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훔친 위험한 冊들 - 조선시대 책에 목숨을 건 13가지 이야기
이민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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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행동이다’라는 J. 네루의 말을 패러디 하자면 책의 종착역도 행동이다. 책은 사상의 집합체이며 인간 지식의 결정체다. 누가 뭐래도 인간의 호기심은 책을 통해 확인될 수밖에 없다. 책은 가장 은밀하고 수준 높은 영혼의 교류였으며 말없는 혁명가였다. 아무나 책을 쉽게 접할 수 없던 시대에 책은 지식이었고 권력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책을 따라 흘렀고 책을 통해 펼쳐졌으며 책을 통해 변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의 경우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책의 문화사를 정리할 만하다. 이민희의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은 기득권 세력이나 왕의 입장과 달랐기 때문에 화를 입었던 책이나 저자의 생각이 시대와 불화하여 일어난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던 책 이야기를 적고 있다. 책은 어느 시대에나 불온하며 위험하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책의 운명들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을 이용한 정치와 기득권 세력과 왕의 장난이다.

  근대 이전의 시기였기 때문에 책의 의미와 역할은 더욱 컸다. 글을 알고 책을 읽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던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은 양반들의 이야기이고 정치의 이야기이며 권력의 이야기이다. 글 모르는 대다수 서민들은 이 책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끼어들 틈이 없다. 한글이 의사소통과 문자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는 18세기 이후에나 책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책의 역사는 슬픔과 고통의 역사다.

  방각본 소설이 나와 전기수가 활약했다는 것은 책이 그만큼 귀하고 글 아는 사람이 적었다는 반증이다. 누구나 쉽게 책을 살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시대는 긴 인류의 역사에서 정말 얼마 안 되는 시기의 이야기다. 국방부의 불온서적 발표로 책 판매량을 급증시켜주었듯 이제는 금지도서나 불온서적은 오히려 관심을 증폭시키고 호기심을 높여줄 뿐이다. 책 뿐만 아니라 여전히 노래 가사를 검열하고 영화를 심의하는 나라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자니 좀 우습기는 하다.

  조선시대의 책 이야기는 현재의 관점에서 흥미롭다. 책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조선의 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을 취한 이 책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책의 ‘문화사’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는 조선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실록이나 다른 사료 등을 통해 드러나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역사의 갈피들 속에 씨줄과 날줄처럼 이야기들이 얽혀있고 교묘하게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 틈을 정확하게 읽어주고 있다.

  단순히 저자의 상상력이나 추측성 발언으로 흥미를 끌어내는 책은 아니다. ‘책’이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맥락, 역사적 인물들이 보여준 태도 등 다양한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진 사건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역사는 평면이 아니고 입체적이다. 역사는 죽은 미라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 숨쉬는 유기체와 같다. 

  사실에 대한 재해석이 역사라면 책은 해석의 기준과 잣대로 훌륭한 역할을 한다. 한 권의 책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세계관이나 학문적 깊이 혹은 내용의 새로움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 가능한 것이 책이지만 그 책이 탄생하게 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전의 경우 그 책이 갖는 의미를 절반 밖에 읽어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책의 문화사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열 세가지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야기보다 더 흥미 있는 형식은 없다. 채수의 ‘설공찬전’이 사림의 훈구파 사냥으로 비화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 책은 문을 연다. ‘조선책략’을 통해 구한말을 들여다보는 일은 답답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500여 년을 이어온 왕조에 대한 애틋함이 아니라 500년 동안 그 모순과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서민들의 삶이 원통함이 읽힌다.

  이 책을 덮으면서 책과 무관하게 이렇게 모진 역사를 지탱하고 견뎌낸 것은 기득권의 모략과 우국충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조차 읽을 수 없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민중들의 생각은 이 책들에서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읽고 싶어졌다.

