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무게
헤더 구덴커프 지음, 김진영 옮김 / 북캐슬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사라졌다. 그것도 자고 일어나니, 감쪽같이. 어떤 마음일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물론 짐작할 수도 없는 고통이 따르리라 생각해 볼 뿐이지만, <침묵의 무게>는 가족의 의미와 더 나아가 ‘부모로서의 역할과 책무’에 대해 진진하게 고민해 보라고 이야기이다. 또한 아이의 침묵을 통해 과연 ‘침묵은 금인가?’, 또는 '우리 현대인에게 침묵은 무관심과 소외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그나마 아이에게 가해졌던 가혹한 ‘침묵’의 사슬,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침묵의 무게>는 한 마디로 글의 긴장감이 끝없는 책이다. 그리고 충분히 시간적 여유를 갖고 책을 집으라고 당부하고 싶은 정도이다. 나의 경우는 다른 일과 병행하며 틈틈이 읽다가 나의 본분을 잊을 정도로 (때론 짜증이 물밀 듯 밀려올 정도로) 호기심과 긴박감이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전개될지 진정 그 숲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내막을 빨리 알고 싶은 충동에 초조하기까지 했다. 

 

‘아이의 아픈 상처’를 소재로 한 책이라 제목에서 느껴지는 묵직함과 더불어 살짝 껄끄럽기도 하였다. 요즈음 뉴스를 통해 많이 접할수록 가슴 아프고 응당 분노하게 되는 사건,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직접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살짝 고개를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네 살 이후 말을 하지 않던 일곱 살 소녀 주인공 ‘칼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는 이야기로 서문을 열 <침묵의 무게>는 일단 ‘칼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하는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읽는 기분에 빠지면서 서서히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알코올중독에 의처증,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 끌려 숲에서 길을 잃게 되는 칼리와 누군가 아는 얼굴을 따라 새벽에 집 밖을 나간 칼리의 친구 ‘페트라’는 우연히 같은 날 사라지게 된다. '정말' 말없이도 이신전심으로 서로를 챙기며 사이좋았던 단짝 친구인 실종 후, 아이들을 찾아 나서는 가족의 이야기와 가족의 비밀이 밝혀지는 전개 방식이 아주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안토니아(칼리의 어머니), 벤(칼리의 오빠), 마틴(페트라의 아빠) 그리고 루이스(칼리 엄마의 첫사랑이자, 부보안관)가 각각 ‘나’가 되어 사건을 전개하는데 이는 같은 상황에 대한 서로의 다른 생각들을 깊이 있게 드려다 볼 수 있다는 점이 호기심을 채워주며 무척 매력적이었다. 물론 서서히 사건의 내막이 드러나는 순간 급한 마음을 재촉하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칼리의 아버지 ‘그리프’의 모습과 자신의 무관심과 자책 속에서 아이들을 방임했던 것과 같은 우를 범한 어머니 ‘안토니아’, 아버지로서 이기적이라 생각하는 마틴, 루이스 등를 통해 가족의 의미와 부모의 역할, 책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반전을 거듭하며 긴장감 속에 완전히 몰입한 결과 부작용으로 무서운 현실에 처음 눈을 뜬 듯이 쿵광쿵쾅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분명 아픔을 딛고 일어설 ‘칼리, 벤, 페트라’의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을 품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2012년 한해가 시작되었다.

지난 해의 독서를 반성하면서, 나름의 새계획을 알차게 시작해볼까 하는데~

 

12월 출간되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책들~

 

 

 

 

<예술, 상처를 말하다> 화려한 명성 뒤에 숨겨진 예술가의 뒷모습은 과연 어떠했을지~ 그들의 고뇌, 삶의 발자취를 쫓아보면 좋은 듯, 1월에 읽기 좋은 책인듯하다.

 

 

 

 

 

 

 

 

 책의 기회의도가 무척 호기심을 자극한다. 중앙아시아의 생소한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셀렘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 바로 <문명의 충돌과 미술의 화해>인 듯하다.

 

 

 

 

 

 

 

 

 

 

그외~ <사랑와 욕망, 그림으로 읽기>,< 명화의 거짓말> <개화기-일제강점기 서울 건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미가제 독고다이 김별아 근대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실>의 작가 김별아! 그저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을 끈다. 최근 그녀의 신간 <채홍>의 소식을 듣고 나니,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가미가제 독고다이>를 펼쳤다. 역사에 실존하는 인물중심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허구적 인물 ‘하윤식’을 필두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역사적 사실성의 억압, 도덕적 이상주의의 강요에서 벗어나 훨씬 자유롭게 그려낸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진정성이 있었다.

