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
도종환 엮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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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는 길 - 도종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고 한 사람 두 사람 걷다 보면 길이 된다는 노신의 말은 부정되어야 하는 걸까? 없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필요한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두려워말라고 위로하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순탄하기만 할까마는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길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걷고 싶은 것은 모두의 숨은 욕망이다. 하지만 이런 길들조차 때로는 낯설고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겹다.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배달하려고 수많은 시집들을 뒤적이며 가슴에 닿는 구절들을 고르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문학집배원 도종환이 시집을 엮었다.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는 여러명의 시인들이 쓴 시들 중에서 도종환의 가슴에 들어온 시들을 골라 엮었다.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각 주마다 한 편씩을 고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계절과 시기에 맞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언제 읽어도 마음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시들도 있다. 이런 종류의 시집은 결국 개인의 취향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시를 고르는 안목과 취향은 오롯이 시인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라도 같은 형식의 시집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도 좋은 시들을 모아 놓은 폴더가 꽤 된다. 그러면 내가 엮어도 부끄럽지 않은 시집 한 권이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시를 보는 안목을 검증받은 적도 없으므로. 도종환 시인에 대한 믿음과 그가 선택한 시에 대한 간략한 해설들이 편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또 하나의 값진 선물은 시낭송 CD이다. 플래쉬를 만드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고 여러 시인들의 육성을 들을 수도 있다.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기도 하며 목소리 고운 성우의 낭송도 섞여있다. 감성적인 플래쉬를 배경으로 시의 내용이 더욱 명확하고 선명하게 전달된다. 시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시집보다도 이 한 장의 CD가 값지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거나 학교에서 다같이 감상해도 손색없는 훌륭한 멀티미이더 교재이다.

이별노래 - 박시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그대 뒷모습 닮은 저 꽃잎의 실루엣

사랑은 순간일지라도 그 상처는 깊다

가슴에 피어나는 그리움의 아지랑이

또 얼마나 세월 흘러야 까마득 지워질 것인가

눈물에 번져 보이는 수묵빛 네 그림자

가거라, 그래 가거라 너 떠나보내는 슬픔

어디 봄산인들 다 알고 푸르겠느냐

저렇듯 울어쌓는 뻐꾸긴들 다 알고 울겠느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하르르하르르 무너져내리는 꽃잎처럼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혹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산다는 일이 모두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행복인지 고통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만난다고 해서 행복이 아니고 떠난다고 해서 모두 슬픔은 아닐 것이다.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추는 여름 하늘의 표정만큼이나 다양하게 우리의 삶은 변화를 겪고 과거를 아쉬워하며 미래를 기다린다.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시는 그저 잠시 발을 담글 수 있는 시원한 냇물이거나 편안하게 기대 울 수 있는 푹신한 베개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는 말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현실 밖에 존재할 것 같은 치유와 배려의 언어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건네는 짧은 한 편의 시가 때로는 수많은 수다와 변명보다도 더 큰 위안이 된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슴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고인이 되어 버린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서먹하다. 그의 시를 좋아했다. 고교시절 시를 처음 접한 후 그를 시를 읽어오면서 그의 언어에 공감하면서 오랫동안 꺼내보는 시집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린 그의 엉뚱한 곳에서 만난 것 같은 기쁨이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사춘기 소년의 연습장에 수없이 끄적였던 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독자에게 전해지는 순간 시는 독자의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든 절박했을 것이고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는 것은 울림이 있는 시였다는 뜻이다. 적어도 내겐.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에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한다. 처음이다, 마지막이다라고. 처음도 마지막도 혹은 비가 오기 시작하면 젖어 버리고 한 번 젖어 버린 사람은 다시 젖는다는 말이 무의미해진다. 장마의 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구름은 걷힐 것이고 푸른 하늘은 그 구름 너머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산다는 일도 때때로 그렇게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거나 혹은 ‘쨍’하고 해가 뜨거나!


070717-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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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7-17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모아놓으신 시라면 한권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7-07-17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7-07-1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오타 고쳐 주시고...절대 돌아보지 않는...ㅠ.ㅠ 오타 많아요...

