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근대건축물에 대한 보존문제가 제기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1990년대까지도 일제시대나 군사정권 시절의 건축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모두 어두운, 기억하기 싫은 역사와 연관되어 그런 경향이 생긴 것이고, 결국 왕조의 유산인 조선시대 궁궐은 보존할 가치가 있어도 일제시대 관청건물이나 수탈기구들은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일본 근세 전문가이신 김시덕 교수가 처음으로 낸 서울의 근대건축과 도시계획에 관 책 ‘서울선언(열린책들,2018)’에서 처음 일제시대 지어진 보통사람들의 집, 흔히 말하는 일제식 적산가옥의 흔적을 찿고 , 일제의 신도시인 영등포와 노량진을 답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 근대건축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오래전 서울경관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왜 서울은 도시의 건물을 무조건 다 부수고 새로 지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였습니다.
역사는 흔적과 함께 기억되는 법인데, 왜 멀쩡한 건물을 모두 때려부수고 몰역사적이고 개성도 없는 천편일률적인 건물로 무미건조하게 공간을 채울까 하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천박하게 돈만 밝힌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과거의 흔적을 없애버려야 하는 긴박한 이유라도 있나?

지금은 위의 두가지가 모두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중앙정보부 남산 예장동 청사의 철거와 옛 조선총독부인 ‘중앙청’철거가 대표적인 예라고 봅니다.

한국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일제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중앙청)과 군사정권의 국가폭력의 상징( 중앙정보부 예장동 본관)이 그 실체를 현재 알 수 없습니다.

건물의 흔적을 지운다고 사라지지 않는 역사의 기록을 건물을 없애서 자위를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관심을 가진 독자로서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인 건물을 보전해야 일본의 사죄를 받을 때 더 효과적일 것일텐데, 그리고 후세의 역사교육에도 도움이 될텐데, 현재까지 한국의 위정자로 군림해온 친일세력이나 그 후예들은 선조들의 죄를 묻어버리려고 식민통치의 유산인 건축물을 없애버리고싶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드는 건 합리적 추정이죠. 조국근대화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가지고 말이죠.

박근혜 정부 당시 위안부 협상을 위해 일본에서 특사가 청와대로 직행해 소위 한국의 정계원로들과 일본어로 밀담을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며 과연 역대 한국정부의 성격은 무엇인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상하던 일과 실제로 난 기사를 보는 입장은 완전히 다르죠. 친일세력이 권력에 없어도 일본이 저렇게 무례하게 행동할까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일 외교 정상화를 이룬 고 김종필 전 총리 역시 일본에서 교육받은 정치군인으로 일본과 불완전한 상태로 외교를 정상화해 이후 모든 한일관계 파탄의 원인을 제공한 정치인이니까요.

해방이후 한국전쟁이 나서 일제 때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부서지고 철거되어 시야에서 사라진 것도 정치적인 이유와 패권적인 이유에서 일본에게 전쟁 범죄를 묻지 않은 미국이 한국땅에서 일제의 잔재가 사라지도록 방치했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1945년 이후 남한에서 정부가 수립하기까지 자그마치 3년의 혼란기를 미군정이 통치했고,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일제의 군사기지였던 용산구와 중구를 집중 폭격한 것도 미국에 대한 이런 의혹이 드는 이유입니다.

한일관계가 꼬이게 된 근본원인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공산주의 봉쇄정책이었기 때문이고 유감스럽게도 2023년 현재도 미국은 영향력이 커진 ‘중국의 부상’을 정치적, 인종주의적으로 봉쇄하려 합니다.

다소 비약이 있긴 해도, 저는 흔적을 없애는 이들은 그들이 그래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의심합니다.

건물의 물리적 구체성때문에라도, 서구의 경우 건물을 모두 흔적도 없이 파괴하는 경우가 더더욱 드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순히 돈을 더 벌겠다는 것이상이라고 의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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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하버드대 교수의 2011년 저작입니다.

한국에는 2013년 까치출판사에서’1417년 근대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입니다.

제가 읽은 2011년 출판된 영어판으로 총 11장 본문 26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입니다. 모두 로마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책’On the Nature Of Thing’이라는 시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책을 찿는 과정과 책의 내용 그리고 이책의 영향을 모두 포괄해 담았습니다.

15세기 초 교황청에서 각종 문서를 필사하는 교황의 수석비서인 포지오 브라치오리니(Poggio Bracciolini)가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잠자고 있던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찿아내서 로마시대 이후 수천년간 잠들어있던 이단적인 내용이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그내용이 결국 유럽의 근대를 가져오게된다는 내용입니다.

