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주해녀는 제주도에만 있는 줄 안다. 하지만 동해에 서해에 남해에 수많은 바닷가에서 제주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제주를 떠나 먼 바다 마을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주강현의 관해기(1.2.3)을 읽으며 처음으로 제주해녀에 대해 알게되었는데, 이번에는 제주해녀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이 나왔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아직 사진집이 뜨지는 않는다. 구입하기는 좀 비쌀듯 하다. 한번 보고 싶다. 그녀들의 모습이...

한겨레신문 2011.3.13  동해~남해~서해, 제주해녀를 찍다  

강만보 작가, 사진집 3권 발간
3년간 500여명 삶의 애환 담아

삶이 핍박했던 시절, 제주해녀들은 한반도의 넓은 바다를 드나들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제주와 뭍을 오가며 물질하던 해녀들은 남해안과 동해안, 서해안의 낯선 해안가에 정착했다. 부산과 울산 방어진에는 집단으로 정착했다. 제주바다의 해녀들처럼 제주사투리를 쓰고 숨비소리를 내며 자맥질을 한다. 강원 속초시 아바이마을 바닷가에도, 서해의 백령도 해안에도 제주해녀들이 있다.

전국 갯가로 퍼져나간 제주해녀들을 3년에 걸쳐 앵글에 담아온 강만보(64·사진) 한국사진작가협회 제주지부장이 최근 사진집 <남해안의 제주해녀>, <동해안의 제주해녀>, <서해안의 제주해녀>를 잇따라 냈다. 20여년 전 지역 일간지 사진기자였던 그는 제주의 어촌을 돌아다니며 해녀들의 삶을 4년 동안 기획취재한 것이 이번 작업의 계기가 됐다. 출향해녀들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다 2008년 남해안을 시작으로 2009년 동해안, 2010년 서해안을 누볐다. 
  
 
» 울산 방어진에서 해녀가 물질을 끝내고 소라와 전복을 망사리에 가득 담아 물에서 나오고 있다. 강만보씨 제공  

 
처음엔 ‘무모하게’ 시작했다고 했다. 2008년 5월 전남 완도로 가 한 식당에서 제주해녀를 수소문했고, 거기서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아 찾아다녔다. 그해 10월까지 남해안의 완도와 청산도, 거제도 등 13곳을 돌아다니며 기록했다. 그가 3년 동안 만난 해녀는 500여명에 이른다.

힘든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며 한사코 사진 촬영을 사양하는 출향해녀들도 있었다. 강씨는 “해녀들을 인터뷰하고 촬영하면서 그들이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의 애환을 듣다보면 눈시울을 붉힐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일본에 정착한 제주해녀 1세대들을 찍고 싶다고 했다. 그의 사진은 다음달 말까지 제주시 구좌읍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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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16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해녀에게 누가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대요.
그랬더니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한 백배 쯤 일이 빨라진다고 하더래요.
그럼 그 방법을 사용하시죠 하고 되물었더니, 그 해녀 왈,
그럼 나머지 아흔아홉명 해녀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래요~

주강현님은 좀 멋진듯 한데, 강만보님은 낯서네요.
저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햇빛눈물 2011-03-16 09:39   좋아요 0 | URL
어느 해녀의 말씀, 정말 우문현답이네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이러하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질것 같네요.
 

요즘 백두산 관련 책을 쓰고 있어, 여러가지 백두산 관련 글과 사진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나름대로 전공자이기 때문에 일반인보다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거기까지였다. 나의 부족함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게 한 둘이 아니더라. 우선 도대체 백두산은 어떤 나라의 산일까?  사실 이건 질문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왜 우리들은 이건 누구꺼고 저건 누구것일까는 구획에 의한 소유의 문제에만 초점을 둘까? 이런식의 질문과 대답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건 객관적인 '지리적 지식'이 필요하다. 산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자. 국어사전, "평지보다 높이 솟아 있는 땅의 부분", 영영사전에 찾아보면 "A mountain is a very high area of land with steep sides."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국어사전보다는 영영사전에 더 잘 나와있다. 즉, 산이라는 것은 '점'적 공간이 아니라 '면'적 공간이다. 'area'을 가지고 있는. 그러니 여러 국가와 공유하고 있는게 당연한게다.  

