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품격 -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이기주 지음 / 황소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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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후 노아(Noah)의 후손은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한 행동에 괘씸하게 여긴 야훼(Yahweh)는 인간의 언어를 혼란에 빠뜨려 뿔뿔이 흩어지게 함으로써 탑 쌓기를 중단시킨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Tower of Babel)’ 이야기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인간의 절망감이 잘 묘사돼 있다. 바벨탑의 교훈은 말 잘하기의 필요성이 갈수록 절실해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살다 보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간에 뜻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때때로 찾아온다. 예를 들면 진심으로 이야기했는데 소통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또 기껏 생각해서 이야기했는데 화만 내는 사람이 있다.

 

대화는 발화자가 상대방(수신자)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위해서 특정한 형태의 말을 의도적으로 보낼 때 성립된다. 이처럼 너무도 단순해 보이는 과정이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작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인간사의 모든 갈등은 대화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곡되고 엇갈린 대화는 개인과 사회조직의 건강성을 해친다. 대화는 가정과 사회생활을 성립시키는 기초적인 행동이다. 이것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개인과 사회 모두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개인이나 조직의 서로 다른 경험과 이해, 가치관으로 인해 말의 차이 못지않은 대화의 장애를 겪는다.

 

우리는 지금 말 잘하기의 필요성이 갈수록 절실해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생산적인 말하기를 위해 말하는 법도 공부해야 한다. ‘말하기’도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각종 대화법과 화술을 배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앞 다투어 쏟아져 나온다. 이런 책들이 비뚤어지고 휘어진 언어 습관을 교정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이라면, 《말의 품격》(황소북스, 2017)가시 돋친 언어에 상처받아 허해진 마음을 북돋아주는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이다.

 

《말의 품격》은 ‘상대방을 위한 말하기’란, 기본적으로 나와 상대방을 이어주는 과정이란 인식에서 출발한다. 상대방을 알려면 그가 어떤 말을 하는가를 보면 된다. 사람은 때로 상대방의 말 속에 숨은 생각을 읽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 마음대로 상대방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잘 들어야 한다. 섣부르게 상대방의 말에 개입하거나 끊어버리는 태도는 상대방의 발화를 막는 일방적인 자세이다. 상대방의 말 위에 자신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얹어 버리면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소음으로 변한다. 에머슨(Emerson)은 말이란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소리라고 했다. 책의 저자도 말은 ‘마음의 소리’라고 말한다. 말이 정갈하게 모여 쌓이면 사람의 품성으로 완성된다.

 

한마디 말이 상황뿐만 아니라 인생을 바꾼다. 우리의 주변에 좋은 말 한마디 때문에 성공과 행복을 거머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말 한마디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도 있다. 말은 이렇게 인생을 뒤바뀌게 하는 힘이 있다. 많은 말을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말은 소통이 목적이지 자신의 과시가 목적이 아니다. 저자는 침묵이 ‘말실수를 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침묵이 항상 좋은 처세도 아니다. 적절한 말을 적절한 때에 하는 것이야말로 잘하는 말이다. 상대방의 진심을 들여다보고 싶으면 침묵을 깨고 질문을 하는 것도 좋다.

 

저자는 《말의 품격》을 쓰기 위한 재료로 공자, 맹자, 장자, 《손자병법》 등 동양고전에서 찾아낸 질 좋은 문장들을 사용한다. 내가 왜 이 책을 열 가지 한약 재료를 넣어 만든 십전대보탕으로 비유한 이유가 있다. 몸에 좋은 동양고전의 문장들과 편안하고 쉬운 저자의 말을 함께 달인 《말의 품격》은 차가운 언어로 얼어버린 독자들의 몸과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준다. 하지만 한약재를 잘못 먹으면 부작용이 일어나는 법.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이 책을 읽는다면 세속적 차원의 대화를 지향하는 것이 된다. 말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형식적인 말에 불과하다. 상대방이 알아듣고 통하는 말의 특징은 마음에서 곧장 흘러나와 단순하면서도 감동을 준다. 말은 상처받은 이들이 위로받고, 낙심한 이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생산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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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9-2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리듯이 나쁜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요.

