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자이자 해양사 전문이신 주강현 교수의 역작을 소개드립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환동해 연구시리즈 1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본문만 711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입니다.
이책에 실려있는 각주의 문헌들이 추가적 정보를 얻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완독 시도를 여러번 했으나 오늘 드디어 완독했습니다.

책의 세부내용을 전하기 앞서 총평을 하자면 지역의 해역교류사와 제국주의의 원주민 침탈사 측면에서 포괄적으로 환동해를 둘러싼 역사를 조망한 책으로 충분히 이분야에 대해 더 연구를 하거나 더 깊이 있는 독서를 원하신다면 두고 읽을 기본 참고서(reference)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으로 보입니다.

이 책은 그동안 별 주목을 받지 않아 온 러시아의 동진과 러시의 연해주 점령, 연해주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 일본 간의 세력 다툼, 러시아와 일본이 사할린과 캄차카 반도, 쿠릴열도의 영유권과 어장을 가지고 어떻게 이권다툼을 벌였는지 보여줍니다.

북극권에 영토가 몰려있는 러시아에게 부동항 확보는 후발제국인 러시아로서 사횔이 걸린 문제였고, 19세기 중반 크림반도를 면한 흑해(black sea) 를 통해 해양에 진출하려던 러시아의 시도가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의 저지로 무산된 이후 (크림전쟁, Crimean War1853-1856) 이후 러시아는 재차 부동항을 얻기위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진을 계속해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마침내 항구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남진을 시도합니다.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인 태국 말레이반도 싱가폴 홍콩을 통해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은 일본과 협력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합니다.

그 사건이 한국 근대사에서는 ‘거문도 사건 (1885)’으로 알려진 사건입니다. 대한해협에서 환동해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거문도를 영국 해군이 불법적으로 2년 동안이나 점령하고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철수한 사건입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Trans -Siberian railway )을 건설해서 시베리아의 영토와 자원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당시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 그리고 몽골지역의 원주민들을 러시아 정교로 개종시키고 러시아 문자를 쓰게 하는 등 소위 ‘문명화 ‘전략을 시도합니다.

또한 환동해 주변의 연해주 지역과 환동해 주변에 나타난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미국의 상인들은 고래 바다사자 수달 등 돈이 될만한 야생동물들을 마구 남획해 상당수의 생물들이 멸종했고 더불어 캄차카 반도애 살던 이텔멘족이 멸종합니다.

일본은 막부시대 이미 북방의 홋카이도와 사할린에 살던 아니누족의 문화를 파괴하고 이들을 일본화 시킨 뒤 복속시켰습니다. 아이누족은 일본민족보다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원주민들과 혈연적 연관성이 있는 이들이지만 후발 제국 일본의 ‘문명화’과정을 거치며 정체성이 해체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런 ‘만들어진 일본 정체성’을 무기로 사할린과 쿠릴열도애 대해 일본의 영유권을 러시아에게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과 가까운 일본의 시마네현 (島根県)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일제시기 독도애서 강치를 남획해 멸종시킨 것도 환동해를 둘러싼 교류의 맥락을 짚어야 이들 주장의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관련된 내용은 저자의 ‘독도강치멸종사(서해문집,2016)’를 보시면 됩니다. 이책에서 설명된 독도강치잡이 부분과 상당부분 내용이 겹칩니다.

일본의 문호개방의 시작이 된 미국 동인도 함대의 페리제독의 개항요구 (1853)는 잘 알려진 사건이지만 같은 시기 러시아도 일본에 같은 요구를 했다는 점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853년 러시아의 해군증장 푸타틴이 팔라다호와 4척의 군함을 가지고 내항해 일본과 통상협정을 맺었습니다.

푸타틴은 같은 함대로 1884년 조선 근해에 나타나고 거문고와 동해안 일대를 관측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와 조선은 수교상테도 아니었고 이 와중에 세도정치로 인한 압박을 피해 백성들이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가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국경에 대한 합의도 이루지 못하던 답답한 상태가 이어지고 두만강이 중국과 러시아에 의해 일방적으로 국경으로 결정됩니다.

