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 -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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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었다. 소설 <홍도>를 읽는 내내, ‘이것은 소설이다. 허구야,’라며 끊임없이 되뇌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왜 그리도 진실처럼 다가오는지, 정말 그 어딘가에 그녀가 살아있을 것 같고, 정말 살아 있을 거란 생각에 빠져들었다. 도저히 이성적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400여년의 시간 속, 그 절절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또한 여러 작가들의 찬사에 조금은 과장이 있을 거란 의구심이 부끄러웠다. 정유정 작가는 <홍도>를 밤에 품지 말라고 했다. 솔직히, ‘뭐~ 그 정도일까?’ 조금은 가볍게 생각했는데, 정말 나 역시 밤에 품었다면, 밤을 꼴딱 새웠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누군가, 책을 펼친다면 그 시점은 밤이길~ 환상의 세계 그 어딘가에서 허우적거리며 깊이 빠져드는 황홀경, 희열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저 나는 <홍도>를 가슴 속 깊이 꼭 품고만 있고 싶다. 그렇게 그 절실함의 변두리 어딘가에 나 역시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첫 번째, <홍도>에 주목한 이유는 단연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띠지의 ‘나는 400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는 문구에서 400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어떤 역사적 인물, 아니 ‘어떤 여성일까?’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읽고 싶다는 생각, 읽어야겠다는 생각뿐, 이야기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 <홍도>에 대한 감상 말고는 어떤 실마리도 풀어내고 싶지 않다.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그 누군가 역시 나처럼 그저 직접 책을 펼쳐 홍도 속 이야기를 만나보시라 당부하고 싶다.

 

<홍도>를 통해 시간을 견디는 힘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느 책인지 흐릿한 기억이지만 ‘사랑은 시간을 견디는 힘’이라고 했다. 아니 ‘그리움을 견디는 힘’이라 했던가? 그리곤 요즈음의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도 얕고 좁은 마음이라 쉽게 상처받고, 화를 내고, 화를 내는 스스로를 보면서 자기비하에 빠졌다. 그러면서 절망과 좌절에 끙끙거리고, 어느 샌가 그 고통이 근원,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면 신음하고 있었다. 고통은 끔찍하고, 그 고통과 맞설 용기는 없고, 그렇기에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도했다. 그 시간을 견뎌내는 지혜를 모색하기보다는 도망치고 회피하기 바빴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지만, 또다시 뒤돌아보니, 나는 제자리걸음, 아니 앉은뱅이마냥 그 자리였다. 내 안의 고통이 그녀처럼 진실함으로, 절실함으로 깊이를 더하며 나를 바로 세우는 좋은 파장으로 흘렀으면 좋겠다. 오롯이 홀로 견디는 의연함과 당당함이 내가 풀어낼 숙제인 듯하다. 그런데 그 숙제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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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바리 - 제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정윤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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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바리’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자체로도 호기심이 마구마구 터졌다. 가냘픈 모습의 한 소녀, 올이 풀어진 스웨터를 입고 있는 소녀는 왠지 애처롭다 못해 뭔지 모를 스산함이 느껴졌다. 어떤 이야기일지 좀처럼 감도 잡을 수 없고, 알 수 없음에도 ‘바리데기’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신간 소개에서 <프린세스 바리>를 보자마자 예전에 몇 번이나 읽었던 <바리데기>(황석영, 창비 2007)가 떠올랐다. 처음 알게 된 ‘바리데기’는 신화 속 특히 무속신화로 전래되는 인물이란 점에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또한 기존에 전래동화라며 읽었던 그 어떤 이야기보다 새롭고, 뒤늦은 만큼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아비를 위해 신비의 묘약을 찾아 저승으로 떠났다는 신화 속 ‘바리데기’가 저 멀리 돌고 돌아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가 가져온 신비의 묘약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을 살릴지도 모르리란 막연한 기대, 착각, 환상이 내 속에서 툭 터져나왔다.

 

<프린세스 바리>를 읽으면서 ‘바리’, ‘산파’, ‘토끼’, ‘나나진’ 등의 인물들의 그 파란만장한 삶이 전개될수록, 그들의 이야기가 교차되고 이야기의 윤곽이 드러날수록 더욱 마음을 졸였다. 특히 기묘한 분위기, 그로테스크한 어둠의 그림자가 글을 펼친 초반부터 나를 옥죄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마력처럼 느껴졌다. 뭔가 한없이 불편하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일수록 더욱 마음을 졸이며 바리의 이야기에 이끌렸다.

읽는 내내 기존의 가치들을 뒤흔들렸고, 나의 마음을 읽어내기에 바빴다. “내가 그곳으로 인도해줄게...”라는 표지의 작은 문구의 의미, 눈에 드러나는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아니, 나는 내심 그녀의 행동에 동조하고 있었다. 산파’, ‘연슬 언니’, 그리고 ‘청하사’의 죽음과 관련한 바리의 행동에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비난의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었다. 그만큼 한 인물을 둘러싼 상황들이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치밀하였다.