비로그인 2007-07-2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위에 쓰신 댓글...이제야 사람냄새가 나는듯해요.
오해는 마세요.
늘 반듯한 분위기로 쓰신 글만 봤거든요.
저 시...정말 좋으네요.
복사해갈게요.


sceptic 2007-07-2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람 맞는데...^^...농담이구요...반듯하지도 않아요...삐딱하죠...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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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어찌살라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고려가요의 절창으로 꼽히는 ‘가시리’의 일부다. 떠나는 임에게 “나는 어떻게 살라고 버리고 가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원망과 회한의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애를 끊어놓는다. 버림받은 사람의 심정은 어떤 설명이나 위로도 소용이 없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보다 그것을 견디고 적극적으로 이겨내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일 뿐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은 여전히 문학의 좋은 밑거름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바리데기>는 이렇게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별과 유랑을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다. 주인공 바리데기는 ‘국민 여동생’이라 불릴 만하다. 영화배우 문근영이 아니라 ‘바리데기’야말로 우리 민족의 여동생이다. 고전 설화에서 차용한 주인공의 이름과 행적들은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남과 북이라는 분단 현실과 갈등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문화적 공통체로서 하나일 수밖에 없는 당위와 필연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고전문학에 대한 경의와 현대적 수용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작가 황석영이 왜 한국을 대표할 만한 작가인가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수많은 씨줄과 날줄들이 교묘하게 얽혀 있다. 통시적 관점과 공시적 관점들이 뒤섞여 있고 하나의 사건이나 단순한 서사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난삽하거나 중심 없는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남과 북의 갈등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태양 아래서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또 다른 얼굴인 북의 현실과 상황들을 ‘바리’라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차분하고 환상적인 장면들로 구성하고 있다. 어차피 현실은 과거의 꿈에 불과하다면 소설에서 사실적 묘사와 설화적 몽환구조는 서로 상통하는 겹침과 펼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민족의 개념과 현실 상황에 대한 개탄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바리는 북에서 출발해서 중국을 거쳐 영국에 이르는 유랑길에 오른다. 어른 소녀의 입장에서 감내하기 힘든 현실적 고통들과 위험 속에서 늘 그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할머니와 칠성이의 영혼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바리에게 유일한 삶의 길잡이며 위로이기도 하다. 무속은 우리 삶의 원형에 가깝다. 초현실의 세계는 원시시대부터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내용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다. 귀신을 보고 영혼과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은 서양의 슈퍼맨과 개념 자체가 다르다. 여성 주인공으로 무속적 영감을 가진 지닌 소녀의 신산스런 삶은 우리 민족적 삶의 원형이기도 하며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들이었다.

  반면에 공시적 관점에서 전 지구적 변화의 물결과 자본주의와 세계화, 인종과 전쟁 문제 등 폭넓은 시야에서 현재 인류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과연 한 권의 소설에서 이런 거대 담론들이 제대로 용해될 수 있으며 한국 문학의 관점에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안들이 제시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의심들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바리의 남편은 이슬람교도인 파키스탄인 ‘알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관타나모까지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다. 밀입국으로 영국에 도착한 바리는 나이지리아인 부터 베트남인에 이르기까지 과연 국경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들여다본다. 삶은 어디에서나 계속되고 지역과 시대를 넘어 산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질문들은 비슷한 형태로 이어진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 P. 223

  시기적으로 1994년  11살이던 바리가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에 걸친 삶의 역경들은 한반도 20세기 후반을 함께 했던 우리 인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산다는 것이 단순히 시간만을 견디는 일일까만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현재 우리들이 외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우리들과 국경을 초월한 삶의 고단한 형태들, 국가간 이기주의와 패권주의 등 9.11 테러에서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모습과 상황만 다를 뿐 종교와 인종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들의 모습들을 모두 한 배에 탄 우울한 인류의 자화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의 압권은 바리가 꿈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할머니와 칠성이와 소통하고, ‘황천무가’에서 차용했다는 지옥 장면이었다. 바리는 우리에게 과연 생명수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책의 부록으로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는 그것을 독자에게 되묻고 있다. 설화 속의 바리는 생명수를 얻어 부모를 살려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 바리는 생명수를 구하기난 한 것일까? 그 생명수는 과연 증오와 갈등, 죽음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21세기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작가는 바리의 입을 빌어 소설에서 이렇게 그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 P. 286

  아득한 먼 옛날 설화 속 주인공 ‘바리’는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 널려있다. 그 모습과 상황만 다를 뿐. 그 대상이 생명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일 뿐.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 부모가 아닌 다른 누구일 뿐. ‘바리’는 늘 무엇에겐가 버림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바로 내가 된다.


