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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세우는 옛 그림 - 조선의 옛 그림에서 내 마음의 경영을 배우다
손태호 지음 / 아트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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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세우는”, “옛 그림” 이란 제목이 단박에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 왜 그림과 마주할까? 그 단순할 것 같지만 단순하지 않은 물음에 대한 현명한 답이 바로 ‘나를 세우는’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옛 그림을 통해 그 속에서 발견한 가르침이 나를 일으켰다는 저자의 고백이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의 나의 자리에서 조금은 올곧게 일어서고 싶었다. 아직은 부족한 옛 그림에 대한 이해는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채우면서, 어제보다는 훨씬 나아지는 나와 마주하고 싶었다. <나를 세우는 옛 그림>은 바른 삶의 지혜를 모으고 싶다는 마음들로 들끓게 하였다.

 

옛 그림들 중에서 ‘조선’의 그림들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물론 우리 회화사에서 많은 것들이 조선에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지만, 아직도 갈 길이 한창인 관계로 생소한 그림들, 그림의 맥락에 무지했던 다양한 옛 그림들을 만날 수 있어 무척 유익했다. 그 동안 읽었던 몇 권의 책 속 그림들이 아주 약간은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천천히 시간을 갖고 책을 접하다보니, 여러 시간과 다양한 책들을 넘나드는 기분이었다.

 

중년 남성이 풀어낸 이야기, 자신의 지난 경험과 생각들을 풀어내면서, 옛 그림들 속 역사적 맥락과 회화사의 맥락을 짚어주고, 찬찬히 설명해주니, 훨씬 이해가 쉽고 흥미진진했다.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의 담담한 자기고백처럼 느껴져, 그저 예삿일이라며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옛 그림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비추고, 삶의 지혜를 모으는 이야기 속에서 그림을 더욱 ‘기운생동’하는 듯, 더욱 가슴으로 와 닿는 느낌이었다.

 

또한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본 그림들을 또 다른 역사 이야기였고,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림에 대한 친밀감도 높아지고, 그림 속에 숨은 이야기를 더욱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옛 선현의 삶이 녹아있는 옛 그림, 나고 자란 이 땅의 옛이야기가 훨씬 깊이 있게 다가오면서, 내 몸 속 어딘가에 붙박혀 있었을 어떤 정신과 마주하는 듯했다. 고매한 정신의 발뒤꿈치를 어찌 따라갈 수 있을까 싶지만, 그 고매한 정신, 그 예술혼을 마주하다보면, 나 역시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자신을 좀 더 바로 바라보며 마음을 경영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웠다고 할 수 있겠다.

 

최근 토지(1부 4권)와 함께 읽고 있었는데, 을사조약 소식을 들고 안절부절 분개하는 김 훈장의 이야기, 그의 그간의 이야기엔 솔직히 약간의 냉소가 서려있었다. 몰락한 양반, 그럼에도 양반이랍시고 조금은 세상물정에 아둔한 듯, 맹목적인 양반의 허울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다. 그런데 ‘애국지사가 흘린 통곡의 눈물『매천 황현 초상』’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생각이 일시에 흩어졌다가 새롭게 모아졌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실들에 깜짝 놀랐다. 작가의 그 일침 그대로였다. 개화라는 시대적 역사적 흐름에 무지몽매했다고 생각했던 쇄국정책, 위정척사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와르르 무너졌다. 정말 그랬다. 우리는 개방과 쇄국,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등등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일제에 항거했던 구한말의 유학자들에 대해 무척이나 무관심했다. 어느 작은 시골 동네에서조차 울분을 토했던 많은 그들의 모습이 『매천 황현 초상』을 통해 두드러지고, 그 정신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름대로 책임을 다하며 살아 왔노라 외치는 소리(161쪽)’가 끊임없이 들렸다. 지금의 우리는 자신의 세운 기치에 대한 어떠한 확신과 신념을 갖고 삶을 직시하는지 되묻게 된다. 김 훈장에게 보냈던 냉소는 바로 지금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흔히, ‘대세’라 불리는 어떤 흐림에 일방적으로 휩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방향을 잃지는 않았는지, 마땅히 자신의 삶에 부여된 책무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묻고 또 묻는다.

