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검색창 밑에 뜨는 검색어에 ‘연가시 생김새’라는 문구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척 궁금해서 그 검색어를 클릭해서 확인해봤는데 검색어를 확인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연가시’, ‘기생충’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종편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뉴스까지 대부분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기생충을 ‘연가시’로 소개하고 있다. 오보의 일차적인 원인은 모든 언론매체들이 인용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글에 있다. 사람의 발에서 나오는 하얀 실처럼 생긴 기생충을 연가시로 착각한 것이다.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채 그걸 그대로 인용해서 소개하니까 한순간에 기생충이 연가시가 된 것이다.

 

문제의 기생충은 연가시의 생태 습성과 유사한 메디나충이다. 주로 깨끗한 식수가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주로 발견되는 메디나충은 사람 몸을 숙주로 삼아 1년 정도 지나면 다리나 발 쪽 피부 조직 밑에 모인다. 이 때 메디나충 유충이 밖으로 나오는 시기다. 감염자는 심한 가려움, 매스꺼움, 타는 듯한 통증을 못 이겨서 스스로 물을 찾게 된다. 감염자가 물가에 환부를 집어넣는 순간 메디나충 유충이 물속으로 뛰쳐나가고, 그 물을 식수로 마신 사람은 또 다른 감염자가 된다.

 

 

 

 

 

영화 <연가시> 한 장면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공개된 문제의 사진만 본다면 영화 <연가시>처럼 메디나충이 자연스럽게 몸 밖으로 나오면서 사망하는 감염자의 모습이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물을 마신다고 해서 살아있는 메디나충이 입이나 항문을 통해서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며, 감염자는 끔찍하게 죽지 않는다. 언론매체가 인용하고 있는 사진은 메디나충 감염자들이 치료받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장면이다.

 

메디나충은 몸의 내장 기관뿐만 아니라 살갗 밑에서 살기 때문에 물을 마신다고 해서 유충이나 성충이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물통에 환부를 담가야만 기다란 하얀 실 같은 메디나충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 메디나충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재까지 몸 속에 있는 메디나충을 박멸하는 치료제는 없다. 성충은 최소 길어야 20cm 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꺼내야 한다. 기생충을 빼내는 과정에 중간에 끊어져버리면 환부에 남아 있는 기생충 일부가 그 안에서 썩기 때문이다. 이러면 최악의 경우에는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

 

 

 

* 참고자료: EBS 다큐프라임 ‘기생寄生 PARASITE' 1부 보이지 않는 손. 올해 여름에 방영되었는데 EBS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링크) http://www.ebs.co.kr/replay/show?prodId=348&lectId=10136540

 

방송 보기 전에 주의할 점. 식사 전후에 보지 마시길. 훌륭한 내용의 다큐이기는 하지만, 메디나충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상이 상당히 충격적이다. 좋은 다큐로 연일 계속되는 폭음 때문에 계속되는 구역질을 유도할 생각은 전혀 없다. 구역질은 연말 술자리 이후에 해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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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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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48] 1984

 

 

 

 Scene #1  권력자들은 말을 지어내 세상을 지배한다

 

며칠 사이로 북한 최고 권부에서 지금 막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의 영상이 실황중계나 하듯 내외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옛날에도 최고 통치권자가 새로 등장하면 그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까지 몇 차례나 되풀이되는 흔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당사자 측에 의해 그 과정이 외부로 낱낱이 공개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충격적이다. 과연 21세기는 IT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제국가의 권력투쟁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는 권력에 대한 의지와 야심, 권모술수와 잔인함, 모략 등 부도덕한 행위도 용인될 수 있다고 하는 마키아벨리즘도 어디까지나 공존을 바탕으로 한 군림이다. 북한은 오직 권력의 유지와 군림만을 위하여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사용하여 모든 사람들을 감시 통제, 인간성이 머물 곳도 피할 곳도 없게 하였다. 오늘의 북한과 비슷한 상황으로, 실제 배경이 되었던 소련 공산주의는 벌써 붕괴되었으나 북한은 아직도 건재하다.

 

엄격하고 잔인한 공포 통치로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고문, 격리시켜 저항의지를 꺾는다. 불평하는 사람을 밀고하게 만들어 가혹하게 처벌한다. 소수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권력의 앞잡이가 된다. 권력의 정당화를 위하여 역사기록이나 사실을 조작, 윤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 북한만이랴. 전체주의적인 경향은 파편화된 형태, 숨은 형국이라 해도 어디서나 끈질기게 작동하는 것이다. 원칙도 기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요즘 우리 사회도 그러하다. 힘 있는 자가 전횡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고의 진영을 궁지에 몰리는 형국을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를 보게 되면 점점 독재 권력처럼 무서워진다. 게다가 억지 논리를 내세우는 권력자들의 말장난은 이제 ‘힘 있는 자가 말을 지어내고 그들은 그 말장난으로 힘을 유지한다’는 고전적 어록, 즉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권력자들은 말을 지어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격언이 실감난다.

 

흔히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라고 하는데 새삼 두렵게 들린다. 조지 오웰은 이보다 더 정확한 어법으로 ‘과거를 지배한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고 했는데, 이는 역사의 기록도 결국은 힘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 되고 만다는 뜻이 아닌가?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면 ‘힘의 세습’, ‘권력의 세습’ 나아가 ‘이익 집단의 세습’만 남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결국 강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역사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기록된다면 엄연한 사실마저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Scene #2 『1984』를 읽는 것은 하나의 고통

 

권력의 세습에 기대어 복종을 강요하는 체제와 인생을 감시하고 강요하는 체제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을 설명하고 쉽고 이해할 수 있도록 『1984』에서 나오는 정말 끔찍한 사례 하나 제시한다면 단언컨대 바로 이 장면일 것이다.『1984』의 오세아니아에선 연애가 금지된다. 사람들은 오직 ‘빅 브라더’(Big Brother)를 사랑해야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사상경찰의 고문과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두 가지를 포기한다. 줄리아라는 연인에 대한 사랑과 ‘2+2=4’라는 진실이다.

