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힘 - 역사의식, 기억과 상상력
하비 케이 지음, 오인영 옮김 / 삼인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은 분명 과거의 기억이 될 것이다. 과거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직선적인 세계관에서 출발한 개념적 환상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과거에 우리는 역사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객관적 기록과 서술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모든 사실을 기록할 수는 없다, 따라서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취사선택한다. 그 과정 자체가 주관의 개입이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주관적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하비 케어의 <과거의 힘>은 역사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적 공동체의 이념을 특징으로 삼는다. 역사 연구는 현재와 다른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읽혀야 한다. 단순히 숨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알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며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정치와 사회적 관점에서 역사를 어떻게 인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하비 케어는 진보적인 역사학자이다. 이 책은 ‘역사학의 위기’라는 1970년 중반 이후의 문제를 심도있게 살펴본다. 1991년에 발간된 책으로 주로 60년대와 70년대의 역사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보여준 현실 정치의 한계와 보수성이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인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목적으로 쓰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고리타분한 역사서와 거리가 멀다. 물론 2008년의 관점에서 보면 벌써 한 세대 이전의 이야기로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보수화 경향을 감안한다면 현재적 유용성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소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이래 미국과 영국에서 등장한 신우익(New Right)과 신보수주의 집단들은 공세적으로 역사의 위기를 공표했다. 그들은 역사 연구의 가치를 자유와 평등 혹은 민주적인 공동체의 발전에 비판적인 안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권력에 봉사하고 기껏해야 현상 유지를 뒷받침하는 데 있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이러한 현상은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를 돌아보게 한다. 역사와 경제 교과서를 통해 교육과 이데올로기 문제를 제기하는 그들의 기원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제기하는 문제는 분과학문의 지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 연구의 목적 및 전망 바로 그 자체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비전을 말하고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체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 장은 역사학의 위기를 개관하고 있다. 학교 교육과 교양 측면에서만 다루어지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2장에서는 역사의 위기를 가져온 현대적 양상들을 60, 70년대 미국과 영국의 정치, 경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3장에서는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고찰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역사교육을 통해 과거를 이용 또는 남용하여 자본주의 헤게모니를 재창출하려는 레이건과 대처 그리고 그들의 동료 정치인들의 생각을 들여다본다. 4장에서는 현대의 전개양상들에 대해 살펴본다. 동유럽과 소련의 혁명적 양상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승리’, ‘역사의 종언’을 말하는 보수주의자들과 권력자들의 주장을 살펴본다. 아직 현실 사회주의가 건재했던 시대의 저술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감회가 새롭다. 1994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목도했다면 이 책은 또 다른 양상으로 정리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급진민주주의적 비전과 부활을 강조한다. 역사가에게 필요한 정치와 사회 사상보다 오히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당연한 고민이 엿보인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저자는 당연히 역사가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과거의 힘’은 비판적 통찰력과 상상력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은 역사를 바라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교육의 측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로 남겨진다.

  역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도구이다.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전락해버린 역사에 대한 연민보다 그것으로부터 올바른 교훈과 가르침을 얻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부터 반성해야 한다. 진정한 과거의 힘은 현실과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등대처럼 빛나야 한다. 현실과 유리된 먼 불빛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미래를 비춰줄 충실한 안내자의 역할과 고민과 의식의 각성제 역할을 함께 해내야 하는 것이 과거 혹은 역사의 힘이 아닐까?


모순적이고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이면에서 진정한 동일성을 발견하고,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것 이면에서 실질적인 다양성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데, 이것은 오해받고 있기는 해도 이념을 다루는 비평가들과 역사 발전을 다루는 역사가들에게는 가장 본질적인 재능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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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이덕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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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을 나는 ‘신념’에서 찾는다. 먹이와 생존에 대한 본능이 해결된 이후의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목숨을 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어쩌면 다른 의미의 ‘행복’일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소론 강경파였던 아계 김일경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외쳤다.