  지식이 곧 권력이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식에 접근하는 경로조차 차단되고 비밀에 부쳐지던 역사를 견뎌온 21세기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한 재미로 그칠 일이 아니다. 아직도 상식 밖의 일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고 있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 현실의 길을 책에서 고민하는 것 뿐이다.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모든 지식을 전해주지만 어떤 길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길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쓰인 책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것을 고찰하는 일은 단순히 역사에서 교훈을 읽어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과정과 지금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내는 일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책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의미가 퇴색하고 세상이 달라졌지만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선인들의 삶까지 퇴색하지는 않았다. 푸르게 살아 숨 쉬는 정신들을 본받거나 되새기는 일이 중요하다. 한 권의 책을 둘러싼 무협영화 같은 주변 이야기는 흥미와 호기심을 위한 당의정일 뿐이다.
 
  각 이야기들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일곱 개의 ‘조선의 책이야기’는 책의 흥미와 여백을 훌륭하게 이어준다. 조선 시대 전체를 망라할 순 없지만 대표적인 책과 관련된 사건들을 통해 당시의 사상과 문화, 정치와 외교를 읽어내는 재미는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이다. 더구나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09020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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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역사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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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동안 시간 여행은 참으로 행복했다. 무릇 책은 온 영혼을 바쳐 써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독자가 몰입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다. 내용과 무관하게 저자의 내밀한 고백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이다. 가볍고 즐거운 방법이라도 그것이 독자의 내면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독자와 작가의 궁합도 필요하다. 독자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 책이 선택되고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고 서로 소통하며 독서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일면식도 책꽂이에 좁은 책등을 내보인 채 일렬로 서 있는 책들을 볼 때마다 반추한다. 제목과 저자를 떠올리고 내용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흐린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소파에 앉아 책장을 훑어보는 일은 그래서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그것은 내가 지내온 시간의 역사이기도 하며 흘러온 과거의 추억이기도 하다.

  한 개인에게도 삶의 굴곡이 있고 결정적 순간이 있으며 변화의 시점이 존재한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는 말해 무엇 할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나의 사유 방식 그리고 나의 미래를 말해준다.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경태의 <역사>는 탁월하다. 수많은 역사책을 뒤적여보았지만 내게 필요한 책은 바로 이런 책이었다고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역사책이 아니다. 연대기적 서술이나 사실의 확인을 위한 역사책은 부지기수다. 하지만 시공간을 가로질러 웅장한 교향곡과 같이 연주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저자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이 아니라면 이런 책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역사 자체의 의미를 묻거나 역사의 관점에 대한 논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평가, 유사한 사건이나 개별적 인물들의 공통점 등 역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의 보고이며 확대 재생산이 가능한 학문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안목과 특별한 관점을 선보인다.

  스스로 ‘문외한’이라 칭한 저자의 겸손은 지나치다. 전문 역사가의 몫은 따로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크로스오버나 퓨전을 전문으로 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는 돋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과 평가지만 이 책은 저자의 노력에 값하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6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작년에 구입하고 유일하게 읽지 못한 책이었다. 집중해서 시간을 들여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학>, <개념어사전>, <스토리철학18> 등을 통해 보여준 인문학적 지식과 활용 능력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저자를 믿고 구입하고 읽고 기대 이상을 충족한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 책의 면면을 살펴보자.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탄생은 역사가 시작된 단계와 문명 이전의 선사시대를 다루고 있다. 2부 성장에서는 제각각 걸어온 시기를 다룬다. 13세기 무렵까지의 역사가 되겠다. 가장 중요한 3부 만남과 섞임에서는 두 문명이 본격적으로 조우하는 과정을 그리고 문명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과정들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마지막 4부에서는 두 문명의 차이와 오늘날의 영향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잘 짜인 대하 역사 드라마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해석이나 중요했던 순간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두 개의 문명 축을 중심으로 그 성격을 규명하고 차이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게다가 현실적 관점에서 그 연원을 밝히는 논평은 작가만의 시각을 개성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에 연표가 붙어 있다. 시기별로 연대별로 정리된 중요한 사건들을 훑어 볼 수 있으며 내용의 흐름에 따라 찾아 볼 수 있지만 개별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정확한 연대기가 필요하다면 잘 정리된 다른 책을 참고하면 될 듯싶다. 이 책은 역사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유목한다. 연대를 거슬러 유사한 사건과 인물들을 배치하기도 하고 동서양을 넘나들며 정치제도와 경제적 토대를 비교하기도 한다. 문화적 차이와 삶의 토대는 역사적 관점이 없다면 그 연원을 밝히기가 힘들다. 단순한 사건과 개별적 사실들이 한 데 어우러져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동양 문명의 중심은 중국의 중원이라는 땅 덩어리였지만, 그에 해당하는 서양 문명의 중심은 지중해하는 바다였다.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의 차이다. - P. 50