국내에 관련서가 전혀 없는 것 같은 분야 중 하나가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와중에 연합국 ( 미국 영국 프랑스) 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역사입니다.

일본이 막부시대를 거쳐 메이지시대에 대만( 臺灣), 류큐( 琉球) 즉 현재의 오키나와(沖繩)를 복속하고 이후 어이누족을 몰아내고 에조치(蝦夷地) 즉 현재의 홋카이도(北海道)를 복속시킵니다.

조선반도 침략은 그 다음입니다. 러일전쟁이후 영국과 미국의 묵인 아래 조선반도 침략을 단행해 한일합병(1910)을 이루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꿈꾸던 대륙진출을 실현하기 위해 만주국(滿洲國: 1932-1945)을 세웁니다.

아마 여기까지는 많은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일본이 괴뢰국으로 세웠던 만주국 출신 엘리트들이 1945년 일본 패망이후 한국 현대정치사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하므로 이를 고찰한 연구서도 꽤 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의 발전주의적 국가모델에 만주군 관동군 출신 인사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이들이 한국사회에 행한 정책들이 만주국애서 일제가 행한 정책과 얼마나 유사한지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한석정, 만주모던 ( 문학과지성사, 2016)

하지만 일본이 러시아내전 (1917-1922) 시기에 연합군 ( 영국 미국 프랑스)와 함께 군대를 보내 러시아혁명에 대한 반혁명 세력인 러시아 백군과 연합해 러시아 혁명군( 적군)과 전투를 벌였고 더구나 만주국과 같은 괴뢰국을 시베리아에도 세우려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저도 이 책에서 처음 봤습니다.

이미 전문가들은 알고 있는 사실일 수도 있고 제가 이분야를 잘 몰라서 그럴 수 있지만 충격적이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애서 일본이 패전하고 미국의 사실상의 기지국가가 된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제1차세계대전을 통해 승전국으로서 어떤 이익을 보았는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 이외에 다른 나라에서 어떤 이익을 보았는지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말로 된 이 분야에 대한 연구서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국가들은 보수적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볼쉐비키들이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기 원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미 이 당시 1950년대 이후 벌어질 극단적 냉전(the Cold War) 의 기원이 싹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시베리아 출병 역시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보입니다. 유튜브애서 미국의 전쟁사 교수가 이 주제에 대해 강연을 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관련서가 영어로는 존재합니다 ( Wolfhounds and Polar Bears, University of Alabama Press,2019)

확실한 것은 1910년대 영국과 미국은 당시 조선에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해양세력으로서 일본과 동아시아에서의 이권을 나누고 이를 지키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당시 태평양으로 팽창을 하던 미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승인하는 대가로 필리핀을 식민지로 얻었고 당시 대통령이던 미국의 루즈벨트는 철저한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해 포츠머츠 조약(1905)를 성사시켰습니다.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국제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냉정합니다. 미국 일본 러시아 영국 등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권에 따라 행동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전략적 동맹관계라고 해도 이들이 한국을 시혜적으로 대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특히 한국은 주한미군에 대해 돈계산 철저히 하고 각처에 있는 미군부대 정화비용 받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미국의 이익이 한반도에 있는 한 미군은 철수 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이 초기 인류학이 발달하던 19세기 말 , 20 세기 초 ‘원시사회’의 대상으로 관찰되었고, 소위 문명국의 박람회에서 ‘희귀한 볼거리’로서 전시되었던 불편한 역사가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문명인으로 스스로 생걱했던 일본인들도 애조치의 아이누족을 전시하는 작태를 서구인들과 똑같이 행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서구 백인종들이 더 우월하다는 인식은 아직도 우리 무의식에 남아 있어 한국에 정착한 백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에게 차별행위로 일어납니다.