유럽에서 가장 긴 도나우 강을 보면 길이는 무려 2,800km이고 독일 남부의 슈바르츠발트에서 발원하여 본류는 독일·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루마니아·우크라이나 등 여러 나라를 지나고, 빈·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등 각국의 수도가 모두 그 본류 연안에 위치한다. 지리에서는 이런 하천을 국제하천이라고 한다.

 

Herbert von Karajan conducts The Blue Danube Waltz by johann strauss jr. 

당연히, 기분은 나쁘지만 백두산은 한반도에 있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이 중국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중국인들은 그들 나름의 이름으로 그 산을 칭하고 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적으로 백두산의 이름과 '산'에 대한 주도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백두산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과의 관계가 불안정하다보니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백두산 천지 외륜산에 있는 수십개의 산 봉우리 이름조차도 통일된 것이 없다. 출처마다 다르고 높이도 다르다. 그러다 보니 그 틈새를 중국이 들어와 자기네식 이름을 붙이고 변경하고 그것으로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동해와 독도도 마찬가지다. 얼마전에 '파인드 코리아'에 대한 기사를 스크랩한 적이 있는데, 제 3국은 동해든 일본해든, 독도든 다케시마든 상관없다. 왜? 자기네와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다른 나라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제 학교에서 세계지리 보충 수업을 하는데 문제집에 버젓이 대만이 중국영토로 표시된 자료(중국측 자료라 그렇다)가 나온 문제가 나오더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나오더라도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왜, 나하고 관계가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깐. 그러니 다른 나라 지도에서 웹사이트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동해를 일본해로 사용한다 한들 그들에게 우리들이 '퐈이야'할 명분은 사실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해서는 때론 타인의 것도 찾아줄수 있는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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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171호  고지도를 보니 동해·일본해 논쟁 해답이 보이네  
 
19세기 이전 서양 고지도에는 ‘한국해’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이후 ‘일본해’가 이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그 기록을 토대로 문제를 풀어가면 동해·일본해 표기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고 동해는 우리 바다이다.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독도는 왜 우리 땅이고 동해의 이름은 왜 동해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보자.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독도가 우리 땅이고, 동해의 이름이 동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종실록지리지> 50쪽 셋째 줄’에 근거해서?

독도 영유권과 동해 표기에 대한 우리와 일본의 주장은 정반대다. 그렇다면 타자의 시선에서는 어떨까? 우리와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등은 해외 주요국 지도에 일본해로 표기된 것을 동해와 병기하게 하거나, 동해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해양경찰청 제공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왜 독도(사진)가 우리 땅인지 설명할 수 있는가? 서양 고지도에 그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  

왜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지도가 일본해로 적었을까? 언제부터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서양 고지도를 살폈다. 결국 독도·동해와 관련된 최종 승부처는 우리 주장이 받아들여지느냐, 일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느냐 하는 것이다. 서양 고지도는 그 승부를 가늠할 수 있는 ‘타자의 시선’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북아역사재단 등을 중심으로 서양 고지도를 수집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고지도 확보를 통해 우리 주장을 더 공고히 하고 일본의 주장을 적절히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수십 년 동안 체계적으로 수집해놓은 것과 비교하면 양적으로 절대 열세다. 이미 제국주의 시대부터 서양 고지도를 수집해놓은 일본은 이 부분에서 한국을 훨씬 앞선다.

‘파인드 코리아’ 운영자인 김태진씨(티메카 대표) 고지도 확보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포커 게임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액면만 가지고 베팅하고 일본은 히든카드를 들고 베팅하는 셈이다. 우리는 관련 지도가 발견되기만 하면 앞다퉈 발표하는데, 일본은 꽁꽁 숨겨놓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고지도 한두 개 새로 발견된 것보다 전체 맥락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대표인 그를 통해 서양 고지도에 나타난 동해 표기와 독도 영유권 문제를 살폈다.

먼저 살필 부분은 우리의 ‘아킬레스건’이다. 독도 영유권 및 동해 표기와 관련해 우리가 지닌 최대 약점은 놀랍게도 한국이 보물로 지정한 고지도다. 일본은 우리가 보물 제849호로 지정한 <곤여만국전도>를 이용해 동해가 일본해라고 주장한다(외무성 홈페이지 참조). <곤여만국전도>는 청나라에 왔던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것으로 여기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다.

    
1810년 일본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제작한 <신정만국전도>.
    