  분열과 분산을 본성으로 하는 유럽 문명에 최소한의 통합성을 부여한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로마제국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다. 그것들이 있기에 유럽의 중세 문명은 역사적․현실적 동질성과 함께 종교적․정신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P. 148


  동서양 문명의 차이는 물론 유럽 문명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한 마디로 짚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배경과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하게 밝혀내고 하나의 맥락으로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책은 맥락읽기가 가능한 책이다.

  문제는 독자의 입장에서 단순한 흥미와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저자의 관점에 동의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특히 오늘날 벌어지는 사회 경제적 문제들의 연원을 밝히는 데 그 연결고리를 제대로 이어져 있는지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책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본적인 태도와 관점의 유사성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수레바퀴처럼 그 흔적들을 따라가고 있다. 전철을 밟는다는 표현은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변화의 속도는 느리고 힘겹기만 하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에는 지름길이 있을 뿐 결코 비약은 없다. - P. 547

고 말한다.

개인의 의식적 행위가 역사적 무의식의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민간 부문의 활성화를 축으로 하는 서양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것이 바로 서양 문명을 세계 문명으로 이끈 힘이다. - P. 285

  동양의 역사에서는 국가 체제가 아주 일찍부터 발달했으나 묘하게도 ‘국민’이라는 개념이 부재했다. ‘백성’은 언제나 있었어도 ‘국민’은 20세기의 산물이자 서양식 근대화의 결과다. 그 이유는 통치의 룰이 달랐기 때문이다. 동양의 지배자는 권위에 기반해 국가를 경영한 반면 서양의 지배자는 계약에 기반에 국가를 경영했다. - P. 328

  국가를 유기체처럼 여기고 개인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받드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점이다. 동양의 역사와 우리 역사에서는 늘 정치, 즉 나라의 경영이 모든 것보다 우선했고 일찍부터 관이 민을 지배하는 체제가 자리 잡았다. 공화국 전통 60년이 넘은 지금도 우리는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P. 638


  의도된 역사는 없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과거를 토대로 할 뿐이다. 저자는 그것을 무의식의 결과라고 표현했다. 서양의 문명은 물처럼 흘렀고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지만 동양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통제되었으며 하나로 수렴되었다. 얼마나 큰 차이가 벌어졌겠는가. 그 결과는 오늘 우리가 확인하는 그대로이다.

  시민혁명의 경험 - 그 소중한 경험이 우리에겐 없다. 백성과 국민은 있었지만 시민은 없었다.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생각할 때 가장 아쉽고 통탄할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겪어온 시간의 흔적이다. 가정법 없는 역사에서 안타까움을 찾아내기 보다는 미래를 위한 비전을 읽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와 사회,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저자의 평가를 부정할 수 없다. 역사는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를 거울에 비춰보는 행위이며 내일의 지표를 설정하는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에필로그가 더없이 뼈에 사무친다. 우리는 역사를 아직도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역사적 관점은 인문학적 관점이다. 문제의 발견과 인식에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현실의 문제는 누가 무엇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문제의 해법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제의 발견과 인식에는 대단히 유용하며, 보이지 않는 지름길을 찾는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인문학이 그에 마땅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풍토다. - P. 657