항상 의식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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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국가 중심의 역사가 아닌 해양사의 관점, 국가의 변방에 위치한 도서 (島嶼) 입장에서 역사와 주민의 삶을 바라 본 연구서입니다.

오가사와라제도라는 이름을 이 책에서 처음 보았는데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입니다.

이전에 주강현 교수님이 쓴 일본 오키제도 (隠岐諸島)와 독도와의 관계에 대한 책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독도 강치 멸종사, 서해문집,2016) , 이 책은 오키제도 이외 잘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부속도서에 대한 또다른 연구서입니다.

이무래도 주권국가 단위의 국가사나 지배계급 위주의 정치사나 왕조사에 익숙한 독자에게 이 책의 서술방식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오가사와라 제도라는 북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외딴섬에 사는 사람들이 근대 대항해 시기와 포경선 수렵 밀렵선의 시기를 지나 세계대전과 일본의 대륙 및 해양 침탈 정책시기를 거치며 어떻게 삶을 헤쳐왔는지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첫째 시기는 16세기에서 21세기 현재까지를 망라합니다.

둘째, 16세기 범선이 주도한 대항해 시기와 해적들이 창궐하던 시기를 거쳐 19세기 이후 일본 근대국가 성립과 미국의 포경선과 수렵 밀렵선들이 태평양으로 밀려들던 시기를 지나 재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미국의 군사력이 태평양을 압도하는 시기까지 커버합니다.

셋째, 17-19세기 선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폭압적 지휘체계로 인해 도서 지역의 해방구로 탈출한 이들이 많았고 이들이 정착했던 섬 중 하나가 오가사와라라는 점입니다. 일종의 치외법권지대로 국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해서 상대적 자유를 누렸던 지역이었습니다.

넷째, 아시아 지역 뿐 아니라 대항해 시대부터 유럽출신을 비롯한 다양한 이들이 도서에 몰려 살면서 포경선이나 수렵선들에 물품을 팔고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다민족 다이아스포라(Diaspora)를 형성했던 곳입니다.

북태평양의 고래잡이, 특히 미국의 포경산업과 극동 러시아와 알래스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행해진 물개 수달 등의 모피무역에 대해서는 별도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미국이 콜롬비아 강을 탐험하고 멕시코와 전쟁을 해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빼앗은 이후에도 자신들의 서부개척은 미국 서부가 끝이 아니라며 이후 하와이와 필리핀을 복속하며태평양으로 진출하고 고래잡이와 수렵을 해서 중국과 교역을 합니다. 이와 같은 미국의 태평양 진출은 초기 미국의 산업 자본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미국은 현재 이런 영향력 확장이 제국주의는 아니라고 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도쿠카와 막부 시절부터 주권을 행사하려던 일본이 1870년대 이 지역을 주권지역으로 포함시켰고 이후 일본 본토에서 개척이민이 시작됩니다. 같은 시기 일본은 아이누들의 지역인 홋카이도를 병합하고 오키나와를 복속시켜 근대국가의 모습을 잡습니다. 홋카이도 개척의 사례는 오가사와라개척에도 준용됩니다.

여섯째, 일본의 아시아 팽창정책과 함께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오가사와라 제도의 섬들은 일본의 병참기지와 해군기지로 바뀌고 정책에 따라 섬 주민들을 일본 본토로 소개시킵니다. 난민화의 시작입니다.

