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더러운 세상에서 그 더러움도 깨끗하게 만들지 못한 채 깨끗한 체하는 철학도 더럽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은 세상의 근본과 근원만 생각한다면서 사실은 그것을 확보하지 못하는 철학, 그러면서 근본과 근원을 잊은 세상을 입바른 말로 비판하기 좋아하는 철학도 제 손에 묻은 때와 피를 보지 못한다.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려고 해도, 논술이나 논리로 특성화를 모색하려고 해도, 도덕과 윤리의 이름 뒤에 숨어도, 철학은 구차스런 더러움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진석은 『더러운 철학』(개마고원, 2010)에서 위와 같이 선언한다. 철학이 더럽다면 남아 날 학문이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학문이 다 더럽다고 보아야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올바르지 않다. ‘더러운 철학’이라기보다는 ‘더러움에 관한 철학’으로 붙여야 옳다. 그런데 왜 ‘더러운 철학’인가? 겸양의 뜻인 것 같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하길 좋아한다. 물론 세상이 더러운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손가락질을 하면서 자세히 관찰해 보시라. 다섯 손가락 중 앞을 향한 건 둘이요, 셋은 자신을 향한다. 나 역시 더럽거나 더러울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야 더러움에 대한 소통이 가능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의도적으로 더러움을 껴안을 필요도 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더러움은 상종해선 안될, 피해야만 할 무엇으로 여겨진다. 세상의 모든 것을 탐구해야 할 학문마저 더러움을 깊이 있게 분석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더럽다’는 수준의 피상적인 관찰로만 끝내기 일쑤다. 이에 김진석은 이의를 제기한다.
“오늘날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더러움에 빠지기 쉽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역설적이게도 더러움을 무릅써야 한다. 철학은 아마도 먼저 더러움에 빠지고, 먼저 더러움을 무릅쓰는 공부의 이름일 뿐이다. 소위 인문적 지식과 담론들뿐 아니라 전통적인 사회과학적 지식과 담론들도 학문적 담론의 더러움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더러움을 피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여긴다. 한국의 정치학자들이 정치에 대해 쓴 모든 논문과 저서들을 다 읽는다면 한국정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까? 어림도 없다. 정치학자들은 더러운 걸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더러운 현상이라도 거시적으로 고상하게만 다룰 뿐, 선거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것에 대해 알기는 어렵다. 그건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선거 브로커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선거 브로커들이 하는 일이 왜 논문이나 저서의 주제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이른바 ‘상아탑(象牙塔)’이라는 신화가 학문을 버려놓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말과 삶이 겉도는 일이 벌어진다. 정치는 마치 침뱉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성공을 한 사람들은 권력의 과실을 누리지만, 그건 마치 침을 맞아가면서 더러운 도박을 한 것에 대한 보상처럼 여겨진다. 어린 아이들이 맛있는 걸 혼자 먹기 위해 먹을 것에 침을 퉤퉤 뱉어놓는 것처럼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정치가 욕을 먹을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걸 잘 알고있는 듯 하다. 그런데 정치가 더럽다고 침을 뱉는 사람들은 얼마나 깨끗한가? 김진석이 던지는 질문이다.
“역설적으로 현실정치는 더럽지만, 그것이 더럽다는 것이 뻔히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곧 그것이 권력관계의 뻔뻔한 극단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최소한 위선적이지는 않다. 위악에는 잘 빠지지만, 위선에는 덜 빠진다. 그와 달리, 실제로는 사교를 하고 인맥을 쌓는 일에 열중하면서도, 자신은 정치 바깥에 있고 또 자신들의 행위는 그저 인간적인 행위라고 믿는 사람들의 행위는 위선에 잘 빠진다. 이 점에서 나는 옳은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 말은 좀더 설명이 필요하겠다. 내 식으로 설명을 해보겠다. 나는 옳은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그걸 자신의 권력 행사를 위해 쓰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달리 말하자면, 진보의 가치를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하거나 남을 비난하기 위해 써먹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옳은 말을 할 때엔 겸손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도덕적 분노가 치밀어 겸손을 잃을 수는 있지만, 상습적으로 진보의 가치를 사유화하는 건 곤란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시장에선 그렇게 사유화를 하는 사람들이 잘 팔린다. 진보의 비극이요, 더러움 철학의 부재다.
진보주의자들이 무조건 ‘경쟁’을 매도하는 걸 볼 때마다 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특히 치열한 경쟁을 통해 명문대학을 나와 사회적 발언권을 얻은 뒤에 경쟁을 매도하는 이들이 많다. 아름답게 볼 수도 있겠지만, 더럽다고 볼 수도 있다.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정녕 경쟁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김진석이 제기한 다음과 같은 의문에 공감하는 이유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이름 아래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인 경쟁이 부추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근본주의적 자연 개념은 너무 단순하게 경쟁을 무시하고 백안시하는 것은 아닌가? 문명적 인간 사이의 경쟁과 권력관계를 너무 부정적이고 악의적으로만 해석한 나머지, 어떠한 폭력도 없는 순수한 공생, 어떠한 갈등도 없는 평화적 공생만을 목적으로 삼는 실수가 일어나는 게 아닐까?”
이명박 정권은 더럽다. 더러워도 이만저만 더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이명박 정권만 더러운 것인가? 그래서 이명박 정권에게 ‘파시즘’ 딱지를 붙이는 것인가? 김진석은 이 딱지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이명박 정부가 경찰과 정보기관의 힘을 빌려 통치를 하는 경향이 심해지자,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 정부를 파시즘 정부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 글을 쓰는 2009년 8월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권위주의적이고 퇴행적인 조짐들이 많이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이 정부를 파시즘 정부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본다.…만일 선거에서도 유권자들의 정부 비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비판하는 관점에서 보면 매우 불행한 일일 것이다. 그 경우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어쨌든 선거에서 표현된 민의를 존중해야 할까? 아니면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가 파시즘에 물들었다고 말해야 할까?”
이번 지자체 선거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이미 한국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이명박 정권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 주었다. 그땐 파시즘이 아니었는데 그후에 파시즘이 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그때부터 온 사회가 파시즘에 물들었다는 것인가? 혹 ‘더러움 철학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착각은 아닐까? 즉, “나는 깨끗하지만 너는 더럽다”는 이분법으론 이 세상을 설명할 길이 없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이분법에서 기만적인 위안을 찾으려 드는 게 아닐까? 이명박 정권의 더러움 이전에 그 어떤 다른 더러움에 대한 분노와 염증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깨끗하지만 세상은 더럽다고 믿는 분들에게 『더러운 철학』을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선샤인뉴스 2010.2.19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