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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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하고 나른한 일상이 끝없이 펼쳐질 것 같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평화로운 수면 아래 오리의 발짓만큼 숨가쁘고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정확하게 그만큼 일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움직이며 마치 수면위에 그림처럼 떠다니는 청둥오리의 우아함은 부럽지 않다. 처량하고 슬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는다. 나도 너도 다들 그렇게 그만큼씩만 바쁘게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바닥에 땀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권여선의 새로운 소설집 <분홍리본의 시절>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켜켜이 쌓여온 먼지들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다. 일상의 균열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살면서 느꼈던 위기의 순간들은 사실 나의 위기일 뿐이었다.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었던 모든 일들이 나에게 비롯되었다는 낭패감.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내면은 불투명하고 쇳소리가 난다.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지만 주인공들이 모두 삐걱이는 일상과의 불화를 나타낸다. ‘가을이 오면’의 여주인공의 삶이 특별히 불행하거나 환경이 특수하다고 볼 수 없다. 넓은 의미에서 평범한 불행과 일상들이라고 규정해버리면 주인공이 화를 낼까? 아프다고 지르는 비명 소리를 외면하는 것도 나쁜 독자의 요건이라면 나는 나쁜 독자다. 소리 지르는 사람에게 애정을 보이지 못하고 측은지심을 길어 올리지 못하는 내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 어딘가, 무언가 문제가 있는 내면의 풍경이다. 그것이 나의 내면이라도 어쩔 수가 없다. 노력한다고 달라지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소리내지 않고 슬쩍슬쩍 엿볼 수 있도록 곁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장면을 통해 바라보는 타인의 불행과 슬픔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전달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보여지는 고통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대표적으로 ‘가을이 오면’의 여주인공과 ‘약콩이 끓는 시절’의 여주인공이 겪는 내면의 풍경은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못한다.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결정적 단서도 없고, 그것을 무시한 채 소설 속에 침잠시킬만한 문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내면이 삭막해지면 소설이 읽혀지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하는 것인지, 소설이 독자를 끌어안는 방법이 달라져 가는지 모르겠다.

 ‘분홍 시절의 리본’은 윤대녕의 소설에서 보았던 장면이 연상되어 소설읽기에 방해가 되었다. 윤대녕의 단편 ‘못구멍’에서 보았던 ‘구멍’들의 반대편에서 그 구멍들을 들여다보는 것같은 착각은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이었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분홍 리본의 추억은 아스라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단 하나의 이미지나 기억만으로도 타인을 규정해버리는 버릇을 고치는 못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분홍 리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현실 속에서 수없이 부딪히는 환상 혹은 나비.

 나머지 단편들, ‘솔숲 사이로’, ‘반죽의 형상’, ‘문상’, ‘위험한 산책’에서도 작가는 일관되게 일상과 불협화음을 보이는 주인공들의 내면 풍경을 묘사한다. 그들이 겪는 심각한 현실과의 부조화는 겉으로 보기에 원인을 찾을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갈등과 고통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너무 많다. 틈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모든 사람들과 생활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과연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지 궁금하다.

 단 한 순간의 실수와 헛발질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다만 허공에 붕 떴다가 착지하는 순간 깨닫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와 너, 여기와 저기 모두가 무화된다. 소설에서, 혹은 현실에서 우리가 맹목적으로 찾으려는 그 무엇은 어디에도 없고 아무곳에나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양다리를 걸쳐 보아도, 그 경계를 넘어도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


07031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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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3-1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잘쓰시네요...리뷰 잘봤습니다.

sceptic 2007-03-1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잖아요...과찬이신거...^^...드팀전님의 리뷰는 예술이죠...전 그렇게 정성들여 꼼꼼히 쓸 수 없어요...^^

프레이야 2007-03-1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의 균열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인상적인 글귀입니다.
책표지 또한 멋지네요^^

sceptic 2007-03-16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내문제고 나부터 시작해서 실마리가 보이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얼음장수 2007-03-23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러봅니다.
저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약콩이 끓는 동안'을 읽고 꽤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니 이 작품집 끌리네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