품격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품격 높은 정치 좀 보고 싶군요.ㅋ

cyrus 2017-09-27 18:44   좋아요 0 | URL
야당이든 여당이든 어느 정당이 제1정당이 되어도 막말하는 정치인은 매년 한두 명씩 튀어나옵니다.. ㅎㅎㅎ
 

 

 

 

1807나폴레옹(Napoléon)이 이끈 프랑스군은 포르투갈을 점령한 후 곧바로 스페인으로 향한다. 당시 스페인의 내정은 불안정했고, 왕실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페르난도 7(Ferdinand VII)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폐위되었다.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페르난도 7세를 쫓아냈고, 그 자리에 자신의 형 조제프 나폴레옹(Joseph Napoleon)을 임명했다. 동생 덕분에 조제프는 호세 1(Jos I)’가 된다. 그러자 스페인 민중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프랑스군은 무력을 동원한 강제 진압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이집트 원정 중에 데리고 온 이집트 용병 맘루크(Mamlūk) 기병대까지 동원하여 스페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 고야, 영혼의 거울(다빈치, 2011)

* 함순용 상처 입은 지성, 그로테스크 고야(함박누리, 2017)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점령할 무렵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는 스페인 최고의 궁정화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6년 동안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자행한 사건들에 영감을 받아 최고의 걸작을 내놓게 된다. 82점으로 이루어진 판화집 전쟁의 참화. 이 판화집은 전쟁의 공포를 관람자의 눈앞에 바짝 들이댔다. 고야는 당시 상황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그려냄으로써 표현의 자유와 현실성을 동시에 확보하게 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야의 하인이 전쟁의 참화에 포함될 판화를 그리고 있는 고야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이런 비참한 것을 그리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고야는 인간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이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잔혹한 것을 두 번 다시 용납해선 안 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 (이때 고야는 이미 청력을 잃은 상태다. 그런데 고야는 어떻게 하인의 질문을 듣고 대답했을까? 귀는 들리지 않아도 상대방의 말을 알 수 있는 고야만의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조제프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구체제를 지탱하는 봉건 제도, 종교재판 등을 없애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은 친불파 스페인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다. 고야 역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를 지지했다. 프랑스군이 저지른 만행을 알면서도 고야는 생계를 위해 스페인을 지배하는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조제프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립을 갈망하는 스페인 민중들의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고, 조제프는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폐위되었다. 쫓겨났던 페르난도 7세가 다시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고야는 부역자로 찍힐 뻔했으나 고야의 능력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페르난도 7세는 그를 궁정화가로 재임명한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고 전제정치 강화에 나섰다.

 

 

 

 

 

 

 

 

 

 

 

 

 

 

 

 

* 자닌 바티클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시공사, 1997)

 

 

 

조제프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보다 한 살 위인 이다. 그런데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시공사, 1997) 97에 보면 조제프를 나폴레옹의 동생으로 나와 있다. 최근에야 이 책의 오류를 발견했다. 이 책은 나온 지 20년이나 된 책이다. 지금까지 쇄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이 사소한 오류를 바로잡았는지 모르겠다.

 

 

 

 

 

 

 

 

 

 

 

 

 

 

 

 

 

* 로제 마리 하겐, 라이너 하겐 고야(마로니에북스, 2010)

* 웬디 버드 디스 이즈 고야(어젠다, 2016)

 

 

 

 

오늘날까지도 고야의 생애 대부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다 보니 고야 관련 책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고야의 행적에 대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야(마로니에북스, 2010)디스 이즈 고야(어젠다, 2016). 이 두 권의 책으로 종군 화가로서의 고야의 활동 여부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하는지 대조해보면 흥미롭다.

 

 

전쟁의 참화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 혹은 고야의 영광스러운 국가 이름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대량 학살, 그리고 종종 어느 편의 사람들이 죽이고 죽임을 당했는지 알기 힘든 장면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서구 미술사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전투에 대한 기존 묘사는 승리에 대한 영광을 그려왔다. 고야는 혼돈과 전쟁으로 인해 어떻게 평화롭던 시민들이 잔혹한 야수로 변하는지에 흥미를 갖는다. 고야가 전쟁 특파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했다.