이야기의 구조가 일단 돌아가신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2009)’과 매우 유사해 놀랐습니다. 1980년대 소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지의 책이 미스터리를 푸는 실마리가 되었다면,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이 책에서는 고대의 물리학을 기술한 루크레티우스의 신성부정의 내용의 책이 이후 중세 유럽의 카톨릭교회의 교리에 도전하게 되고 초기 르네상스 시기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후 나타나는 르네상스 예술과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유럽 서구 중심적 이야기이고 따라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라틴어 고전이 강조됩니다. 고대라틴어로 쓰여진 고대로마의 물리학에 관한 시집을 찿는 이야기이며 15세기 로마 교황청내의 궁정 정치와 카톨릭신학과 이단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와 관련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영향에 대한 라틴어 문헌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21세기 한국 서울에서 이책을 제대로 읽는 일이 쉬운 일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철학적, 문헌학적 이야기이므로 전문적인 영역은 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유일신으로서의 서양의 신이 기본적으로 얼마나 폭력적인 신인지 감안하고 읽어야 합니다. 독자로서 간단히 인상비평 정도를 남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유럽의 중세가 생각보다 자연스럽지 않은 매우 억압된 사회였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정치적 그리고 신앙적으로 전 유럽을 지배하면서, 원죄를 당연시하고 후세(afterlife)의 영광을 기약하며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타락이 극에 달해 있었고, 예수의 수난을 따라한다는 명목으로 수도사들에게는 극한의 고통이 주어지는 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스스로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등 상상이 안되는 끔찍한 일들이 태연히 자행되었습니다.
15세기 문화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에서 수도원 도서관에서 발견된 이단적 문헌을 보는 건 카톨릭 교회에서 파문을 각오해야 할 뿐아니라 종교재판에 넘겨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어서 공개적 주장은 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시기가 유럽의 종교개혁(the Reformation)시기와 겹쳐있고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이 물러가고 이단재판(the inquisition)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던 참혹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둘째, 소수의 엘리트들이 모든 문서와 대화를 라틴어로만 소통했고 정치와 교회의 중심은 이탈리아 로마였고, 영국과 독일등 근대 서구국가들은 당시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지식인들은 모두 그리스 라틴어에 정통했고 이책의 주인공인 포지오는 교황청에서 필경사를 하고 교황을 보좌하던 측근으로 고대 라틴어에 정통한 라틴어고전 전문가였습니다. 이런 배경때문에 그는 독일 변방의 수도원 도서관에 잠들어있던 루크레티우스의 시집을 찿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루크레티우스의 시집은 그 내용이 결국 세상은 모두 원자 (atom)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물리학 내용으로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카톨릭 교회에서 교리로서 주장하는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합니다. 또한 가톨릭 신학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생의 즐거움(pleasure; 여기에는 성적인 쾌락도 포함됩니다)을 삶의 목표라고 주장하는 내용도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흔히 쾌락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로마에서 계승한 사람이 바로 루크레티우스 입니다. 이러니 카톨릭교회가 이 책을 이단시하고 공개적으로 책 내용을 거론한 이들을 종교재판에 넘겨 처형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절대적 교황의 권력과 카톨릭 신앙의 기반을 흔들 수 있다고 본 겁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교황의 최측근이던 라틴어 필경사 출신 포지오에게 발견되어 수천년 만에 다시 유통이 됩니다.

초기 소수의 지식인들이 라틴어 판본으로만 돌려보다가 점차 영어 불어본이 유통되어 17-18세기 유럽의 근대 철학자와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보수적 카톨릭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 유럽에 죽음이후의 다른 삶은 없으며 세상은 원자와 빈 공간(void)밖에 없다는 로마시대 철학자의 시는 매우 그 자체로 이미 너무 급진적이어서 카톨릭 교회의 수용한계를 넘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짧지만 서양의 인문학적 전통에 대해 상당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읽어나가기 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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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루저의 나라 - 독일인 3인, 대한제국을 답사하다
고혜련 지음 / 정은문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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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동아시아예술사를 공부하신 고혜련 박사의 책입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 외국인이 본 당시 조선에 대한 책들도 주로 영미권에 치중되어 있고, 간혹 러시아 외교관이 본 대한제국에 대한 책은 보았지만 독일인이 본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조선은 일단 호기심을 자극할인한 요소가 있습니다.

이 글은 저자가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 도서관에서 찿아낸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조선을 여행한 세 독일인의 조선 답사기입니다.