09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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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다른만화 시리즈 1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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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역사는 민주주의 역사다’라는 동경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평등과 자유가 가치가 실현된 복지 국가로 정의를 위해서만 주먹질을 하는 착한 나라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 스스로에게 묻지만 답을 구하기 모호하다. 공교육 기관을 통해 전해진 지식 속에는 분명 미국은 우방이며 6.25전쟁에서 한국을 구해 준 고마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아직도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어쩌면 미국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노른자위 땅 용산. 배산임수의 기막힌 자리에는 2008년 현재 아직도 미군이 자리 잡고 있다. 철수가 확정되었지만 철수비용을 둘러싼 소음과 잡음은 끊이질 않고 미군철수 문제나 SOFA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미국은 과연 대한민국의 친구일까?

  자선사업가도 날개 없는 천사도 아닌 미국에 대한 환상은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을까? 단순히 경제적 원조, 무역의존도 때문이었을까? 정치적 민주화때문이었을까? 미군정의 한반도 분할 통치정책과 이승만의 집권은 지구 전체를 상대로 한 미제국의  패권주의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논의는 역사가 말해 줄 것이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분석과 고민이 필요한 문제이다. 온정주의와 맹목적 사대주의 모두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유 없는 반미도 문제지만 조선시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버금가는 미국 섬기기는 더더욱 문제다. 경제나 군사 분야뿐 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와 학문에서도 미국 위주의 패권은 계속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은 미국이고 한국은 한국이다. 두 눈을 바로 뜨고 미국을 투명하게 바라보자.

  촘스키나 하워드 진이 한국인이라면 아마 오래 전에 국가보안법으로 장기수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추악한 이면과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쏟아낸 그들의 말과 글은 결코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그 성과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단순하게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색다른 시각 정도로 보아 넘길 수 없는 이들의 발언에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이 아니라면 지식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존경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넓은 의미로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미국이라면 나는 미국을 부러워하고 싶다. 타인의 생각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견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열린 가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힐러리를 끌어안은 오마바에게 박수를 보낼 일이 아니라 민주당이 집권해도 공화당이 국무장관을 할 수 있는 미국인의 정치 풍토가 부럽기는 하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일 뿐이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는 미국 역사를 접근하기 쉽게 접근하고 있는 만화책이다. 그 소통의 수단과 도구는 접근 대상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아이들에게 혹은 멍청이로 졸업한 성인들에게 미 제국주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관점이 달라지고 색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는 안다. 한 번 고정된 시각과 뿌리박힌 고정관념은 총보다 무섭다. 죽어도 그것을 바꾸기 어려운 것이 신념인데 그 신념을 깊이 고민하거나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았는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서 민족주의 관점에서 나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이성적 판단 이전의 문제로 생각하기 쉽다. 애국적 민족주의는 근대 이후 형성된 가장 두려운 이념이며 개인을 옭죄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 그것은 어느 나라 국민이든 소속 국가에게 빚지고 있는 마음의 감옥이다. 자유주의 혹은 민주주의 국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미국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외쳤지만 원주민인 인디언들 입장에서는 참 어이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무인도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모르던 땅에 대해 알게 된 것이 그리 큰 일이었을까마는 인디언들에게는 큰일이었다. 400년 쯤 후 1890년 운디드니 학살 사건은 미국의 본질을 보여주는 잔혹함 그 자체였다. 영국의 산업혁명 여파로 미국에도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밀어닥치고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자본의 횡포가 시작된다. 미국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이며 노동자 탄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페인과의 전쟁, 필리핀 침공, 1,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 니카라과, 쿠바, 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사의 전쟁에 미국이 빠진 적이 없다. 석유와 산업화를 위한 원료 기지, 군수산업과 긴밀히 연결된 정치인들의 연결고리는 애국주의와 맞물린다. 백인 기독교로 대표되는 미국인과 달리 흑인들의 인권과 자유는 철저하게 외면당했고 더구나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은 전쟁과 억압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바로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이면의 숨은 진실을 보아야한다. 삐딱하고 왜곡된 시선은 맹목적인 믿음과 표면적인 현상에 대한 신뢰만큼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아니 왜곡된 사실이나 과장된 사건들에 이념의 옷을 입힐 때는 끔찍한 결과가 찾아온다. 바보가 되어버린 대중은 파시즘에 경도되고 전체주의에 함몰되며 그것을 민주주와 미국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과연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전쟁이며 정책인지 가만히 들여다보라. 물처럼 투명한 진실이 드러난다. 눈 감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워드 진은 미국의 역사를 통해 미국의 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지나간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진짜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제대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역사조차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는 현실에서 미국의 역사를 만화로라도 살펴보자는 말을 하자니 슬픔이 밀려온다.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는 오늘도 안녕하신가? 아니, 검인정제도는 오늘도 안녕하신가? 아니, 공정택에게 불려간 교장들은 오늘도 안녕하신가? 한국보다 미국, 미국보다 한국이 더 걱정이다. 아니, 오십보백보!