070715-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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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문 2007-08-08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계속 올려주시길^^
 
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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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빠삐용>은 귀신같은 탈옥 솜씨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끝없는 도전 정신이 더욱 인상 깊은 영화이기도 하다. 신체의 구속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했던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설명되기 힘들다.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사회로부터 격리 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는 논리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역설이다. 탈옥 영화들은 주인공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관객들이 주목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탈주에 대한 욕망이다. 자유를 차압당한 인간의 본능에 대해 공감을 형성한다. 비무장 지대 GP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나는 방에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의 대형 포스터를 오랫동안 걸어 놓았다. 주인공 팀 로빈슨이 시원스레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어둠 속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가슴을 활짝 펴고 양팔을 뒤로 뻗은 자세의 포스터를.

  동명의 소설이 나왔다. 국내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파피용>은 공상과학 소설의 복습이자 예습이며 현재형을 보여준다. 먼저 복습에 대해 살펴보자. 공상과학 소설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쥘 베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이브의 아버지 이름이 쥘이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이브의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파피용>은 쥘 베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은 지구 밖을 여행하는 <파피용>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과 탄탄한 구성 측면에서는 선배에게 한참 밀리고 있다.

  하지만, 예습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전문기자였던 작가의 이력을 더듬지 않더라고 만만찮은 소설의 뼈대를 과학 상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근거 없는 상상력조차 상상력은 문학의 가장 큰 재료가 된다. 아득한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인류가 걸어온 길은 빛의 속도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천년 후의 인류를 상상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비좁은 세상을 떠나 상상을 뛰어넘는 저 우주의 또 다른 세계로 떠난다는 설정은 그리 허황된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미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상상하는 자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형에 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지구의 현재는 결코 낭만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지향점이 없는 현대 사회의 모순들을 살펴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소설에서도 여러 번 지적했듯이 ‘원자폭탄, 종교적 광신주의, 환경오염, 인구 과잉, 그리고 사방에 스트레스와 두려움’등 현재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기에 차고 넘친다. 전쟁과 기아, 자본주의와 민족적 이기주의 등 헤아릴 수 없는 모순들과 문제들을 가진 일촉즉발의 위기 행성 ‘지구’에 대한 반성이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미래는 없는 것인가? 작가가 소설 초입에서 여러 번 반복하는 말이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다.”라는 문장이다. 과연 그러한가. 희망없는 별 지구를 떠나서 우주의 다른 행성을 찾는 것이 현생 인류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숨은 그림처럼 숨겨 놓았다. 14만 4천명이 태양돛을 단 범선을 타고 천 년 후에 도착할 인류의 새로운 지구를 찾아 떠난다는 설정은 황당하기만 하지만 거꾸로 그렇게 찾은 별이 바로 여기라는 설정이다. 끝없이 새로운 별을 찾아 떠날 수 없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마지막 ‘지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희망. 이 책에서 작가는 그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 하나를 살려 놓고 있다.

  아담과 이브 등 성서에서 차용한 주인공들의 이름과 우주 여행이라는 기본적인 발상은 그리 신선하지도 않고 낯설지도 않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소설의 기본 틀은 별로 흥미를 끌지 못할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개미>에서 느꼈던 강렬함이나 몰입의 즐거움은 찾을 수 없었다. 허명에 쫓겨 이 책을 선택하는 모험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다만 도덕 교과서처럼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서 상상력으로 빚어낸 인류의 미래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는 읽고 난 후에도 긴 여운으로 남는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떠나서 변화해야 하고 이대로는 안된다는 인식 자체도 힘이 드는 현실에서 문학은 또 하나의 각성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IMF가 터졌을 때 돈 많은 부자들이 술잔을 부딪히며 외쳤다는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마지막 희망’이 무엇인지 찾아 떠나는 14만 4천 명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지구는 살만한 별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별에서 국가도 군대도 폭력도 전쟁도 화폐도 결혼도 없는 완벽한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소설이나 읽으면서 살고 싶다. 그 소설이 현실이 될 수 도 있다는 사실들을 후세에게 전하며 조용히 늙어가고 싶다.