 

윈스턴을 신문하는 사상경찰관은 ‘2+2=5’를 진실로 받아들이라고 집요하게 압박한다. 진실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빅 브라더가 인정하는 것이다. 윈스턴은 결국 ‘2+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희망이 있다’는 명제를 포기하고 ‘2+2는 5이다’고 말한다. 진실을 포기하는 순간 사랑도 사라진다.

 

 

 

 

"Big brothet is watching you"

가상의 1984년 빅 브라더 그리고 (수치상으로) 30년 후 현실의 북한 빅 브라더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하루아침에 북한 최고의 히트곡이 되어 허울뿐인 ‘위대한 영도자’에게만 (억지로) 바치는 찬가가 떠올린다. ‘그이 없인 못살아’, 진실을 포기하고 권력을 향한 충성을 노골적으로 맹세한다면 각인을 위한 강요에 속박당하는 것이다. 노동신문으 시작을 알리는 일면 한가운데에 박힌 위대한 영도자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Big brothet is watching you"(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노래를 절절하게 불러 달라고.

 

『1984』는 언제나 읽어도 암울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다. 안 그래도 지금 ‘갑’들의 횡포가 존재하는 소설 같은 현실 그리고 오웰이 제작한 현실 같은 소설 둘 다 본다는 것도 버겁게만 느껴진다. 거기에 김씨 일가가 만든 우스운 나라의 이야기까지 접하면 평소에 안 나던 싫증도 밀려온다.  

 

빅 브라더가 소설에서만 나올법한 가상의 존재처럼 우리 세상에 유명무실해진다면 그무거운 마음을 읽을 필요가 없었을텐데. 이미 이런 사회를 예언한 오웰의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역겨운 사회를 직시할 수 있는, 올곧은 정신력으로 무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 진실을 향해 삶을 바꾸어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이 이처럼 정확하게 무소불위의 거대 권력을 예언한 능력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이라기보다는 지적 성실성으로 설명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사회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페인 내전에 참전, 좌파 편에서 싸웠다. 그는 바르셀로나를 장악한 좌파정권 안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을 목도하였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친소분자들이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일으킨 무자비한 숙청과 학살을 체험하였다. 그 자신도 희생될 뻔하였다.

 

공산전체주의의 위선을 발견한 그는 죽을 때까지 13년간 수많은 기사, 논평을 통하여 이 진실을 알리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폐결핵에 걸려 치료를 받으면서, 객혈을 해가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워가면서 『1984』을 완성하였고 1년 뒤 죽었다. 죽음이 코앞에 두면서도 진실을 본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쇠약해진 몸을 문학의 힘에 의지했다. 그런 점에서 『1984』는 미래의 인류에게 선물한 ‘진실의 눈’인 셈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1984년의 세계’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등장하고 있다.

 

 

 

 Scene #3  ‘자신의 언어’로 거대한 세상과 맞서다

 

‘1984년의 세계’에 사는, 아니 갇혀 있는 사람들은 외부뿐 아니라 과거와도 단절되어 있다. 권력은 과거로부터도 단절되어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선조들보다 자신들이 잘 살고 있으며, 물질적 풍요가 점점 향상되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대중에게 강요에 가까운 강조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과거를 재조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 기록은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진실성에서 오늘의 필요에 맞추어 과거를 조작하는 것은, 애정성에서 하는 주민감시나 억압만큼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다. 과거는 기록 및 기억과 부합해야 한다. 권력이 모든 역사기록과 주민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하므로 과거는 권력 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향에만 맞추어진다.

 

언어를 지배하는 당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날조되기에 오세아니아에서 '존재'의 의미는 극히 기만적이며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이러한 삼엄한 통제 가운데 윈스턴은 용기를 내어 비밀 일기장을 몰래 구입하고 1984년 4월4일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에서 조심스럽게 펜을 든다. 체제에 반발하기 시작한 인물이 가장 먼저 시도한 행위가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직조하려는 것임은 큰 상징성을 지닌다.

 

그러나 막상 일기장을 펼치자 윈스턴은 자신을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당황해한다. 일기장을 마주하고 윈스턴이 느끼는 한없는 무력감은 언어의 불능이 사고의 마비, 존재의 무기력임을 뜻한다. 그간 당국의 통제 아래 생활하던 윈스턴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낯설고도 괴로운 변신 과정이다.

 

그래도 윈스턴은 점점 더 자신의 언어를 토하며 일기를 써내러 가고, 막연하기만 하던 그의 불만과 의문 역시 차츰 구체화된다. 하지만 거대한 세상과 맞서기에는 ‘자신의 언어’로 구체화된 생각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윈스턴의 반발은 당국의 체포로 끝난다. 고문과 세뇌를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된 윈스턴은 자신을 포기하고 체제에 순응한다.

 

 

 

 

 Scene #4   “빅 브라더가 아직도 건재하는 세상, 안녕하지 못하다!”

 

우리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사소한 일탈을 저지르고, 실수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정상적인 삶이 강화되는 측면이 있고 그게 바로 삶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하나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고, 그 기록과 정보를 특정한 누군가가 열람하고 데이터화하여 다른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 이런 일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다. 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적되어 이용 가능한 개인정보들, 안전을 명분으로 한 무작위 감시 등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풀어 나가야 할 핵심 화두가 될 것이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오웰이 쓴 소설 속의 ‘오세아니아’에 사는 사람들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미스터 오웰 그리고 빅 브라더.

