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팥빵, 상어, 숭어의 공통점은? 모두 한반도 어디에선가 이번 설 차례상에 올려질 음식이란 것. 카스테라와 팥빵은 제주도 차례상에 등장한다. 제주는 논농사가 힘든 섬. 그래서 차례상에 쌀로 만든 음식을 올리기 어려웠다. 제주 사람들은 대신 ‘상외떡’을 올렸다. 상외떡은 밀가루를 발효시켜 팥소를 넣고 둥글게 빚는 찐빵의 일종. 고려시대 중국 원(元)나라에서 전해진 ‘상외떡’에서 유래됐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물론 요즘 제주에서는 쌀이 비싸지도, 구하기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빵을 올리는 전통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카스테라·팥빵·롤빵 등이 차례상과 제사상에 오른다. 

 

상어, 더 정확히 ‘돔배상어’는 안동 등 경북지역 차례상에 빠지지 않아왔다. 돔배상어란 상어를 말린 것. ‘돔배고기’라고도 불린다. 이 지역에서 왜 상어고기를 썼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서 답을 유추해볼 수는 있다.

일본에서 상어는 경북과 비슷한 지리 조건의 산골마을에서 주로 먹던 생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이런 지역에서 생선을 먹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상어는 다른 생선과 달리 배뇨기관이 발달하지 않아 몸에 암모니아 성분이 많다. 그래서 쉽게 상하지 않아 보름 정도는 신선도가 유지된다고 한다. 소금이 잔뜩 들어가는 간고등어 만드는 기술이 바닷가에 있는 도시나 마을이 아닌 내륙 깊숙이 틀어박힌 안동에서 발달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경북에서는 말린 오징어가 차례상에 오르기도 한다.

전남 목포 근방에서는 숭어를 차례상에 올리기도 한다. 추운 겨울에도 이 근처 바다에서 숭어가 잡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전통을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해온 모양이다. 한국민속연구소 주강현 소장은 “전통의 기본은 지키되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긴, 전통 음식은 아니지만 생전 부모님, 조부모님이 즐겨 드시던 음식을 제사상, 차례상에 올리는 경우도 늘고 있고 미국 재미동포 차례상에는 피자와 와인이 오르기도 하지 않는가.

(김성윤기자)  조선일보 200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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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2009년 지리올림피아드 문제 중 한 문제가 아마도 이 신문기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듯 하다. 지문 내용과 답지 내용이 거의 같다. 그러나 좀 더 다듬어서 출제했으면 더 좋았을 듯...뭐 지올문제가 다 그렇지만, 아쉽다!! 

  

‘유럽의 공장’ 동유럽, 금융위기로 흔들

“북아프리카 4개국 임금 싸고 물류비 적다”

에어버스 등 서방 기업들 앞다퉈 공장 이전


지중해 등 천혜의 자연환경과 사하라 사막, 석유 등 풍부한 천연자원, 영화 ‘카사블랑카’….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4개국을 통칭하는 ‘마그레브’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이곳이 최근엔 ‘세계의 공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유럽의 공장’ 동유럽이 경제위기로 휘청거리는 동안 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가진 데다 유럽과 가까워 ‘동유럽의 대체기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

▽‘일몰의 땅’에 제조업의 ‘해가 뜨다’=‘마그레브’는 아랍어로 ‘해가 지는 땅’이라는 뜻으로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4개국을 가리키는 말.

최근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이 일몰의 땅에 자동차 항공 전자 통신 등 첨단산업 공장이 속속 유치되면서 제조업의 해가 뜨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5년간 이 지역에 대한 제조업 투자규모는 300억 달러에 이른다. 이미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카사블랑카에 공장을 세운 프랑스 르노 자동차는 모로코 서북부 해안도시 탕헤르에 직원 6000명 규모의 자동차 조립공장을 건설 중이다. 중국 자동차업체들도 모로코에 조립공장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 유럽의 항공기 제조업체들도 몰려오고 있다. 유럽 합작사 에어버스는 내년 튀니지 북부 므기라에 7600만 달러 규모의 조립공장을 열 계획이다. 미국 보잉사도 카사블랑카에 모로코와 합작 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항공엔진 제조사인 프랑스 사프란도 마그레브 전체에 6개의 공장을 갖고 있다.