1785년 일본 하야시 시헤이가 그린 <삼국접양지도>. 독도를 ‘조선의 것’으로 표시했다.
<곤여만국전도> 제작 과정을 들여다보면 미스터리는 더욱 증폭된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 중인 <곤여만국전도>는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목판본 원본이 아니다. 현재 원본은 전 세계에 일곱 부가 있는데 이 중 세 부가 일본에 있다. 규장각 소장본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가져온 원본 모사도를 다시 모사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원본에 대한 모사가 조선에서 이뤄져 몇몇 부분에 가감이 있었는데도 유독 일본해 부분만 고치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것. 심지어 단순 표기된 일본해에 상자를 그려넣어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기까지 했다.
 


<곤여만국전도>는 한국의 ‘아킬레스건’

이에 대해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의 김혜정 관장은 단지 동해의 일본 쪽 바다를 일본해로 불러준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일본해 표기는 일본 쪽에 치우쳐 있으며 작게 표기되어 있다. 한국 쪽 바다 위에는 조선에 대한 해제가 들어가 있어서 ‘동해’ 혹은 ‘한국해’ 표기가 생략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곤여만국전도>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봐야 한다.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였다. 서양의 동양 진출은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바스코 다가마를 배출한 포르투갈에서 출발한다.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정복되면서 스페인으로 넘어간 뒤에는 콜럼버스를 배출한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 영국, 독일 순서로 동양 진출이 이어진다. 이 순서는 서양 고지도, 특히 해도가 작성된 순서와 대략 일치한다. 그런데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제작한 동양 고지도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시는 세계지도를 극비 문서로 취급해 널리 유포하지 않았다. 또한 동판 인쇄가 아니라 직접 모사하는 방식으로 지도를 제작해 지도가 희귀했다. 현재 우리는 이 시기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리고 이들이 참고한 아랍의 고지도 역시 확보하지 못했다.

서양 고지도의 한국해 표기는 상대적으로 프랑스 지도에 많이 나타난다. 18세기에는 세계 경도의 중심을 파리로 표시할 만큼 프랑스가 지도 선진국이었기에 프랑스 해도가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다. 프랑스 해도에는 동해가 한국해나 동방해 혹은 동해로 표기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인 프랑스 지도 제작자 카시니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기욤 드릴, 샹숑 등이 한국해로 계속 표기함으로써 이를 일반화시켰고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빈센조 마리아 ‘중국해’, 1692년, 이탈리아.  

  
브리에 ‘동양해’, 1650년, 프랑스.  

    
존 세넥스 ‘동해 혹은 한국해’, 1725년, 영국.  

    
질 로베르 ‘한국해 혹은 일본해’, 1750년, 프랑스. 

    
라피에 ‘일본해’, 1832년, 프랑스.  

가장 영향이 컸던 지도는 청나라 강희제가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주문해 9년간(1708~ 1717) 제작한 최초의 실측 지도인 <황여전각도>였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지도를 빼내 본국에 보낸 것을 기반 삼아 왕실 지리학자였던 당빌이 <신중국지도첩>을 제작했는데, 이 지도는 동양에 대한 최고 권위를 가진 지도로 대접받았다. 이를 보고 듀 왈드 등이 <중국지리지>를 편찬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동해가 한국해로 표기되었다.

김민희씨(성신여대 대학원)가 석사학위 논문에서 ‘파인드 코리아’ 사이트의 서양 고지도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서양 고지도의 동해 표기 흐름은 이렇다. 일단 16세기까지는 중국해(혹은 동양해-Ocean Oriental)라는 표기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1615년 이탈리아 고딩호가 제작한 지도에 한국해(Mar Coria)라는 표기가 최초 등장한 이후 17세기 전반부터는 한국해 표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한국해 표기가 보편화되고(중국해 20곳, 동양해 20곳, 한국해 8곳, 일본해 1곳), 18세기 전반에는 한국해 표기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한국해 72곳, 중국해 또는 동양해 36곳, 일본해 5곳).

‘동양해’나 ‘청해’로 부르자는 주장도

그런데 18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해(21곳)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던 한국해(160곳) 표기가 19세기 들어 역전되기 시작한다. 곧 19세기 전반 일본해(66곳) 표기가 한국해(34곳) 표기보다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더니(한국해와 일본해 병기는 4곳), 19세기 후반으로 가면 일본해(71곳) 표기가 한국해(4곳) 표기를 압도한다(한국해와 일본해 병기는 1곳). 동해 표기가 이런 분포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맥락을 보자고 주장하고, 일본은 절대량을 보고 판단하자고 주장한다(19세기 지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18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해 표기는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해 표기가 압도적으로 늘어난 것일까? 이에 대해 고지도 전문가인 양보경 교수(성신여대)는 “지도제작자 두 사람 때문이다. 한 명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명을 받고 동해를 탐험한 라 페로즈이고, 다른 한 명은 독일 출신 네덜란드 학자 시볼트이다”라고 말했다.