08112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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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화사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 돌베개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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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해가 지고 완전한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의 시간. 그 푸른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이며 낮과 밤의 고비를 넘어가는 순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파스텔톤 여명의 그림자 때문이다. 어둠이 사라지고 파란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보다 고즈넉한 해질녘이 훨씬 편안하고 여유롭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휴식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밤을 맞이하는 것을 누가 반기지 않겠는가. 밤은 그렇게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선사한다.

  낮이 노동과 의무의 시간이라면 밤은 휴식과 자유의 시간이다. 사회적 관계로 얽매인 시간이 낮이라면 개인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밤이다. 밤은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모호함과 마술의 시간이다. 현대인에게도 밤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진부한 말이 아니어도 개인이든 사회든 밤은 낮보다 대담하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감성의 시간이다.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낮의 시간보다 모든 것을 신비로움 속에 감추어 두는 밤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닮았다. 밤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였으며 어떤 역할을 했고 인류 역사에서 두려움의 존재로만 인식되었을까? 도대체 밤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렇게 인류 역사의 반쪽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해 보인다. 로저 에커치는 밤의 역사를 기막힌 솜씨로 풀어 정리했다. <밤의 문화사>는 근래 보기 드문 재밌는 책이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물론 정보와 재미를 선사한다. 인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전해준다.

  역사적인 사건과 영웅 중심의 거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참 재미있는 일이 많다. 생활사 혹은 미시사로 명명되는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진짜 역사에 대한 궁금증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바로 이런 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저자는 20여 년간 준비해온 자료와 연구를 통해 근대 이전의 ‘밤’이 어떠했는지 상세하게 밝혀놓았다. 그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어진다. 이 책의 진가는 읽는 동안 한 마디, 한 장면이 풍부한 상상력과 철저한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산업혁명 이전 서양 사회로 한정되어 있더라도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아니다. 다른 지역의 밤에 대한 역사가 쓰여진다면 그 또한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기대해 본다.

  이 책은 공포로부터 시작된다. 1부의 ‘죽음의 그림자’는 밤의 위험에 대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가로등도 없고 통금이 있던 시절 치안은 어떻게 유지되었을까. 야경꾼과 도둑 사이의 흥미진진한 관계는 한 편의 영화처럼 아득하다. 경찰이 만들어져 시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보다 도둑맞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현대사회가 반증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약탈, 폭력, 방화로 대표되는 밤의 그림자는 죽음과 맞닿아 있었지만 말이다.

