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도의 북쪽 요동땅의 압록강( 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유역에서 살던 여진족(女眞族)과 조선의 대외관계를 연구한 책입니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으로 260쪽에 이르는 작은 책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아직도 소중화(小中華)의식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만주땅이나 요동지방, 연해주 지방을 포함하는 한반도 북부 스텝지역의 유목민족들에 대해 인종적 편견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중세, 근세사는 물론이고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국에 대한 연구서도 손에 꼽을정도로 적습니다.

하지만 만주땅의 경제개발계획이 이 땅에서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고, 구한말에 청나라는 일본과 조선에서 이권다툼을하고 조선의 주권을 유린한 당사자였습니다.

한석정교수님의 ‘만주모던(문학과지성사,2016)’이 박정희 정권에 미친 만주국의 영향을 고찰한 책이라면, 정영숙교수가 쓰신 ‘고종44년의 비원(너머북스,2010)’은 구한말 고종 재위시의 정치사를 총체적으로 개괄한 책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지 못해 청국을 끌어들인 고종의 결정은 결국 당시 청의 북양대신 (北洋大臣)이던 이홍장(李鴻章)과 사실상 중국의 대사자격으로 조선에 주재했던 원세개 (袁世凱)의 노골적인 내정간섭을 초래했고 결국 청일전쟁으로 귀결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이책의 마지막 6장에서 소개되는데 압록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건주여진(建州女眞)출신의 정치지도자입니다.

한국학자가 한국어로 저술한 누르하치의 평전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중국학자가 저술하고 번역된 누르하치의 평전으로 이 책은 대청제국(大淸帝國,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다이칭 구룬) 건국과정을 중심으로 서술된 책입니다.

과문한 지라, 첸제센의 ‘누르하치(돌베개,2015)’이외 다른 누르하치 평전을 본 적은 없네요.

특정 주제보다 통사적으로 청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책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청과 조선에 관련된 저서는 꽤 많아 근세 청과 조선의 정치사, 외교사를 어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내조(來朝)라는 말의 의미부터 되짚어 봅니다. 이말은 외국의 사신(使臣)이 찿아온다는 뜻과 지방에서 신하가 임금을 알현(謁見)하려 조정(朝廷)에 찿아온다는 말도 됩니다.

즉 ‘여진인 내조’라는 뜻은 조선의 북쪽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에 사는 여진족들이 조선의 임금을 찿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찿아온 목적은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고, 조선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위 목적 중 첫번째 경제적 이익은 조선 조정과 조공무역( 朝貢貿易)을 통해 접경지역에서 찿을 수 없는 물건을 구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번째 목적은 이 책의 주제와도 관련있습니다.

즉, 여진족들은 조선과 독자적인 조공-책봉(朝貢冊封)관계를 통해 조선과 여진족 간에 일정의 천자-제후관계를 형성하고 조선의 영향력 아래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는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남쪽에서 쓰시마(對馬島)와 류큐(琉球)와 같은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이들의 내조를 허락했습니다.

이책이 커버하는 조선전기는 명나라의 전성시대로 흔히 동아시아는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에 의거 중화주의의 입장에서 명나라와 다른 오랑캐 국가 ( 조선도 포함)들 간의 단일한 중국중심의 외교관계로만 설명되어왔는데, 사료와 연구는 단일한 조공책봉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은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하며 사대를 지속하는 한편으로 북쪽에서는 여진과 남쪽으로는 일본과 류큐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소중화로서 중심을 잡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대외관계는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침공을 받고, 건주여진의 누르하치 세력이 커지고 대청제국이 성립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모두 바뀌게 됩니다.

책의 6장은 청이 건국하기 이전 누르하치가 조선이 국경방어를 위해 두만강유역에서 복속해온 여진족 부락인 번호(藩胡)를 어떻게 쇄환 (刷還)하는지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통합시키고 이후 산해관 (山海關)을 넘어 명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계승범 교수의 ‘모후의 반역 (역사비평사,2021)’에서 조선이 사대를 하던 명을 버리고 살기위해 병자호란이후 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국내정치적으로 집권 서인 세력들은 유일한 천자(天子)로 받들고 책봉을 받아온 명을 버린 것으로 조선왕가의 정통성을 스스로 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쿠데타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한 주요 명분중 하나인 배명(背明)을 스스로 저버리는 아이러니에 직면한 것입니다.