여러분은 이제 정확히 30년이 흐른 '1984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백남준  「Good Morning, Mr. Orwell」장면 중에서)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30년 전,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암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비디오 아트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3년 12월 31일부터 1984년 1월 1일 사이 TV로 미국, 유럽, 한국 등의 현재 모습을 동시 분할 화면 등의 표현 방법을 통해 실시간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가 매체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이러한 실험적 시도는 TV의 긍정성, 또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예견한 것이다.

 

하늘에 있는 오웰의 영혼을 향해 우주적 인사를 건넨 백남준은 이 세상에 없다. 역사적인 비디오 아트가 공개된 지 어느덧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낙관적 예언은 일부 맞다. 하지만 오웰이 진짜로 경계할 것은 경고했던 빅 브라더의 존재를 간과했다. 스마트폰,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 디지털이 낳은 신기술이 전통적인 권력구조를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빅 브라더는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컴퓨터와 인터넷은 이른바 빅브라더의 감시를 용이하게 해준다. 10면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더라. 빅 브라더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빅 브라더는 백남준이 좋아했던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네크워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은밀하게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인터넷과 핸드폰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거대 권력이 인터넷과 핸드폰을 감시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 나의 머리와 마음까지도 통제하는 빅 브라더의 세상이다. 끔찍하다.

 

만약에 지금 백남준의 영혼이 하늘에서 오웰의 영혼을 만나 인사를 건넨다면 오웰은 그의 인사를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쌀쌀 맞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Mr Paik, It is unpleasant!’,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백남준의 인사를 이렇게 맞받아쳤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이런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21세기 고도의 정보사회를 향해 던진 오웰의 디스토피아인가. 이 물음에 우리는 응답할 때가 됐다.

 

 

 

 Scene #5  우리 국민들은 권력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하지 않다 

 

바야흐로 겁박의 시대다. 권력을 쥔 자들이 힘없는 국민들에게 으르렁대고 민중의 지팡이를 휘둘러 댄다. 겁이 없다. 심지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져야 할 정치를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감시와 개입을 시도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권력의 횡포와 오만이 판을 친다. 우리 시민들의 의식은 성숙했는데 국가 권력은 여전히 감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하늘에 있는 오웰이 이런 세상을 보고 있다면, 안녕하지 못하는 세상에 분노와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가장 강조했던 말은 “도둑질 하지 마라”와 함께, “절대로 남의 일기장을 열어보지 마라”는 것이었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을 내세운 권력의 감시와 개입은 비윤리적인 범죄 행위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권력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민들이 멍청하지 않다, 그런 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 그것이 국가권력의 잠재적 위협에서 국민 각자의 프라이버시와 인권을 지키는 길이다.

 

빅 브라더가 지배된 암울한 세상을 보여주는 조지 오웰의 『1984』는 단언컨대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상은 오웰의 소설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설마 이 소설이 권력 유지를 위해서든 개인을 감시, 통제하고 싶은 권력자들끼리 공유하고 읽는 지침서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책 읽을 수 있는 한가로운 여유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을 키워 나가고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악취미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1984』는 소설이다. 빅 브라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지 마라. 독자에게 양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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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미하엘 유르크스 지음, 김수은 옮김 / 예지(Wisdom)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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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평화를 위한 간절함이 느껴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마법을 부려도 좋다. 환상도 상관없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연속이면 또 어떠랴. 그것으로 가슴이 따뜻해지고, ‘거짓’임을 알망정 잠시나마 우리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가 있는 이맘때 한번쯤은 ‘기적’이 일어나도 괜찮다. 내가 아니라도 좋다. 거창하게 세상이 뒤바뀌는 것이 아닌 작은 만남, 성공, 사랑, 기쁨이라도 좋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기적’ 얘기를 꺼낸다면 황당무계하게 여겨지고 코웃음 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본 경험이 있었을까.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처럼 기적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삶의 특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기적을 바라고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비주의자들에게 어울릴 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비록 짧지만 실제로 한 사람의 사소한 간절함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마저 커다란 삶의 변화를 가져다준 기적으로 만든 일이 있었으니까.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 24일 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서부전선 어디선가 낯선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불과 50m 떨어진 독일군 참호에서 흘러나온 크리스마스 캐럴에 영국군은 당황했다. 처음엔 독일군의 심리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난 뒤 건너편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곧이어 어둠 저편에서 독일 병사 한 명이 일어나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바짝 긴장한 영국군은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이 병사는 촛불을 켠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를 양측 참호 사이 무인지대에 놓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외침이 들려왔다 “서로 총을 쏘기보다는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또다시 캐럴이 이어지고 이번엔 영국군도 따라 합창했다. 삭막한 전선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트리를 중심으로 양측 병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한 병사들은 곧 담배를 나눠 피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은 전쟁터에 투입되기 전에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낸 시간들이 그리웠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양측 병사들은 자신의 심장에 총알이 언제 박힐지도 모르는 살벌한 공포의 참호 속에서도 전쟁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독일군 병사는 간절히 원하는 소망을 담아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을 것이다.