 

(로제 마리 & 라이너 하겐, 고야55~56, 57, 글 작성자가 임의로 편집하고 인용함)

 

 

180810, 고야는 호세프 파라폭스 장군과 동행해 사라고사로 갔다. 사라고사는 6월에서 8월까지 포획된 상태였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은 전쟁의 재앙연작에 사용된다. 11월에 고야는 도피했다. 12월에 두 번째 포위가 시작되자 고야는 자신이 그린 스케치 작품들 중 일부를 없애 버렸다. 이는 그 작품들이 프랑스 군들의 손에 들어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웬디 버드, 디스 이즈 고야63)

 

 

※ 『전쟁의 재앙전쟁의 참화를 말함.

 

 

 

고야가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은 자신의 고향 사라고사에서 머무른 건 사실이다.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에서도 이 사실이 언급된다.

 

 

1808615, 프랑스군이 사라고사를 공략했다. 공략에 실패한 프랑스군이 마침내 8월에 퇴각하자 돈 호세 데 팔라폭스 장군는 고야에게 시민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그릴 수 있도록 도시의 참상을 돌아보고 조사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12월에 프랑스군이 다시 돌격해 오면서 이 계획은 중단된다.

 

(자닌 바티클,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100)

 

 

 

돈 호세 데 팔라폭스(José de Palafox) 장군의 요청으로 고야는 프랑스군에 짓밟힌 고향의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팔라폭스는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스페인 민중들을 이끈 장군이다. 그러므로 고야는 비정규군 소속 종군 화가로 볼 수 있다

 

고야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전쟁의 참화』를 형상화했다. 하지만 판화에 나오는 일부 장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비록 고야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기 어렵지만, 고야는 안전한 곳에서만 머무르면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따라서 “고야가 전쟁 특파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했다라는 구절이 독자들한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고야가 전쟁터에 직접 가보지 않고 오로지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연히 따지자면 전쟁 특파원종군 화가는 동일한 직업이 아니다. 전쟁 특파원은 전쟁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직업이라면, 종군 화가는 전쟁 상황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선전용 전쟁화를 그리기도 한다. 고야는 도시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이성과 인간성마저 파괴하는 전쟁의 위력을 전달하려고 전쟁의 참화를 제작했다. 그는 전쟁 특파원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했다. 다만 그는 전쟁의 선전에만 몰두하는 종군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다가 희생한 스페인 민중들을 빛나는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았고, 민간인을 잔혹하게 죽이는 프랑스군을 살육 기계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고야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철저히 배제하여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광기 어린 분노를 표출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다.

 

고야를 안다고 생각한 사람들(필자도 포함된다)전쟁의 참화일부만 보고 있을 뿐이다. 나무에 목매달려 죽은 스페인 민중의 시체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벌거벗은 민간인의 성기를 절단하고, 여성을 강간하는 등 만용을 저지르는 프랑스군을 묘사한 그림들만 보게 되면 프랑스군의 광기만 각인된다. 그렇지만 고야가 목격한 전쟁은 서로 간에 피를 흘릴수록 프랑스군과 스페인 민중 모두 파멸하는 증오와 광기의 전쟁이었다. 고야는 이성을 잠재우는 전쟁의 광기를 판화로 기록하려고 했다. 전쟁의 참화는 전쟁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또 인간의 광기란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준다.

 

 

 

 

[1] 함순용, 상처 입은 지성, 그로테스크 고야(함박누리, 2017),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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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26 14:25   좋아요 0 | URL
전쟁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지 모르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네이버 댓글창에 기웃거리죠.

