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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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어찌살라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고려가요의 절창으로 꼽히는 ‘가시리’의 일부다. 떠나는 임에게 “나는 어떻게 살라고 버리고 가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원망과 회한의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애를 끊어놓는다. 버림받은 사람의 심정은 어떤 설명이나 위로도 소용이 없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보다 그것을 견디고 적극적으로 이겨내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일 뿐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은 여전히 문학의 좋은 밑거름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바리데기>는 이렇게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별과 유랑을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다. 주인공 바리데기는 ‘국민 여동생’이라 불릴 만하다. 영화배우 문근영이 아니라 ‘바리데기’야말로 우리 민족의 여동생이다. 고전 설화에서 차용한 주인공의 이름과 행적들은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남과 북이라는 분단 현실과 갈등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문화적 공통체로서 하나일 수밖에 없는 당위와 필연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고전문학에 대한 경의와 현대적 수용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작가 황석영이 왜 한국을 대표할 만한 작가인가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수많은 씨줄과 날줄들이 교묘하게 얽혀 있다. 통시적 관점과 공시적 관점들이 뒤섞여 있고 하나의 사건이나 단순한 서사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난삽하거나 중심 없는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남과 북의 갈등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태양 아래서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또 다른 얼굴인 북의 현실과 상황들을 ‘바리’라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차분하고 환상적인 장면들로 구성하고 있다. 어차피 현실은 과거의 꿈에 불과하다면 소설에서 사실적 묘사와 설화적 몽환구조는 서로 상통하는 겹침과 펼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민족의 개념과 현실 상황에 대한 개탄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바리는 북에서 출발해서 중국을 거쳐 영국에 이르는 유랑길에 오른다. 어른 소녀의 입장에서 감내하기 힘든 현실적 고통들과 위험 속에서 늘 그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할머니와 칠성이의 영혼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바리에게 유일한 삶의 길잡이며 위로이기도 하다. 무속은 우리 삶의 원형에 가깝다. 초현실의 세계는 원시시대부터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내용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다. 귀신을 보고 영혼과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은 서양의 슈퍼맨과 개념 자체가 다르다. 여성 주인공으로 무속적 영감을 가진 지닌 소녀의 신산스런 삶은 우리 민족적 삶의 원형이기도 하며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들이었다.

  반면에 공시적 관점에서 전 지구적 변화의 물결과 자본주의와 세계화, 인종과 전쟁 문제 등 폭넓은 시야에서 현재 인류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과연 한 권의 소설에서 이런 거대 담론들이 제대로 용해될 수 있으며 한국 문학의 관점에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안들이 제시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의심들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바리의 남편은 이슬람교도인 파키스탄인 ‘알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관타나모까지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다. 밀입국으로 영국에 도착한 바리는 나이지리아인 부터 베트남인에 이르기까지 과연 국경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들여다본다. 삶은 어디에서나 계속되고 지역과 시대를 넘어 산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질문들은 비슷한 형태로 이어진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 P. 223

  시기적으로 1994년  11살이던 바리가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에 걸친 삶의 역경들은 한반도 20세기 후반을 함께 했던 우리 인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산다는 것이 단순히 시간만을 견디는 일일까만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현재 우리들이 외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우리들과 국경을 초월한 삶의 고단한 형태들, 국가간 이기주의와 패권주의 등 9.11 테러에서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모습과 상황만 다를 뿐 종교와 인종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들의 모습들을 모두 한 배에 탄 우울한 인류의 자화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의 압권은 바리가 꿈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할머니와 칠성이와 소통하고, ‘황천무가’에서 차용했다는 지옥 장면이었다. 바리는 우리에게 과연 생명수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책의 부록으로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는 그것을 독자에게 되묻고 있다. 설화 속의 바리는 생명수를 얻어 부모를 살려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 바리는 생명수를 구하기난 한 것일까? 그 생명수는 과연 증오와 갈등, 죽음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21세기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작가는 바리의 입을 빌어 소설에서 이렇게 그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 P. 286

  아득한 먼 옛날 설화 속 주인공 ‘바리’는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 널려있다. 그 모습과 상황만 다를 뿐. 그 대상이 생명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일 뿐.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 부모가 아닌 다른 누구일 뿐. ‘바리’는 늘 무엇에겐가 버림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바로 내가 된다.


070715-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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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문 2007-08-08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계속 올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