좀 더 긴 역사적 기간을 보면 병자호란의 패배로 조선 태조 이래 조선왕실로 내조 (來朝)를 해오던 여진족 오랑캐에게 무릅을 꿇고 이들을 천자로 다시 관계를 맺어야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 천자(명)-조선-여진의 관계에서

여진 천자(청)-조선의 관계로 완전히 상하주종관계가 뒤바뀐겁니다.

이런 상황으로 정당성을 상실한 조선의 근본주의적 성리학(fundamental neo-Confucianism)이 점점 사회를 등한시한 체 사변적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조선이 여진과 맺어온 조선중심의 ‘조공책봉’관계가 잘 작동하고 별 문제가 없어 한 수 아래로 보던 오랑캐 여진족에게 힘으로 역전당하는 굴욕을 맛보았으니 잘못을 시인할 수도 없고 내부로 침잠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업과 공업을 천시하고 군사력 향상을 도외시한 성리학이 조선 국력 약화에 일조한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사회구조상 조선의 사대부의 물질적 삶을 노비계급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라 경제적으로도 자생눙력이 없는 계급이 사대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조선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 미국의 학자도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조선인구의 약 30%가 노비였고 이들이 없으면 사대부들이 책만 읽는 건 불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즉 사대부는 명분만 있고 실리는 챙기지 않은 의식구조를 갇진 계급인 겁니다.
따라서 오랜기간 억압받았던 피지배층이 장기적 관점에서 19세기에 일으킨 농민 반란과 서북지역의 민란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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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모후(母后)는 임금의 어머니를 뜻하는 말로 이 책에서는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의 계모이자 광해군의 아버지이자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의 두번째 왕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제목에 따르면 모후의 반역이라 하는 말은 서궁에 유폐(幽閉)되었던 인목대비의 반격이라는 의미로 즉 인조반정( 仁祖反正)을 의미합니다.

계승범 교수의 이 책은 광해군의 집권 시기를 다루는 정치사로 광해군이 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했는지를 밝히고 있으며 굉해군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능양군(인조)의 반정이 17세기 이후 조선후기라고 명명된 기간동안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합니다.

계승범 교수의 이전 저서인 ‘중종의시대(역사비평사,2014)’에 따르면 조선에 왕위찬탈(王位簒奪)로 볼 수 있는 쿠데타는 총 4번으로 첫번째가 조선초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난에 따라 아버지 조선태조 이성계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고, 두번째는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즉 세조의 욍위찬탈입니다.

이 첫 두번의 쿠데타는 태종의 것은 조선 건국초에 일어난 것으로 별 비난을 받지 않았고 세조의 쿠데타는 유교화가 어느정도 지난 상태에서 일어나 지탄의 대상이 된 쿠데타였습니다.

16세기가 들어서 일어난 중종의 쿠데타, 즉 중종반정( 中宗反正)은 폭군 연산군의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연산군의 폭정으로부터 별 무리없이 정상적인 ‘바름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걸맞게 정당화되었습니다.

15세기까지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던 조선사회는 중종당시인 16세기부터 사대부라는 관인계급이 등장하면서 조선은 급속히 유교근본주의 사회로 진화합니다.

하지만 사대부계층은 유교경전만 읽고 주희의 성리학을 절대시 하면서 상업과 공업을 무시하고 군사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경제적 현실주의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거죠.

거기에 명나라와의 사대(事大)만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명의 번국 (藩國)을 자처해 조선왕들은 권위를 명의 책봉(冊封)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렇게 집권 사대부 계급이 유교 근본주의에 빠져 현실적 생각을 등한시 하던 16세기 말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전쟁인임진왜란이 터지고, 군사적 방비가 전무했던 조선은 왜(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게 됩니다.
무능력하고 소심한 환란을 맞아 조선 땅을 버리고 선조는 중국의 요동(遼東)으로 망명할 생각만 하고 이 와중에 광해군은 세자로 임명됩니다.