2017-09-2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전에 도서관에서 미술사강의 듣다가 재미없어서 나왔어요.
고야도 잠깐 나왔는데 cyrus님 강의로 보충하고 갑니다.
재밌게 잘 읽었어요^^

cyrus 2017-09-26 17:24   좋아요 0 | URL
사실 미술은 재미없어요. 그림 하나를 알려면 그림과 관련된 열을 알아야 할 때가 있어요. 확실한 것은 미술을 주제로 쓴 제 글도 읽어 보면 재미없어요. 제가 핵노잼형 글을 쓰는 편입니다. ^^
 
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8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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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예견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것이 있다. ‘우주 개발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기술력이 뒷받침된다면 달보다는 지구와 환경이 비슷한 화성이 우주개발로는 더욱 매력적이라고 한다. 지구에서 나고 자란 자원을 화성의 토양에 이식하고, 그곳에 세워진 도시에 지구인들이 사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꿈같은 얘기지만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인간의 화성 이주계획을 착착 진행 중이다. 우주여행을 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로켓(Rocket)이다. 로켓이라고 하면 우선 미사일(missile)로 대표되는 살상용 무기가 연상된다. 그러나 이런 반인륜적인 도구는 로켓의 기능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사례에 속할 뿐이다. 오늘날 로켓은 우주 개발 사업 발전을 선도해갈 최첨단 고부가가치 기술이다.

     

그런데 먼 훗날에 우주여행이 가능하고, 화성에 정착할 수 있다고 해도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우주로 향하는 인류의 시대를 동경했던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브래드버리가 본격적으로 SF를 쓰기 시작했던 4, 50년대나 지금이나 일반인이 로켓을 타고 우주로 갈 가능성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과 같은 엄청난 행운이다. R은 로켓의 R(R Is for Rocket), 로켓(The Rocket / Outcast of the Stars)은 우주여행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단편이다. 하지만 각종 조건에 부합되지 않아 우주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나오며(R은 로켓의 R), 로켓을 타는 일은 부자들만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면서 우주여행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로켓). 작가는 서로 상반된 인물을 배치하여 우주여행이 가능한 미래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준다. R은 로켓의 R의 크리스토퍼의 독백은 곱씹어 볼 만한다.

      

나의 꿈을 생각했다. 달로 가는 로켓. 그 로켓은 더 이상 내 일부가, 내 꿈의 일부가 아니다. 내가 그 로켓의 일부가 될 것이다.

 

(R은 로켓의 R중에서, 275)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번쁨은 하늘을 훨훨 날고 우주로 여행하는 꿈을 가진다. 이때 우주와 로켓은 동경의 대상이며 꿈의 일부였다. 하지만 알다시피 모두가 그 꿈을 끝까지 지켜가지는 못한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실현하게 된 인간은 지구인이 아니라 우주인이 된다. 우주인은 로켓과 우주 일부가 되어 푸르른 지구를 바라보면서 생활한다. 그런데 우주인의 행복은 잠시 순간일 뿐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크나큰 괴리감은 우주 생활에 적응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완벽한 우주인이 되려면 매일 통제된 일상을 살면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린 시절 우주를 동경했던 순수했던 꿈이 점점 희석된다. 로켓맨(The Rocket Man)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처럼 삶의 절반을 우주를 위해 바치는 로켓맨이 되지 말라고 당부한다.

     