일본 스미토모 전기는 폴란드 불가리아 등 동유럽의 전자전기 생산기지를 모로코 탕헤르와 튀니지 부살렘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밖에도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한 인프라 구축, 자원개발, 신도시 및 관광지 개발 등에도 서구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왜 마그레브인가=동유럽이 유럽연합(EU) 가입 이후 인건비가 대폭 올라 저가 생산기지의 매력을 잃은 데다 최근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아 국가 부도위기까지 몰린 게 계기가 됐다. 이곳은 금융시장 개방 정도가 낮아 최근 금융위기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다. 실제로 경제위기 이후 투자가 급감한 동유럽과 달리 지난해 마그레브 지역 투자는 5% 줄어드는 데 그쳤다.

임금이 저렴하면서도 노동력의 질이 우수하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르노자동차 루마니아 공장의 직원 평균 임금은 671달러에 달하지만 마그레브 지역에서는 195∼325달러밖에 들지 않는다.

특히 튀니지는 공교육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아프리카 최고의 인적자원을 자랑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튀니지의 수학 및 과학교육 수준이 세계 7위라고 평가했다.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에 속하지만 유럽과 가까워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13km만 가면 바로 스페인에 닿는다. 동유럽에 비해 인프라가 낙후되어 있고 아랍권에 속해 테러가 잦다는 것이 약점으로 꼽히고 있지만 전망은 밝다.

제임스 모로 씨티그룹 북아프리카 법인장은 “생산기지를 옮기거나 새로 건설하려는 기업들에 마그레브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동아일보 2009.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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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다른 남북 대립 격화…연방제 추진
벨기에가 북부 네덜란드 언어권과 남부 프랑스어권의 대립이 국가 분열 위기로 치달으면서 스위스식 연방제 개헌을 추진할 전망이다.
인구 1050만명인 벨기에는 국민의 60%를 차지하는 네덜란드어 사용 북부 플랑드르 지역이 경제적으로 낙후된 남부 프랑스어권 왈로니아 지역에 대한 정부의 경제 지원에 반발해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국정 혼란에 빠진 상태.

지난주 이브 레테름 총리가 지역 간 합의에 실패하자 사의를 표명하면서 벨기에가 남북으로 두 동강 날 것이란 우려가 증폭됐다. 이에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는 총리 사표를 반려하고 프랑스어권과 네덜란드어권, 독일어권 출신 3명으로 구성된 팀을 구성해 국정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지역 반목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토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벨기에는 현재의 언어권별 연방제에서 더욱 느슨하게 지역 자치정부의 권리를 확대, 스위스 연방제를 모델로 한 개헌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이 21일 전했다.

벨기에는 지난 1830년 건국 이래 북부의 네덜란드 언어권 지역과 남부의 프랑스어권, 그리고 북부에 위치했으나 프랑스 언어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수도 브뤼셀 지역, 그리고 인구의 1%를 차지하는 동부 독일어 지역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어왔다.

벨기에는 언어와 문화 차이를 수용하기 위해 그동안 지난 1970년 개헌 이래 4차례의 개헌을 통해 지방자치를 확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런 개헌으로 유럽의 작은 나라인 벨기에에는 7개의 의회와 60여석의 국무위원급 장관직이 있고, 의회도 남부와 북부권 출신 정당이 대립하는 등 국정 난맥상이 가중돼 왔다.

여기에 최근 경제적으로 부유한 북부지역에서 연간 30억~60억달러씩 가난한 남부지역에 지원하는 것에 대해 북부 출신 여당이 반발하며 언어권별로 해당 지역의 의료보험제도와 실업보험, 사법기구를 독립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갈등이 폭발하고 있다. 최근 들어 남북 대립이 격화되면서 벨기에 언론은 국가 분리 독립 가능성이 연일 신문 지면을 도배하고 있는 실정.