  ‘자연의 법칙’은 교회와 국가로 대표되는 공적인 기관에서 밤을 대하는 태도와 민간에서 밤을 맞이하는 방법은 조금 달랐다. 당국은 나약했고 가정은 요새가 되었다. 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처럼 가로등도 없고 불빛도 없는 거리를 생각해 보면 과거의 밤은 지금과 밤과 많이 달랐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양초로 대표되는 불빛은 이제 인간의 노동시간 연장을 의미하기 시작한다. ‘밤의 영토’는 점점 넓어지며 모든 사람에게 사교와 성과 고독을 선사한다. 평민들에게도 밤의 시간이 주어지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여유와 휴식의 시간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방종과 쾌락에 빠지기도 하며 영주와 귀족에게는 그들만의 리그가 열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완전한 ‘사적인 세계’로 밤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잠을 두 번에 나누어 잤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만 하다. 첫 잠을 깬 후 담배를 피우고 대화를 나누고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과거의 밤이다. 지금과는 삶의 리듬이 달랐고 인공 조명의 피해가 훨씬 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중세말기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밤의 역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로부터 점차 밝은 빛의 세계로 나아간다. 하지만 과연 낮의 연장이 완전히 실현된 24시간 체제의 현대가 그때보다 발전되거나 진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둠이 줄어들면서 사생활과 친밀감과 자아 성찰의 기회도 훨씬 드물어질 것이다. 기어이 그 밝은 날이 오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는 소중한 우리 인간성의 절대 요소를 잃게 될 것이다. 이는 어두운 밤의 심연에서 지친 영혼이 숙고해봐야 할 절박한 전망이다. - P. 436

  밤은 여전히 우리에게 휴식과 안정의 시간으로 여겨진다. 직업과 상황에 따라 밤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오랜 습성을 인공조명으로 바꾸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고 즐거운 일도 아니다. 삶의 시간이 연장된다는 측면에서 밤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밤이라는 특별한 시간에 벌어지는 온갖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이제는 당연하기만 하다.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개의치 않는 것은 자본과 욕망뿐이다.

  독서와 사색을 즐기고 명상에 잠기는 밤은 매우 사적인 시간이다. <밤의 문화사>는 인류가 걸어온 한 시대의 밤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며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밤’에 대한 오래된 기억들이다.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밤에 무엇을 했으며 하루 일을 마치고 어떻게 지냈을 지 궁금하다.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꼼꼼한 자료와 꾸준한 연구를 통해 생생하게 살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양의 밤이라고 해서 무어 그리 특별했을까마는 문화의 차이만큼은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인 것만은 틀림없다. 여전히.

0811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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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길들이기 - 로마 몰락에서 유럽 통합까지 다시 쓰는 민족주의의 역사
장문석 지음 / 지식의풍경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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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 않은 지 10년 쯤 됐다. 공식 행사에서도 가슴에 손을 올리지 않고 그냥 서 있다. 입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단순한 치기와 저항이 아니다. 민족은 무엇이며 내개 조국은 무엇인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고 지금도 그러하다. 맹목적인 충성과 복종의 강요는 군대에서부터 아니 생내적으로 심한 구토를 유발한다. 모든 억압과 굴종으로부터 개인은 자유로워야 한다. 보이지 않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의 음모는 계속된다. 그것은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체제와 현상을 미화하고 내면화시키려는 시도가 지속된다. 그러나 그 마지막 향수와 추억은 과거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지 않는 한 ‘민족주의’라는 쓰레기는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역사의 교훈과 시행착오 속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광기와 폭력이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근대와 탈근대적 민족주의와 파시즘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의 문제는 단순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한 것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개인이 속한 계급적 이익과 사회적 상황 속에서 자리한 위치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의 부재와 얄팍한 지식은 판단 자체가 불가능하고 넓고 깊은 통찰의 부족으로 나타난다.

  민족주의가 정리되었다. 쉽게 말문이 트이지 않겠지만 이 한 권의 책으로 민족주의에 대한 객관적 시각과 안목이 생겼다. 특별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서가 아니라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하는 책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야겠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 1~3>, <감시와 처벌> 등을 통해 역사철학적 방법으로 현대 사회의 현상들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인류가 밟아온 지난한 과거를 통해 하나의 현상을 고찰하는 일은 가자 알기 쉬운 방법이면서 가장 힘들고 고단한 작업이다.

