개별자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내용은 다양하기만 하다. 이성과 감성에 적절히 기댄 대자보가 전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는 마음 어루만지기 프로젝트가 된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지난 한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체적 정서가 ‘안녕들 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대내외적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수십 년 째 이어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망언,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북한 정권의 위협적인 언사 등 외적인 스트레스 받는 것도 모자라 내적으로는 정부와 국민 간의 매끄럽지 못한 소통 때문에 곳곳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난무했다. 대자보가 나오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이다.

 

 

  새해엔 제발 안녕들 하시냐는 자조 섞인 인사말이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말로만!) 실현되기 힘든 꿈이 될지라도 명랑 사회가 가까웠으면 하는 바람이 단순한 새해 인사가 아니기를 바라본다.

 

 

 

 

 

2.아직 멀었다

 

  별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어제 뜬 태양이 오늘 그 자리에 다시 솟고,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그대로 겨울 나목에 스친다. 마음가짐이야 조금 달라졌겠지만 새해라고 별달리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으니 갑자기 일상이 변할 리 없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변한 것 없는 새 하루가 지나간다. 그저 누군가 신년 메시지를 희망차게 전할 때 다른 누군가는 절망의 장탄식을 호소하는 것,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점진과 급속이란 완급의 페달을 조절하며 우리 삶은 그렇게 나아간다.

 

 

  가끔씩 잔잔한 파문 같은 뉴스에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는 것,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의 단신 기사 하나.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생도를 퇴학시킨 육군사관학교의 처분은 위법하다는 항소심 내용이 눈길을 끈다. 도덕적 한계를 위반했다는 이유 등으로 임관을 앞두고 퇴학 처분을 받은 피고가 일반병으로 입영하라는 통지를 받자 소를 제기했다. 위법 판결이 내려졌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한데 학교 측 반응이 가관이다. 품위유지 의무 위반을 한 피고의 퇴학처분은 정당하다며 상고할 계획이란다.

 

 

  기사만 보자면 학생은 퇴학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다. 성폭행을 한 것도, 교내에서 풍기문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주말 외박 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퇴학당할 일인가? 국가인권위원회는 금주·금연·금혼 등 이른바 ‘3금 제도’ 위반자에게 내린 육사의 퇴교 조치를 인권침해로 규정해 개선 요구를 했다. 중요한 건 이것을 학교 측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성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규제하는 웃지 못 할 사회를 살아가는데,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직은 많다. 질서유지라는 명분하에 개인의 기본 인권까지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 이런 상황이 온당한 것일까. 재판부의 말처럼 ‘국가가 내밀한 성생활 영역을 간섭하고 제재하는 건 개인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

 

 

 

 

 

 

3.비인정(非人情)의 풀베개

 

  우리 일상의 큰 축은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달리 말하면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에서 벗어날수록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인은 갈등 속에 그 둘을 업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고, 예술가는 그 두 짐을 과감하게 놓아버리려고 시도하는 자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완전하게 일상성에서 벗어나기도 힘들기 때문에 예술이 위대하게 보이는 거다. 따라서 예술과 일상은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일상과 불화하는 예술인의 내면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작가군 중의 한 명이 나스메 소세키이다. 예술가 소설에 속하는『풀베개』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을 보자.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세파에 영향 받는 인간 갈등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설득시켜주는 작가가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사람 관계를 유지하는 소시민은 이지만을 따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주변과 삐거덕거리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타심을 발휘하면 제 기가 다 빠져버린다. 둘 다 힘겹다. 이제 그만 악다구니와 눈치만 있는 돌베개 벤 것 같은 인간사를 벗어나, 시와 그림이 있는 풀베개 베도 좋을 신선의 세계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소세키는 인정(人情)에서 떠나 비인정(非人情)의 세계, 즉 자연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감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행을 감행한다. 화공이 되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비인정의 세계에서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객관화될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새로운 연민이 생기고, 새로운 갈등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 다만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그 과정이 예술혼이 된다는 걸 알겠다. 소시민은 일상과 사투하고 예술가는 비인정의 세계를 갈망한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

 

 

 

 

 

 

 

 

 

 

 

 

 

 

 

 

 

 

 4. 수많은 밥

 

  내 행동과 말은 내가 한 것이되 내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자의 것일 뿐이다. 나는 궁궐을 지었지만 상대는 초가를 보고, 한 번 뱉은 말은 발 없이도 천리를 내달린다. 무지개란 진실은 하나로 뜰 뿐인데(가끔 쌍무지개가 뜨긴 하는구나!) 그걸 전하는 자나 해석하는 자는 각자 다르게 말한다.