 

전선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찾아왔다. 양측은 크리스마스 전후에 그동안 무인지대에 방치됐던 시체를 거둬 장례식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시체를 수습하는 동안 서로 일손을 나누고 장례식에서 기도해주는 등 친교를 쌓았다. 시체를 치운 자리에선 축구 시합이 열리고 군수품과 음식물이 교환됐다. 더 이상 전장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Scene #2  ‘전쟁의 개’들이 망쳐놓은 크리스마스의 기적

 

감동이 느껴지는 한 편의 영화 같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기적이 서부전선 서북단 예페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자발적 평화운동은 서부전선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주도한 사람은 없었지만 동참하는 사람은 많았다. 병사들이 만든 평화는 크리스마스를 넘어 연말까지 이어졌고 일부에선 수개월간 지속됐다. 타의에 의해 전장에 내몰린 대부분 병사들은 살생을 싫어했고 인간을 사랑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병사들이 만든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의 개’들이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각국 지도자들은 전장의 친교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들은 평화가 자신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그들은 평화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친교를 막기 위해 참호를 떠나는 행동을 금지했고, 이를 어기면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전투가 독려됐다. 어제까지 같이 공을 차던 친구에게 총을 쏘고 담배를 나눠 피우던 이웃의 등에 칼을 꽂았다. 참호는 다시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됐고, 무인지대는 다시 시체로 뒤덮였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밀려 휴전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전쟁은 이후 44개월이나 더 계속됐고 9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이 책에 나온 위대한 휴전의 주인공들 상당수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들이 무의미한 참호전 속에 목숨을 놓은 날에도 전선의 지휘소에서 본국 대본영에 보낸 전문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쓰여 있었을 것이다.

 

 

 

 Scene #3  ‘평화’라는 절박함이 총 대신 사랑으로 무장하다

 

예수가 마법과 상상, 환상과 우연을 아무리 동원한들 기적에 관한한 양국 병사들의 공통된 간절함에서 비롯된 평화로운 시간의 기록을 따를 자가 있을까. 물론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쟁사에 축도 들지 못하는 소사(小史)도, 예수의 기적도 다 환상이고 우연일 뿐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기적이란 없는지 모른다.

 

아름다웠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버린 몇 개월간의 평화. 이 이야기가 어쩌면 완충지대의 평화가 단 하루의 몽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암시할 수도 있겠다. 크리스마스의 휴전과 그 이후로 잠깐으로나마 지속된 평화의 시간이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기록한 전쟁이라는 참혹한 서사와 비교하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적이라고 하는 것도 ‘불가능의 가능’이 아니라, 단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의 실현.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눈물과 정성 그리고 사랑이 쌓여 이뤄진 결과일 수 있다. ‘기적’에도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간절함. 성서에서도 ‘간절히 원하면 주신다’고 했다. 간절함이란 모든 마음과 노력을 쏟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방점을 찍는 부분은 이 현실적 결말이 아닌 환상적 화해의 공간이다. 병사들의 감각을 얼어붙게 만드는 거대한 포탄 소리와 총소리가 가득하고, 앞날을 기약하지 못하는 적막한 전선의 기운은 ‘가족’과 ‘사랑’, ‘신의 은총’이라는 대의 명제 앞에서 휘발된다. 총과 군모 대신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사랑으로 무장했다. 양국 병사들은 서로 적을 향해 총구를 겨냥해야 자신들이 원하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이들은 단순히 총을 내려놓고 크리스마스 연휴를 즐기고 싶었을까. ‘평화’라는 절박한 마음이 ‘살인병기’였던 군인들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게 만들었다. 만약에 전쟁이 좀 더 일찍 끝냈더라면 전쟁이 만든 명분 없는 증오가 아닌 사랑이 승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보는 이들의 내면적 갈등을 잠재운다. 사람이란 욕망과 윤리, 당위와 선택 가운데서 흔들리는 존재라는 것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상흔은 거시적 담론의 폭력으로 전도되고 그 가운데 개인들은 선량한 피해자로 채색된다.

 

책 마지막 장 소제목으로 인용된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좋은 전쟁은 없다. 그리고 나쁜 평화도 역시 없다. 평화를 위해 반드시 거창한 이론이나 조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작은 행동만으로 충분하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북프랑스 전선에서 살벌하게 대치하던 독일, 프랑스,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진영논리나 국수주의,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순식간에 녹인 것은 의외로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독일군 참호에서 흘러나온 캐럴은 전선에서 오래전에 죽어버린 감정을 일깨웠다. 그가 부른 노래에는 유럽 젊은이들의 공통적 문화와 가치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공감대가 이루어지면서 적국임에도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거룩한 밤에 깊은 어둠을 뚫고 들려온 평화의 노래는 일시 전쟁의 위력을 잃게 만들었다.

 

어느 역사가는 진정한 20세기의 시작은 1914년 12월 14일이라고 말했다. 제국주의의 광기가 유럽 대륙을 휘몰아치던 시기, 유럽의 어느 들판에서 전쟁의 당사자인 젊은 병사들이 맺은 이 작은 휴전은 우리들로 하여금 전쟁과 평화의 의미에 대해서 곱씹어보게 한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소사일 수도 있겠지만 전쟁의 험상궂은 표정을 드러내 전쟁을 혐오하게 만드는 대신, 잠시나마 세상에 강림한 평화를 보여줬다. 이를 갈망하게 만드는 짧지만, 강렬했던 역사의 한 장면이다. 프로이트와 전쟁을 주제로 서신을 교환하던 아인슈타인이 남긴 다음의 말처럼. “우리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나머지 인류도 평화주의자가 될까요?”

