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은 감상부터 써야할 것 같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광기(狂氣)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연구서였습니다. 이 책에 나온 특히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라는 황도주의 언론인이자 정치가는 솔직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노골적인 일본 황실우선주의자이자 전제정치주의자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선동했던 호전적인 인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현재 일본에서 매이지, 다이쇼, 쇼와시대를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일제의 식민사학을 비판하기 위해 출간된 이책은 시리즈의 첫번째로 이미 두번째 권은 소개한적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식민주의 ( 사회평론 아카데미,2022)

두번째 책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찿기 위한 일제 관변사학자들의 유물발굴과 박물관에서의 유물전시, 의도적으로 궁궐의 전각을 박물관으로 사용하면서 궁궐을 훼손한 사례들을 설명했다면, 첫번째 권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라는 막말 사상가의 ‘주변국 선점론’이 어떻게 ‘동양사’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도쿠토미 소호의 ‘황도 파시즘’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줍니다.

요시다 쇼인이라는 일본 막말의 인물을 처음 인지한 건 얼마전 유세도중 피격되어 사망한 전 일본총리 아베신조(安倍晋三)관련 외신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일본의 극우상향 정치가는 공공연히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고, 그 이후 여러 정보를 접하면서 그가 한국에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스승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어베신조의 선조들의 고향은 야마구치현(山口県)으로 막말의 조슈번(長州藩)입니다. 이곳은 메이지 시대 국가주의적 일제의 통치체제를 완성한 호전적인 군국주의자들의 고향인 곳입니다.

아베 전총리가 일본 재무장에 열을 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요시다 쇼인이 주장한 ‘주변국 선점론’이란 간단히 말해 서구 제국주의 열강보다 먼저 일본의 주변국 즉, 중국과 일본 그리고 여러 아시아 지역을 선점해 일본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냥 봐도 침략주의 (侵略主義) 주장입니다.

그를 존경하던 메이지 시대 군국주의자들이나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인물 상당수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건 그래서 매우 일관적입니다.

다음은 동양(東洋)이라는 지명의 유래입니다. 지금은 너무나 일반적으로 사용해 별다른 함의(含意)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매우 충격을 받은 말이 바로 이 ‘동양’이라는 용어입니다.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라는 일본의 학자는 1890년 메이지일본이 ‘교육칙어 (教育勅語)’를 발표해 천황제에 기초한 교육방침을 공고히 한 후 천황을 신격화하고 군국주의를 강화하기 시작한 가운데 당시 본방사(本邦史), 지나사 (支那史), 외국사 (外國史)로 편제되어있던 역사교과를 지금처럼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로 편제를 한 것으로 그의 제안이 문부성에 받아들여서 생긴 변화입니다.

나카 미치요가 정립한 ‘동양’이라는 용어는 쉽게 말해 일본의 천황이 통치하는 지리적 영역을 모두 포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의 중원인 화북지방 뿐만 아니라 만주 몽골 그리고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모든 지리적 공간에 대한 역사를 모두 동양사에 집어 넣었습니다. 1890년대 나카 미치요가 제안한 동양사의 지리적 범위는 놀랍게도 제국일본이 1945년까지 침략을 진행했던 모든 지역과 일치합니다.

제국 일본은 치밀한 계획하에 조직적으로 아시아를 침탈한 것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동양사와 관련해 또 하나 경악할만한 사안은 통념과 달리 조선의 역사가 동양사가 아닌 일본사애 편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제국 일본은 교육칙어를 반포한 이후 조선을 이미 사실상 일본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고 교과서에 그 내용을 실었습니다. 당시는 청일전쟁을 하고 있었고 러일전쟁을 하기 이전입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신라 정벌을 사실로 받아들여 조선은 이미 고대에 일본에 복속된 땅으로 조선은 일본의
복속에 이탈해 잘못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침탈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일본의 ‘침략성’을 이 주장보다 더 명확히 드러낸 경유는 아나 없는 것 같습니다.

즉 제국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서양으로부터 최신 군사기술과 무기를 받아들이고 선진문물을 배운 이유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목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일본은 민주주의와 인권사상을 받아들였지만 천황제 파시즘 이러는 국가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 민주주의를 벌이고 군국주의로 나간 국가입니다.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해 당시 제국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의 이익이 걸린 당시 독일의 조차지가 있던 산동반도의 칭타오를 공격하고 독일의 식민지였던 남양군도를 점령합니다.

중국 중원 진출을 추진하던 군부 세력은 랴오둥 반도로 출병해 끝내 만주사변 (満州事変,1931)을 일으키고 중일전쟁(中日戦争,1937)을 일으킵니다.

앞에서 언급한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는 광신적으로 황도(皇道)파시즘 이데올로그로서 결국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은 모두 몸과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군국주의적이고 전제주의적 파시즘의 극단을 주장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일본이 아시아를 넘어 서양까지도 진출할 수 있다고 독려한 그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Pearl Harbor)를 공격하고, 말레이 반도의 싱가폴(Singapore)을 공격해 영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광기가 메이지 시대부터 지속되어 결국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과 이를 준동하고 사실상 독전(督戰)울 위한 글을 발표한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에 대해 한국인들이 잘 모른다는 건 사실 충격입니다. 그는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이후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을 도와 조선의 언론계 전체를 감독하며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를 확립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과거의 일제시대를 설명하고 있지만 2023년 현재 일본이 메이지 시대보다 한치라도 변한게 있는지 의문입니다.