1787년 제주도를 시작으로 울릉도를 거쳐 캄차카 반도까지 탐험한 라 페로즈는 본국에 탐사 자료를 넘겼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1797년 항해기와 항해도첩이 제작되었다. 이때 항해기에는 한국해, 항해도첩에는 일본해로 동해가 표기되었는데 그 뒤 안타깝게도 항해도첩이 서양지도 제작의 전범이 되면서 일본해 표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가사키에서 20여 년간 살았던 시볼트는 식물 생태 등 자연과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인물로 일본 난학(네덜란드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때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막부의 명을 받고 제작한 <일본변계약도>를 가져가 <NIPPON>이라는 책을 냈다. 여기에 동해가 일본해라고 표기됨으로써 일본해 표기가 보편화되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원본에 ‘조선해’라고 표기되어 있던 것을 시볼트가 임의로 변경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을 거치면서 일본해 표기가 서양에서 일반화되었다.

이제 동해 표기는 우리의 과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해 표기는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었다. 2008년 성신여대 대학원 최미선씨가 발표한 석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세계 주요 100대 사이트는 동해를 주로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다. 표기 현황을 보면 일본해가 41곳, 병기 3곳(동해 우선 병기 1곳, 일본해 우선 병기 2곳), 복합 표기 10곳, 별다른 표기가 없는 곳이 46곳에 이른다.

동해 표기와 관련해서 일본이 우리 쪽 지도를 바탕으로 반박하는 것처럼 일본 고지도를 통해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일본 막부의 명을 받고 지도 제작 관료인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제작한 <신정만국전도>(1810년)를 비롯해 주요 지도에 조선해라는 표기가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역시 일본 지도에 독도가 제대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바탕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을 펼친다.

이것 외에는 동해 표기와 관련해 어떤 논리를 펼 수 있을까? 김혜정 관장은 세계 지도상의 바다 명칭 표기 사례를 중심으로 그 답을 제시한다. 일단 세계적으로는 대륙 중심 표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러시아 오호츠크 동쪽 바다는 오호츠크해로, 중국 동쪽 바다는 오키나와 서쪽에 있지만 동지나해로, 중국 남쪽 바다는 필리핀 북쪽에 있지만 남지나해로 부른다. 이것이 섬나라 일본보다 대륙인 한국 쪽 이름을 우선해야 하는 이유다.

일본이 ‘동해’ 표기를 반대하는 논리 중 하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가 어떻게 바다 이름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해’처럼 방위를 표기한 모델이 없지는 않다. 이 지역은 영국의 동쪽 바다지만 유럽 대륙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해라고 불린다. 아시아 대륙 동쪽에 있는 ‘동해’ 역시 비슷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 실제로 서구에서 동해를 ‘동양해’로 불렀던 것은 타르타르(만주)의 동쪽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국해와 일본해를 병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노르웨이와 그린란드가 전범이 될 수 있다. 노르웨이와 그린란드는 각각 자국 쪽 바다를 노르웨이해와 그린란드해로 표기하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이렇게 통용된다. 그밖에 바다의 색깔 등 특성을 따 ‘흑해’나 ‘황해’처럼 푸른 동해를 ‘청해’로 부르자는 주장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동해가 불리하지만은 않다. 여기에 식민지 경험이 있는 지역, 특히 아시아권 지명에 대한 세계적 추세는 외래 지명(exonym)보다는 고유 지명(endonym)을 국제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양보경 교수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인도 봄베이가 뭄바이로 바뀐 것이다. 우리도 동해의 영문 표기를 ‘Donghae’로 해서 고유명사화하고, 이를 국제 표준으로 삼자는 주장을 펼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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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1.10  “동해 표기 많이 찾아내면, 독도 자연스레 우리땅”
[한겨레가 만난 사람] 국제지도수집가협 한국대표 김태진씨 


» 일년에 절반은 유럽의 고지도 경매시장에서, 나머지 절반은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인터넷 도서유통 사업가와 ‘동해·독도 지킴이’로 살고 있는 김태진씨가 연초 <한겨레>를 찾아 그동안 수집해온 한국 고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애국자냐고요? 외국서 오래 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되지요. 저 역시 1988년 미국 땅을 밟은 순간부터 한번도 ‘한국’을 잊은 적이 없으니까요.”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영어 원서 전문 인터넷서점 티메카(TMECCA)를 운영하고 있는 재미동포 김태진(47)씨의 대답은 지극히 모범적이다.