 

‘Freedom and peace are not free.’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평화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꼭 무기에 의지한 희생에 의해서 평화를 얻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담대한 용기와 증오의 벽을 스스로 허무는 노력만 있다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희생 없는 평화가 단지 현실 불가능한 이상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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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펭귄클래식 43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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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산타클로스와 스크루지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교회에서 울린 단 한 번의 종소리가 얼어붙은 강을 타고 마을에 들어선다. 시간을 굽는 빵가게를 지나 차가운 손을 비비며 꽃을 파는 여인을 위로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자를 스친다. 도시를 울리는 청명한 종소리가 있는 시간,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떨어지는 눈송이보다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크리스마스이브다. 남루한 옷차림의 과일장수가 열손가락만으로도 계산되는 수입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지나가던 부랑자에게 사과 하나 건네 줄 수 있는 날, 당장 집에 먹을 것이 없더라도 따뜻한 난로가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날, 다리 밑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의 주머니가 가득 채워질 만한 날이다.

 

이런 날, 스노우볼 같은 지구에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눈송이가 한 사내만은 그저 스쳐지나간다. 그 앞에서는 종소리도, 눈송이도 힘없이 사라질 뿐이다. 평생 크리스마스 캐럴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을 것 같은 스크루지 영감. 그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들떠있는 당신을 노려보며 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떠들고 다니는 놈들은 모조리 푸딩과 함께 푹푹 끊여 버려야 해.”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으레 화제에 오르는 캐릭터가 산타클로스와 스크루지다. 산타는 착하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해주는 데 반해 스크루지는 인색한 성격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선행의 주인공인 산타 할아버지는 현실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동화속의 인물일 뿐이다. 오히려 이기적이며 탐욕스런 스크루지 영감이 우리들 모습에 훨씬 더 가깝다면 가까울 것이다.

 

 

 

 Scene #2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먼저 저 스크루지에게 돌을 던져라

 

스크루지를 보면 말 한 번 걸면 짜증 섞인 욕설이 나올듯한 욕쟁이 할아버지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성격이 괴팍하다는 이유만으로 스크루지를 욕하지 말자. 디킨스가 묘사하는 스크루지는 인색하고 욕심스러울망정 남에게 그렇게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젊어서부터 어렵게 모은 돈이기에 아끼면서 지내는 모습이 너무 지나쳐 사랑과 인정이 메마른 구두쇠의 화신처럼 비쳐질 따름이다. 자기 집이나 상점에서도 추위를 겨우 이겨낼 만큼만 석탄을 때는 정도다.

 

조금 달리 바라본다면 그렇게 비난을 받을 만한 부류는 아니라는 얘기다. 자신을 위해 흥청망청 쓰는 것도 아니고 씀씀이를 줄여가며 재산을 지키려 드는 데야 누구라도 나무랄 수 없다.

 

그는 우리보다 열심히 일했고 우리보다 검소했으며 우리보다 열심히 세금을 냈다. 그의 검은 옷차림과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보면 그 돈을 다 어디에 숨겨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보다 부지런히 살며 돈을 모았다. 말투와 표정을 제외하면 검은 옷을 입은 그는 성직자와 같은 금욕적인 생활을 해왔다. 가족을 떠나 홀로 지내는 성직자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혈육도 무시하고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사는 스크루지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규칙을 지키고 사는 또 하나의 성직자와도 같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정이 메마르는 고독의 그늘에 갇힌 현대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물론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 상점에서 일하는 점원의 급료를 자꾸 깎으려 든다거나 이웃을 돕는 데 인색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직원들의 월급을 기꺼이 더 얹어주려는 기업주가 드물고, 불우이웃 돕기에 대부분 등한하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는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캐릭터일 따름이다. 지금의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스런 까닭이다.

 

그가 숭배하는 돈, 그것만 바라보며 벽에 똥칠하지 않고도 먹은 욕을 명줄삼아 오래오래 살 스타일이다. 이 규칙적인 인간 스크루지는 그래서 독자들이 잊고 있거나 알면서도 스스로 묵인했던 인색한 인심에 자극을 줄 수 있다. 아무리 좋게 보려 죽을힘을 다해 애를 써도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심술궂은 시선 속에서는 그를 조롱하며 바라보는 우리도 멍청하고 방탕한 광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Scene #3  없는 산타를 기다리는 ‘어른 아이’ 스크루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렸을 때 동화로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스크루지가 개과천선하는 이야기의 과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스크루지는 세 명의 유령을 만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여행하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따뜻한 이유는 디킨스가 크리스마스에 끼워 넣어 억지로라도 만들려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내 것을 나누며 선을 베풀어 모두가 행복해야 의미가 있다는, 식상하지만 인류가 이뤄내야 마땅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요인으로는 비교효과를 들 수 있다. 돈 많은 구두쇠 스크루지의 외로운 크리스마스이브와, 돈 없는 가족의 따뜻한 크리스마스이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흡사 비교체험 극과 극을 보여준다. 스크루지의 비참한 죽음 이후 아무 의미 없어진 그의 구두쇠 노릇과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은 한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현실 사회의 문제점은 스크루지에 있다기보다 선물을 받기만을 내심 바라면서 오지도 않을 산타에 기대려는 분위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생활이 고단할수록,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수록 선물 보따리를 둘러멘 산타의 출현을 기다리는 마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다가 눈을 뜨고는 끝내 산타가 오지 않은 데 실망하고 마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처지다. 우리는 우습게도 세상에도 없는 산타는 잘 기다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법을 몰라 세상을 원망하면서 고독을 삼키는 ‘어른 아이’ 스크루지가 되어 있다.

