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역사 - 역사를 만든 우리가 몰랐던 사건들의 진실
조셉 커민스 지음, 김수진.송설희 옮김 / 말글빛냄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으면서 병사들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조국과 민족이라는 혹은 역사적 사명이라는 혹은 자신의 영웅심과 사명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했을까? 히틀러는 영국을 폭격하면서 세계 제국의 꿈이 코앞의 현실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게르만족의 위대함과 유대인이 멸종된 세상을 생각했을까?

  역사에 가정법을 들이대는 가장 멍청한 짓을 해보는 것은 본능적인 호기심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말한대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영원한 아쉬움은 한 사회를 추동하는 또 다른 힘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벌어진 사실에 대한,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들의 판단은 과연 ‘진실’에 얼마나 접근했을까? ‘진실’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르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의미 있는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한 조셉 커민스의 <만들어진 역사>는 ‘역사를 만든, 우리가 몰랐던 사건들의 진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진실일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일반적인 상식에 기대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 상식 뒤집기에 불과하다. 지나치게 거창한 제목과 과대 포장은 오히려 책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시킨다. 이 책은 세계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거시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는 훌륭한 책이지만 부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조셉 커민스는 이 책에서 자신있는 목소리로 역사적 사건들을 재해석하거나 특별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는 않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에서 시작하여 2001년 911테러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를 움직인 중요한 사건들을 점검하고 그 순간을 묘사하여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객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역사의 최종 의미는 아니겠지만 기본 전제임에는 틀림없다. 저자는 이 기본 전제에 충실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해석이나 잘못 전해진 이야기들 그리고 역사적 평가와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사를 다룬 다른 책들과 구별짓는 특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선 이 책은 시간과 공간적 배경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하나의 사건을 정확한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역사 시대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현재형으로 들려주고 그 결정적 순간이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의미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한다. 물론 이 사건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가정법을 들이대고 싶은 사건들이다. 그래서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420페이지 분량이지만 중간 중간 사진과 그림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독자들의 상상력에 생기를 불어넣고 가정법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전 세계 역사를 고루 연구하고 통찰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내용이다. 여기서 ‘전 세계’란 물론 유럽과 미국을 이르는 말이라서 서글프다.

  특히 동양에 관한 역사는 ‘베트콩’(원문이 어떠하길래 역자는 이런 표현을 썼는지 그 저의가 대단히 의심스럽다)의 구정 총공세가 전부이다. 저자의 세계사에 대한 안목을 탓할 필요는 없겠다. 이쪽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나 관심이 없거나 아는게 없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에서 전부를 얻을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에 동의한다면 이 책은 충분히 나름의 가치와 재미를 지니고 있다.

  대체로 전쟁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기준에 부합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잔인한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이나 잔 다르크의 죽음,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 솜므 강 전투, 히로시마 원폭 투하 등의 사건을 접할 때마다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의 삶은 엄청난 살육과 전쟁과 고통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물론 지금도 팔레스타인 문제는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고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침공 등은 만들어진 역사가 아니라 진행형의 역사이다.

  미국인의 시각이라는 한계로 볼 수는 없다. 객관적인 역사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책은 세계사에 대한 상식 바로잡기 정도의 의미로 읽는다면 재밌다. 더 이상의 깊이와 깊은 성찰은 관련 분야의 다른 책을 통해 충족시켜야 할 것 같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큰 흐름과 중요한 사건들을 재조명해보는 책으로 접근한다면 크게 실망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한 가지 문제는 24,500원이라는 책값이다. 표지와 판형과 삽입된 사진과 도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내용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가지고 보급판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내용 자체에 대한 독자들의 선택에 대해서는 조금 망설여질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겠지만.

  인류가 살아온 시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역사에 관련된 수만 권의 책들 속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자의 특별한 관점에서 시작해서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다양한 접근, 특정 사건이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책이라면 동서양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과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이렇게 욕심많은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앎과 고민의 힘으로 세상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도록 우리는 오늘도 조금씩 그리고 한 걸음씩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담론이 없는 죽은 역사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역사는 역사일 뿐이 아니라 역사는 과거이며 현재이고 우리들의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080623-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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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8-07-0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서양중심적인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에 번역된다면 큰 호응을 얻지 않을 것을 알았을텐데 말이죠. 좀 의아했어요. ^^

sceptic 2008-07-01 22:5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습니다. 미국인이 눈에 비친 유럽과 미국 중심이라서 현실감은 많이 떨어지지만 흐름을 이해하기엔 괜찮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