명의 책봉도 못 받은체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권력을 일부 이양받아 전란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이끌어야 했던 사람이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광해군을 견제했던 선조는 적자를 볼 요량으로 새 장가를 드는데 이 사람이 인목대비입니다.

40년 이상 나이차이가 나던 왕과 왕비 사이에 적자가 태어나는데 선조는 적자가 아닌 광해군에게 보란 듯 젊은 왕비도 둘이고 60이 넘은 나이에 적자를 보게 됩니다.

역사상 보여지는 선조라는 임금은 능력이 없으면서도 권력욕은 강하고 자식인 광해군에게 평생 상처를 주면서도 이를 모르는 무심하고 먼 아버지였던 것 같습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어린 이복동생(8세)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圍籬安置)시키고 죽게 만들었고 계모인 젊은 어머니를(9세 연하)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대비(大妃)라는 왕후의 지위에서 강등시켜 어머니 자격을 박탈한 폐모(廢母)론은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폭발력 덕분에 많은 사극의 소재가 되어왔고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광해군과 인조 당시의 조선은 몇가지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첫째, 광해군이 집착적으로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가할 수 밖에 없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할 수 없었던 것은 적장자가 아닌 광해군이 임진왜란이라는 환란의 시기를 지나고 불안정한 조선에서 상황에 떠밀려 왕이 된 이유가 크고, 조선 왕으로는 드물게 명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체 왕이 된 첫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왕권이 불안정하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광해군은 불안정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두번째, 성리학의 관점에서 역모를 모의한 경우 비록 부모라 하더라도 역적으로 처벌이 가능하다고 인정되어 왔으나 조선의 경우 인조반정을 계기로 부모에 대한 효가 나라에 대한 충을 앞선다는 경직적 성리학 근본주의가 자리잡는 계기가 됩니다.

성리학에서 볼때 충과 효 중 어느 가치가 더 중요한지 논쟁할 수 있는 대상이었으나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에서 효는 충을 뛰어넘는 절대 가치로 교조화하고 이는 조선후기를 규정짓는 경직적인 성리학 근본주의로 귀결됩니다.

셋째, 따라서 필연적으로 성리학은 효에 우선순위를 둠으로서 더 철학적 사변적 심리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고 나라의 운영을 포함하는 좀 더 사회적인 의미의 충이 우선시되지 않아 군주권이 신권에 밀리며 조선 말 세도정치를 비롯한 각종 폐단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 시작이 인조반정입니다.

넷째, 광해군의 배명(背明)적 외교정책과 인목대비 서궁유폐를 말하는 폐모(廢母)를 명분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병자호란에서 청에게 패해 청에게 사대를 하게 되면서 광해군을 공격했던 배명의 명분을 잃게 됩니다.

성리학 근본주의가 인간의 내면 수양을 중시하고 현실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상업과 군사를 무시하기 때문에 군대양성을 소홀히 하는데다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게도 오로지 명나라 황제만을 천자(天子) 로 인식하는 경직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 기마부대가 우수한 유목민족 출신인 청의 현실적 힘을 애써 무시한 것도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게 된 원인으로 생각됩니다.

현실적 외교와 군사력 강화가 근본주의적 성리학적 사고 앞에는 불가능했고 필연적 결과를 삼전도에서 항복하면서 인식하게 된 겁니다.

명을 배반하고 청과 화친했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해버린 서인을 비롯한 척화파 세력들은 병자호란에서 져 ‘오랑캐’인 청국에게 항복하고 살기 위해 군신관계를 맺어 광해군이 행한 배명보다 훨씬 더한 배명을 행하게 됩니다

다섯째, 그 결과 배명은 사라지고 폐모만 남아 광해군은 어머니를 폐한 천륜을 저버린 군주로 남게되고 사대의 대상인 명이 멸망한 후애도 명에 대한 사대를 계속하는 조선중화주의 혹은 소중화주의라는 지극히 ‘분열적인’사대의식이 조선에 남게 됩니다.

충격적이게도 명에 대한 사대의식은 19세기 말 고종 때까지 이어졌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운 현상입니다.