07071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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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Cat 2007-07-12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서두에서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은 팀 로빈스에요 ^^
오타 내신것 같아서 살며시 댓글 남기고 갑니다

sceptic 2007-07-13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수정했습니다...딴 생각하고 리뷰썼나봅니다...^^
 
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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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감기에 걸려 본 사람들은 안다. 그 열병을 털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뺨과 귓불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의 신선함을. 살아있다는 것은 그저 신열을 앓고 난 후에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는 공기의 시원함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윤성희의 세 번째 소설집 <감기>는 구석구석 발라먹어야 하는 생선처럼 가시를 숨기고 있지만 예측할 수 있는 함정과 장치들이기 때문에 당혹스럽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소설을 읽으면서 낯설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주는 감동은 사실 오래가지 않는다. 적어도 내 경우의 이야기지만 소설가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문체가 우선이다. 한 데 뒤섞여 있어도 분명하게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윤성희가 가진 특징이고 매력이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좋아지는가 하면 별 생각없이 빨려든다.

  적당한 거리두기와 냉소적인 시선이 아니라 무덤덤한 목소리는 마른 모래 바람처럼 서걱인다. 좀체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숨소리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읽어내야 한다. 그 섬세한 숨결들을 놓쳐버리면 윤성희는 지루한 작가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내게 윤성희는 아주 매력적인 작가로 기억되었다. 그녀의 전작 소설집 <거기, 당신?>를 읽으면서 느꼈던 독특한 면들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 나는 계속 그녀의 소설을 읽을 것이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다스럽지 않다. 말이 많은 캐릭터가 필요해도 작가는 중간에서 차단하고 몇 마디 말만을 골라 던져주거나 대화와 대화 사이의 간격을 쭉쭉 넓혀버린다. 상징이 아니라 비약은 가독성을 떨어뜨리지만 상상력을 배가시킨다. 절제된 언어는 시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요설스럽지 않지만 할 말은 다하고 있다. 툭툭 내뱉는 어법과 어휘와 문장들 사이의 생략은 윤성희가 지닌 문체의 가장 큰 매력이다. 나는 그래서 그녀가 마음에 든다. 어차피 작품이든 작가든 개인적인 취향일 수밖에 없다면,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다.

  한결같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사람들의 내면을 답답하게 끌고 나가는 방식이 때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 사이에 뚫린 ‘구멍’을 읽어나가는 일은 현실 속에 모든 존재들을 읽어내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감기에 걸려 재채기를 하든 죽은 사람에 대한 부채감으로 인생을 허비하든 상관없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가슴에 큰 구멍 하나씩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구멍을 숨기기 위해 크게 웃고 위선 혹은 위악을 부리거나 눈물을 흘린다. 옷으로 가려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슬쩍슬쩍 보이기도 하지만 서로 모른 채 하거나 알아도 눈을 감아버린다. 그 구멍들을 소설에서 직접 보여준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소설이 될까? 윤성희는 끝없이 빨려드는 블랙홀처럼 그 구멍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구멍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에게 보물지도의 상징처럼 암호를 숨겨놓기도 하고 어휘나 문장들 사이에 숨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재미있다.

  단편 ‘구멍’이나 ‘하다 만 말’ 그리고 ‘저 너머’나 ‘무릎’에서는 가장 자주 부딪히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가장 큰 행복과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가족들이 때로는 생의 가장 큰 불행이 되기도 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런 가족들 사이에서 확인되는 개인은 서로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확인된다.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의 삶은 끈끈하게 이어져 있지만 쉽게 분리되기도 한다. 같은 시공간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말하지 않고 교감하거나 삶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거나 어떤 타인도 내 생의 이유를 확인해 줄 수 없거나.