지구인이 우주인으로 되어가는 과정 중에 우주를 날고 싶어 하는 욕망은 우주를 경제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욕망으로 탈바꿈한다. 여기 호랑이가 출몰한다(Here There Be Tigers)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에 우주와 행성을 지구인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고 소모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인간에게 우월적 지위를 부여한다. 이 말에 들어있는 단어인 자연대신에 우주를 넣어도 말의 의미는 변함없다. 작가는 우주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행성의 자연환경을 존중하는 인물의 입을 빌려 인간 우월주의를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안개 고동(The Fog Horn), 끝없는 비(The Long Rain) 이 두 편의 단편소설은 거대한 환경 속에 갇히고, 시간의 힘 앞에서 무력한 살아있는 존재들을 그린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살아있는 존재는 인간뿐만 아니라 암흑으로 둘러싸인 심해에 숨어 사는 괴물도 포함된다. 공룡을 닮은 괴물은 100만 년 동안이나 숨어 사는데, 괴물의 고독을 달래주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등대에서 울려 퍼지는 안개 고동이다. 안개 고동1951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이때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고독이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작가는 인간적인 관점을 뒤집어 심해 괴물도 지구상에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끝없는 비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혼란과 절망에 빠지는 인간의 감정 상태를 보여준다. 세 명의 우주 탐사 대원은 온종일 궂은비가 쏟아 내리는 열악한 행성인 금성에 갇혀버린다. 그들은 인공 태양이 설치된 돔 구조물을 찾기 위해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비를 쫄딱 맞으면서 걷기만 한다. 결국, 화성의 극단적인 환경이 주는 위압감을 견디지 못한 우주 탐사 대원 한 명은 이성을 잃어버려 미치게 된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아름다운 환상의 커튼으로 가려진 우주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아름다운 환상의 커튼이 걷어진 우주는 어떻게든 적응하고 견뎌 내야 하는 막막한 고독의 시공간이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우주 속 지구인을 동경하면서도 그들 곁에 드리우는 그림자도 놓치지 않는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SF는 인간 본연의 고독과 상실감 등 심리 탐구에 집중한다. SF는 이렇게 의외로 철학을 그리기도 하며 독자들에게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레이 브래드버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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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09-2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켓맨이라는 제목에서 김정은이란 이름이 떠오르는건 트럼프 미대통령 때문이겠죠^^? 화성이주 계획이 실현될 즈음에 지구가 어떤 상황일런지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SF소설들에서도 우주여행에 대해 밝은 미래보다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작품들을 더 보았었는데요 자발적으로 화성이주를 선택하는 이들 중에 동경이 아닌 못견디겠는 현실 때문에 등떠밀리듯 화성이주를 선택하는 이들이 많으면 어쩌나 싶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 댓글 참 엉뚱한 댓글이네요^^;

cyrus 2017-09-22 19:57   좋아요 0 | URL
엉뚱하긴요. 충분히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어요. 화성 이주가 가능한 날이 오면 돈 없는 사람들은 재생불가능한 지구에 남아 있을 겁니다. 우주 시대가 와도 빈부 격차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세실 2017-09-21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켓을 타고 우주여행을...
비용이 문제기는 하겠네요.
저가 로켓도 나올까요?ㅎ

cyrus 2017-09-22 19:58   좋아요 1 | URL
자동차 한 대 살 수 있는 가격이면 좋겠는데, 걱정되는 점은 성능입니다.. ㅎㅎㅎ

겨울호랑이 2017-09-22 0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주보다는 먼저 바다 이주 계획부터 실현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 생각이 되네요. 수소와 헬륨으로 구성된 우주보다 생명을 탄생시킨 경험있는 바다에서의 생활이 더 수월할 것 같아요^^:

cyrus 2017-09-22 20:02   좋아요 1 | URL
<날아라 슈퍼보드> 에피소드 중에 손오공과 원숭이 무리들이 수중도시에 생활하는 장면이 있어요. 물 속에 있는데도 호흡할 수 있어요. 만화라서 가능한 일이죠. ^^;;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나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포크송으로 편곡된 얼굴의 노랫말이다. 얼굴은 추억 저편에 간직해뒀던 과거의 기억을 톡톡 건드리는 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면 아스라이 마음에 그리운 이의 얼굴이 스친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라는 노랫말이 그림 그리기의 시작점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그 점에서 모든 사람은 타고 날 때부터 잠재적 화가이다. 붓과 물감이 없어도 우린 마음이라는 캔버스에 추억을 그린다. 따라서 나는 그림은 눈으로 보면서 감지하는 외적 형상보다는 슬픔이나 고통, 그리움과 같은 내적 정서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 김형구 르동(서문당, 2004)

* 오광수, 박서보 감수 르동(재원, 2004)

* 질 장티 외 상징주의와 아르누보(창해, 2002)

* 모리스 세륄라즈 인상주의(열화당, 2000)

* 이연식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이봄, 2013)

    

 

 

실제로 상징주의 미술(symbolism art)을 전개한 화가들은 눈은 마음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생각했다. 상징주의 미술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충실히 표현하기보다 생각, , 무의식 등의 소재를 이용해 관념과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미술 사조다. 프랑스의 비평가 조르주 알베르 오리에(Georges-Albert Aurier)는 처음으로 상징주의 미술의 시작을 선포한 인물이다. 그는 그림은 관념적이고 주관적이어야 하며 초월적인 감수성이 없는 화가는 학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하는 상징주의 화가가 바로 오딜론 르동(Odilon Redon)이다. 르동의 그림은 몽환적이다.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르동은 내면적 생활의 권리를 실천한다.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현실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르동은 자신의 일기 A soi-même에서 내면세계를 가시적인 현실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썼다.