명을 배반하지 않는 제후국이라는 자기 최면하에 멸망한 지 200년이 넘은 나라를 위해 의식을 치루고 중국 한족이 보기에 동쪽 오랑캐중 한 나라인데도 스스로 ‘소중화’로 여기고 있고, 청과 다시 책봉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조선 사대부 스스로 청의 만주족들이 ‘오랑캐’라고 여기면서도 현실적 필요에 의해 사대와 책봉관계를 유지하고 거기다 다시 망한 명에 대한 의례를 200년 넘게 지속하고. 얼마나 이율 배반적인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선 전기와 중기 정치를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조선의 성리학적 근본주의 그중에서도 인조반정 이후 조선후기 버전은 조선의 역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천륜(天倫)이라고 주장하면서 왕권보다 신권을 우선하며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도 국가에 대한 충의(忠義)는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본인은 일 안하고 책만 읽고 일은 모두 노비가 하고, 즉 노비가 없으면 경제적 기반을 만들 수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노비의 수는 계속 늘어가게 되는 상황을 방치하고, 노비는 국방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군사력도 계속 감소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사대부 수가 늘어날수록 노비 수가 늘어나고 군사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가 만들어 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들과 그후예들이 병자호란을 거치며 자신들의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저지른 ‘배명’을 숨기고 광해군을 희생양 삼아 인목대비의 폐모를 더욱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충과 효라는 두 중요한 가치에서 효를 더욱 절대화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효가 충보다 중요해지면서 군신관계가 약화되고 왕권이 약화되어 조선후기는 신권정치로 점철됩니다.

사변적 성리학이 성행하고 스승으로서의 군주상이 요구되고 이에 부합하는 걸로 알려진 성리학 군주 정조이후 학자적 자질이 정조보다 떨어지는 군주들이 등장하자 조선의 정치는 외척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됩니다.

주자의 성리학이 최초의 유학에 비해 근본주의자이지만 충과 효라는 두 가치가 서로 상보적이고 경쟁적이며 군주의 통치에 있어 충이 효을 앞설 수 있는 것인데도 조선에서 17세기 인조반정이후 효는 반정 세력이 생존의 필요에 의해 경직적 성리학을 추구하게 되고 누구도 효가 충을 앞선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됩니다.

끝으로 이책의 장점을 몇가지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실증적 근거에 제시해 주장을 전개합니다.

둘째, 조선의 사료뿐만 아니라 중국측 사료까지 같이 설명하기 때문에 조선과 명과의 책봉관계를 좀더 면밀하게 재구성할 수 있으며 인목대비 폐위 논쟁에 대한 중국의 전거를 따로 정리해서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셋째, 이전의 연구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비평하며 구체적인 연구와 주제를 정합니다.

넷째,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에 대한 당시 정치적 역학관계를 대해 종합적으로 저술한 첫 한국어 연구서입니다.

인조반정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인데도 여태 독립된 주제로 연구가 되지 않았다는 건 충격적입니다.


다섯째, 조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당시 중국의 나라인 명과 청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중국의 경우 조선 당시만이 아니라 사서와 당시 사대부들이 인용한 경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경전이해를 위해 필수적으로 춘추전국시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중세 근세사에 있어 중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중국의 역사와 유교에 대한 이해없이 조선은 이해가 불가능한 과거입니다.

근래 중국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일부 목소리는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미국과 길게 잡아야 1860년대부터 교류를 시작했다면 중국과의 교류역사는 그 수십배에 달하는 긴 기간입니다. 수천년을 헤아립니다. 조선만 따져도 500년 입니다.

한국은 중국을 단순히 최대 교역상대국이라는 표면만 볼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몰역사적인 시각을 가진 것이 분명한 집권층의 시각을 자주접하게 되어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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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지주제와 소작정책의 식민성 일제침탈사 바로알기 12
최은진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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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소작정책이 어떠했는지 정리한 소책자.
책 말미의 참고문헌이 잘 정리되어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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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지음 / 역사비평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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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회구조에 관한 책으로 저자의 강의안을 정리한 책입니다.

사회학적인 계급론적 측면과 법제적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조선의 신분제를 다루었습니다.