  부채감이나 열등감 혹은 몸과 마음의 이상 증세는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기와 같다. 없다고 행복하지도 않고 있는 것을 자랑할 수도 없다.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인간 삶의 보편성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윤성희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그것들을 과장하고 확대하거나 지나치게 무시해 버린다.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현실 밖의 세상과 이야기를 넘나든다. 그 경계가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순간을 무서워해야 해. 자네가 비겁해진 순간이 있었다면 그 한순간이 평생을 따라다닐 거야.” - ‘등 뒤에’중에서(P. 70)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순간을 무서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 한 순간이 평생을 따라 다닐 것이라는 말은 무심한 순간들이 어쩌면 결정적 순간이라고 믿었던 모든 순간들을 밀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불확정성 때문에 사는게 두렵고 때때로 허탈하고 외로워진다. 그 ‘순간’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 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외부의 힘이나 타인이 될 수도 있다.

“고백을 해본 사람들은 고백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알게 되지.” - ‘재채기’중에서(P. 117)


  아무도 쉽게 고백하지 않는다. 고백을 하는 순간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쉽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노름판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패배의 낭패감을 견뎌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윤성희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단편들 사이사이, 소설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내면,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툭툭 내뱉는 간단한 대화,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웃음과 엉뚱한 결말. 이 모든 것들이 작가의 다음과 그 다음까지를 기다리게 한다. 변하지 않는 개성과 다양성을 함께 기대하는 이기적인 독자가 그녀를 기다린다.


070625-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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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 박영근 유고시집 창비시선 276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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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작별

그 언제부턴가
가을도 다 지나고

가슴속에
식은 채 묻혀 있던
불덩어리 하나

다 피어나지도
저를 떨구지도 못한
꽃덩어리 하나

오늘은
허연 잿더미를 헤치고
말갛게 불티로 살아난다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세요

찬 바람 속
몸시 앓다가
한 여드레쯤 지나면
문밖 골목에도
고즈넉이 흰 눈 내리겠다

  하나 둘씩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혹은 사랑이든 미움이든 말이다. 고정희도 그랬고 윤중호나 오규원 그리고 박영근도 사라졌다. 시인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과 특별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은 죽어서도 많은 말들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들이 토해낸 언어들은 죽지 않고 활자로 살아 남는다. 책으로 남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롯이 등불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이 조금 덜 쓸쓸할 것이다.

  박영근의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는 시집 앞에 실린 몽골 초원 위에 누워 있는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는게 아니라 어둠속 저 하늘 위 별자리에 누워있을 시인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은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다. 시인 박영근도 그렇다. 그가 남긴 시들이 읽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표정으로 다가온다.

  ‘늦은 작별’이 아니라 너무 이른 작별이었다. 가슴 속에 묻혀 있던 불덩이 하나가 꽃덩어리로 피어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건 아닌지 모르겠다. 생에 있어서 순간성과 일회성의 엄밀한 규칙은 단 한사람에게도 예외가 적용된 적이 없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듯이.  지금 현재 살아가는 방법과 자세를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문득 부딪히게 되는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침묵이 되어 버린다. 예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고 있어도 속수무책이다. 받아들이되 이해할 수도 없고 외면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기억하느냐’고 묻고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 생물학적인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의 사라짐이다. 인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비로소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종소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는 떠난다. 하지만 박영근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전해질 것이다. 시인이 끝임없이 되묻고 있으니까, 기억하느냐고.

기억하느냐, 그 종소리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천녀의 꿈이라 한들
제자리에 있겠느냐

우리가 사는 일이 온통 고통이라 해도
오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저 풀잎 하나보다 못하구나

기억하느냐
겨울 빈 들에서 듣던 그 종소리

  44편의 시들 중에서 유일하게 발표되지 않았던 시가 마지막에 실려있다. 뭉크의 ‘절규’를 주제로 한 시가 그것이다.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이 ‘절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시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절규한다고 해서 살아나지는 않는다. 모든 죽음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세상을 향해 절규하던 목소리들,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치열했던 삶의 자세, 사람과 사물들을 향해 보여줬던 뜨거운 사랑이 담긴 시들을 남기고 떠난 박영근 시인을 기억한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시인은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절규

저렇게 떨어지는 노을이 시뻘건 피라면 너는 믿을 수 있을까

네가 늘 걷던 길이
어느 날 검은 폭풍 속에
소용돌이쳐
네 집과 누이들과 어머니를
휘감아버린다면
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네가 내지르는 비명을
어둠속에 혼자서
네가 듣는다면

아, 푸른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작은 새의 둥지도


07062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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