 

처음 책에 대한 첫인상을 두고 나는 ‘옛 선현들의 그림 속에 담긴 정신을 탐하며, 오롯이 나를 세우고 스스로 지지할 수 있는 의미를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이상이었다. 건실하게 마음 밭을 다지고 가꿀 수 있었다. 그것은 황현과 그 초상을 통해서만이 아니었다. 윤두서의 자화상도 마찬가지였고, 신윤복, 김명국, 이정, 정약용, 심사정, 안견, 김정희, 정선, 김홍도, 허목, 김두량 등의 다양한 옛 그림을 통해서 나의 마음 그릇이 훨씬 깊어지고 넓어지고 단단해졌다. 울분과 설움을 토해낸 그림, 다사로운 정, 그리움을 담아낸 그림들, 다양한 마음들이 쏟아져,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여유를 갖고 넉넉한 시간 속에서 천천히 곱씹으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자신의 마음을 찾아가는 좋은 길잡이였다. 아울러, 우리의 옛 그림들을 더 자주, 많이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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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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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의 이야기라 자연스럽게 손이 먼저 가 닿는다. 세자빈 봉씨, 순빈봉씨의 이야기라는데, 기존 역사 속 동성애 스캔들을 어떻게 풀어냈을지 사뭇 기대되었다. 예전에 ‘세자빈 봉씨 살인사건’이란 부제의 <훈민정음의 비밀>을 통해 만난 기억이 있는데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다시 <채홍>을 통해 섬세하고도 애틋하게 그려진 그녀를 다시금 만나니,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답답함에 짓눌리고, 왠지 모를 억울함과 설움이 복받쳐 오르는 그녀의 마음, 그리고 오롯이 자신의 삶의 욕망을 가감 없이 살아낸 한 여인을 만나면서, 애써 그 마음의 언저리에서 머물며 내안의 편견과 금기 속에서 다가가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금세 나도 모르게 그녀와 한 마음이 되었다. 그저 안타깝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순빈이라 허울에 갇힐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삶이 온정으로 넘치는 아명 ‘난’, 그리고 봉빈이란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사랑으로 넘치는 사랑 그 자체였을 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작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사랑’이 이야기의 화두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역시 ‘사랑’이었다. 단지 흔히들 말하는 금기의 사랑이라 할 수 있지만, ‘사랑’이란 것의 마음에 어떤 수식을 붙이든 그 마음속에 담아있는 사랑의 오롯한 실체를 어찌 분류하며 재단할 수 있을까? ‘사랑’에 붙여진 여러 곁가지들 역시 한 나무의 다양한 모습의 일부가 아닐까? 다시금 봉빈, 난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궁극을 보았다고 할까? 또한 사랑이란 이름의 가혹성 속에 감쳐둔 인간의 욕망도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불운의 왕 ‘문종’의 또 다른 일면이 그려졌다. 미처 보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모습일 것이다. 세종의 아들, 앞으로 조선을 이끌 기대주, 하지만 한 사내에게 두 명의 내쳐진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그간의 문종의 이미지에 균열이 만든다. 사내로써, 남편으로써 아내에게 강요된 예의범절만을 강요하는 것마저 자기모순임을, 두 어깨의 짊어진 조선의 무게에 짓눌린 사내로 비쳐졌다.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이 더욱 도드라져 또한 안타까웠다. 하지만 구중궁궐 속 봉빈의 한없는 외로움과 서러움, 절망으로 봉빈의 애잔한 삶이 더욱 극명해졌다. 욕망의 절제만으로 자신의 책무에 빠져 사는 사내, 그 사내가 풀어낸 훗날 역사의 한 자락이 한걸음에 와 닿아 참으로 아이러니함이 느껴졌다.

 

사랑이란 이름의 욕망과 본능 그리고 사람의 도리라는 범절, 그 절제의 굴레 사이, 그 저울질이 참으로 어려운 그 모든 이, 인간의 깊은 슬픔으로 채워진 이야기가 바로 <채홍>인 듯하다. 봉빈의 삶, 그 사랑이 애틋함으로 물드는 사이사이, 다른 이들의 애잔한 이야기들이 또한 가득 차있었다. 소쌍와 단지, 문종, 김태감, 박나인 등 모든 등장인물의 삶 또한 처절하리만큼 외로움이란 커다란 성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그들 각자 나름의 삶의 이유, 희망을 찾아 배회하였고, 끝끝내 살고자하는 삶의 욕망을 여지없이 불태운 듯 보인다. 태양의 반대편에서 여러 빛깔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채홍, 무지개는 또한 우리의 눈 속에 순수와 열정, 아름다움으로 각인되고는 한다. 왕이라는 태양 빛에 가려졌던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 중에서도 한 여성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낸 <채홍>은 무지개의 의미가 더해지면서 또 다른 ‘사랑’의 궁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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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 - 1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3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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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최치수의 살인 사건이 발각되고, 모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3권으로 이어진다. 이미 급물살을 타듯, 이야기에 휩쓸린 나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2주간의 시간을 기다리며 더딘 시간을, 3권의 책을 모두 빌려간 남모를 이에게 혼자 투덜거렸다. 드디어 손에 쥔 3권의 이야기는 ‘살인자의 아들들, 돌아온 임이네’ 그리고 ‘용이의 변신’이 특히나 눈에 들어왔다.