물론 그의 말처럼, 나라 밖으로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들 한다. 이런저런 꿈이나 말 못할 사연을 안고 이 땅을 떠나 사는 동포들에게 ‘조국’의 의미는 한층 절실해진다. 한국산 라면 한가닥에 눈물나게 감동하기도 하고, 이국의 도시에서 풍기는 김치찌개 냄새를 쫓아 하루종일 뒷골목을 헤매기도 하고, 소박한 향수에서부터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가 대항 경기를 보며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며 일희일비하고…, 이런 정서들을 애국심의 발로라고 친다면 700만명을 헤아리는 재외 한인 누구나 예외없이 애국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또다른 명함인 고지도 전문 사이트 ‘파인드 코리아’(www.findcorea.com) 운영자로서는 100% 정답은 아니다. 그에게 ‘애국’은 일상의 업이자 삶의 주요한 목적이다.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 대표인 그는 동북아역사재단 중심으로 추진중인 서양 고지도 확보 ‘전쟁’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다. 바로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동해’와 ‘독도’를 지키는 싸움이다. 한-일뿐만 아니라 중-일, 중-러 사이의 영토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신묘년 새해 그는 어떤 ‘영토 수호 전략’을 구상하고 있을까?

-우선 ‘파인드 코리아’가 궁금하다.

“세계 지도, 엄격하게 얘기하자면, 16세기 서유럽인들이 신세계 신대륙을 찾아 동양으로 탐험에 나서면서 작성되기 시작한 서양 고지도 가운데 한국, 동해, 독도가 표기된 지도들을 수집해 공개해 놓은 사이트다. 2005년부터 최근까지 확보한 세계 20여개 대형박물관의 고지도 4000여개의 목록과 한국 관련 고지도 원본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2009년 8월15일, 광복절을 기념해 사이트를 열었는데 1주일 만에 일본인 해커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학술연구용으로 회원에게만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회원인 한 대학교수로부터 제자들을 비롯해 국내 연구자들이 고지도의 원본을 실제로 본 적이 거의 없다는 얘기를 듣고 100여장(5억원어치)을 제공하기도 했다. 성신여대 지리학과 대학원 과정에서 이 사이트를 활용한 석사 논문 2편과 박사 논문 1편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큰 보람이다.”

-애초부터 고지도 연구나 수집에 관심이 많았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려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88년 미국으로 유학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을 걸쳐 노스럽대학에서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했다. 99년 한국-미국-유럽을 잇는 인터넷서점 티메카를 창업했다. 처음엔 모든 종류의 책을 취급하기도 했지만 점차 한국 쪽 수요가 많은 영어나 외국어 원서 유통에 집중해 지금까지 국내 공공기관에 납품하고 있다. 그러다 2005년 국립중앙도서관을 통해 한국 관련 고서나 고지도를 구입해 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조사에 나섰다. 이전까지 한국은 일본을 통해 간접구매를 해왔는데 그때부터 옥션·크리스티·소더비 등 국제 경매시장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다. 서양문물 개방은 그렇다 치고, 한-일 강제병합 시기부터만 잡아도 무려 1세기나 일본에 뒤진 셈이다.”

‘동해·독도 표기’ 서양 고지도 공개사이트 운영
정부기관 의뢰로 수집의 길…4천여 목록 모아
“한국해·독도 모두 나온 ‘아틀라스’ 낙찰 기뻐”

-그러고 보니 창업 초기 아마존닷컴에 도전하는 유망 벤처기업가로 소개된(<한겨레> 2000년 7월24일치) 적도 있는데?

“그때는 정말 야심만만했다. 이스트우드북스에서 5년간 국제 도서시장을 섭렵하면서 50만여권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갖췄고, 1만5000여개의 전세계 학술세미나 정보, 전문학술포럼 네트워크도 서비스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아마존에 뒤진데다 자금력도 달려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고지도 경매에 뛰어들면서 로스앤젤레스 사무실을 접고 2006년 뉴욕으로 옮겨 제2 창업을 했다. 그날이 바로 8월15일이어서, 앞으로 해마다 기념할 만한 일을 하자고 결심했다. ‘파인드 코리아’가 그 시작인 셈이다.”

