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시선 273
최종천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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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따먹고 나면 비로소 너는
의미를 떠나 상징을 벗어버리고
하나의 실재가 된다, 아름답고 풍만한
육체가 된다.                                                         - ‘따먹다’중에서

  수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포장하고 꾸며대지만 최종천 시인은 직설적이고 대담하게 언급한다. 도대체 되먹지 않은 사랑 타령은 그만두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따먹고 나야 상징을 벗고 ‘실재’가 된다는 논리는 아름답고 풍만한 육체가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선하게 만들어 준다. 비실재와 실재는 관념론과 유물론만큼의 간극을 보인다. 특히 시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빚어내는 언어의 힘에 기대다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손에 잡히는 대상에 대한 직설법에 인색해지게 마련이다.

  시간의 개념을 무화시키는 어느 봄날의 오후 소나기와 먹구름은 순차적인 선적 순환구조를 무너뜨린다. 공간에 대한 지각과 시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시가 자리잡고 있다는 환상이 필요하기도 하다. 대낮에 알몸을 드러내듯 그로테스크한 장면들과 언어들의 충돌이 시가 되지는 않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시가 보여주는 진정성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독자와의 공감을 통해 형성되는 지점에 있다. 언어가 보여주는 투명함과 낯선 이미지의 현란함이 또 다른 시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최종천은 오랜만에 ‘몸’의 시를 읽어준다.

  몸을 통해 노동을 이해하고 삶을 깨닫는 생활은 실재적이다. 여기에 다른 무엇이 개입할 여지는 많지 않다. 그 과정을 인식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나를 확인하는 작업은 고통스럽기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해보인다. 내 손의 주인은 나다. 가엾은 자신의 손만 들여다보아도 자아를 찾게 된다.

나의 손은 이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

허구가 되어간다
상징이 되어간다.                           - ‘가엾은 내 손’중에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 조작에 전념하고 있다’는 말에 등골이 오싹하다. 평생 실재로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내 손을 들여다 본다. 가늘고 긴 손가락은 게으름과 먹물의 상징이다. 노동의 괴로움도 즐거움도 모른다. 가슴보다 머리로 부대끼며 살아온 것은 아닌 지……

상징은 배고프다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
어떤 사람 하나는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디었다고 했다
만에 하나 그가
예술에 매혹되어 있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한권의 시집이 있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시집 종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서서히 미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징은 늘 배가 고픈가보다. 생존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상징일까? 살기 위해 시집이라도 뜯어먹어야 하는 순간의 아득함을 상상해 본다. 극단적인 비유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희망을 꺼놓자는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무작정 희망을 노래를 부를 수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현실. 태양보다 희망이 더 빛나는 지구에 사는 일은 힘겹다. 희망을 반사해서 빛을 발하는 절망을 없애기 위해 희망을 꺼두자는 빈약한 논리에도 공감할 수 없다. 희망도 절망도 동의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가려움.

희망을 꺼놓자

인간이 희망을 켜놓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므로
희망이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은 인간에게 좋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희망으로는
식물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꺼버리면 어떨까요?
절망은 희망의 위성 같은 것으로서
희망의 빛을 반사하여 빛나고 있기에
희망을 꺼두면 절망도 빛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가 사막화하고 있는 것은
태양보다 희망이 더 빛나기 때문입니다


070328-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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