 

 

예술가는 삶의 두 가지 세계, 즉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있어야만 한다. 만약 두 세계를 분리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들의 예술은 보다 감소되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고상함과 탁월함은 사라지게 된다.”[1]

     

 

르동은 외면적 현실 묘사에 치중하는 인상주의 미술을 사고(思考)와 영감(靈感)’을 떼어내는 미술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즐겨 그린 그림 소재는 눈으로 확인하기 힘든 미생물, 잘린 목, 괴물, 신화 등이다. 이들은 불가사의하고, 현실에서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는 괴기스러운 소재에 접근하는 자신의 방식을 불가능한 존재에 인간적인 형식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일[2]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르동이 묘사한 괴물은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렇다 보니 르동을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상상의 세계에만 탐닉한 화가로 평가받기 마련인데 그의 회화적 기량마저 비판 대상이 된다. 그러나 르동이 추구하는 환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르동은 동시대 화가들과 다른 개성적인 화풍을 유지했다. 르동은 눈으로 보는 현실을 보지 못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너머의 세계(상상의 세계)’를 정확히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가진 장님이다.

 

르동은 어린 시절부터 고독을 맛보면서 성장했다. 그는 보르도(Bordeaux)에 있는 지방인 페일르버드(Peyrelebade)에서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외삼촌이 운영하는 농장은 어린 르동에 회화적 영양분을 제공한 토양이었다. 르동은 풀과 나무만 있는 농장을 캔버스 삼아 상상의 세계를 그려나갔다. 그래서 그는 눈으로 보는 즐거움보다는 마음으로 보는 즐거움, 즉 상상력이 깃든 아름다움에 일찍 눈을 뜨게 된다. 르동 친척이 페일르버드의 농장을 매각했을 때 르동은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그에게 페일르버드 농장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소중한 곳이고, 외롭고 말 없는 자신을 화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준 제2의 고향이었다. 르동은 일기에서 농장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나는 지난 날 그렸던 저 슬퍼 보이는 내 예술의 근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 있으면 나 자신밖에 없다는 고독한 유배지이며 수도원이나 다를 바 없었던 페일르버드의 대지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막막하고 황폐했던지…‥ 내가 그곳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은 아예 박탈당하고 없었던 그곳에서는 정신력과 상상력이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3]

    

 

 

           

          

 

 

 

             

 

 

 

 

르동은 초기에 렘브란트(Rembrandt)고야(Goya)의 영향을 받아 목탄화와 석판화를 제작했다. 그는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매력을 끌어내는 애매모호한 어둠의 세계[4]를 묘사했다.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르동은 유화와 파스텔(Pastel)화에 전념하여 부드러우면서도 환상적인 풍경, , 사색에 빠진 인물 등을 그렸다.

 

 

 

 

              

 

 

     

 

특히 감은 눈은 어딘지 모르게 영적이고 숭고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담백하다. 이 사람은 눈을 감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깊은 마음속 보이지 않는 관념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건 르동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이 그림은 르동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 모리스 세륄라즈 인상주의1991년 구판, 170

 

[2]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상징주의 미술(열화당, 1987), 83

 

[3] 오광수, 박서보 감수르동, 재원, 10

 

[4]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상징주의 미술(열화당, 1987),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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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9-2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김건모가 리메이크한<얼굴>이란 노래가 떠오르네요^^