그러나 북부지역의 자치 확대를 주장하는 집권 여당권도 막상 국가 분리를 원하지는 않고 있어 지난 1992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독립한 것과 같은 사태가 당장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지희 기자(jgo@heraldm.com)
헤럴드경제 2008.07.21 

 

벨기에 빈부차 지역갈등 악화일로 남북 분열 위기  

유럽연합(EU) 본부가 위치한 ‘유럽 통합의 수도’ 벨기에 브뤼셀이 정작 본국의 분열에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벨기에의 국왕 알베르 2세는 이브 레테름 총리의 사임과 붕괴된 연정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여·야 정치인들과 협의를 시작했다고 16일 AFP통신 등 외신이 보도했다. 레테름 총리는 지방 자치권 확대와 지역 통합을 위한 개헌 작업과 관련, 협상 타결 시한을 15일로 제시해 왔으나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해 지난 14일 오후 사의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취임 4개월 만이다. 벨기에는 레테름 총리 취임 이전에도 지난해 6월 총선 후 약 9개월 동안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못해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혼란을 겪어왔다.

갈등의 뿌리에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북부 플랑드르 지방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로니아 지방의 반목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왈로니아 지역은 플랑드르와의 경제적인 격차로 상당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플랑드르의 국내총생산(GDP)은 EU 평균의 124%에 이르는 반면, 왈로니아는 90%에도 못 미친다. 실업률 역시 왈로니아 측이 15%로 플랑드르에 비해 3배나 높다. 최근에는 물가상승률이 2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어 갈등이 심화될 우려가 높다.

벨기에가 하나의 통합된 국가로 남을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양측간 분위기는 험악하다. 레테름 총리 역시 사의를 표명하며 “연방 합의제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다. 독일 일간 디 타게스차이퉁은 “경제적 측면에서 벨기에는 가장 성공적인 ‘실패한 국가’ ”라고 평했다. 외교, 안보, 통화 정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능이 분권화돼 있어 당장 큰 혼란에 빠지지는 않겠지만, 딱히 해결책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레테름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음에도 불구, 국왕인 알베르 2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새로운 총리를 임명하든가, 아니면 조기 총선을 실시하는 방안이 선택지로 떠오르고 있다.

미 시사주간 타임은 “알베르 2세로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며 “유럽 의회 선거와 지방 선거가 실시되는 내년 6월 총선을 함께 치를 때까지 주요 개혁 사안을 잠시 미루고 레테름 총리를 재신임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박지희기자 violet@kyunghyang.com ⓒ 경향신문 2008.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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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러운 세상에서 그 더러움도 깨끗하게 만들지 못한 채 깨끗한 체하는 철학도 더럽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은 세상의 근본과 근원만 생각한다면서 사실은 그것을 확보하지 못하는 철학, 그러면서 근본과 근원을 잊은 세상을 입바른 말로 비판하기 좋아하는 철학도 제 손에 묻은 때와 피를 보지 못한다.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려고 해도, 논술이나 논리로 특성화를 모색하려고 해도, 도덕과 윤리의 이름 뒤에 숨어도, 철학은 구차스런 더러움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진석은 『더러운 철학』(개마고원, 2010)에서 위와 같이 선언한다. 철학이 더럽다면 남아 날 학문이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학문이 다 더럽다고 보아야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올바르지 않다. ‘더러운 철학’이라기보다는 ‘더러움에 관한 철학’으로 붙여야 옳다. 그런데 왜 ‘더러운 철학’인가? 겸양의 뜻인 것 같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하길 좋아한다. 물론 세상이 더러운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손가락질을 하면서 자세히 관찰해 보시라. 다섯 손가락 중 앞을 향한 건 둘이요, 셋은 자신을 향한다. 나 역시 더럽거나 더러울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야 더러움에 대한 소통이 가능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의도적으로 더러움을 껴안을 필요도 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더러움은 상종해선 안될, 피해야만 할 무엇으로 여겨진다. 세상의 모든 것을 탐구해야 할 학문마저 더러움을 깊이 있게 분석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더럽다’는 수준의 피상적인 관찰로만 끝내기 일쑤다. 이에 김진석은 이의를 제기한다.