일곱째, 일본의 패전이후 미국은 일본이 지배하던 ‘남양군도(
南洋群島)를 접수해 태평양을 세력권에 넣기 시작했으며 하와이에서 괌을 지나 필리핀에 이르는 태평양 전역에 해군기지와 미사일 발사대, 무기 실험을 행하면서 대륙세력안 중국과 러시아를 봉쇄(containment)하는 정책을 취합니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새워졌고 오가사와라에도 미군 기지가 세워져 이전에 이 섬에 살던 주민들 대부분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체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사망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섬 주민들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병참기지때문에 삶에 어려움을 겪었고, 미국이 섬을 접수한 이후로는 군사적인 목적때문에 태어난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에 따라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는 건 일본이건 한국이건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오키나와에서 성범죄를 비롯한 미군들의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는 건 한국에 위치한 미군기지 주변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가사와라 제도의 이오지마(硫黄島)주민들이 제2차세계대전 말, 미군의 일본 지상군 공격 전투 때문에 일본본토로 소개(疏開)된 이후 70여년간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고 되돌아가지 못한 체 고령으로 세상을 등지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으로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하는 한국의 실향민들과 그 후손들의 삶과 겹쳐 보입니다.

미국이 필리핀에서 해군기지를 폐쇄하고 한국의 기지를 용산에서 평택으로 옮기고 있고 중국을 겨냥한 사드미사일을 경상도 지역에 배치하려는 가운데 제주도에도 해군기지를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국방전략을 잘 모르는 제가 봐도 미국은 이미 본인들이 중국과 러시아를 타격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자신들의 기지를 지어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고 한국과 일본의 친미 기득권층은 아무소리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습니다.

미국이 중국을 적대시하는 건 그들 입장에 이해가 되지만 한국은 입장이 당연히 미국과 다릅니다. 간단히 한국에 우호적인 중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당장 경제적 손실이 옵니다. 더구나 미국은 미군에 소요되는 경비마저 한국에 내라고 하니 이건 말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군인들은 유일하게 ‘살상(殺傷)을 전문으로 하는 직책으로 답이 없는 조직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도 교수들과 학자들이 새로 발명한 무기가 없었으면 미군 수뇌부도 전쟁에서 졌을 수도 있습니다.

최소 말도 않되는 소수의 엘리트들의 자의적 결정으로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건 막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모르긴 해도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이나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나 다 같은 황인종으로 별로 다른 정책을 펼 이유를 몰랐을 것입니다. 1960년대까지도 백인과 유색인종의 화장실을 달리 쓰던 인종주의 국가에서 그리고 자신들 세계 이외에 무관심한 나라에서 아시아의 조그만 패전국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륙의 라이벌을 막기 위해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이상의 생각을 했으리라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에 이식한 통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 현상유지 정책 ( status quo policy)를 펴고 일본과 한국에 군정을 실시했을 것이고, 제2차세계대전의 전범들을 다시 전후 일본 사회의 지도세력으로 불러들여 미국의 정책을 따르게 했을 것입니다.

이 책의 말미에 미국이 일본의 통치하에 있던 ‘남양군도’를 신탁통치의 대상으로 정하고 실제 그리했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미국은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쟁 중 ‘일본땅’이던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를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소련과 북쪽에 대한 신탁통치를 논의한 건 구한말 이래 러시아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에 대해 선뜻 미국이 나서기 어려웠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은 다른 연구서를 좀 더 찿아보아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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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포함 270여쪽에 불과한 작은 책이지만 생태적 관점에서 독도와 일본 시마네현 (島根縣) 오키 제도(隠岐諸島)간의 장기적 역사관계를 조망한 책입니다.

보통의 독도관련서가 국제법적 해양법적 관점에서 국가간의 경계와 그에 따른 분쟁에 촛점을 맞췄다면 이 책은 독도에 서식하던 독도 강치(Zalophus japonicus, 학명 일본강치)의 멸종과 이를 초래한 일본의 남획과 그에 따른 분쟁과 그 흔적을 따라갑니다.

시간대가 고대 중세 근세 근대를 아우르는데다 한반도 독도의 지방사와 시마네현 오키 제도의 지방사를 아우르는 등 정치사에 가려져 있던 미시사와 구술사가 서술의 일부를 차지합니다.

이 모든 점을 떠나서 황당한 것은 시마네현이라는 일본의 일개 지방 혹은 막부 시대 소국이 자신들 편의대로 ‘자의적으로’ 독도를 자신들의 관할로 정하고 자신들 판단대로 도항 및 어업허가를 내주며 기록을 만들어간 점입니다.