˝누구의 얼굴인지 나는 모르겠어.
술취한 내손이 누구를 그려놓은건지.
새하얀 종이위에 흔들리듯 그려진
낯익은 소녀의 얼굴~˝

cyrus 2017-09-21 16:57   좋아요 1 | URL
제 글을 보는 분들은 눈치 챘을 겁니다. 지난 주 일요일 <서프라이즈>에서 가곡 ‘얼굴’의 탄생 비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저 그 방송을 보고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얼굴 노래’로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왔던 검색 결과가 김건모의 ‘얼굴’이었습니다.. ^^;;

임모르텔 2017-10-14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노래 , 어릴적 엄마가 늘 불러주셔서 오래도록 남는 노래인데 잊었다가, ..그리움이 밀려오네요. 그러다가 르동의 그림보고 반했어요! 블러그보는내내 무기력한 일상의미로에서 반딧불이를 따라가는 느낌입니다..ㅎ

cyrus 2017-10-14 16:10   좋아요 0 | URL
<서프라이즈>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이 만들어진 사연이 소개됐어요. 그 방송 덕분에 노래 제목을 알게 됐어요. 아주 오래 전에 라디오에 흘러나온 ‘얼굴’을 한 번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목을 몰라서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는 노래가 될 뻔했습니다. ^^;;
 
남자문제의 시대 - 젠더와 교육의 정치학
다가 후토시 지음, 책/사/소 옮김 / 들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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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젠더(Gender)’가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로 급상승했다. 그 이유가 젠더 폭력의 뜻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발언이 입방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자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은 요즘 세상은 성 평등을 넘어 여성 우월 시대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사람은 당 혁신위원회가 주최한 한국 정치 : 마초에서 여성으로여성 정책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상황에 문제의 발언을 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면 애초에 토크콘서트 제목을 자유한국당 정치 : 마초에서 마초 킹으로라고 정했어야 했다.

     

홍 대표의 발언에 공감하는 네티즌들이 적지 않다. ‘젠더 폭력이 언제부터 일반 상식이 되었느냐고 따지는 네티즌이 있는가 하면, 메갈리안과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신조어또는 은어를 왜 알아야 하느냐고 비난하는 네티즌도 있었다. 사람들이 젠더 폭력을 모른다고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정말로 페미니스트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진지하게 비판하고 싶다면 최소한 젠더같은 용어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젠더젠더 폭력은 최근에 만들어진 신조어가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서구권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했던 용어가 우리나라에 늦게 알려졌다.

     

홍 대표의 발언도 문제 있지만, 그보다 심각한 것은 류 위원장의 발언이다. 류 위원장의 발언은 페미니즘을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담론으로 만드는 위험한 프레임(Frame)이다.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 사상이 아니며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여성운동의 대상은 여성과 남성 모두 포함된다.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여성이 그 정당한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여성운동을 펼치는 것은 예민하거나 별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에 반감을 보인 일부 남성들은 우리 사회가 이미 여성 상위시대라며 역차별을 호소한다. 이미 남성 역차별이 문제가 되었다는 인식은 일베 등의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대두했다.

     

젠더 문제와 교육을 접목시키고, 남녀평등교육에 주목한 일본의 교육가 다가 후토시의 정의를 빌리자면 우리 사회는 남자문제의 시대에 들어섰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남자 문제가 거론됐다. 남성들보다 학업과 업무성과, 리더십 등에서 월등한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의 영향력이 거세지면서 상대적인 '열등감'에 시달리는 남성들이 생겨났다. 일본 사회에 직업이 없고,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니트(NEET: Not in Employment, Education, Training)이 얼굴을 내밀었다. 니트족이 일본 사회의 큰 문제로 떠오르게 되자 니트족 남성들을 여성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페미니즘의 등장으로 밀려난 피해자로 인식한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남성 위기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림으로써 여성을 적대시한다.

