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릴케 <두이노의 비가>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는 글에서 제목을 빌려왔다는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그의 소설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겉으로 드러난 외모의 아름다움과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미적 쾌감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라고 통칭되는 것들에 내재한 감각적 흥분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본능에 가까운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인생에 적용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우리는 늘 안타깝게 수런거린다. 창밖의 빗소리처럼 들릴듯 말듯 속삭이는 생의 이면들에 대해 하늘의 별처럼 명료한 목표와 동경이 없어도 우리는 걷는다. 그 비루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시간의 누적으로 쌓여온 단편들을 묶어내는 일이 소설가에게 쉼표와 같다면 독자들에게는 시대와 세월의 나이테를 들여다 보는 일과 같다. 은희경의 소설은 아름다움으로 빛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낯설고 허무한 생의 간극들을 확대경처럼 보여줄 뿐이다.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이지 않으면서 긍정과 희망의 웃음을 함부로 흘리지도 않는다.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한 권의 소설집에 나타난 특징들을 살펴볼 수는 없다. 시처럼 소설도 결국 독자들마다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고 마음의 결마다 묻어나는 향기가 다른 법이기 때문이다. 단편 ‘고독의 발견’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익숙한 목소리를 낸다.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곁에서 나만 모르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나는 언제부터 이들 사이에서 제외되어 있었을까. -  P. 63

  누구나 하고 싶은 말들을 작가가 대신 토해낼 때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울컥했던 마음들이 정화되거나 확인되지 않았던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은희경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들의 빈 곳을 보여준다. 문장은 수려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목소리는 높지 않으나 강건하다. 의심을 찬양하거나 고독을 발견하는 일은 일상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서 ‘의심’과 ‘고독’을 즐길 만큼 미학적인 사람은 많지 않다. 생활인과 소설가는 그만큼의 간격을 벌리고 서서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몸이 계급인 현대 사회에서 다이어트와 기아飢餓는 공존한다. 지구 한 구석에서는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한 명씩 굶주려 죽어가지만 또 다른 현생 인류는 몸에서 살을 제거하기 위해 가히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단지 아름다움을 위해 목숨 걸고 살을 빼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주인공의 행위도 결국에는 현대인의 모호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결국 나를 멸시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멸시할 수는 없으므로.

  날씨와 생활은 은희경의 소설과 함께 도착한 오디오북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이다. B라는 소녀의 엉뚱한 상상을 시작으로 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우리들 삶이 보여주는 부조리에 관한 보고서이다. 차안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은희경의 소설은 라디오의 단막극처럼 건조하게 들렸다. 처음 접해보는 오디오북이 내게는 모래바람처럼 귀가에 맴돌았고 운전하는 내내 머릿속만 울리다 돌아 나가버렸다. 나는 듣는 체질이 아니라 읽어야만 하는 활자 중독증 환자다.

  활자에 중독되었든 지도에 중독되었든 현실을 견디는 비법을 누구나 한가지 쯤 지니고 있다. 현실 밖에서 곰을 만나는 일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할 확률만큼이나 낮다. 그 확률에 기대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상황의 우연성이 상징하는 현실의 우발성은 아닐까. 반복적이고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밖의 것들에 대한 모호함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만큼 잡히지 않는 투명한 막들에 둘러쌓인 상상계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랬을 것이다.
 
  현실계를 벗어나 상상 속의 먼 우주를 유영하는 유리 가가린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것은 우주 밖에 떠도는 우리들의 꿈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현실 속의 암흑을 떠도는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나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삶은 그런 식으로 비루하게 이어지는 거고, 우리는 아버지들의 위선 속에 세상을 배우는 거잖아.(108페이지)’라고 툭 던지는 한 마디 속에 유리 가가린의 꿈은 좌절하고 만다. 그 두려움과 상상할 수 없는 영원 속으로 떠나고 싶게 하는 것은 신형철의 해설처럼 은희경의 소설이 아름답고, 낯설고, 허망하기 때문이다.


070415-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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