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갈
김원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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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노피온 왕이 오리온을 장님으로 만들자, 복수하러 나선 오리온 같네.” 안나가 커피를 홀짝거렸다.
  “장님이 된 처지에 왕을 복수한다고? 내가 그렇게 보여?”
  “전갈자리 신화예요. 신탁을 받은 오리온이 시력을 회복해선 복수하러 나섰다가 여신 아르테미스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었죠. 아르테미스의 오빠가 아폴론인데, 누이가 미남 오리온을 사랑하게 될까바 전갈을 보내 누이를 지키게 했는데, 오리온이 전갈 독침에 죽었죠.”

  김원일의 장편소설 <전갈>의 제목과 관련된 신화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강재필와 안나가 나누는 대화가 인상깊다. 한 인간의 숙명은 어쩌면 신화의 시대부터 운명 지워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디선가 느꼈거나 보았던 익숙한 기시감은 운명처럼 발목을 감싸고 목을 조여오기도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그닥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어떤 운명을 타고 태어나 누구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처럼 보일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은 삶에 대한 각기 다른 방식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보통 인생을 ‘만남’이라는 주제로 읽어내면 그렇다는 얘기다.

  한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복권 추첨과 같다. 1차적으로 인종과 국가, 부모와 환경을 선택할 수 없는 우연의 산물이 인생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역사의 현장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현실적인 인간이 과거 속의 인간을 대신 살아내는 과정은 설명하기 힘들다. 조부와 부모의 삶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 속에 분명하게 살아 숨쉰다.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이어지는 진행형의 과거이다. 나는 부모의 미래형이며, 부모는 나의 과거형이다.

  밀양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았다가 만주 731부대 위병초소 근무를 했던 조부와 도시 빈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부친의 삶은 주인공에게 그대로 대물림된다. 주인공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조부의 행적을 쫓는 일은 다분이 작위적이다. 감옥에서 독학으로 대입 검정 고시를 마쳤다고 하지만 출소해서 조부의 행적을 쫓는다는 설정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그러나 소설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담담하게 쫓아가면서 이 땅에 태어나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격앙된 목소리도 아니고 냉소적인 비판도 아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조금씩 현재와 과거를 이어나가는 목소리가 진지하고 차분하게 들린다.

  김원일의 관심과 소설적 이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편소설 <전갈>은 치명적인 독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독의 근원을 묻고 있는 작품이다. 어떻게 만들어진, 누구를 향한 독인가에 대해 묻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역사와 사회를 조망하고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하는 소설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스토리가 주는 흥미와 사건 전개의 재미가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삶의 뿌리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결코 가볍거나 만만치 않은 주제를 3대의 삶을 교차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담백하고 간결한 문장과 함께 대가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의 소설이 보여주는 경쾌함과 발랄함 속에서 김원일류의 소설들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묵직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만나 느끼는 긴 여운은 또 다른 재미를 확인하게 된다. 소설은 결국 우리들 삶의 모습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외면하고 고개 돌려도 우리들의 모습의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다. 그런 면에서 <전갈>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끝나지 않은 역사의 단면이다.

  항상 밝고 행복한 일로 가득한 인생이 없겠지만 철저하게 망가지고 비참한 인생도 찾기 힘들다. 소설은 보통 후자에게 애정과 관심을 보낸다. 주류와 보통 사람들 너머에 있는 사람들, 정상분포곡선의 좌우측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대 정신은 당대의 관심과 문화, 철학적인 배경이나 가치관을 반영하지만 소설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구석구석을 뒤집고 다니며 먼지를 털고 젖은 이불을 널어 말리듯 모두에게 햇빛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독자가 소설에서 건져 올려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장편이었다.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소설가들의 다양한 소설들은 타인의 삶에 대한 애정과 통찰을 키워준다. 어디 내 인생만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나의 고통만을 이야기할 수 있으랴.


07041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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