그들의 삶, 철저히 소외되고, 세상 밖에 움츠릴 수밖에 없는 삶, 때론 지나친 이기심과 욕망의 굴레에서 속수무책인 그들의 삶에서 그 어떤 삶보다 진정으로 간절함과 절절함이 느껴졌다. 왜 사냐? 삶이 무엇이냐? 묻기 이전에, 그저 묵묵히 살아지는 거, 살아야 하는 게 삶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저 주어진 생이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고, 오히려 자살을 하고, 자살을 이끄는 바리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저 무력하게, 어쩔 수 없이가 아니다. 처절함 속에서도 간절한 열망으로 서로를 보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외된 속에서 그들만의 튼튼한 울타리를 통해 단단하게 견디는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특히 독거노인의 증가와 그들의 자살,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최근의 뉴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몇 번이고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지만 그저 단순한 안타까움으로 순간뿐이던 마음들이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요원한 일처럼 느껴졌던 그들의 어려움이 절로 피부로 느껴지며 tv 속 이미지가 고스란히 재생되었다. 진정 ‘바리’는 우리에게 생명의 묘약, 그 신비의 묘약을 찾아 돌아온 것이다. 소외된 삶의 단면을 낱낱이 파헤쳐 그 아픔과 외로움을 손끝으로 느끼게 하더니, 문제의 해답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제목을 확인하면서 호기심을 키우는 순간, 바로 ‘제 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란 문구가 눈에 띄었다. 반가웠다. ‘혼불’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아파했던가! 그리고 제 1 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난설헌>을 읽으면서도 ‘혼불’을 읽으면서 접했던 그 어떤 비슷한 기류가 느껴져서 많이 애달팠던 기억이 스쳤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저 나를 자연스럽게 이끌어주었다. <프린세스 바리>를 만나고 나니, 내년 10월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앞으로 매년 10월이면 ‘혼불문학상’이란 수상작의 영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올 새로운 이야기를 들뜬 마음으로 펼쳐들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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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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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그녀의 삶은 여전히 안개 속이고, 단지 그녀의 동생 ‘허균’을 통해 얼핏 스칠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증과 호기심이 더해갔다. 그녀의 삶, 민낯 그대로의 삶을 자꾸만 엿보고 싶어진다. 최근에 ‘류지용’의 <사라진 편지-규방에서 진 부용꽃, 허난설헌>를 통해 먼저 만나보았지만 여전히 설명할 길 없는 아쉬움이 맴돈다. 그렇게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최문희’의 <난설헌>을 만날 수 있게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난설헌>은 ‘제1회 혼불문학상’의 영예를 안은 작품이다. <혼불>하면 ‘애잔함’이 떠오른다. 어쩔 수 없는 굴레 속의 여성의 삶은 오늘의 시각에선 때때로 답답함과 분함을 일으키지만, 그 숙명을 오롯이 견뎌내는 삶의 애잔함이 그네들의 삶을 이해하게끔 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에 대한 이해로 결부된다. 그래서 외면할 수도 없을뿐더러, 잔잔함 슬픔을 껴안고, 그리워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애잔함의 그리움이 <난설헌> 속에서도 느껴졌다.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 오롯이 살아 가슴 속 깊이 스며든다. 잔잔하고 고요한 여운이 온몸을 휘감는다.

 

작가는 ‘시인 난설헌’보다는 ‘여자 난설헌’의 주목했다. 누구의 딸, 누이, 아내, 며느리도 아니었다. 참고로 ‘허균’ 역시 이번에는 조연, 아니 단역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조선 중기, 여자의 삶은 무엇이겠는가! ‘누구의 누구’라는 삶이 전부였으리라. 그 틀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던 그녀의 부단했던 삶의 부대낌이 느껴져 마음이 아려왔다.

시집간 후 십여 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그녀의 삶을 기구했다. 어릴 적의 ‘초희’도, ‘난설헌’도 사라지고, 종부, 아내, 어머니의 자리 역시 어느 곳에서도 허락되지 않았다. 고매한 시혼을 지녔다는 이유로 철저히 소외당하고, 내쳐졌다. 그럼에도 오롯이 제 몫으로 감당하고 견뎌내는 그녀의 삶에서 작은 위안을 얻는다. 맑고 순수한 그녀의 영혼에 물들며, 우리의 오염된 영혼은 (작가의 바람대로)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끝까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놓지 않을밖에.

 

청사초롱을 밝힌 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어제의 비와 다르지 않았다. 봄비의 설렘보다는 우산을 뒤집어버리는 날선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듯, 소설 속 함 들어오는 날의 거센 빗줄기는 그녀의 삶의 한 자락이었다. ‘시어머니 송씨’처럼 곡해 보면, 전체적으로 우울한 기운이 감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차분한 어조로, 섬세한 내면을 포착하는 ‘난설헌’의 시어들처럼 소설은 고매하고도 아름답게 그녀를 그려냈다. 정갈하면서도 일관된 침착함이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똘똘 뭉쳐 시샘을 살 수밖에 없었던 ‘난설헌’의 삶이 활자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소설 <난설헌>은 그자체로 ‘허난설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애틋함과 아련함으로 오늘도 ‘그미, 난설헌’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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