  물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경종에게 충신이었으나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그의 자식들마저 절멸됐다. 연좌제의 전통은 끔찍하기만 하다. 그것을 알면서도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한 인간의 고뇌 혹은 고집은 ‘신념’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리라. 가족의 입장에서 다르게 보일 수도 있으나 역사적 관점에서 그와 같은 행동과 입장들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단순히 그들이 불행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대에 도전했던 사람들은 한 두명이 아니지만 우리 역사에서 그들의 행적을 돌아보는 일은 현실을 돌아보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시대에 도전하는 맑은 정신과 피 끓는 외침을 듣기는 더욱 어렵다. 백가쟁명의 시대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영웅을 기다린다. 파시즘은 일종의 마약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6%의 지지, 강남 3구의 지지를 딛고 우뚝 선 강남교육감을 모시고 살아가는 시대에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세상이 어떻게 변하기를 바라는 걸까?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당장 나의 이익과의 관계만을 계산하는 것이 시대정신인가? 교육에 의해 계급은 재생산되고 그 체제는 더욱 교묘하게 공고히 굳어진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내 삶에는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나름의 가치와 판단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시대는 그렇게 흘러왔고 그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씩 변화하기도 했다.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혁명을 꿈꾸었거나 시대를 거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반면교사가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역사이며 바로 오늘 다시 되돌리려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덕일의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는 ‘시대에 도전하라’는 말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시대에 도전했던 사람들의 행적은 아프게 읽히고 반성적으로 돌아보아야 할 현실의 문제만 남긴다.

  주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시대정신’에 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야별로 묶은 이 책은 먼저 중국에 항거한 사람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북벌을 주장하고 주자학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 중 양명학자 정제두가 인상 깊었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유득공도 눈에 띤다. 정치 체제나 종교적인 문제로 자신을 버렸던 사람들, 사회제도나 신분제도에 도전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이 책은 역사적 지식의 편린들을 머릿속에서 끼워 맞춰야 하는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했던 시대적 진실들이 과연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그것이 훗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역사 서술의 방법과 관점에 대한 동의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도 가끔 우리의 역사 교과서를 언급, 인용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지식의 문제를 넘어 관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개인적 용기를 넘어 사회적 진실이 되었을 때 역사의 흐름에 작은 변화가 생기는 법이다.

  책은 끊임없이 얽히고 교통하며 조화를 이루고 간섭한다. 바로 이전의 책에서 보았던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이 책 3부의 제목으로 쓰였다. 4부의 제목 ‘내가 가면 길이 된다’는 당연히 노신을 떠오르게 한다. 어떤 분야의 책이든 합종연횡 되어 지식의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만만치는 않다. 하나의 연결고리가 아니라 거대한 덩어리로 떠다니기도 하고 기억의 저편으로 가물가물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너무 소략하여 에피소드나 일화의 형식으로만 전해지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이 책의 한계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을 소개하고 있어 두루 살펴보는 즐거움을 위해 하나는 희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엮이고 묶이는 의도와 방법을 따라가며 읽는다면 이덕일의 책은 나름대로 계통과 흐름을 따라 갈 수 있어 편리하고 재미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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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인 스파르타인 살림지식총서 173
윤진 지음 / 살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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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트로이>로 강한 인상을 남긴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기억할 것이다. 그 전쟁에서 트로이에 맞선 그리스는 연합군이었고 그 중심에는 스파르타가 있다. 스파르타는 공교육의 창시, 국가에 대한 충성심, 소박한 생활 방식 등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도시 국가이다. 이에 비견되는 아테네는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로 후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두 도시 국가는 정치 공동체인 폴리스는 ‘민주’와 ‘공화’라는 개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이 정치 체제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은 아득한 역사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그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찾게 된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며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유산인 현재에 대한 확인 작업이다. 두 나라에 대한 기억은 인류 문화의 기억이며 정치 제도에 대한 반성이다.

  발전이라는 당위적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과거보다 행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이는 현대 사회에서 일종의 패턴을 보여주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제도와 대의적 민주제도는 반성과 변화를 모색하며 끊임없이 갈등과 충돌을 보여준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물론 국가와 국가의 문제이다.

  윤진의 <아테네인, 스파르타인>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특징을 요약적으로 잘 정리해 준다. 살림지식총서 시리즈의 특징을 잘 살려 쓰고 있다. 제한된 분량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상식 수준에서 벗어나 그들의 수호신과 종교, 축제와 운동경기를 비교하고 있다. 사회구성과 교육, 정치와 군사 등 당대의 모습들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간략하지만 잘 정리된 그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통해 당대 사회와 문화, 정치 그리고 각종 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사항들이 아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서양의 고전을 접할 때 후륭한 전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당대의 사상이나 역사,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때대로 힘겨울 때가 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기 위해 보다 세심한 노력과 풍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그들의 사상은 결국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배태되었을 것이고 그 사상의 효용 또한 그들이 살았던 시대정신을 뛰어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나라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지니고 있는 두 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생활과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한 책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스 도시 국가의 특징과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했고 후대 인류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한 번쯤 관심을 갖게 된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교해 보고 당대의 제도와 종교, 정치와 운동 경기를 살펴보는 일 만으로도 재미있다. 문화사나 풍속사가 중요한 것은 그 자체로도 중요성을 가지지만 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은 사상과 학문의 접근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를 통해 소개받은 이 책은 다른 책을 위한 레시피로 적당하다. 다양한 지적 토대를 가지고 폭넓은 관점으로 과거 인류의 삶을 이해한다면 또 다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그렇게 탄생한 학문과 사상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앎의 방식과 태도는 이렇게 다양하게 종횡무진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야 하는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다른 책을 위한 디딤돌이나 발판의 역할 만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 아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라고 하는 두 도시 국가의 두드러진 특징을 통해 그 나라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바른 이해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상식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며 정확한 이해이기도 한 것이다.