세편의 답사기는 각각 독립적으로 아무 순서없이 읽어도 무방합니다. 첫번째 프러시아 제국의 산림청 공무원 크노헨하우어의 강원도 당고개 금광 답사기로 대한제국 당시 제국주의 열강세력에게 고종이 광물채굴권을 주고 이익의 25%를 상납받아 고종의 비자금인 내탕금(內帑金)을 조성하고 고종은 이 돈으로 헤이그 밀사를 파견(1907)하고 의병 지원을 합니다. 즉 대한제국 당시 고종이 열강에 이권을 나누어줘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던 사실이 이 구체적 사례로 보아 재정여건이 열악한 대한제국의 궁여지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프러시아의 일개 공무원인 크노헨하우어는 25%수익 상납을 부정적으로 보고 고종이 탐욕스럽다고 평가합니다. 그건 그들 독일인의 시각이고 내탕금의 존재를 몰라 가능한 생각이죠.

이 찻번째 답사기는 사실 그냥 답사기가 아니고 크노헨하우러가 프러시아로 돌아간 이후 1901년 베를린 독일 식민지협회에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두번째는 독일의 동아시아 예술사가 에쎈의 답사기로 1913년 조선의 경성과 이왕가박물관 등을 둘러본 글입니다. 이책의 저자와는 학문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저자는 이 글을 소개하기 전 독일의 동아시아 예술사의 학맥 계보를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책의 제목에 들어간 ‘유아한 루저’라는 말은 이 두번째 글에서 나온말로 에쎈은 경제활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담배나 피우는 양반 계급을 ‘우아한 루저’로 생각했습니다. 독일제국의 동아시아 예술 특히 공예분야가 전문인 에쎈은 당시 조선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사회의 최하층인 천민이라는 사실에 문화적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인 양반은 아무런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체 성리학적 질서에만 순응해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의미로 ‘우아한 루저’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냉소에도 에쎈은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조선의 우월한 문화가 이어지지 않는 걸 안타까와 합니다.

세번째 글은 독일의 지리학자 라흐텐자흐의 백두산여행기입니다. 1933년도 글입니다. 이베리아 반도를 연구하는 지리학자인 라흐텐자흐는 한반도의 지리와 이베리아를 비교연구하기 위해 조선을 찿아 한반도 전역의 자리를 탐사했는데, 책에는 이 중 백두산 탐사기만 실려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강도’라고 표현된 백두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는데 조선의 독립군의 일부가 아닐까 저자는 추정합니다.

저자가 각 답사기 앞에 설명한 각 시기에 대한 배경설명은 간략하지만 꽤 밀도가 높은 글입니다. 특히 머리말의 ‘대한제국의 낯선 이방인’은 독일 위주로 정리되어 있지만 대한제국의 근대화노력에 독일인들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구한말의 독일인 뮐렌도르프는 중국 텐진에 주재하던 독일 외교관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구미국가들과 조약을 맺고 외교협상을 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독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상황에서 외교적 중립을 지켰지만 말입니다.

또 하나 유럽인들이 조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아는 경우는 20세기 초 구미에 밀어닥친 일본문화의 영향으로 일본의 시각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이 책의 번역판본에 대한 정보는 일러두기에 나와있고 각종 인용출처는 본문에 병기되는 방식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도판목록이외 관련 출처도서목록이 없는 건 의외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총 313쪽으로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21세기의 일본은 과거처럼 선진국이라고 할 수도 없고 별로 생산적인 나라라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과거에 얽매인 나라라는 생각이 더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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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깨주의의 탄생 - 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 보리 인문학 3
김희교 지음 / 보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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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미관계사(中美關係史)를 연구하시는 광운대 김희교 교수의 신작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께서 추천한 책이어서 관심을 받았던 책입니다. 저도 그런 독자 중 한사람이었고, 기회가 되어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책은 15부 본문 653쪽에 이르는 소위 ‘벽돌책’ 입니다.

단언컨데,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분이거나, 미국식 경제체제만이 최고라고 여기시는 분들에게 ‘매우’ 불편한 책입니다.

책 후반부에 중국의 국가전략과 대외전략을 이야기하면서 중국툭색의 사회주의가 기존에 통용되어오던 자본주의경제체제, 특히 미국식 경제제재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중국이 미국과 다른 체제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특히 중국이 제조업을 가지고 있고 국내시장만으로 경제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이 했던 팽창주의적 패권정책을 추구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은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에서 사사하는 바가 큽니다. 1990년대 이후 국제화로 인해 중국을 미국이 봉쇄하려고 해도 봉쇄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보수언론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을 묘사하는 건 그저 상상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서구의 발전과정을 교과서로 알고 추구하는 한국의 일부 엘리트들에게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내용이지요.