 

우리는 항상 ‘독립’에 초점을 맞추어 지난 일제 식민지를 바라보게 된다. 어쩔 수 없는 필연임을 알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모든 이에게 과연 ‘독립’은 지상최대의 과제이자 유일무이한 삶의 당위성이었을까? 그 이외의 삶, 분명히 살았을 이면의 삶을 지금껏 바라보지 못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나는 독립투사처럼 그 시대를 살았을까? 나는 어느 곳에서 내 삶의 몫을 살아냈을까? 말뿐인 말을 하기는 아주 싶다. 그저 무책임하게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것 역시 손쉽다. 당장의 나의 현실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분명 그들의 삶을 ‘지금이야’ 나라를 팔아먹은 졸부, 콩가루 집안이라며 쉽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지라도, 주어진 삶의 본능에 충실하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낸 인물들의 모습은 그간의 비극을 더욱 극대화하면서 몰입하게 만들었다.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삶, 보통의 우리들의 삶은 그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다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가미가제 독고다이>다. 역사적 상황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손아귀에 쥐고 뒤흔드는지, 그리고 그들의 삶은 어떤 모순과 어떤 희극을 낳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흥미진진하게, 톡톡 터지는, 결코 유쾌할 수만은 없는 웃음 속에! 그렇게 지금껏 외면했던 뭍사람들, 흔히들 민초라 불리는 이들의 삶이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그네들의 삶의 내밀한 속살은 암울한 식민지의 모습을 오히려 아무런 여과 장치도 없이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비위가 상하는데 외면할 수 없고, 두 눈에 들어와 박혀버린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속물이라는 것이다.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나는 더욱더 이기적이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좌절하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현실에 충실(?) 하고픈 욕망으로 들끓고 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결코 내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이란 높은 벽에 속수무책, 웅크리며 조바심치면서, 결코 ‘쿨~’하지도 못하면서! 소시민적 삶의 냉소에 길들여진 탓일까? 뭐~ 대단한 것을 꿈꾸기보다는 하루하루가 치열한 현실에서 작은 행복에 자족하는 것조차 씁쓸한 뭔가가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곳이 왠지 모르게 <가미가제 독고다이>에 투영되는 것은 왜일까? 지난 식민지적 상황에서 한 개인의 그렇고 그런 삶을 엿보았는데 비극적인 시대극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오늘이었다. 그렇다면, 내일의 꿈은 말 그대로 꿈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암울한 비극 속에서도 ‘No'라고 외치게 된다.

 

비극적 상황 속, 희극은 진저리쳐지도록 비극이었다. 헛웃음, 실소의 혀끝은 씁쓸하니, 쓰디 쓸 뿐이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어 입안에서 맴도는. 그럼에도 무심하게, 심드렁하게 풀어내는 이야기에 자꾸만 구미를 당겼다. 아리고 쓰린데 한 번 쥔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끝없이 비극으로 치닫고 있는 결말 속에서 뭔지 모를 희망을 온몸으로 오롯이 품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삶의 본능이고, 욕망일까? 바로 너무도 인간적이기에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윤식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연속들, 냉소와 무기력 속에서, 죽음의 수렁에서,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우리를 끄집어내는 것은 이러쿵저러쿵 수많은 단어를 풀어내더라도 결국은 ‘사랑’이었다. 아니, 사랑이라니? 우리가 희망을 품고, 내일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사랑’이라니! 순간 모든 상황들의 엉킨 실타래가 맥없이 풀리고, 암담한 비극적 상황들이 그저 소설 속 하나의 장신구처럼 ’사랑‘으로의 귀결은 김이 새는 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뻔한, 뻔뻔한 필연과 당위적 결말, 그 사랑의 힘에 한없이 무릎을 꿇고 싶다. ‘윤식’처럼 나 또한 그 뜨거운 사랑에 옥죄이고 굴복하고 싶어진다.

바로 <가미가제 독고다이>가 궁극적으로 외치고 싶은 단 한마디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진정성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뒤돌아보게 한다. 잃어버렸거나, 사라진, 또는 몰염치로 일관하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사랑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끝내는 여지없이 ‘사랑’에 목말라하는 우리를, 그토록 갈구하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편지 - 규방에서 진 부용꽃, 허난설헌
류지용 지음 / 동아일보사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드디어 허난설헌을 만났다. 눈도장을 찍어둔 채, 얼마간의 시간을 흘러 보낸 것일까? 뭔가 아스라한 그리움이 몰려오는 표지, <규방에서 진 부용꽃, 허난설헌 “사라진 편지”> 분명 단번에 눈길을 끌었었다. 그럼에도 허난설헌이란 개인에 주목하기보다는 그저 <홍길동전>의 ‘허균’, 그의 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사실이었다. 천재 시인, 그 고귀한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삶은 허균의 통해 간접적으로 만남으로써 더욱 그 실체에 다가가고 싶었다.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작가의 상상 속에 기대서라도 그녀의 삶, ‘허초희’라는 한 여성, 천재 시인의 삶 자체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최근 <난설헌>을 통해 더욱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더 이상 그녀와의 만남을 미룰 수가 없었다.