 

 

  내 의도와 상대방의 해석은 같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의도는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꽃을 꽃이라고 말할 땐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그처럼 명명백백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은 우리 삶은 수많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빗대 말하는 그것의 최종 목표도 결국은 진실 그 하나이다. 하나인 진실을 두고 말하는 이나 받아들이는 자 각자 ‘다르게’ 말한다. 그러다 보니 그 둘 사이엔 완벽한 심상의 합일점을 찾기가 어렵다. 말하는 자는 돌려 말하고 이해하려는 자는 의중이 담긴 그 수수께끼를 제 식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소통은 그만 너와 나의 게임이 되고 만다.

 

 

  봉준호 감독의 걸작 ‘살인의 추억’ 마지막 신에서 송강호가 내뱉는 한 마디는 ‘밥은 먹고 다니냐?’이다. 명대사 중의 명대사로 뽑히는 이 말을 두고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한 수로 그 의미를 해석했다. 형사 역할인 송강호가 유력한 용의자 역할이었던 박해일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껴 한 말이란 게 당시 관객의 대체적 정서라고 했다. 지난 가을 영화 개봉 십 주년 행사 때 송강호가 그 대사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를 내놓았다. 자신의 의도는 터널 속에 있을지도 모를 진짜 범인에게 ‘이런 짓 하고도 밥이 넘어 가느냐’라는 의미로 한 애드리브 였다고 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돼도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느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라는 덧붙임 말이 눈길을 끈다. 내가 한 언행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공감하는 순간이다. 내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은 순전히 상대에게 달렸다. 내 언행의 전부를 상대가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욕심이다. 나는 말하고 상대는 해석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것이 정답이다. 세상엔 수많은 밥이 있고, 그 밥을 먹는 방식은 입맛마다 다르니.

 

 

 

 

 

5. 찔레엔 가시

 

  찔레덩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보편적 정서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얗게 핀 찔레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반면에 오줌소태나 불면증으로 밤잠을 설치는 이라면 빨간 찔레 열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천식이나 치통으로 고생하는 어른들이라면 그 효험을 상기하며 일찌감치 찔레뿌리라고 맞받아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가정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일 뿐이다. 찔레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찔레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꽃과 열매 뿌리 모두 중요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가시’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느냐고 항의할지도 모른다. 성가시고 위협적이라서 부러 피했다고 변명하는 것이야말로 찔레의 화를 돋우는 일이다. 찔레 입장에선 가시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될 터이니. 질곡의 환경에서 제 한 몸 유지 보존케 하는 최소한의 보호막으로 가시는 필요했다.

 

 

  쌍둥이 소녀가 엄마랑 산책을 했다. 향기로운 찔레덩굴 앞에서 큰아이가 말했다. 여긴 이상한 곳이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왜 그러냐고 엄마가 물었다. 흰 꽃을 둘러싼 가시가 성가시다고 했다. 당황한 엄마가 대답을 놓치자 동생이 다가와 말했다. 여긴 참 좋은 곳이라고. 엄마가 다시 왜 그러냐고 묻자 동생이 답했다. 가시 사이에 흰 꽃이 피었지 않느냐고.