 

어린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마스에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으며, 설혹 받은 경우라 해도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잣집 친구들에 비해 선물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다. 그나마 산타가 방문해 주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들뜬 나머지 다시 이듬해를 기대하면서 차츰 동화의 세계에서 벗어났던 기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화려한 차림의 산타들이 각종 상품을 선전하는 광고를 보면 이제 산타는 동화 속의 인물이기보다 장삿속을 위한 세일즈 도구로 전락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산타가 등장하는 요란한 크리스마스 행사들이 도리어 빈부격차를 느끼게 하고 동심을 멍들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 산타의 이름으로 선행을 베푼다면서 은근히 제 실속만 차리려는 사람들도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Scene #4  오늘의 스크루지는 언제나 외롭다

 

우리는 스크루지의 여행을 통해 외톨이로 지내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환경을 만난다. 스크루지는 언제나 외로웠고 고독했다. 가난은 그에게 한평생의 짐이 됐다. 어린 시절, 누군가 그에게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선물했다면, 마음을 위로하는 크리스마스를 만들어줬다면 어쩌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돈보다 마음이라는 이 유치한 원리를 그가 진정으로 깨닫기에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혹시 그의 변화가 효과 있는 이유를 스크루지의 재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린이 독자를 위한 축약본이 아닌 진짜 원작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가 가난해서 물질을 베풀지 못하더라도 스크루지의 각성은 의미를 지닌다.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그 양을 떠나 황폐한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크루지의 고지식한 인간성이 훨씬 더 돋보이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자신을 찾아온 유령의 안내로 과거와 미래 세계를 두루 둘러본 그는 자신의 인색함을 깨닫고 선뜻 거액의 자선 기부금을 내놓기도 하지 않는가.

 

혹시 자신이 스크루지와 비슷하다면 각자 스스로의 미래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단 하루라도 좋다. 특히 바로 이맘때.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와 그 다음날인 크리스마스 아무 날이어도 상관없다. 어리석은 우리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들이 우리를 위해 즐겁게 찾아온다면 정말 고맙겠지만, 유령이 무서워서 싫어한다면 어른의 눈으로 진짜 어른 스크루지를 다시 만나 보라.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을 수 없지만, 디킨스가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를 잊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만든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주위에 스크루지 영감이 있다면 그들에게 끊임없는 손길을 내밀어 온정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출간된 지 올해 170주년이 되었다. 소설 속 스크루지는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스크루지는 언제나 외롭다. 그 날이 크리스마스라 할지라도. 우리의 스크루지들이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모두 즐거운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맞는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내 옆의 스크루지가 행복해야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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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2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크리스마스 캐럴이 출간된지 160주년이예요? 와아....
사이러스님,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연말되셔요.

cyrus 2013-12-25 13:18   좋아요 0 | URL
메리 크리스마스, 마고님! :) 제가 숫자를 잘못 적었어요. 160주년이 아니라 170.. ^^;;
사랑하는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으시죠? 예전에는 크리스마스 따위 안중에도 없었는데
이 책 읽고 나니 기분이 즐겁고 행복하네요.얼마 남지 않은 올해 연말 이 크리스마스의 행복이 쭉
이어지길 바랍니다 ^^
 
식수 혁명 - 안전한 식수를 향한 인간의 권리와 투쟁
제임스 샐즈먼 지음, 김정로 외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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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네, 안녕하지 못합니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중국 구이린(桂林). 하지만 이 지역 주민의 평균수명은 50세에 불과하다. 중국인 평균수명인 71.8세에 비해 20세 정도 낮은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석회질에 오염된 물 때문이다. 몸속에 석회 성분이 쌓여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생명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계적으로 이같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는 인구는 11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몇 년 전에 공개된 UN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먹는 물 수질은 전체 122개국 중 8위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마시는 물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그래, 안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수질 기준을 초과한 수돗물, 지하수 등이 적지 않은 데다 먹는 물에서 발암물질까지 검출되면서 국민의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다.

 

‘2013년 상ㆍ하반기 상수도 미보급 지역 지하수 수질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실시한 조사에서 지하수 73%이상이 수질기준을 초과한 오염 지하수인 것으로 확인됐다. 관련 예산이 부족해 정밀조사를 추진하지 못한 채 오염된 지하수들이 방치하고 있으며, 해당 주민들은 본인들이 마시는 지하수의 오염 정보를 지자체로부터 통보받지 못한 채 계속해서 지하수를 음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음 소개하는 사례는 좀 더 강도가 센 충격적인 내용이다. 대구시가 지난 8~10월께 실시한 3개월치 수질검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 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동네 우물 13곳 중 8곳에서 발암물질인 ‘1.4-다이옥산’이 지속적으로 검출되었다.

 

이번에 검출된 1.4-다이옥신은 먹는 물 기준치인 0.05㎎/ℓ이하의 수치를 기록해 그나마 다행인 상태이지만, 시의 허술한 우물 관리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말았다. 대구시는 동네우물에서 검출된 유해물질이 어떤 경로로 유입됐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수질관리를 위해 매월 일반세균 등 47가지 항목의 수질검사를 실시했다고 변명했지만, 대부분 우물에서 다이옥신뿐만 아니라 황산이온, 불소 등 몸 안에 장기간 축적 시 각종 부작용을 유발하는 유해성분들이 계속 측정되고 있다. 한 곳당 하루 평균 360여명의 대구 시민이 우물을 통해 식수를 받고 있기 때문에 특히 노인이나 임산부 등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Scene #2  병에 든 생수가 수돗물보다 위생상 좋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우리는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이 아닌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있다. 식수로 수돗물이 외면당하게 된 이유는 수돗물에 대한 막연한 불신감 때문일 것이다. 수자원공사가 올해 제출한 국감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국민 3.7%만 수돗물을 그대로 마신다고 한다. 통계가 보여준 것처럼 수돗물에는 ‘막연한 불신’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수돗물 원수 중 70~100%는 하천수와 댐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의존한다. 그래서 각종 산업폐기물 오염과 대형 수질사고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수돗물을 기피하는 또 다른 이유로 '소독약 냄새'가 있다. 냄새가 날 거라는 걱정 때문에 마시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전국 200여 가정의 수도꼭지의 물을 검사해봤더니 수돗물의 수질이 정수기 물이나 먹는 샘물에 비해 별반 차이가 없었다. 비슷한 양의 미네랄 성분을 함유하고 있었고 먹고 마시는 물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해마다 크고 작은 수도 사고를 접하게 되면 평소 수돗물 공급을 원활하게 했더라도 사고가 한 차례 발생하면 신뢰는 대중의 불안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싸여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한 수도 사고에만 집착해 수돗물을 오랫동안 불신한다면 편하고 쉽게 마실 수 있는 물을 가게에 파는 생수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는 경제적 낭비다. 언론에 보도되는 수도 사고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알게 된 수돗물 소독약 냄새 루머를 자주 접하게 되면 하나의 고정 관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생각의 편향 때문에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그 쪽으로 치우치게 돼 버린다. 비행기 추락 사고를 연일 보도된다고 해서 비행기 사고로 사람이 죽을 확률이 자동차 사고 사망률보다 높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의 판단이다.