이 후반의 내용만으로도 책의 표현에 따르면 신냉전을 추구하는 미국식 신식민주의를 최선이라고 믿는 분들에게는 금기로 가득한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은 상당부분 한국의 소위 ‘보수’언론들이 중국에 대한 담론(discourse)을 얼마나 자의적 편의적으로 가공해서 중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저해하는지 상세하게 기술해놓았습니다.

소위 보수언론의 주류(mainstream)기자들이 중국에 주재해 있으면서 중국인들을 직접 취재하거나 중국어 신문을 위주로 인용하는게 아니라 서구편향의 홍콩영자지나 WSJ,NYT같은 미국과 서구언론을 인용하는 건 매우 충격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미국과의 동맹이 중요하다고해도 오랜기간 한국 옆에 존재하는 중국과 괸련된 사실조차 언론을 통해 의도적으로 왜곡보도되고 있다는 점은 사실 충격입니다.

중국을 욕하거나 폄하하기에 앞서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건 사회로 보나 국가의 입장에서 보나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이걸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중국만이 문제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건 국익 차원에서도 도움이 안되는 자살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일이 발생하는 것이 미국의 유사인종주의를 받아들여 본인들이 미국의 백인으로 착각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서구의 발전만이 역사발전의 표준이라고 보고 한국도 중국도 모두 서구의 발전경로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이면서 백인의 사고방식을 추종하는 건 그 자체 유사인종주의 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동아시아에 강제하는 신식민주의를 추종하고, 그럼으로서 이익을 얻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자본가인 이들은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사적인 재산권이 최대로 보장되며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것이 자연스럽죠. 하지만 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지나친 금융화(financialization)와 탐욕으로 사실상 2008년 유지될 수 없다는 게 판명되었습니다. 더구나 민영화된 의료체계로 인해 코로나 펜데믹 기간 중 우리는 자그마치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죽어서 냉동차에 실리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이 누리던 이익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경제학자들이 효력이 없는 것으로 판면났다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를 앵무새처럼 주장하고 법인세 인하가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데도 법인세 인하를 주장하는 소위 ‘좀비정책’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소위 보수 언론 매체라고 하는 조선, 중앙, 연합뉴스, 한국경제,동아,머니투데이 등의 중국발 기사가 거의 믿을 수없을만큼 사실 자체를 왜곡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익에 심각한 저해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보수언론이면 국익을 누구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텐데 도대체 이들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나요?

중국이 현재 한국의 교역상대국 중 가장 큰 국가인데 도대체 중국을 무시하고 중국에서 일어난 일을 제대로 보도도 않하면서 미국만 바라보면 모든게 끝인가요? 이런 입장이 미국이 구축한 신식민주의에 경도된 게 아닌 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중국 전문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경제와 현재 세계경제 상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중국은 결코 소홀하게 다루어야 할 국가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저지도 언급하듯 중국의 자본주의 경제는 중국에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로 불리고 있고, 정치는 공산당이 정부와 군 위에서 모든 국가의 개입을 정치적으로 결정합니다.
일당독재이기 때문에 후진적이라는 사고는 민주주의체제가 모든 걸 우선한다는 서구중심주의일 뿐입니다. 민주주의가 엘리트 편향의 소수독점을 야기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표면을 보지말고 본질을 봐야 합니다.

아무튼 이미 전형적인 소련식 계획경제도 아니고 마르크스 레닌이 주장했던 원래의 공산주의도 중국에서는 적용되지 않다는 것이죠.

이렇게 국가가 시장에 자연스럽게 개입하는 게 가능하고 토지 소유가 사유화되지 않은 중국은 자본의 지나친 집중을 국가가 개입해서 막아왔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을 ‘죄악시’하는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한국의 자본가층과 기득권층은 이런 중국의 실체를 왜곡하고 이런 정보를 국내에 흘러들지 못하게 만드는데 계층의 이익이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막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영향력을 사용해서 중국에 대한 정보를 왜곡하고 통제하며 중국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가 과도하게 커진 중국기업들의 경제적 독점을 막고 그들의 이익을 재분배를 통해 사회전체에 나누려고 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한국의 자본가층과 기득권층이겐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겠습니까? 말 그대로 사회를 위한 정책이고 자본만을 위한 정책을 내세우는 현재 한국 상황과는 너무 대조적이죠. 당장 레드 컴플렉스를 발동시켜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온갖 매체를 동원할 겁니다. 늘 뻔하니까요.