 

‘평사리’를 중심으로 한 공간적 한계 속에서 많은 이들, 특히 그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소작인들의 이야기가 구구절절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이번에는 귀녀를 사랑한 강포수의 이야기와 살인자의 연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평산의 아들, 한복과 칠성의 아내 임이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이야기가 평사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상, 마을에서 떠밀린 것 자체가 어쩌면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듯한 극한의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수많은 돌팔매질에도 결국 평사리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우면서도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마음이 빼앗겼다. 처절하도록 주어진 삶의 본능에 충실했던 임이네의 이야기와 다시 돌아온 월선과 용이의 이야기는 여전히 나의 관심 대상이었다. 또한 역병과 흉년에도 살아남아 돌아온 한복이 마지막엔 용이의 주선으로 이젠 월선이의 집에 머물게 될 것 같은데, 가엾은 한복의 이야기는 또 어떻게 풀릴지 사뭇 궁금해진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심, 그리고 어머니의 장사를 지내준 사람들을 잊지 않겠다는 한복의 마음이 수많은 이야기, 생에 대한 아전투구 속에서 나를 돌아보게 한다.

 

3권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이야기는 바로 역병과 흉년으로 인한 수많은 죽음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갑작스런 ‘윤씨 부인’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이 기정사실임에도 역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 수많은 죽음 속에 그저 아무런 소요도, 소동도 없이 묻혀버린 듯, 강청댁의 죽음보다도 더욱 담담하게 그려진 것이 아쉬움을 크게 하였다. 그럼에도 그 죽음을 둘러싼 후폭풍이 흥미진진하게 더욱 배가되었다. 서희와 조준구, 홍씨의 힘 겨루기가 서서히 막을 올린 가운데, 그 틈 속에서 힘이 될 충실한 이(김서방, 봉순네)마저 모두 잃은 서희의 안타까움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힘이 없음에도 혼자서 분투하는 수동이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죽음을 둘러싸고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때론 눈시울을 붉히며 애잔한 이야기가 3권의 전체적인 나의 느낌이다. 이제 토지의 진짜 이야기, 서희의 이야기가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지 않을까? 재산을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가 어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줄다리기를 하게 될지, 또한 죽음의 한바탕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가 전개될지 끝없는 호기심이 샘솟는다. 다음 4권은 ‘정이 지나쳐도 미치는가’로 시작하는데 누구의 이야기일지 시작부터 들썩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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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는 봄
양석일 지음, 김응교 옮김 / 산책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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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은 왔지만, 진정한 봄, 햇살 가득 찬 그 따뜻한 봄은 아직인 듯하다. 이 봄, 온 만물의 기지개를 켜듯, 이젠 집단적 망각 속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다시 오는 봄> 신간 소설을 통해 접했을 때, ‘종군 위안부’를 다룬 일본소설이란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무척이나 호기심이 일었다. 작가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어 그저 일본인의 시각에서 쓰인 소설이 번역된 걸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오는 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학창시절엔 ‘정신대’라는 세 글자는 그저 ‘정, 신, 대’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낡은 흑백 사진 속 임신한 한 위안부의 모습만이 각인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지나간 역사 속 수많은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무지했다. 그저 ‘당했다’는 집단적 피해의식만이 깊이 뿌리내렸을 뿐, 그 실체에 접근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가끔씩 뉴스를 접할 때도, 순간 너나없이 들끓다 사그라지는 가벼운 감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거 별 의식 없이 주입된, 자각한 적 없는 역사였다.

 

그런데 <다시 오는 봄>을 통해 역사적 실체에 다가갔다. 그 참혹함에 까무러쳤다. 난 너무도 순진했던 것이다. 비로소 지금껏 외면했던, 교과서 틀 속에 갇혀있던 진실이 봉인 해제 되었다. ‘잊어버리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일, 그래도 잊어버리고 싶은 것, 기억하는 걸 견딜 수 없어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의 실체를 온몸의 세포들이 고스란히 느껴버렸고, 몸서리치며 벌벌 떨었다. 나는 ‘순화’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부하고 싶고, 객관화하려 노력해도, 순화가 느끼는 절망,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전히 내 것이 되어버렸다.