이미 조선시대 안용복이 일본에서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를 주장하고 있고 한반도에서 울릉도 독도의 거리가 더 가깝고 을릉도에서 육안관찰이 가능한데도 조선이 취해온 공도정책 (空島政策)을 빌미로 빈 섬에 일본인들이 먼저 들어가서 살았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정황 상 오키의 어민들은 어족자원이 고갈되어 독도 인근에서 조업을 했을 따름이지만 이들은 과거의 자신들의 행적을 근거로 지속적으로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주장합니다.

막부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성립했던 여러 왕조들과 조선으로부터 을릉도 독도 연안의 조업과 무단 상륙에 대한 경고, 그리고 일본 정치가들이 스스로 을릉도 독도 연안에서 조업을 하지 말도록 금지를 했는데도 동해에 가까운 시마네현은 100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끊임없이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오는 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 더 노골적이고 의도적으로 독도를 병합시킨 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은 저자 주강현 교수가 이전에 지은 ‘환동해 문명사(돌베게,2015)’를 추가로 읽어야 그 전체적인 맥락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가 드물게도 한국에서 ‘해양사(Maritime History)분야를 연구해 오신 분이라 책의 관점을 눈여겨 봐야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환동해 지역은 일본 열도의 북쪽 한반도 동쪽에서 러시아의 오오츠크 해에 이르는 지역으로 짐작되는데 이 지역은 일본의 강치 남획뿐만 아니라 19세기 당시 미국과 일본의 포경업자들이 고래잡이를 하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한국사람들에게 북쪽의 시베리아와 연해주, 홋가이도와 러시아의 경계지역인 사할린과 그 위쪽 캄차카 반도와 배링해협 그리고 이와 연결된 알래스카 지역은 미지의 땅입니다.

러시아 바이칼호 연안이나 알타이 산맥 부근과 몽골지역 그리고 여하를 중심으로 하는 요동지역 등에 대해서는 연구서들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그 이외 다른 북쪽 지방, 북극을 포함해서 전혀 연구가 이루어진 것 같지 않습니다.

‘경계’지역 또는 소위 주변부라고 생각되는 지역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정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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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본 역사 - 개방, 경합, 공생 - 동아시아 700년의 문명 교류사
하네다 마사시 지음, 조영헌 옮김, 고지마 쓰요시 감수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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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여명에 이르는 일본의 학자들이 3년간 공동연구 공동집필 후 나온 동아시아 해역사를 조망한 연구서입니다. 내용의 밀도와 깊이가 상당한 이 책은 13-14세기 몽골의 세계지배가 이루어진 시기, 16세기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접근하고 명을 중심으로 조공체계가 자리잡히고 ‘대왜구’가 출몰하던 16세기, 그리고 강력한 동아시아 정치세력들이 해상무역을 통제하던 18세기를 다룹니다.

모두 근대이전, 그러니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포함) 전통시대의 해역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합니다.

전통적인 역사서술 방식인 육지의 통치세력 관점의 정치사 또는 왕조사 위주의 서술이 가지는 시각에서 벗어나 동일한 사실(史實)에 대한 다른 관점(perspective)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근세사는 고려 조선과는 전혀 다른 봉건적 막번체제(幕藩體制)인데다가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각 다이묘의 세습가문 등으로 이해하기가 무척어려운 분야이기도 합니다.

일본학자들의 저술이니만큼 이 책의 주된 촛점은 동아시아의 해역교류가 일본전통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사회경제사적 측면에서 고찰합니다. 따라서 몽골의 패권시대인 13세기에 동아시아와 인도양이 더 자유로운 교류가 가능했던 이유라든지, 일본에서 몽골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시 몽골의 속국이던 고려를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가 설명됩니다.