그래서 경제적 보수주의자들에게 중국은 오직 거대시장으로만 존재할 뿐 사회자체를 한국에 비해 미개하다고 생각하게 매체를 이용하는 것이죠.

이책이 아카데믹하거나 정제된 톤으로 쓰여진 책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래도 국제관계론의 틀안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서구언론의 시각과 한국 보수언론의 중국담론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은 최소한 기울어진 중국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지나친 친미적 외교정책만을 펼치는 윤석열 정부가 중국을 소홀히 해서 놓칠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한국이 중국시장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청와대 수석의 발언은 국익을 망각한 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속의 중국’에 사로잡혀 뭐가 국익인지 모른다는 말로 들립니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 경제적인 관점에서 중국시장을 포기하는 어이없는 일이 안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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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대한제국 연구서를 읽었습니다.

여지껏 보아오던 국가론적 입장이나 기존의 정치사 입장에서 고종의 통치와 대한제국을 보았던 연구와 달리 이 책은 ‘극장국가(Theater State)’라는 관점에서 고종과 대한제국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퍼포먼스 (Performance)에 초점을 맞춰 대한제국의 성립과 몰락을 조명했습니다.

분석의 틀인 ‘극장국가’라는 개념은 약간의 추가설명이 필요합니다.

극장국가는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 (Clifford Geertz)가 1981년 저술한 인도네시아 발리의 국가의례를 분석한 저서에서 최초 소개된 개념입니다.

즉, 극장국가는 국가의례나 국가공식행사와 같은 과시적 스펙터클의 극적 효과를 통해 국가의 효력을 유지한다(p16)는 점입니다.

바꿔 말하면 극장국가의 보여지는 스펙터클의 극적 효과가 사라지면 국가의 효력 역시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경우 고종이 을미사변을 겪고 사실상 일본이 그를 경복궁에 감금시키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을 단행하고 이후 경운궁(덕수궁)으로 이어(移御)하고 정동의 구미대사관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로 칭합니다.
청일전쟁으로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던 청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일본이 들어오자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잠시 물러나게 한 상태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겁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힘이 없었던 고종은 자신의 황제즉위, 명성황후의 장례 등을 기획하고 주연을 맡으며 신민들에게 황제가 실제한다는 스펙터클을 제공한 것입니다.

그 프로젝트의 일부로 청과의 사대관계를 상징하던 영은문(迎恩門)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건설하는 퍼포먼스도 벌인 것이죠.

책의 3장은 이러한 정치적 퍼포먼스의 배경으로서 추진된 한성도시개조사업이 소개됩니다. 어쩌면 현재의 서울공간의 개발에 대한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사업으로 친미파로 최초 미국 워싱턴 공사관에서 일을 했던 박정양과 이채연이 주도하여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상의 근대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 사업으로 현재 종로2가에 위치한 탑골공원이 조성되었고, 교보빌딩 앞의 고종즉위 40쥬년 칭경기념비전이 만들어집니다.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이었지만 한성도시개조사업에 대한 존재자체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만큼 고종이 행한 행적에 대해 대중은 대체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이 생소한 도시계획에 대해 언급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고종이 행한 황제로서의 정치적 퍼포먼스는 절대주의적 전제군주로서 제국의 신민(臣民)들에게 황제의 존재를 보여줄 수 있었을 뿐이고 그 기간도 10여년에 불과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제했고, 이후 남산에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고종이 생각했던 한성의 근대도시계획은 틀어지게 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최초의 실내극장이었던 협률사(協律社)의 발생 기원을 추적하면서 실외에서 이루어진 대한제국의 황제의 거둥(擧動), 황제의 초상화인 어진(御眞)봉안행렬등이 모두 사라지게 되어 이런 스펙터클이 보여주는 극적 효과도 사라져 대한제국의 현실 (reality)을 신민들이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현실과 허구가 서로 엉켜있던 스펙터클이 사라지고 허구적인 퍼포먼스가 모두 실내의 극장 무대로 집중되자 현실이 눈에 보이게 된 것입니다.

본문 349쪽으로 적당한 크기의 연구서입니다만 상세한 주석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책과 몇가지 관련 연구서를 추가적으로 소개합니다.

Geertz, Clifford.,Negara: The Theatre State In Nineteenth-Century Bali(Princeton,1981)

Takeshi, Fusitani, Splendid Monarchy: Power and Pageantry in Modern Japan (California,1998)

두 책 모두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으며, 두번째 책은 일본 메이지시대의 국가의례에 대한 연구서입니다.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 앞에서 직접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전제권이 강한 권력일수록 더욱더 의례에 집착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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