-고지도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경험이 별로 없었다면 쉽지 않았겠다.

“그래서 우선 한국 관련 고지도의 목록과 소재 조사에 몰두했다. 1년 만에 1000개의 목록과 이미지를 파악해서 제시했더니 모두들 놀라워했다. 첫출발이 좋았다. 2007년 소더비에서 1735년판 프랑스 지도 제작자 당빌(D’Anville)의 지도첩 <아틀라스>(신중국지도첩)를 낙찰받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전도(Royaume de Coree)와 함께 한국해(Mer de Corea·동해)·울등도·독도가 모두 표기된 가장 오래된 서양 고지도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15년 앞선다. 청나라 강희제 때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주문해 최초의 실측지도인 <황여전각도>를 제작했는데, 선교사들이 이 정보를 몰래 본국에 보내 당빌이 옮겨 그린 것이다. 이 지도첩에는 일본만 나온 지도에 ‘한국해’로 표기한 것도 들어 있다. 이를 계기로 국내 주요 기관들의 구매 대행도 맡게 됐다.”

-서양 고지도에서 우리나라와 ‘동해’는 언제부터 등장하나?

“16세기 식민지 개척에 나서면서 항해용 ‘해도’를 작성하는 연대와 일치한다고 보면 된다. 마젤란과 바스쿠 다가마의 포르투갈에서 시작해 스페인, 콜럼버스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독일 순이다. 특히 인쇄술이 발달한 18세기 프랑스 제작본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한국해·동방해·동해 등 여러가지로 나타난다. 인쇄본으로는 1595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세계전도에 ‘조선해’(Mer de Corai)가 처음 등장한다. 원본은 이탈리아의 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어 구할 수 없다. 이 원본을 보고 필사한 1615년 고딩호 제작본이 있다. 우리나라가 등장하는 필사본으로는 1568년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것으로, 스페인 마드리드도서관에 있다. 더 오래된 것은 페르시아에서 제작한 것으로 ‘신라’가 등장하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내가 경매에서 구입한 가장 오래된 지도는 1594년 제작된 인쇄본으로 2009년 초 옥션에 나왔다. 2000만원쯤. 우리나라를 여러개의 섬으로 그려놓았는데, 쓰시마도 포함돼 있다. 일본 역시 여러개의 섬을 ‘새우머리 모양’으로 나열해놓았다. 최근엔 1646년 제작된 더들리(Dudley)의 ‘조선해’ 표기 원본도 구했다.”

-지금까지 우리 쪽에서 공개한 고지도에는 ‘한국해’와 ‘독도’ 표기가 많은데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가?

“‘파인드 코리아’의 지도 목록을 분석한 김민희(성신여대 석사 논문)씨의 내용을 보면, 16세기까지 중국해·동양해로 나오다 1615년 고딩호 제작본부터 한국해가 등장해 18세기 후반까지 한국해 160개, 일본해 21개로 압도적이었다. 그러다 19세기 들어서 역전당한다. 특히 19세기 초 나가사키에 살았던 네덜란드 학자 시볼트가 서양 지도의 전범으로 꼽히는 <항해도첩>(라 페루즈·1797년)을 근거로 제작한 일본 지도를 서구에 소개할 때 원본의 ‘한국해’를 ‘일본해’로 고친 영향이 크다. 19세기 전반에는 ‘일본해 66개, 한국해 34개, 병기 4개’로, 후반에는 ‘일본해 71개, 한국해 4개, 병기 1개’가 된 상태다. 같은 대학의 최미선씨는 석사 논문에서 ‘세계 주요 100대 지도 사이트’를 분석했는데, 일본해 41, 병기 3, 복합 10, 무표시 46개였다. 지금 현상적으로는 우리 쪽이 불리하게 보이지만 역사적 연원과 배경을 차근차근 따져서 합리적이고 냉철하게 접근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18C 한국해 ‘압도적’ 19C 일본해로 ‘역전’
세계지도 ‘동해 병기’로 바꾸는게 1차 목표
“미 의회 미분류 고지도, 한국 주도적 참여를”

-다른 인터뷰에서 ‘한국의 아킬레스건’도 있다고 했던데.