조선의 전기부터 후기까지 포괄한 전 기간에 걸쳐 조선의 사회구조및 계급에 대해 고찰하고 조선의 정치. 경제를 제도적 측면에서 고찰했습니다.

핵심적인 사항위주로 정리되어 있어 가독성이 훌륭합니다.

이 책은 조선의 신분제를 전혀 새로운 학설로 여겨지는 양천제(良賤制)로 보고 왜 조선이 양천제를 시행한 사회인지 설명합니다.

여태 우리가 알고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4계층 신분 사회라는 주장은 일제 초기 다나카 도쿠타로 (田中德太郞)라는 조선총독부 통역관이 조선 사회에 대해 쓴 유람기에서 유래했고 연구논문이 아닌 피상적 관찰기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주장이 고착화되어 교과서에까지 실린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출처를 밝히고 조속히 수정되었으면 합니다.

신분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책은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정의하는 양인(良人)과 천민(賤民)에 대해 설명합니다.

양인은 사대부를 포함한 일반적인 상민(常民)을 말하며 군주의 통치대상의 모든 백성을 말합니다. 천민은 죄를 지어 형사적 처벌을 받아 상민의 권리를 박탈당한 신분을 말합니다.

따라서 법제적 관점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면 천민은 존재할 수없는 신분입이다.

양인 신분은 과거에 합격해 정부관리가 된 사대부와 일반 양인으로 나누어집니다.

저자에 따르면 사대부는 국왕을 도와 조선사회를 통치하는 지배계층으로 철저하게 능력에 따른 선발제도를 거쳐 선발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사대부 계급과 양인 사이에 차별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으나 16세기 중종대를 거치며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 통치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유교화되고 그 차별이 고착화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대부와 양인 모두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오직 천민 신분인 노비들만 이런 의무에서 면제되었습니다.

국왕의 통치대상이 아니고 신민으로 취급받지 못해 신민의 의무도 질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 천민인 노비는 대부분 지주계급인 사대부 가문의 농업생산과 기타 여러 잡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중앙정계에서 국왕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데 그 물질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조선 중기가 지나고 후기로 갈수록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기 때문에 미국의 한국학자 제임스 팔레(James B. Palais)는 조선이 ‘노예제 사회(slave society)’가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서구학자의 주장이 노비=농노로 보는 일반적인 서구학자들의 개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노비가 다른 사회의 노예와 다른 점은 ‘인격권’이 인정되었다는 점으로 단지 재산취급을 받고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고대 로마의 노예나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의 노예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사대부 계급의 존재로 인해 국왕의 왕권이 많이 제한되었던 나라로 전제군주제 국가이지만 신권이 왕권을 능가하거나 최소 많은 제약을 가했던 나라입니다.

국왕의 왕권이 네차례 ( 태종, 세조, 중종, 인조) 찬탈(簒奪)되었고 건국 초기인 태종 때를 제외한 나머지 세정은 근본주의적 성리학이 국가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고 군신관계가 부모 자식관계와 같다고 여겨지던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끝의 두번의 왕위찬탈은 반정(反正), 즉 옳지 못한 것이 바로잡힌다는 명분으로 사대부들에게 인식되어 사대부의 권력이 사실상 국왕을 능가하는 상황을 정당화해주는 계기가 됩니다.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조선을 현재와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지만, 최소 사회의 모순은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사대부 지배계급이 유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의리 (義理)를 근본으로 삼는 정치를 펼쳤으나 물질적 기반을 등한시하고 국방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상관(堂上官)이상의 거의 모든 고위관리가 문관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16세기 이후의 전란이나 외국과의 분쟁에 휘말릴 때 물질적 군사적 고려를 할 수 없는 지배층들이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단지 조선 후기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이 사실이 매우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둘째 조선 사대부가 추종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민생중심보다 자신의 정신적 수련을 강조하는 수기(修己)중심이다 보니 아무래도 사회를 보는 시각이 결여되고 뜬구름 잡는 고담준론에 치우칠 위험이 존재합니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金尙憲,1570-1652)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적 성리학자들이 얼마나 대책없고 무모했는지 소설과 영화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청군에 맞서 변변한 군사력도 없이 남한산성이 갇혀 공성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신세인데도, 백성들 생각은 안하고 명과의 의리만 생각하고 해결책을 내놓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관점에서 조선이 토지를 비롯한 재산에 대한 사유재산권이 강조된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전제 정치 체제였지만 조선의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보았고 실제 농지의 매매가 일어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농지 이외의 땅은 모두 국가소유로 보고 모든 백성들이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재적 발전론 관점에서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고 체계화시키기 노력한 책이지만 계급적 관점에서 조선사회를 바라본 점은 신선했지만 경제문제는 사적소유권이 인정되었다는 점 말고 경제 자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인상입니다.