포르투갈의 등장과 일본산 은 그리고 멕시코에서 필리핀으로 들어온 신대륙 은의 중국 유입과 더불어 명나라 가정제 (嘉靖帝) 때 일어난 ‘가정왜구(嘉靖倭寇)’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과 물품이 교역되고 혼종이 된 시기로 16세기를 특징짓습니다.

18세기는 일본의 경우 도쿠가와 막부의 이른바 ‘쇄국정책’과 청의 강력한 해상통제 정책 그리고 조선의 해상통제 정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청은 조선은 육로를 통해서만, 일본은 직접 통상하지 않은 체 류큐를 통해 교역했고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류큐는 현재 가고시마의 사스마 번주와 조공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청과도 조공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막부정권과 직접 통교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모든 외교 및 통상절차를 진행했고 부산항을 통해서만 일본과 교류했습니다.
조선의 북쪽 교역자는 평안도 의주와 함경도 회령 경흥이외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도 부산포함 총 4곳의 교역지에서만 국경이 열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는 정권권력이 해상을 통항 인적교류와 통상을 강력하게 통제했지만 물품과 지식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로 18세기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일어난 육지를 통한 사행이나 일본으로의 통신사 교류, 중국의 동남해안에서 이루어진 유럽세력과 중국의 교류, 나가사키를 통한 중국,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류, 류큐와 일본 그리고 류큐와 청의 교류, 쓰시마를 통한 조선과 일본의 교류가 이시대 해양교류의 다양성을 반증합니다.

외부세력에 대해 특히나 폐쇄적이었던 조선은 18세기의 폐쇄성을 19세기에 가서도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동진과 유럽세력 특히 영국이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아시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오는 상황을 간과해 버린 것이 20세기 들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심지어 명이 멸망하고 청에게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항복을 하였는데도 그 이후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사대부들과 그 후대 양반들이 18세기를 지나 19세기 들어서까지 만주족인 청이 중원의 지배자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명에대한 의리만 생각하는 명분론을 주장하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현실인식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 중 ‘송자’라고 칭송받는 송시열에게 조선 멸망의 책임을 지우는 건 따라서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소중화를 자처하는 문명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군사와 경제를 일으키지 않고 말그대로 쇄국책을 쓰다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던 나라가 조선이 아니었나요?
역사를 보면 동아시아에서 18세기 이래 조선처럼 강고하게 외국과의 교류에 철저하게 무감한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15세기부터 유럽세력이 동아시아에 나타났는데 조선은 오로지 명나라만 바라다 본 셈이지요.

이런 무감한 처사가 결국 19세기 말 청나라가 조선을 실제로 속국화하려는 빌미를 주게 됩니다. 조선이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이라며 표명해온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뒤이은 19세기 외척 세력들이 조선왕조 멸망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들이 청나라 사행이후 간접적으로 들어온 서양의 학문에 대해 배척하고 이를 탄압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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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1838-1842년 행한 남태평양( 피지, 사모아,하와이), 개척 이전 서부 콜롬비아 강( 오레건, 캘리포니아, 캐나다 접경지역) 및 남극대륙 탐험에 대해 한국에는 놀랄만큼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이 160여년 전 행한 남태평양/ 남극 탐험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1830년대 미국은 아직도 서부 지역, 캘리포니아와 오레건 주의 영토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 이전시기부터 대서양과 인도양 그리고 태평양 항로를 따라 항해를 해온 유럽 ( 특히 영국과 프랑스) 세력과 달리 대양 항해 혹은 탐험의 역사가 일천한 신생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남태평양/ 남극 항해를 이끈 미 해군 소속 찰스 윌키스 중위 ( Lieutenant Charles Wilkes)는 미 해군성으로부터 항해선단의 선장(Captain)으로 임명받지도 못한 상태로 전대미문의 항해를 하게 됩니다.

측량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찰스 윌키스는 4여년간의 항해동안 그 이전 서구 어느 나라에서도 측량하지 못한 피지군도와 남극 대륙을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하는 성과를 거두지만 군인으로서의 오만함과 휘하 선원들을 무자비하게 또 폭군과 같은 스타일로 지휘해 능력에 비해 그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4년간의 항해가 끝난후 그는 뉴욕에서 열린 군사법원( Court Martial)에 회부되어 그가 행한 지휘가 적절했는지 심판을 받습니다.