 

식민지 조선, 가난한 소작인의 딸로 태어나, 돈을 벌 수 있다는 순사의 말에 속아 난징으로 끌려갔다. 집단적 강간으로 시작된 첫날부터 수없이 되풀이되는 성노예의 삶, 그렇게 난징에서 동남아시아의 어느 곳, 어느 곳으로 끌려 다녔던 순화의 8년의 시간 속에서 위안부의 삶이 오롯이 드러났다. 아무런 여과 없이 기록된 하나의 ‘증언소설’로써 <다시 오는 봄>은 허구가 아니다. 실재했던 현실 속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어떤 묵직한 덩어리들이 꾸역꾸역 치밀어 오른다.

 

‘순화’를 통해 수많은 위안부들의 삶, 그 치욕적 역사의 현장에서 또 다른 진실과 마주했다. <다시 오는 봄>은 위안부의 실체적 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국가폭력과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전쟁’과 ‘국가폭력’이 우리들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도록 황폐화시킬 수 있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몸서리 쳐지도록 알아버렸다. 아니 지금껏 읽고, 봤던 그 어떤 이야기보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며칠을 두고 천천히 읽으면서, 수시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생각에서 길을 잃을까봐 두렵고, 나를 잠식한 어떤 힘에 굴복한 채 아무런 자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무섬증이 일었다. 비인간적 폭력을 자행했던 수많은 사람들, 삶과 죽음의 경계해서 외줄 타는, 죽음의 극단에 내몰린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인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써의 삶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적 이데올로기, 그 국가폭력에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현장을 목도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지난 역사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순간 그 어딘가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반인륜적 폭력인 것이다.

 

소설 <다시 오는 봄>을 통해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을 그저 재미삼아 있던 내겐 충격 그 이상이었고, 작가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며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이 지닌, 가공할 수 없는 무한한 힘에 압도당했다. 두려움에 떨다 감각이 마비되고 또다시 외면하기 전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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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디자인 산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런던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2
김지원 지음 / 나무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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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디자인 산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그에 앞서 눈도장 찍어두었던 <핀란드 디자인 산책>을 먼저 읽었다. 시리즈로 연결된 이 두 권의 책은 서로 다른 공간 속에서 디자인에 대한 단상들을 풀어내고 있다. 런던과 핀란드, 한 국가의 수도와 나라의 이름을 제목에 내걸었지만 이 두 권의 책이 담아내고 있는 ‘디자인’은 서로 닮아있었다. 시공을 초월한 ‘디자인’에 대한 담론이 펼쳐진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면서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것인 무엇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디자인?’ 참으로 난해하다. 끊임없이 되묻는다.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문외한이지 평범한 일상의 우리에게 있어 ‘디자인’이란 무엇이어야 할까? 디자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단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독보이고, 범상치 않은 어떤 기운을 뿜어내는 것, 조금은 특별해 범접하기 힘든 것이 디자인의 세계일까? 내가 접해왔던 그 디자인의 세계는 고가의 명품 브랜드처럼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그런데 <런던 디자인 산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단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상의 우리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주체가 되어, 내 삶의 즐거움과 실용이 바로 ‘디자인’의 세계, 쉽게 접하며 즐기는 수 있는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런던 디자인 축제에서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소수의 전문가들만의 디자인이 아닌, 함께 어울리며 남녀노소가 함께 ‘디자인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이야기에서 그저 멀게만 느껴졌던 디자인이 바로 곁으로 다가왔다. “디자인은 꼭꼭 숨겨두었다가 어느 순간 세상에 반짝 공개하는 특별한 것이라기보다 일상에서 지속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만드는 디자인 전시가 아닌 경계를 허무는 디자인 문화 축제가 런던에서 확산되는 이유다.”(321쪽)

 

<런던 디자인 산책>의 풍경을 다시금 그려본다. 런던이란 곳의 풍경, 아니 각인된 이미지가 결코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아님이 자명하였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의 노고, 또한 환경을 생각하는 철학들이 ‘디자인’을 선도하는 이들의 핵심 화두인 듯하다. <핀란드 디자인 산책>과 <런던 디자인 산책> 두 권의 이야기는 ‘디자인’이 앞으로 추구해야할 길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었다. 인간과 환경, 자연의 공존, 그리고 옛것과 지금 그리고 미래 지향적 사고는 물론 ‘디자인’에 국한한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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