 

수돗물을 불신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지갑에 돈이 새는 것을 감수해서라도 병에 든 생수가 위생상 좋다고 믿을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마시는 물의 위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은 수도 사고로 인해 질병으로 사망하는 확률이 병에 든 생수를 마시고 사망하는 확률보다 높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Scene #3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은 인류의 원초적 욕망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러한 착각을 하도록 부추기는 세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병이 든 물을 파는 생수업체들이다. 생수산업이 단기간에 발전한 데에는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불신을 키운 것은 생수업체였다. 생수업체들은 자사의 제품을 선전할 때 '깨끗함', '안전', '믿음'을 내세웠다. 과거에는 자신들의 경쟁상대라고 할 수 있는 수돗물에 대해서는 '소독약 냄새 나는 비위생적인 물'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공격했다.

 

지금도 대중의 지갑을 열게 만들 정도로 생수업체의 힘은 막강하다. 그래서 다수의 대중은 생수업체가 만든 물을 믿고 마신다. 한 병에 만원이 넘는 최고급 생수가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워터 바'에서 맛 좋은 물을 권하는 '워터 소믈리에'까지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1초마다 1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생수병 마개를 연다고 한다. 대동강 물을 팔아넘긴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가 더 이상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생수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비싸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일명 프리미엄 생수. 하지만 정작 프리미엄 생수에 대해 잘 알고 마시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프리미엄 생수를 찾는 고객은 일반 생수보다 미네랄 성분이 더 풍부하고, 수질관리가 더 철저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식수 혁명』의 저자인 제임스 샐즈먼은 편리함과 맛, 건강 그리고 스타일로 무장한 ‘생수 마케팅’의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고, 생수의 안전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수돗물에 비하면 생수는 규제가 더욱 느슨하고, 감시도 더 적게 이루어진다. 또한 상표에 표시된 내용은 대개 무의미하고, 기재 사항도 적다. 일부 대규모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생수가 수돗물보다 더 많이 오염되어 있고, 때로는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많다. 생수가 수돗물보다 더 안전하다고 가정하면 마음이 편해질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거의 없다. (271쪽)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프리미엄급 생수는 프랑스 산 에비앙이다. 알프스 산맥 에비앙 지역에서 채취한 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생수다. 알프스 산은 평생 한 번 갈까 말까할 정도로 유명한 명소다. 비록 희고 차디찬 알프스에 쌓인 눈을 만져 보지는 못하지만, 그 곳에 있는 눈이 녹여서 생성된 물이 어떤 맛인지 알고 싶어 한다. 수돗물이나 병이 든 생수나 물맛의 차이는 없는데도 말이다. 알프스 산맥에 채취되었다는 제품의 소개 내용과 '에비앙'이라는 브랜드를 보는 순간 병에 들어 있는 물이 알프스 산 생수라고 믿는다.

 

그러나 좀 불순한 생각을 하자면 에비앙 문구가 붙어있는 병에 수돗물을 담아 높은 가격으로 판다면 공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전국 대형마트에 꽤 적지 않은 수량으로 진열되고 있는 그 많은 에비앙 생수에 진짜 알프스산 물을 담은 것인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에비앙을 판매하는 회사가 제아무리 100% 알프스산 물이라도 확신을 줘도 말이다. 똑똑한 소비를 지향하는 소비자라면 에비앙의 판매 전략은 최고급을 선호하는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한 마케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고급스러운 물을 마시고 싶고, 그 물이 위생상 좋다고 신뢰하는 소비자의 심리적 착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스놉 효과(Snob Effect, 속물주의)에 비롯된 소비 행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물이 인류의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물질임을 생각한다면, 생존을 위해서 깨끗하고 건강에 좋은 물을 마시고 싶은 인류의 원초적 욕망이 소비 행태로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 유럽 각지에서 순례 코스가 인기를 끌 때 사람들이 가장 찾고 싶었던 것이 ‘성스러운 물’이었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성스러운 물'을 불치병 환자가 한 모금만 마시거나 몸에 바르면 병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순례길 위에서 성직자들은 치유력으로 소문난 샘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급증하는 순례자들에게 진짜 성수(聖水)를 입증하기 위해 저마다 휴대용 물병을 만들었고, 여기에 다른 샘물과 구별되는 특수 문장을 새겨 넣기도 했다. 이미 중세에 쉽게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최고급을 선호하게끔 만드는 생수판매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생수병의 위생을 논하기 전에 꼭 알아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 또 있다. 생수병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의 사례가 있다는 점이다. 1L짜리 페트병을 하나 만드는 데 물 3~4L가 필요한데다 석유도 약 29mm가 들어간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페트병이 쓰레기로 버려진다는 사실이다. 환경친화적인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정말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다면 플라스틱으로 제조된 병에 있는 물을 안 마시는 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다.