 

여전히 허난설헌의 삶의 의문투성이다. 당대 세도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세도가 집안의 종부가 되었지만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두 아이를 여읜 슬픔은 그저 한 여성의 삶에만 초점을 맞춘 것일 뿐이었고, 그 한계에서 여전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사라진 편지> 속 전개는 당혹스럽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오만원 권 화폐의 신사임당을 두고 격론이 일었던 화두가 떠올랐다. 몇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나의 편협한 시각은 한 천재 시인의 삶이 아닌 결혼과 출산이라는 여성의 삶에 머물러 있었다. 아직도 한 인간의 삶이 아닌 여성이라는 반쪽의 삶, 그래서 남장을 하고 말을 타고 들녘을 누비고,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하는 등, 규방이라는 제한된 삶의 한계를 뛰어넘어 드넓은 세계로 그녀의 삶이 부각된 것이 낯설었지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듯하다. 그녀는 누구보다 당당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기보다는 세상 밖으로 확장시키고 뜨겁도록 자신을 불태우는 설정을 그녀를 더욱 그녀답게 그린 듯하다. 그것이 때론 독화살처럼 그녀를 옥죄는 결과를 나았을지라도.

 

그녀의 삶에 대한 몇 가지 의구심들이 일면 타당성을 갖게 되는 이야기 전개는 흥미로웠다. 특히 이달의 삶과 좌절, 허균의 꿈 그리고 초희의 삶이 다각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마음을 뒤흔들었다. 시적 유희 속 그 깊이를 아직 헤아리기에 역부족이지만, 좀 더 진실한 마음으로 삶을 투영하는 그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난설헌이 세상을 바라보던 감성어린 눈빛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조망하고 싶어진다. 잠시나마 그녀 곁에 머물다보니, 그녀의 생각에 물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또 다른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허난설헌, 허초희’를 만나보고 싶다. <난설헌>은 초례를 치르기 전 상황을 더욱 애절하게 그리고 있는데 어떤 삶을 투영하고 있을지, 어떻게 다르면서 같은지 직접 확인할 차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후 네시의 루브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막연하게나마 유럽 여행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파리에 대한 동경이 유난히 커졌다. 이는 아무래도 최근에 그림 관련 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된 후,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루브르’를 제목으로 한 신간, <루브르, 루브르 회화의 모든 것>과 <오후 네 시의 루브르>를 접하게 되니,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일단은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고, <오후 네 시의 루브르>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림 속 다양한 명화들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루브르를 대표하는 모나리자를 제외하면 딱히 눈에 익은 작품들이 손에 꼽을 정도다. 실제로 루브르를 찾게 되면 오래 시간 체류하지 않는 한, 설사 그럴 기회가 생기더라도, 3만 5천 점-전시된 작품 수다-에 이르는 수많은 그림을 눈에 담기는 힘들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기에 색다른 그림들과 그 속에 담긴 작가의 삶, 생애, 그리고 그림 속 메시지에 더욱더 귀를 쫑긋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눈을 붙드는 그림들을 몇 점 뽑아본다. 특히 ‘돈놀이꾼과 그의 아내’를 비롯한 거친 세상을 그려낸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오후 네 시의 루브르>와 함께 읽었던 <아트 파탈> 속, 신선한 충격이 되었던 ‘앵그르’의 작품들이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낯선 풍경, 역사에 담긴 그림 속 다양한 은유는 그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욱 넓혀주면서 호기심을 키워 준다. 루브르의 명화들은 한 번에 감상 할 수 없듯이, 책 속 다양한 명화들 역시 한 번에 읽기에 방대한 듯하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은 마음을 간직한 채, 루브르로 향한 가벼운 발걸음을 떼었다. 이젠 차분히, 오후 네 시의 산책을 즐기던 칸트처럼 나 역시 책 속 루브르로의 산책을 종종 즐기기만 하면 될 듯하다. 

 

참고로, 책의 구성 중에서, 다섯 개의 주제별, 예순일곱 점의 명화들이 소개되고, 바로 뒷장은 화가에 대한 짧은 소개 위에 그 명화 앞에 다양한 모습의 감상자들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 실려 있다. 루브르 속 실제의 다양한 풍경을 담아낸 여러 사진들은 부러움의 시기와 선망을 넘어 책을 펼친 우리로 하여금 마치 그림 앞에 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루브르’와의 짧은 입맞춤이 더욱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다. 책 속의 그림을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엄청난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후 네 시의 루브르>를 접하고 나니, 마음속엔 더욱 간절한 열망이 자리하는 것 같다. 기필코 루브르의 명화들을 직접 보리라는 꿈, 뒤늦게 남다른 꿈을 갖게 된 것 같아 기대와 설렘으로 일상의 즐거움이 더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