능력은 있으나 오만하고 고집불통인 개인적 스타일로 그는 바라던 해군제독이 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긴 항해 이후 그는 자신의 업적을 내보이기 위해 항해일지를 기반으로 공식 항해기를 집필하였고 자신이 지휘한 항해 기간 수집한 남태평양 섬에 서식하는 동식물들을 표본과 식생에 대한 도판들을 전시하는 일에 책임을 맡게 됩니다.

그의 항해에서 수집한 이 표본과 각종 기록들은 후에 워싱턴에 세워지는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품의 근간이 됩니다.
이후 미국은 서부개척시대가 열리고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멕시코와 전쟁을 하게 되어 현재와 같은 서부지역 영토를 확보하게 됩니다.


같이 동행한 과학자들도 이후 식물학, 민족지학 (ethnography), 인류학 (anthropology), 그리고 진화이론(evolutionary theory)등을 선도하는 학자들로 뚜렷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책의 제목 자체가 ‘영광의 바다(Sea of Glory)로 미국의 알려지지 않은 ‘영광스런 항해’에 대한 책이므로 한국인의 입장에서 쇼비니즘적 측면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항해를 진행한 배경과 시기에 더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시기는 미국의 아직 열강에 들지 못했던 신생 국가의 시기로 흔히 하는 시대구분으로 남북전쟁 이전시기입니다.

1853년 일본에 전함을 끌고와 강제개항시켰던 미 해군 페리제독 (Commodore Matthew Perry)도 동시대의 사람이고, 거의 동일한 시기에 영국의 찰스 다원(Charles Darwin)이 영국 군함 비글호( HMS Beagle)를 타고 갈라파고스 제도를 탐사하던 시기입니다.

1858년 다윈은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원고를 이 항해에 참여했던 과학자 아사 그레이 (Asa Gray)에게 보내기도 합니다.

이 항해를 통해 미국은 후발주자로서 유럽 열강들처럼 자연과학적 지식을 대항해를 통해 축적하기 시작했고 그 기반도 1850년대 설립된 스미스니언 박물관이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찰스 윌키스가 작성한 남태평양 및 미 대륙 서부의 측량자료와 해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일한 해도로서 사용되어 이후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영어권에서 대중적인 항해/ 모험/ 해군 관련 서적들은 그 자체로 영어권 국가들에게 과거의 영광에 대한 기록이면서 상당히 제국주의적 성향을 띄게 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내새니얼 필브릭 (Nathanial Philbrick)도 전미 도서상 (National Book Award)를 수상한 유명한 해양전문 작가입니다. 이 작가의 책들은 대부분 항해의 해양의 역사 분야로 각종 해전 및 항해 관련 서적이 많습니다만 저는 이번에 처음 이 저자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이후 읽고 싶은 이 저자의 책은 ‘In the Heart of the Sea (2000)’라는 책으로 멜빌의 마스터피스 ‘모비 딕 (Mobi-Dick)’과 관련되어 그가 영감을 받은 실화에 대한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한번 읽으려 했었지만 여건때문에 읽지 못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가졌던 패권을 가져오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남북전쟁 전후로 미국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복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기에 있어 미국이 어떻게 아시아와 태평양에 영향력을 확대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미국의 해양력 확대의 과정을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자신들의 우방으로 끌어들이고 일본의 한국 침탈을 방조하였고, 대륙세력인 러시아와 중국과 충돌하면서 20세기 패권의 향방을 결정지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미국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양의 관련 도서들이 세심한 참고도서 목록과 함께 존재합니다. 여전히 수많은 기밀 문서들이 있겠지만 일단 공식 출판된 관련 도서를 훑어보아도 상황을 복기하는데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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