  장문석은 <민족주의 길들이기>에서 ‘민족주의’가 걸어온 길을 찬찬히 더듬고 있다.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로마 몰락에서 유럽 통합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의 역사를 꼼꼼하게 더듬고 있다. 민족주의에 관한 책을 원할 때 필독서로 권장할 만하다. 저자의 수고와 내공이 녹아 있는 책으로 칭찬 받아 마땅하다.

  우리가, 아니 내가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던 민족주의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근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었다. 물론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통해 얻은 지식과 어줍잖은 사유의 결과물들이기도 하지만. 그 실체가 불분명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어떻게 형성되어왔고 최근까지 분쟁 지역에서 어떤 힘과 영향을 발휘했는지 살펴보는 일은 차라리 고통스럽다.

  털없는 원숭이들의 미신과도 같은 민족에 대한 신념은 우습고 안타깝기까지 하다. nation의 번역어이다. 어휘와 개념에 대한 설명들이 곁들어졌지만 국가 보다는 민족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 기원에 걸맞는 듯하다. 이 책에서 민족은 서구의 차가운 민족주의와 동양의 뜨거운 민족주의로 나뉜다. 여기서 차갑다는 말은 정치 공동체에 기반한 민족을 의미하고 뜨겁다는 말은 종족적 기준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이것은 데모스(민주주의)와 에트노스(종족)의 차이이기도하다. 물론 서양 안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데모스적 성향이 강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에트노스에 가깝다고 분류한다. 하지만 이 냉정과 열정의 차이는 이분법적으로 적용될 수 없으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 역사적 상황 맥락 안에서 뒤집히고 흔들리며 접점을 찾아가는 고단한 시간을 거쳐왔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라고 볼 수 있다.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세기 초 본격적인 민족주의가 등장했던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에 두고 있다. 1장은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과 연구사를 정리하고 있어 다소 딱딱하지만 주의깊게 읽어두면 나머지 장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3장은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 유럽의 역사에서 종족과 민족을 다루고 있다. 중세유럽과 영국과 프랑스가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5장과 6장은 민족주의 이후 남동 유럽과 파시즘의 등장 그리고 공동체로 거듭나는 유럽연합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유럽의 역사가 전제되어 객관적인 사실을 정교하게 다듬고 그것을 해석하여 하나의 흐름을 이끌어내는 솜씨는 전적으로 저자에게 달려있다. 지루하지 않고 쉽고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흑백이나마 그림이 삽입되어 있고 영화 이야기도 간간히 등장한다. 저자의 땀방울이 곳곳에 배어 있는 책을 넘기는 독자는 행복하다. 이 책은 오래 두고 참고할 만하고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에필로그로 쓴 ‘반쪼가리 자작의 우화’가 인상적이다. 민족은 어쩌면 선과 악의 봉합되지 않는 몸뚱아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불편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저자의 말대로 종족이 민족으로 리모델링 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고 싶어졌다. 인류의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는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간다. 민족주의도 과거를 통해 미래를 조금은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유럽 통합을 넘어 새롭게 번져 나가는 제국주의의 망령과 파시즘의 부활 조짐은 세계 곳곳에서 감지되는 심상치 않는 기운이다. 꺼진불도 다시 봐야 한다!

  “민족주의는 개인이 최고의 충성을 마땅히 민족에 바쳐야 한다고 믿는 신조이다.”(P. 25)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민족들의 공존과 공영을 위한 문화적 노력 외에도 국가 구조를 민주화하는 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 좀 더 많은 대표성과 민주주의야말로 민족주의를 길들이는 가장 유력한 방식일 것이다. 역설은 그런 대표성과 민주주의를 증진시킨 것이 민족주의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P. 344)는 말로 끝나는 이 책은 뱀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처럼 순환고리를 형성하는 듯하다. 제목처럼 민족주의를 길들이는 일은 뱀이 제 꼬리를 물고 제자리를 도는 일과 같지는 않겠지만 억압과 폭력이 아니라 대표성과 민주주의의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08110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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