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
도종환 엮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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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는 길 - 도종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처음부터 길은 없었고 한 사람 두 사람 걷다 보면 길이 된다는 노신의 말은 부정되어야 하는 걸까? 없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필요한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두려워말라고 위로하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순탄하기만 할까마는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길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걷고 싶은 것은 모두의 숨은 욕망이다. 하지만 이런 길들조차 때로는 낯설고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겹다.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배달하려고 수많은 시집들을 뒤적이며 가슴에 닿는 구절들을 고르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문학집배원 도종환이 시집을 엮었다.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는 여러명의 시인들이 쓴 시들 중에서 도종환의 가슴에 들어온 시들을 골라 엮었다.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각 주마다 한 편씩을 고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계절과 시기에 맞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언제 읽어도 마음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시들도 있다. 이런 종류의 시집은 결국 개인의 취향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시를 고르는 안목과 취향은 오롯이 시인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라도 같은 형식의 시집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도 좋은 시들을 모아 놓은 폴더가 꽤 된다. 그러면 내가 엮어도 부끄럽지 않은 시집 한 권이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시를 보는 안목을 검증받은 적도 없으므로. 도종환 시인에 대한 믿음과 그가 선택한 시에 대한 간략한 해설들이 편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또 하나의 값진 선물은 시낭송 CD이다. 플래쉬를 만드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고 여러 시인들의 육성을 들을 수도 있다.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기도 하며 목소리 고운 성우의 낭송도 섞여있다. 감성적인 플래쉬를 배경으로 시의 내용이 더욱 명확하고 선명하게 전달된다. 시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시집보다도 이 한 장의 CD가 값지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거나 학교에서 다같이 감상해도 손색없는 훌륭한 멀티미이더 교재이다.

이별노래 - 박시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그대 뒷모습 닮은 저 꽃잎의 실루엣

사랑은 순간일지라도 그 상처는 깊다

가슴에 피어나는 그리움의 아지랑이

또 얼마나 세월 흘러야 까마득 지워질 것인가

눈물에 번져 보이는 수묵빛 네 그림자

가거라, 그래 가거라 너 떠나보내는 슬픔

어디 봄산인들 다 알고 푸르겠느냐

저렇듯 울어쌓는 뻐꾸긴들 다 알고 울겠느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하르르하르르 무너져내리는 꽃잎처럼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혹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산다는 일이 모두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행복인지 고통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만난다고 해서 행복이 아니고 떠난다고 해서 모두 슬픔은 아닐 것이다.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추는 여름 하늘의 표정만큼이나 다양하게 우리의 삶은 변화를 겪고 과거를 아쉬워하며 미래를 기다린다.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시는 그저 잠시 발을 담글 수 있는 시원한 냇물이거나 편안하게 기대 울 수 있는 푹신한 베개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는 말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현실 밖에 존재할 것 같은 치유와 배려의 언어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건네는 짧은 한 편의 시가 때로는 수많은 수다와 변명보다도 더 큰 위안이 된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슴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고인이 되어 버린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서먹하다. 그의 시를 좋아했다. 고교시절 시를 처음 접한 후 그를 시를 읽어오면서 그의 언어에 공감하면서 오랫동안 꺼내보는 시집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린 그의 엉뚱한 곳에서 만난 것 같은 기쁨이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사춘기 소년의 연습장에 수없이 끄적였던 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독자에게 전해지는 순간 시는 독자의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든 절박했을 것이고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는 것은 울림이 있는 시였다는 뜻이다. 적어도 내겐.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에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한다. 처음이다, 마지막이다라고. 처음도 마지막도 혹은 비가 오기 시작하면 젖어 버리고 한 번 젖어 버린 사람은 다시 젖는다는 말이 무의미해진다. 장마의 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구름은 걷힐 것이고 푸른 하늘은 그 구름 너머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산다는 일도 때때로 그렇게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거나 혹은 ‘쨍’하고 해가 뜨거나!


070717-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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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7-17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모아놓으신 시라면 한권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7-07-17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7-07-1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오타 고쳐 주시고...절대 돌아보지 않는...ㅠ.ㅠ 오타 많아요...

비로그인 2007-07-2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위에 쓰신 댓글...이제야 사람냄새가 나는듯해요.
오해는 마세요.
늘 반듯한 분위기로 쓰신 글만 봤거든요.
저 시...정말 좋으네요.
복사해갈게요.


sceptic 2007-07-2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람 맞는데...^^...농담이구요...반듯하지도 않아요...삐딱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