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힘 - 역사의식, 기억과 상상력
하비 케이 지음, 오인영 옮김 / 삼인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은 분명 과거의 기억이 될 것이다. 과거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직선적인 세계관에서 출발한 개념적 환상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과거에 우리는 역사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객관적 기록과 서술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모든 사실을 기록할 수는 없다, 따라서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취사선택한다. 그 과정 자체가 주관의 개입이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주관적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하비 케어의 <과거의 힘>은 역사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적 공동체의 이념을 특징으로 삼는다. 역사 연구는 현재와 다른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읽혀야 한다. 단순히 숨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알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며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정치와 사회적 관점에서 역사를 어떻게 인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하비 케어는 진보적인 역사학자이다. 이 책은 ‘역사학의 위기’라는 1970년 중반 이후의 문제를 심도있게 살펴본다. 1991년에 발간된 책으로 주로 60년대와 70년대의 역사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보여준 현실 정치의 한계와 보수성이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인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목적으로 쓰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고리타분한 역사서와 거리가 멀다. 물론 2008년의 관점에서 보면 벌써 한 세대 이전의 이야기로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보수화 경향을 감안한다면 현재적 유용성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소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이래 미국과 영국에서 등장한 신우익(New Right)과 신보수주의 집단들은 공세적으로 역사의 위기를 공표했다. 그들은 역사 연구의 가치를 자유와 평등 혹은 민주적인 공동체의 발전에 비판적인 안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권력에 봉사하고 기껏해야 현상 유지를 뒷받침하는 데 있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이러한 현상은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를 돌아보게 한다. 역사와 경제 교과서를 통해 교육과 이데올로기 문제를 제기하는 그들의 기원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제기하는 문제는 분과학문의 지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 연구의 목적 및 전망 바로 그 자체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비전을 말하고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체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 장은 역사학의 위기를 개관하고 있다. 학교 교육과 교양 측면에서만 다루어지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2장에서는 역사의 위기를 가져온 현대적 양상들을 60, 70년대 미국과 영국의 정치, 경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3장에서는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고찰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역사교육을 통해 과거를 이용 또는 남용하여 자본주의 헤게모니를 재창출하려는 레이건과 대처 그리고 그들의 동료 정치인들의 생각을 들여다본다. 4장에서는 현대의 전개양상들에 대해 살펴본다. 동유럽과 소련의 혁명적 양상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승리’, ‘역사의 종언’을 말하는 보수주의자들과 권력자들의 주장을 살펴본다. 아직 현실 사회주의가 건재했던 시대의 저술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감회가 새롭다. 1994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목도했다면 이 책은 또 다른 양상으로 정리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급진민주주의적 비전과 부활을 강조한다. 역사가에게 필요한 정치와 사회 사상보다 오히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당연한 고민이 엿보인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저자는 당연히 역사가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과거의 힘’은 비판적 통찰력과 상상력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은 역사를 바라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교육의 측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로 남겨진다.

  역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도구이다.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전락해버린 역사에 대한 연민보다 그것으로부터 올바른 교훈과 가르침을 얻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부터 반성해야 한다. 진정한 과거의 힘은 현실과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등대처럼 빛나야 한다. 현실과 유리된 먼 불빛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미래를 비춰줄 충실한 안내자의 역할과 고민과 의식의 각성제 역할을 함께 해내야 하는 것이 과거 혹은 역사의 힘이 아닐까?


모순적이고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이면에서 진정한 동일성을 발견하고,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것 이면에서 실질적인 다양성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데, 이것은 오해받고 있기는 해도 이념을 다루는 비평가들과 역사 발전을 다루는 역사가들에게는 가장 본질적인 재능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P. 67)


0809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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