 

 

 

 Scene #4  '블루골드' 시대에 맞춰 등장한 물 민영화 문제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매번 지겹도록 강조하는 사실이지만, 물은 우리 삶에 있어서 정말 소중한 자연의 물질이다. 오늘날 물은 우리 실생활에 다방면으로 사용될 정도로 필수적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물을 소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식생활에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이 중요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물은 너무 쉽게 쓴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과 이상 기후로 인해 점점 물이 고갈되어 부족할 수도 있는 위기의 현실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물의 소중함을 알리고 물 부족의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UN은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지정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물의 중요성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막연하게 물을 아끼자고 전하기보다는 우리 삶에 있어서 땔래야 땔 수 없는 '식수(食水)'를 아낄 것을 강조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지금 우리가 수돗물이 더 위생적이냐, 아니면 생수병이 건강하고 안전한 것인지 거기에 얽매여서 따질 처지가 아니다. 이 문제 또한 중요하지만, 물의 안전성을 둘러싼 전지구적 관심과 논쟁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수돗물 vs 생수병' 못지않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 정말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걱정하고 싶다면 좀 머리 아프겠지만 인류의 생존 여부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즉, 식수는 누구의 것이며 얼마나 안전하며 또 어떻게 관리·분배되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국가가 직접 해결해야 할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개인의 삶을 넘어서 인류 전체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기본적이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전문가들은 20세기가 '블랙골드(석유)'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블루골드(물)'의 시대라고 말하면서 물 산업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물 부족 심화로 해수와 폐수를 담수로 만드는 수처리 사업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데다가 중동, 아프리카 등 산유국이 막강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깨끗한 물을 찾고 있는 것이 전 세계가 물 산업에 주목하는 이유로 손꼽힌다.

 

물 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하수도 민영화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식수의 본질’을 논하기 위해서는 권리 대 시장 혹은 공유 대 사유 문제로 확대되는 물 공급 민영화 이슈를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 공급 민영화 찬성론자들은 민간 기업의 참여를 늘려 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서비스 질과 수도 접근성이 향상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민영화 반대론자들은 물 사용에 부과되는 세금이 높아져서 양질의 상하수도를 사용하지 못하는 가난한 국민이 소외되고, 양극화가 더 심화될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공공부문 민영화와 관련된 논란을 되돌아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일부 국가의 물 민영화 성공 사례도 있다. 깨끗한 양질의 물이 절실히 필요한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물 민영화를 도입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저자는 급수시설의 민영화 도입 이후 물 부족이나 오염된 물을 마셔 병사한 어린이 사망률을 감소시킨 통계자료를 물 민영화 필요성의 근거로 내세운다.

 

그렇다고 이 책의 저자가 단순히 보수적인 자세를 취해 물 민영화를 옹호하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 공급 민영화 문제를 단순히 시장논리가 아닌, 인간 기본권을 우위에 두고 바라볼 것을 주목하고 있다. 민영화 찬반 문제에 있어서도 '물은 인류 전체의 소중한 자연의 물질'라는 기본 전제를 놓치지 않는다. 지불 능력이 없는 가난한 국민도 안전한 식수를 마실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Scene #5  물은 인류 생존에 직결되는 자연권이자 기본권이다

 

전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공공기관에 '민영화'의 그늘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최근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철도 민영화', '의료 민영화'와 더불어 우리나라 역시 '물 민영화' 문제를 절대로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는데 물 민영화 문제만은 여유롭게 즐기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철도, 의료 민영화 논란에 묻혀서 그렇지 몇 년 전부터 물 민영화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지자체 재정 절감을 목표로 추진된 상수도 민간위탁은 현재 높은 수도요금과 낮은 유수율, 독소 계약 등의 문제를 낳으며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전국의 지자체 상수도 전면 위탁과 수익형 해외사업 등을 추진하며 ‘물 민영화’ 방침을 염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다른 민영화 문제나 해결되지 못한 여러 가지 장기적인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이에 만약에 정부가 '묻지마 식' 물 민영화를 조용히 추진한다면 언젠가는 지금처럼 정쟁으로 이어질 정도로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갈등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철도, 의료 민영화 그 다음에는 물 민영화. 조만간 '민영화 3종 세트'를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무조건 민영화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물 민영화 도입 여부 문제도 민영화의 장단점에만 초점에 맞춰 해결하려고 한다면 절대로 절충적인 합의를 도출할 수 없다. 저자의 생각처럼 물은 모든 사람의 생존과 직결되는 자연권이자 기본권이라는 사실은 숙지해야 햔다. 모든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삶의 양질을 높이도록 고민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 민영화 도입 여부를 먼저 따져보는 것보다 지금부터라도 물, 아니 자연권이면서도 기본권으로서의 식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책무가 필요하다. 결국, 깨끗한 물을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이 일상적인 권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의 지구에 살면서도 기본적인 삶의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나라도 있다.

 

'사 먹어야하는 물'과 '안전하게 먹어야하는 물'. 성분이 같은 물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물을 바라보고 사용하는 방식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의 물은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추상적이면서도 일반적인 정의에 가깝다고 한다면 후자는 인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식수의 실질적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안전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한 인류의 투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올바르고 정당한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수의 중요성을 깨닫는 인식의 변화가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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