“오늘날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더러움에 빠지기 쉽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역설적이게도 더러움을 무릅써야 한다. 철학은 아마도 먼저 더러움에 빠지고, 먼저 더러움을 무릅쓰는 공부의 이름일 뿐이다. 소위 인문적 지식과 담론들뿐 아니라 전통적인 사회과학적 지식과 담론들도 학문적 담론의 더러움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더러움을 피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여긴다. 한국의 정치학자들이 정치에 대해 쓴 모든 논문과 저서들을 다 읽는다면 한국정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까? 어림도 없다. 정치학자들은 더러운 걸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더러운 현상이라도 거시적으로 고상하게만 다룰 뿐, 선거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것에 대해 알기는 어렵다. 그건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선거 브로커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선거 브로커들이 하는 일이 왜 논문이나 저서의 주제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이른바 ‘상아탑(象牙塔)’이라는 신화가 학문을 버려놓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말과 삶이 겉도는 일이 벌어진다. 정치는 마치 침뱉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성공을 한 사람들은 권력의 과실을 누리지만, 그건 마치 침을 맞아가면서 더러운 도박을 한 것에 대한 보상처럼 여겨진다. 어린 아이들이 맛있는 걸 혼자 먹기 위해 먹을 것에 침을 퉤퉤 뱉어놓는 것처럼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정치가 욕을 먹을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걸 잘 알고있는 듯 하다. 그런데 정치가 더럽다고 침을 뱉는 사람들은 얼마나 깨끗한가? 김진석이 던지는 질문이다.

“역설적으로 현실정치는 더럽지만, 그것이 더럽다는 것이 뻔히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곧 그것이 권력관계의 뻔뻔한 극단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최소한 위선적이지는 않다. 위악에는 잘 빠지지만, 위선에는 덜 빠진다. 그와 달리, 실제로는 사교를 하고 인맥을 쌓는 일에 열중하면서도, 자신은 정치 바깥에 있고 또 자신들의 행위는 그저 인간적인 행위라고 믿는 사람들의 행위는 위선에 잘 빠진다. 이 점에서 나는 옳은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 말은 좀더 설명이 필요하겠다. 내 식으로 설명을 해보겠다. 나는 옳은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그걸 자신의 권력 행사를 위해 쓰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달리 말하자면, 진보의 가치를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하거나 남을 비난하기 위해 써먹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옳은 말을 할 때엔 겸손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도덕적 분노가 치밀어 겸손을 잃을 수는 있지만, 상습적으로 진보의 가치를 사유화하는 건 곤란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시장에선 그렇게 사유화를 하는 사람들이 잘 팔린다. 진보의 비극이요, 더러움 철학의 부재다.

진보주의자들이 무조건 ‘경쟁’을 매도하는 걸 볼 때마다 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특히 치열한 경쟁을 통해 명문대학을 나와 사회적 발언권을 얻은 뒤에 경쟁을 매도하는 이들이 많다. 아름답게 볼 수도 있겠지만, 더럽다고 볼 수도 있다.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정녕 경쟁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김진석이 제기한 다음과 같은 의문에 공감하는 이유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이름 아래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인 경쟁이 부추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근본주의적 자연 개념은 너무 단순하게 경쟁을 무시하고 백안시하는 것은 아닌가? 문명적 인간 사이의 경쟁과 권력관계를 너무 부정적이고 악의적으로만 해석한 나머지, 어떠한 폭력도 없는 순수한 공생, 어떠한 갈등도 없는 평화적 공생만을 목적으로 삼는 실수가 일어나는 게 아닐까?”