“서울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곤여만국전도>(보물 제849호)의 필사본이다. 16세기 말 중국에 천주교를 최초로 전래한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만든 목판 인쇄본을 선조 때 베이징에서 파견됐던 사신 또는 소현세자 일행이 가지고 왔고, 1708년 숙종 때 관상감에서 모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바로 ‘일본해’로 적혀 있어 현재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첫번째 증거로 제시해 놓고 있다. 물론 우리 학자들은 ‘단지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일본 쪽 바다를 일본해로 부른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실제로 ‘동해-창해-일본해’처럼 두 나라 연안과 그 사이 공해를 구분해 적어놓은 사례도 있고, 19세기 초 일본인이 제작한 <신정만국전도>처럼 ‘한국해’로만 표기한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그동안 고지도 찾기 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거나 곤란한 경험이 있다면?

“우선 ‘곤여만국전도’를 놓쳐서 아쉽다. 전세계에 원본이 7개쯤 있는데, 일본은 3개나 갖고 있고 나머지도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소장된 상태여서 구하기가 어렵다. 최근에 드물게 경매에 나와 한국 기관들에 구매 제의를 했으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값(100만달러)이 비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당장 우리 쪽에 유리한 사례만 찾으려는 경향은 문제다. 또 유럽의 경매시장이나 책박람회, 고서점 등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기 때문에, 단순히 동해나 독도 지도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아주 가치있는 물건들도 종종 발견하는데 한국이 아닌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 팔릴 때가 많아 안타깝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60돌을 넘어 참전 미군 세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소장품들이 경매시장에 쏟아져나오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든든한 후원자가 없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끼리 과열 경쟁하는 것도 문제다.”

-한국 정부나 학계 등에 제안하고픈 얘기가 있다면?

“감히 바람이 있다면 고지도 찾기를 비롯해서 동해·독도 관련 조사와 연구작업이 꾸준히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졌으면 한다. 정부 쪽에서는 정책과 물적 지원이 중요하다. 국가 예산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일본이나 미국처럼 민간기업 쪽에서도 후원자로 나서줬으면 좋겠다. 기관이나 개인마다 별개로 진행하다 보니 연구가 진전되지 못하고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학계에서는 연구 성과의 공유와 연대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고지도에는 대부분 고어가 쓰여 있어서, 지리학자들만으로는 해독이 어렵다. 언어학이나 문화인류학 같은 연관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도 절실하다.”

-그동안 경험에 비춰 동해·독도 지키기 전략의 방향을 제시한다면?

“사실상 국제 경매시장에서 홀로 뛰다 보니 벅찰 때가 많다. 일본은 알려진 경매 전문가만 4명이다. 프랑스 국립박물관의 사서가 지난해 들려준 일화다. 회원 1명이 1회 4개씩 고지도 열람이 가능한데, 어느날 한국 외교관 10명이 왔다 가더니 1주일 뒤에 일본에서 20명이 몰려오더란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일본의 전략을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출발은 100년 뒤졌지만 지금이라도 정보의 기선을 제압하면 재역전할 수 있다. 미 의회 도서관만 해도 대부분 아시아 지도인 고지도 7000여개 가운데 1000개만 분류된 상태인데, 한국 정부가 후원을 제공해 분류작업을 주도한다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다. 세계지도협회 총회 같은 국제행사 때 한국 연구자들을 인턴으로 파견해 전문인력을 키우고 정보망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유용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세워놓은 실천전략이 있다면?

“비전문가로 출발한 까닭에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고 전문가들의 조언이 아쉬울 때가 많았는데 2009년 일본 관련 강연회에서 처음 뵌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님의 조언과 감수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지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는 것’이라는 말씀을 지침으로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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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oing On this page
    from www.evernote.com 2014-04-19 05:28 
    전지연-지리관련소식 - “동해 표기 많이 찾아내면, 독도 자연스레 우리땅”
 
 
 

[통계 뒤집어보기] 국내 기상이변이 몰고 온 변화들 

  
    
한국에서도 기상이변이 그 강도와 빈도가 세지면서 일상화되고 있다. 올해 1월 첫 주에는 서울·경기를 중심으로 기록적인 폭설과 함께 한파가 발생했다. 연초인 1월 4일 하루 동안 서울에 내린 눈은 25.8cm로 1937년 적설 관측 이래 최대치였다. 또 3~4월에는 이상저온현상이 나타났다. 일조시간이 247.1시간으로 평년 338.1시간의 약 73% 수준이었으며, 최고 기온의 평균치가 예년보다 1.6℃나 낮았다. 그런가 하면 무더위 현상도 보였다. 지난 6~8월 평균 기온은 24.8℃로 관측 이래 두 번째로 높았으며 폭염과 열대야 일수가 각각 10.5일, 12.4일로 평년보다 2.3일, 7일 더 많았다. 특히 올 여름에는 집중호우가 많아 시간당 강수량이 30mm 이상인 날은 2.2일로 관측 이래 세 번째로 많았으며 추석 연휴에는 시간당 100mm 안팎의 집중호우로 수도권 1만1000여가구가 침수되기도 했다. 9월 하순 강우량으로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양이었다.