  가장 찬란했던 문화와 강성했던 국가를 건설했던 두 나라.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의 근원이 되기도 했던 그들은 인류의 문화와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현재에도 그들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록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현재는 단순한 과거의 미래가 아니라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노력과 변혁의 힘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고대 아테인과 스파르타인의 전언은 아닐런지.


0807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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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역사 - 역사를 만든 우리가 몰랐던 사건들의 진실
조셉 커민스 지음, 김수진.송설희 옮김 / 말글빛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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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으면서 병사들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조국과 민족이라는 혹은 역사적 사명이라는 혹은 자신의 영웅심과 사명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했을까? 히틀러는 영국을 폭격하면서 세계 제국의 꿈이 코앞의 현실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게르만족의 위대함과 유대인이 멸종된 세상을 생각했을까?

  역사에 가정법을 들이대는 가장 멍청한 짓을 해보는 것은 본능적인 호기심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말한대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영원한 아쉬움은 한 사회를 추동하는 또 다른 힘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벌어진 사실에 대한,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들의 판단은 과연 ‘진실’에 얼마나 접근했을까? ‘진실’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르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의미 있는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한 조셉 커민스의 <만들어진 역사>는 ‘역사를 만든, 우리가 몰랐던 사건들의 진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진실일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일반적인 상식에 기대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 상식 뒤집기에 불과하다. 지나치게 거창한 제목과 과대 포장은 오히려 책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시킨다. 이 책은 세계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거시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는 훌륭한 책이지만 부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조셉 커민스는 이 책에서 자신있는 목소리로 역사적 사건들을 재해석하거나 특별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는 않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에서 시작하여 2001년 911테러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를 움직인 중요한 사건들을 점검하고 그 순간을 묘사하여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객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역사의 최종 의미는 아니겠지만 기본 전제임에는 틀림없다. 저자는 이 기본 전제에 충실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해석이나 잘못 전해진 이야기들 그리고 역사적 평가와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사를 다룬 다른 책들과 구별짓는 특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선 이 책은 시간과 공간적 배경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하나의 사건을 정확한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역사 시대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현재형으로 들려주고 그 결정적 순간이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의미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한다. 물론 이 사건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가정법을 들이대고 싶은 사건들이다. 그래서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420페이지 분량이지만 중간 중간 사진과 그림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독자들의 상상력에 생기를 불어넣고 가정법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전 세계 역사를 고루 연구하고 통찰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내용이다. 여기서 ‘전 세계’란 물론 유럽과 미국을 이르는 말이라서 서글프다.

  특히 동양에 관한 역사는 ‘베트콩’(원문이 어떠하길래 역자는 이런 표현을 썼는지 그 저의가 대단히 의심스럽다)의 구정 총공세가 전부이다. 저자의 세계사에 대한 안목을 탓할 필요는 없겠다. 이쪽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나 관심이 없거나 아는게 없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에서 전부를 얻을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에 동의한다면 이 책은 충분히 나름의 가치와 재미를 지니고 있다.

  대체로 전쟁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기준에 부합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잔인한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이나 잔 다르크의 죽음,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 솜므 강 전투, 히로시마 원폭 투하 등의 사건을 접할 때마다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의 삶은 엄청난 살육과 전쟁과 고통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물론 지금도 팔레스타인 문제는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고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침공 등은 만들어진 역사가 아니라 진행형의 역사이다.

  미국인의 시각이라는 한계로 볼 수는 없다. 객관적인 역사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책은 세계사에 대한 상식 바로잡기 정도의 의미로 읽는다면 재밌다. 더 이상의 깊이와 깊은 성찰은 관련 분야의 다른 책을 통해 충족시켜야 할 것 같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큰 흐름과 중요한 사건들을 재조명해보는 책으로 접근한다면 크게 실망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한 가지 문제는 24,500원이라는 책값이다. 표지와 판형과 삽입된 사진과 도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내용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가지고 보급판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내용 자체에 대한 독자들의 선택에 대해서는 조금 망설여질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겠지만.