이명박 정권은 더럽다. 더러워도 이만저만 더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이명박 정권만 더러운 것인가? 그래서 이명박 정권에게 ‘파시즘’ 딱지를 붙이는 것인가? 김진석은 이 딱지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이명박 정부가 경찰과 정보기관의 힘을 빌려 통치를 하는 경향이 심해지자,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 정부를 파시즘 정부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 글을 쓰는 2009년 8월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권위주의적이고 퇴행적인 조짐들이 많이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이 정부를 파시즘 정부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본다.…만일 선거에서도 유권자들의 정부 비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비판하는 관점에서 보면 매우 불행한 일일 것이다. 그 경우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어쨌든 선거에서 표현된 민의를 존중해야 할까? 아니면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가 파시즘에 물들었다고 말해야 할까?

이번 지자체 선거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이미 한국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이명박 정권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 주었다. 그땐 파시즘이 아니었는데 그후에 파시즘이 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그때부터 온 사회가 파시즘에 물들었다는 것인가? 혹 ‘더러움 철학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착각은 아닐까? 즉, “나는 깨끗하지만 너는 더럽다”는 이분법으론 이 세상을 설명할 길이 없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이분법에서 기만적인 위안을 찾으려 드는 게 아닐까? 이명박 정권의 더러움 이전에 그 어떤 다른 더러움에 대한 분노와 염증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깨끗하지만 세상은 더럽다고 믿는 분들에게 『더러운 철학』을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선샤인뉴스 2010.2.19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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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여전히 ‘박정희 신화’가 지배하고 있다.…사회적 양극화와 실업난이 심할수록 박정희 시대의 향수에 젖는 사회가 과연 미래를 향해 갈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보수세력만 책임질 일은 아니다. 진보와 개혁을 주창한 세력이 서민들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라는 자책을 불러온 것도 박정희 부활에 기여했다. 박정희 모델을 뛰어넘는 사회 발전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진보세력의 한계 역시 박정희 신화를 띄웠다. 이렇게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의 반성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2009년 10월 26일자 사설 ‘왜 아직 박정희를 넘지 못하는가’의 일부다. 왜 그럴까? 왜 아직 우리는 아직 박정희를 넘지 못하는 걸까?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의 『동원된 근대화: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후마니타스, 2010)은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기도 한다. 이 책은 ‘성장과 경제적 성취 대 폭압과 수탈’, ‘동의 혹은 헤게모니 대 폭압과 강압’, ‘산업화 대 민주화’, ‘수탈 및 착취 대 근대화’, ‘분배를 수반한 성장 대 불평등 성장’ 등의 대립 구도라고 하는 이분법적 시각을 넘어서 매우 정교한 분석과 복합적인 이론적 구성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읽기에 쉽거나 부드러운 책은 결코 아니지만, 기존 이분법 투쟁에 지친 사람들은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뛰어넘어 공부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매력적인 책이다. 특히 진보적이면서도 기존 진보적 시각에서 좀 게으르다거나 ‘도덕 과잉’의 냄새를 맡은 사람이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책이기도 하다.

조희연은 박정희 시대의 구조적 성격을 ‘근대화를 향한 동원’을 주된 특성으로 하는 체제로 파악하고, 이런 점을 드러내기 위해 ‘개발동원체제’라는 용어를 쓴다. 개발동원체제는 ‘근대화(개발, 산업화, 발전 혹은 성장)’라는 국민적․민족적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기존의 박정희 체제 분석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크게 보아 세가지다.