사료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조세제도 이외에 다른 설명이 부족한 건 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조선은 굉장히 독특하게 경제를 운용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런 경제체제도 후기에 들어 소수의 문벌과 외척세력의 영향 아래 들어가 결국 조선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조선의 경제관련문제는 조금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경제를 주로 공부해서 그런지, 정치와 경제의 연관성을 보면서 정치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는데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경제와 국방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조선의 역사를 서구 학자들이 보는 틀에 맞출 필요도 없지만 조선이 산업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나라였는지는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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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계승범 교수님이 2014년 쓰신 16세기 중종 당시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조선의 유교화 과정 (Confucian transformation)을 다룬 책입니다.

제가 두번째로 읽은 계승범 교수의 책입니다.
첫번째는 ‘정지된 시간(2011, 서강대 출판부)’로 19세기 고종말까지 이어진 조선의 ‘대명사대의식’에 대해 기술한 책입니다.

이 책은 ‘정지된 시간’에서 보여준 극단적 대명사대의식이 언제 누구로부터 왜 시작되었는지를 밝히는 책입니다.
그러면서 조선전기 (15-16세기) 정치사와 조선의 성리학 수용과정을 살핍니다.

몇가지 중요한 논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조선이 유학을 정치원리로 삼아 건국하였지만, 조선의 정치현실은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고, 왕권의 권위가 없고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태조에 대한 태종의 왕위찬탈, 단종에대한 세조의 왕위찬탈이 일어났고, 중종도 사실상의 왕위찬탈로 보위에 오릅니다. 17세기 인조 역시 왕위찬탈로 왕위에 오릅니다.

왕위찬탈(王位簒奪)이란 왕이 될 수 없는 자가 왕이 된다는 말로 특히 유교국가의 근본이 어느정도 정립된 이후에 일어난 세조의 단종폐위와 욍위찬탈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끊임없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후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신하가 임금을 폐하고 중종을 즉위시킨 중종반정(中宗反正)도 반정으로 포장되었으나 신하가 욍을 폐위시키고 유배시켰고 죽이기까지 한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15세기 조선은 명을 중원을 통치하는 대국으로 보았지만 절대적인 천하(天下)의 중심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즉 고려말부터 유학 특히 성리학이 정치권에 영향을 미쳤지만 명을 절대적으로 보고 사대(事大)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정치사상운동으로 사림(士林)이 등장하고 유교적 덕목인 의리(義理)의 가치를 절대시하게 되자, 조선은 스스로 천자인 중국의 번국 (藩國)으로서 명에대한 사대를 단순 외교관계이상의 부자관계, 천륜관계로 절대화합니다.

이는 이후 일어나는 임진왜란으로 대명사대관계가 더욱 절대시되고 인조때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처한 현실과 극심한 모순으로 들어나게 됩니다.

셋째, 기존의 조선전기 학설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저자가 강단역사학의 주류인 서울대 역사학과 출신이 아니고 미국의 한국사를 주도하는 워싱턴 대학(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공부를 하신 이력이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단 사학에서는 그리고 교과서에서 사림은 지방에서 은거하던 유학자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해서 조선의 정치에서 영향을 준 것으로 설명을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즉 편의적으로 조선의 사대부를 훈구(勳舊)와 사림으로 나누어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지배계층으로 설명하지만 이 이론의 역사적 근거가 없고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도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기록과 족보를 봤을 때 사림과 훈구는 서로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얽혀있고 무엇보다 공신이나 훈구세력으로 분류된 인사들 중 사림에 우호적이거나 최소 묵인하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한 사림의 출신지는 지방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한양이었고, 심지어 고려이래 명문거족의 자제나 공신의 자제 등 훈구세력으로 불려도 무방한 자제들이 사림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사람은 훈구와 지향점이 다른 같은 사대부이자 조선의 지배층으로 한양을 중심으로 중앙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세력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림을 훈구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획계층 또는 새로운 계급으로 봐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16세기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유교적 의리를 절대시하면서 각종 물질적 가치를 폄하하고,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절대시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적 성리학으로 바뀝니다.