  인류가 살아온 시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역사에 관련된 수만 권의 책들 속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자의 특별한 관점에서 시작해서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다양한 접근, 특정 사건이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책이라면 동서양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과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이렇게 욕심많은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앎과 고민의 힘으로 세상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도록 우리는 오늘도 조금씩 그리고 한 걸음씩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담론이 없는 죽은 역사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역사는 역사일 뿐이 아니라 역사는 과거이며 현재이고 우리들의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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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8-07-0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서양중심적인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에 번역된다면 큰 호응을 얻지 않을 것을 알았을텐데 말이죠. 좀 의아했어요. ^^

sceptic 2008-07-01 22:5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습니다. 미국인이 눈에 비친 유럽과 미국 중심이라서 현실감은 많이 떨어지지만 흐름을 이해하기엔 괜찮았습니다.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
스티븐 버트먼 지음, 김석희 옮김 / 루비박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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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흐름에 온몸을 맡겨보자. 우리의 생애는 영원 속에서 점으로도 찍힐 수 없을 만큼 짧다. 덧없는 인생이란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다. 사람이 산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깊은 고민과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생의 유한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한 번은 죽는다. 인생의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대전제에서 출발하면 인생은 그렇게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다. 역설적으로 모두에게 공평한 죽음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겸손해지고 숙연한 마음으로 자신의 생을 돌아보게 된다.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시간 여행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이 순간과도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본다. 역사가 항상 우리에게 정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미래를 예견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타당한 것일 때가 많다. 특히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 여행은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

  고고학은 그저 옛 사람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결국 어떤 학문이든 그것은 인간의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지적 호기심은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고 시간에 대한 탐구와 앎에 대한 욕구는 땅을 파게 했다. 역사에 전해지는 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은 어쩌면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 시간여행을 시도한다. 때때로 그것은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인간의 기록이나 기억보다 더 진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유물과 유적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내는 노력은 순전히 과거에 대한 동경과 인류 역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고고학 여행이 절대로 ‘낭만과 모험’으로만 가득할 수는 없다. <인디애나 존스>류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낯선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고고학은 지나온 시간에 대한 관찰이고 과거에 대한 경의로움이다. 스티븐 버트먼의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은 ‘doorways through time'이라는 훨씬 낭만적인 원제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평범해져버린 제목이 아쉬움을 남긴다.

  어쨌든 이 책에는 전 세계를 통틀어 눈에 띠는 유물과 유적을 고고학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학문적인 관점에서 딱딱하게 이론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 아니다. 마치 드라마나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재현하고 발굴과정을 소개하며 놀라운 광경을 자세히 묘사한다. 그 경이로운 순간을 기록한 사람들의 책과 말을 직접 인용하면서 해설을 덧붙이고 있어 짧은 글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있다.

  학문적인 깊이가 있고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눈이 있는 전문가가 대중적인 글을 잘 쓸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번역 소개되는 외국 서적 중에서는 그런 종류의 책이 자주 눈에 띤다. 우리에게도 없지 않지만 아쉽고 부러울 때가 많다. 학문의 다양성과 자유로운 관점은 사회적인 분위와 학문적 풍토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요원한 일인 것 같아 안타깝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치 눈앞에 펼쳐지듯 서술한 ‘폼페이 최후의 순간들’이다. 초등학교 때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계몽사 세계명작문고에서 읽었던 그 감동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생생한 일상의 모습들이 그대로 잿더미에 묻혀 참혹하지만 비장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위대한 자연 앞에 항상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그 모진 역경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오히려 자연의 대재앙을 만들어내는 오만한 인간의 모습이 두렵다.

  신화 속에만 존재할 것이라 믿었던 트로이의 유적 이야기나 잉카 제국의 이야기는 전쟁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인간의 숙명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투탕카멘 왕과 진시황제의 무덤은 놀라움을 넘어 분노를 일으킨다. 후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문화유산이고 자랑스러운 역사적 현장이겠지만 그것을 만들었던 민중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야만의 시절이었고 통곡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늘 꿈을 꾸고 그것을 찾아 어디론가 떠난다. 현실에 발붙이고 살지만 마음은 언제나 허공을 딛고 힘차게 날아오른다. 때로는 몽상이나 환상으로 끝나버리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현실이 되고 실제 과거에서 벌어졌던 일일 수도 있다. 꿈은 언제나 현실을 위한 상징이다. 그것은 때대로 환각제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행복을 위한 처방전이 되기도 한다. 지나간 역사가 들려주는 그 수많은 이야기와 묻혀버린 시간 속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보자. 한 권이 책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즐거움은 상상이며 공상이고 환상이며 꿈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언제나 처절한 투쟁과 피로 범벅된 참혹한 역사 속에서 꾸었던 꿈이라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08061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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