 

 

  긍정의 자세, 선한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이런 비유가 진부하거나 조금은 불편하게 보이는 건 왜일까? 뭐든 한쪽 시선으로만 보면 교훈이나 길들이기 식이 되어 버린다. 좋은 소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칼날은 칼등에 우선한다. 칼날이 위험하다고 칼등으로 스케이트를 탈 순 없다. 마찬가지로 멧돼지 앞의 찔레는 제 가시가 꽃보다 우선한다. 따가운 가시가 성가시다고 찔레꽃으로 멧돼지를 막을 순 없다. 찔레의 속성은 꽃과 가시를 모두 포함한다. 찔레덩굴에서 흰 꽃만 보는 건 제대로 본 게 아니다. 숨은 가시의 의미까지 보듬어야 제대로 보는 거다. 약자에게 가시는 위협용이 아니라 실존적 생존의 방식이다.

 

  왜 정치하는 사람들만 그걸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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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1-10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 님, 잘 지냈나요? 화제 글 보고 들어왔어요.
필력은 여전하시네요.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 " -에 동의합니다.

『풀베개』의 그 유명한 구절을 잘 읽었어요. 저는 나스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작가에게 반해 버렸죠.

새해엔 자주 뵙기를...

다크아이즈 2014-01-13 11:40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의 꾸준한 서재행보를 응원합니다.
저도 새해에는 꾸준하고 싶어요.
도려님도 좋지요. 독서클럽에서 읽은 기억이...
소세키의 매력을 느끼는 동지들이 많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에요.
그렇게 쓸 수만 있다면, 그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1-1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은 먹고 다니냐... 정말 촌철살인이었죠. 애드립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송강호는 종종 정말 염통이 쫄깃해지는 순간에 엉뚱한 애드립을 해서
효과를 100배 더 올리는 재주가 있습니다.
< 복수는 나의 것 > 에서는 신하균 죽기기 전에 " 내가 너 미워하는 거 아닌 거 알지 ? " 하면서
죽이는데.. 아, 이건 진짜 송강호 아니면 생각할 수 업는 애드립 같더라고요..


+

소새키 읽으면서 정말 깜작 놀랐던 것은 구닥다리 옛날 분이니 구닥다리 소설이겠네, 라고 읽었다가 그 문장의 현대성에 깜작 놀라서 정자세르 하고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소세끼,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크아이즈 2014-01-13 11:47   좋아요 0 | URL
송강호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서 전 놀랐어요.
제가 설경구 다음으로 별로 안 좋아하는 배우가 송강호예요.ㅋ
이유 같은 건 없어요. 답이 된다면 이병헌 같은 배우를 좋아해서랄까. 좋아하는 배우 성향이 다르다는 게 이유가 되는지조차 모르겠네요. 어쨌든 연기자 이병헌의 눈빛을 제가 무척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마치 개그계의 신동엽을 제가 유재석보다 천만 배는 좋아하는 것처럼요. ㅋ 사설이 길었네요.

맞다, 신하균의 저 말도 있네요. 저것도 송강호의 에드리브란 말이지요? 못 말리는 송강호 ㅋ 그나저나 송강호 없는 한국 영화계의 흥행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네요.

소세키는 현대적이다,에 절대공감이요. 소세키처럼만 쓸 수 있다면 지금도 통하지요. 언제나 글쓰기는 힘겹습니다. 즐건 작업이 되어냐 하는데...
곰발님은 새해엔 쭉 이대로만 가신다면 대박 터질 것입니다.^^*


2014-01-10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3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4-01-10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강호는 애드립을 잘한다고 들었어요. 내가 한 어떤 말이나 행동이 의도와는 달리 해석되고 과녁을 벗어날 때 당황스러워요. 그치만 과녁의 재질이나 각도를 내가 잘 못 이해한 경우일 수도 있겠거니 하지요. 오늘 점심 같이 하며 안녕들하십니까,와 가시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했는데 또 보네요. 바쁘신 중에도 다양한 단상들을 이렇게라도 정리하며 넘어가는 팜므님.♥♡ 저도 오늘 분발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어요. 열다섯살 연상의 청춘에게서요.

다크아이즈 2014-01-13 11: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러려니의 생활화... 그게 안 되면 스스로 힘들어지지요.
이건 나이가 들면서 훈련한 결과이지, 원래 성정과는 큰 관계가 없는 것 같아요.
박선생님에 대한 최대의 찬사 - 열다섯살 연상의 청춘, 맞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