이때 유교화 과정에서 일어난 이런 의리 중심의 가치 절대화는 성리학적 사대부가 대지주이자 지배층으로 무한한 권력을 누리지만 경제와 군사에 힘을 쏟지 않는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부실한 군사문제로 일본의 침략을 받은 전쟁이 임진왜란이고, 왜란 후에도 군비증강에 손을 넣고, 절대적 대명사대주의에 빠져 청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다가 공격을 받은 전쟁이 병자호란입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의리만 중시하고 경제적 이익이나 군사문제는 군자(君子)의 일이 아니며 격이 낮은 소인(小人)이나 하는 일이라며 폄하했습니다.

조선 지배계층의 이런 절대주의적 성리학적 시각을 감안할 때, 두번의 전란을 겪고도 나라가 거의 망할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변하지 않는 사대부들에게 불만이 쌓이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선은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명을 섬기는 지금 입장에서 이해할 수없는 의식을 19세기 말까지 이어온 겁니다.

끝으로 ‘유교화 과정(Confucian Transformation)’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즉 조선이 고려 당시의 불교국가에서 유교국가로 바뀐다는 말인데, 이책에서는 조선이 점진적으로 시간을 가지고 변화했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1388)이라는 극적인 정변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화는 계기가 되었지만 조선의 건국은 고려의 지배계층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실 혁명(Revolution)의 요소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고려 말 성리학이 송나라로부터 전해진 이래 고려의 지배층이 성리학을 정치지배원리로 받아들였고, 점차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 사회로 퍼져나가 16세기 중종 때 조선에 정치원리이자 사회통치원리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유교화 과정’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읽었던 ‘한국의 유교화 과정(2013)’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책은 정치과정보다 조선사회의 기반인 가족(家族), 친족(親族), 결혼제도가 고려이후 어떻게 변했는지를 관찰한 책입니다.

유교사회에서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보다 중요한 천륜(天倫)으로 이해되는 만큼 유교의 종법(宗法)과 관련된 분야를 살피는 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한 가계의 족보가 부계(父系)를 따라 정리되고 남자가 가는 장가가 여자가 오는 시집으로 바뀌는 것 모두 조선의 유교화 영향으로 그 이전에 없던 현상이라는데 주목합니다.

인류학적 방법론을 쓴 위의 책이나 각종 사료를 분석하고 장기사 (長期史)의 관점에서 조선전기 유교화 과정의 원인 결과를 추적한 이 책 모두 조선이 어느날 갑자기 유교국가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조선사 자체가 교과서에서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관련해 해방이후 처음 조선전기의 역사를 훈구-사림의 대립구도로 설명한 이병도( 李丙燾1896-1989)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병도씨의 이력을 보면 일본 유학후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이력이 있습니다. 그후 서울대애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습니다. 아무튼 이후 이병도의 훈구-사림 대립구도는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고,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하지만 이 설명은 가설에 지나지 않고 사료들이 증명하는 바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훈구-사림은 지향이 다른 같은 지배층으로 한양의 중앙정치무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사대부계층일 뿐이고, 조선의 지식유통단계로 보더라도 중국과 직접 교류가 쉬운 한양이 성리학의 최신 사조를 더 쉽게 접할 수 있지 지방에 사림이 근거한다는 설명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최근 제도권 밖에서 활동하는 역사가들이나 비주류를 자처하는 학자들 중에서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도 않고, 사료에서 증거도 찿을 수 없는 과거의 이론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자의 양심의 문제이지 주류와 비주류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병도씨의 이론이 도그마(dogma)가 되어 새로운 시각의 이론을 배격한다면 이는 작게는 한국의 학계에 그리고 넓게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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