     

그러나 다가 후토시는 남자를 여성보다 못한 사회적 약자로 거론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는 철저히 남성우위의 사회[1]라고 말한다. 그는 여성과 페미니즘에 반감을 느끼는 편견속에 은폐된 남자를 불리하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를 검토하고, 남성우위체제를 무리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가 강요한 남성성의 부작용을 지적한다. 다가 후토시는 남녀 모두 남녀 권력의 비대칭성 문제에 고통받는다고 주장한다. 여권이 신장하면서 역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 남성, 여전히 남성이 유리한 사회에 소외당한다고 느끼는 여성 모두 남성여성이라는 고정 틀에 맞춰진 젠더 규범과 남성이 사회적 주도권을 잡도록 강제하는 사회적 압력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고, 일자리 기회가 높아지게 된 원인을 단지 페미니스트들의 여권 신장 운동이 맺은 결실로만 볼 수 없다. 남자의 일자리 기회가 줄어들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근대 사회의 산업 구조는 남성의 노동을 능력으로 인정해주었다. 이때 여성은 일할 능력이 있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의 노동 가치를 낮게 바라봤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서비스 산업의 확대로 여성의 고용 노동 수요가 높아졌다. 과거처럼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거로 믿었던 남성들은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능력주의적 경쟁이 펼쳐지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고, 밀려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낀다. 따라서 남성의 고용 불안정 원인을 여권 신장과 이에 기여한 페미니스트 탓으로 돌리고,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가 후토시를 페미니즘 진영으로 분류하면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는 고정적 · 비대칭적 남녀의 존재양태의 문제점을 하며 남녀 개인이 자유롭게 기회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막는 사회적 규제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다가 후토시는 젠더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들, 젠더 자유주의(자유주의 페미니스트가 지향하는 입장)’젠더 평등주의(한쪽 성이 불리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 때문에 남녀 권력의 비대칭성이 발생한다는 입장)’을 비교하면서 각각 입장의 장단점을 균형 있게 설명했다. 젠더 자유주의와 젠더 평등주의는 공통으로 남성이 월등한 우위에 있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다만 문제의 원인을 접근하는 시선은 다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일본 사회와 비슷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국 남성의 고용 불안정 원인을 무조건 여성에게만 전가할 수 없다. 남성들에게 제공할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는 경제 구조와 정책에 더 큰 책임이 있다.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남성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유리 천장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사회도 철저히 남성우위의 사회이다. 결국, 남녀 모두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일자리 파이를 가지고 티격태격 싸우면서 네 탓 공방을 벌이는 것은 서로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무의미한 일이다.

 

 

 

 

[1] 다가 후토시 남자문제의 시대,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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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1 0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21 12:43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평등‘에 너무 초점을 맞추면 분명 한쪽 성별이 불리하게 느껴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양성평등‘을 둘러싼 젠더 자유주의와 젠더 평등주의의 입장이 다릅니다.

블랙겟타 2017-09-21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사두기만 하고 아직은 안읽어봤는데 cyrus님께서 잘 정리해주셔서 직접 읽고싶은 마음이 더 생겼네요.

cyrus 2017-09-21 12:44   좋아요 2 | URL
이 책에 유용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제 리뷰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양성평등교육‘의 한계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책에 《남성성/들》을 인용한 내용도 있습니다. ^^

AgalmA 2017-09-21 2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능의 우월에 대한 논의는 늘 논란을 양산하긴 하지만 교육이 확대되면서 여성의 취업률이 늘어나고 사회진출이 높아진 건 통계적으로 사실입니다. 남성이 기득권을 차지하며 여성까지 라이벌로 두지 않기 위한 사다리차기가 많았다고 봅니다. 여성이 대학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세계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학계나 연구 과정 들어가는 건 더 어려웠고요.
이런 경제적 사회 기반적 문제 때문에 한국에서 군대 문제가 끝없이 대두되는 것이죠. 불평등하며 권리를 뺏기는 거라는 아우성이 나올 만하죠. 예전엔 남성이 군대 다녀오면 대학 졸업한 여성은 취업해있는 상태가 왕왕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임금불평등, 성적 차별 그런 건 또 보지 않죠. 다들 자기 이익과 권리를 따지다보니 간과하는 게 너무 많아요.

그나저나 요즘은 유명세 타고 코미디 보여주려면 코미디언 되는 거보다 정치인되는 게 더 나은 듯? 홍이나 트럼프 보면...

cyrus 2017-09-22 20:08   좋아요 2 | URL
UN 연설을 ‘아무말 대잔치‘로 만들어버린 트럼프. 역시 클라스는 다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