온실가스 증가에 따른 지구온난화가 이런 기상이변의 주요인으로 지목된다. 매년 1~8월의 전국 일조시간과 강수량 추이를 살펴보면, 일조시간은 1970년대 1548.9시간에서 2000년대에는 1388.1시간으로 160.8시간, 약 10.4%가 줄었다. 이에 비해 강수량은 1004.3mm에서 1124.2mm으로 79.9mm, 약 11.9% 늘었다. 국내 기온 상승 속도는 지구 평균인 0.74℃의 2~3배를 웃돌고 있고 해수면 오름 속도도 지구 평균인 매년 1.8mm보다 빠르다.

기상이변은 다양한 부작용을 발생시킨다. 첫째, 기상재해의 강도가 심해지고 피해액도 커진다. 재해당 사망자 수가 1990년대 7.6명에서 2000년대 17.5명으로 늘었다. 재해로 인한 피해액도 1990년대 6.3조원에서 2000년대 19조원으로 3배 이상 커졌다.

둘째, 기상상태에 큰 영향을 받는 농산물 가격이 크게 오른다. 신선채소 물가지수가 3개월(6~8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20% 이상 상승해 물가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배추 가격은 9월 29일 현재 한 포기에 1만5000원까지 올랐다.

셋째, 기상이변은 건설업이나 물류, 유통업 등 기상상태에 민감한 산업의 생산과 판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넷째, 기상이변은 질병을 증가하게 해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아열대성 전염병인 말라리아의 전체 환자 중 국내에서 감염된 환자 비율이 1993년 33.3%에서 2009년 98.1%로 증가했으며, 발병환자 수도 1995년의 139명에서 2009년 1345명으로 최근 10년간 급증했다.

다섯째, 농작물재해보험과 풍수해보험 등 이상기후 관련 보험료와 보험계약이 증가함에 따라 위험회피 비용도 증가한다. 예를 들어, 풍수해보험의 계약건수는 2006년 1만7000건에 불과했으나, 2009년 34만9000건으로 크게 늘었으며 보험료도 각각 6억원에서 81억원으로 증가했다.

빈번해지고 일상화되는 기상이변을 최대한 막고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기상예측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기상 관련 2010년 R&D 예산을 비교해 보면 미국은 한국의 21배, 일본은 2.3배나 많다. 기상용 슈퍼컴퓨터도 우리는 2대를 보유하고 있지만 일본은 16대, 미국은 277대에 달한다. 기상이변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 증가가 절실한 상황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76호(10.10.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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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 역 지명 유래

옛날에 이 지역의 도로가 한강, 이태원, 서울역 등 세갈래로 나있어 그 모양이 세모졌다고 하여 삼각지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30세에 요절한 가수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가 1966년에 발표 된 다음해 우리나랑서 최초인 입체 교차로가 있는 지역이라서 더 알려졌습니다. 물론 이 노래의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가사는 돌아가는 교차로와는 상관없는 연인을 만나러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뜻의 곡이었으나 실제 돌아가는 로터리의 준공과 더불어 그의 히트곡은 회전하는 로터리로 인식되면서 더욱더 우리의 기억에 남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로 서울의 명물이었던 교차로는 1994년 지하철이 건설되면서 역사속으로, 시민들의 가슴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출처 : 삼각지역사 내 안내판

 

ps : 수능 시험 감독을 위해 아침에 삼각지 역에서 전철을 타려하는데 이 사진이 보이더라 매번 버스타고 삼각지역을 지나가면서도 그 뜻을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다. 말 나온김에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가사를 옮겨 본다.(지금 듣고 있는데 구슬픈 느낌이다.) 

돌아가는 삼각지 

                                     배호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 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 도는 이 발길
떠나 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 하며
눈물 젖어 불러 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 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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