첫째, 복합적이다. 박정희 체제의 폭압과 모순, 위기를 강조하는 진보적 서술에서 출발하되, 새로운 문제 제기들을 단순히 비판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도전들에 대면하면서 기존의 진보적 인식틀을 성찰적․확장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박정희 시대를 재인식한다. 둘째, 보편적이다. 박정희 체제를 한국만의 유일무이한 ‘특수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일반적’ 특성을 갖는 대상으로 파악한다. 셋째, 총체적이다. ‘하나의 박정희’가 아니라 ‘다양한 박정희’가 존재는 하는 점에 주목해 박정희 체제의 ‘모순적 복합성’을 규명한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영 모르겠다고 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조희연은 진보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투철한 자기성찰과 더불어 기존 진보적 시각의 한계를 지적한다. 예컨대, 조희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론적 실천이 정치적 실천의 성찰적 계기로 작동하기보다는, 이론적 실천이 정치적 실천과 곧바로 동일시되거나 도구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이론적 실천의 도구화’는 운동적 언어가 쉽게 분석적 언어로 치환되어 동일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속에서 분석의 문제는 쉽게 ‘입장’의 문제가 된다.…일종의 ‘본질주의’적 분석이 진보적 분석을 지배하게 되면서, 그 분석의 공백에 뉴라이트적인 현대사 분석이 존재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진보적 분석 내부에서의 ‘순수주의’ 같은 것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조희연은 조심스럽게 또는 고급스럽게 표현했지만,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간 박정희를 보는 진보진영의 시각은 도덕적 분노 일변도여서 오히려 ‘박정희 붐’에 일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일상적 삶에서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이면서도 박정희를 종합적으로 긍정 평가하는 대중이 많다. 이들의 생각이 분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분석을 시도하게 되면, ‘박정희는 무조건 악인’이라고 낙인 찍는 식의 진보파가 펄펄 뛰며 반격해온다. 박정희 시대에 저질러진 인권유린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흥분해대기 시작하면, 어느덧 소통과 논쟁은 실종되고 누가 더 민주주의와 인권에 투철한가 하는 ‘자격 검증 시험’으로 변질된다. 그렇게 해서 생각이 같은 사람의 뜨거운 박수는 받을지 몰라도, 이는 그 어느 중간 지점에 있는 대중을 박정희 찬양 세력의 대열에 들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격이다.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된 점도 있다. 왜 우리는 아직 박정희를 넘지 못하는가? 이를 둘러싼 논쟁과 논란은 뜨겁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딱 두가지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기를 옛날의 왕보다 훨씬 더 강한 철권으로 지배한 지도자가 박정희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논쟁과 논란이 평행선을 달리며 상호 접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이 두가지 이외의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아닌 다른 독재자가 그 시기를 책임졌다면 오늘과 같은 번영을 이룰 수 있었을까? 사실 이건 사소한 질문일 수 있음에도 우리는 주로 이 문제를 놓고 논쟁과 논란을 벌인다. 박정희 찬양 세력은 ‘성공’이라는 결과에 주목하고, 박정희 비판 세력은 ‘성공’의 정체와 더불어 그 ‘그늘’에 주목한다. 각자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여기에 이해관계까지 끼어든다. 박정희의 집권 기간은 18년이었지만 사실상 그 체제를 연장한 5공화국과 적어도 인적 구성에서 5공을 연장한 노태우 시기까지 합하면, 박정희 체제의 기득권 세력은 30년 넘게 한국을 지배해 온 셈이다. 3당통합으로 집권한 김영삼 정권도 반쪽은 그 체제의 연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박정희를 넘어서는 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게다가 지도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 존재하는 ‘비극적 죽음’의 프리미엄이라는 문제도 있다. 조희연이 잘 지적했듯이, “한국 역사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의 경우 ‘비운에 간’ 인물들에 대해서만 ‘동의적’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우리 현대사의 경우, 지배에 대한 동의 자체가 적고 지배의 불안정성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현실 정치인들은 민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은 정치인들에 한해서, 기대가 투영되는 식으로, 정치적 지지가 남아 있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동원된 근대화’는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지도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그런 ‘동원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난 한 세대에 걸쳐 박정희의 명예를 자신의 명예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층으로 우뚝 섰거니와 ‘비극적 죽음’에 약한 민중의 정서가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를 읽으면서 박정희 체제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차분하게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선샤인뉴스 2010.1.25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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