서두에서 말했듯 아베신조 전 총리를 비롯한 제2차세계대전 전범(war criminal; 戰犯)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정치를 하는 나라가 일본이고, 이 책에서 보았듯이 애초 민주주의라는 대의 정치제도가 발붙일 역사적 토양이 없는 나라입니다.

호전성은 바뀌지 않았고, 미국과 중국의 대립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틈을 타 다시 재무장을 하려고 합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당시 패전국이었고 미국도 일본과의 전투에서 인명 피해를 많이 입어 일본을 무장해제 시키고 동아시아를 봉쇄하기 위해 주일미군의 주둔시켰지만 상황이 바뀌어 미국은 일본을 재무장시켜 위협이 되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은 과거에 아직도 얽매어 있는 오래된(archaic)전제 왕국일 뿐입니다.

끝으로 책의 저자이신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의 다른 저작을 소개합니다. 아마 대한제국기 고종의 통치에 대해 거의 최초로 긍정적 시각으로 집필된 연구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2000)

일본 편향적인 학자들이 무능한 군주라고 설명해온 고종의 통치를 긍정적인 시각에서 재조명한 것으로 오래전에 출간되었지만 이책과 정반대의 시각을 볼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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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의 논픽션 작가 에릭 라슨 (Erik Larson)이 쓴 책으로 저로서는 두번째 작가의 책을 보았습니다.

첫책이 작가의 출세작 ‘The Devil in the White City (Vintage,2003)’로 20세기 초 미국 시카고에서 열렸던 박람회를 배경으로 활약했던 연쇄살인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다분히 미국적이고 호러소설을 보는 듯한 글이었습니다.

우연하게 보게 된 작가의 최신작인 이 책은 나치 독일의 영국 대공습에 대한 이야기로 촛점은 공습 당시 영국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그의 가족, 그의 개인비서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시 전쟁을 지휘하는 영국 수상의 이야기이지만 정치적 측면과 더불어 영국 수상이 일을 하는 다우닝가 10번지( 10 Downing Street)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엿보는 형식으로 글이 전개됩니다.

작가도 언급했듯 이 책은 유명한 영국 수상 처칠의 한 일면만큼 보여준 것일 뿐이기에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수많은 그의 전기(biography)나 그가 직접 쓴 책을 보는 수 밖에 없겠죠.

저는 Wiilam Collins에서 나온 영국판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이미 한국어 번역본도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폭격기의 달이 뜨면 (생각의 힘,2021)

개인적으로 한국어판의 제목은 글의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영국 대공습 당시 나치 독일 공군(Luftwaffe)는 야간공습을 실시했고, 달이 환하게 뜬 밤이 공습의 최적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책에 관해 간략하게 정리를 아래와 같이 해 보았습니다.

첫째, 이 책이 다루는 기간은 1940-1941년 약 2년간으로 처칠의 수상재임 초기에 해당됩니다.

나치 독일은 처칠이 수상이 될 무렵 이미 프랑스를 함락시키고, 프랑스는 독일에게 항복(Surrender)했으며, 나치 독일에 협력적인 비시 프랑스(Vichy France)가 들어선 시기였습니다.

프랑스의 항복이후 나치는 영국 본토에 대한 대대적 공습을 시작합니다.

이미 이 공습 이전 영국군들은 던케르트(Dunkirk)에서 대대적인 철수를 했습니다. 2017년 개봉한 영국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동명 영화도 이 철수 작전을 영화로 만든 것이죠.

처칠의 경우 영국의 해군장관(First Lord of Admiralty)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고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이었던 오스만 터키를 공격해 갈리폴리(Gallipoli)전투를 벌였는데,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 다르다넬스 (Dardanelles )해전에서 패배하고 퇴각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처칠 개인으로서도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결전을 치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한국오판 책 제목이 보여주듯이, 나치의 공습은 야간에 진행되었고, 특히 보름달이 뜬 환한 밤이 공중 폭격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독일이 야간에 공격목표를 타격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이 확보된 반면 영국공군 (Royal Air Force aka RAF)은 야간 작전수행이 붕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책의 다른 한 이야기는 영국이 독일의 야간공습을 기술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셋째, 1940-1941년 초까지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특유의 고립주의(isolationism)외교정책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은 전쟁 초 유럽의 전쟁터에 미군을 보낼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처칠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는 한 유럽 전장 (European Theater)에서 나치 독일에 이길 방법이 없다고 보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Franklin D Roosevelt)를 설득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지난하게 진행합니다.

결국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던 일제가 진주만(Pearl Harbor)를 공격하면서 미국도 참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은 독일의 영국대공습을 미국의 참전 없이 막아냅니다.
책 484쪽에 영국이 나치 공습으로 입은 인명 피해 상황이 나옵니다. 총 44,562명이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고, 그 중 5,626명은 어린이였습니다.

영국은 런던이 폭격 당하면 , 베를린을 폭격하는 식으로 나치 독일에 정면으로 대항합니다. 하지만 전쟁은 결국 보급 싸움이고 영국은 끊임없이 미국에 보급과 식량 지원 요청을 합니다.

넷째, 이 책은 철저히 영미권 주류의 시각에서 저술된 책입니다. 책을 보면 아시겠지만 특히 영국의 수상 처칠은 대영제국( British Empire)이라는 말로 영국을 지칭할 만큼 숨길 수 없는 제국주의자적 면모를 보입니다. 따라서 처칠의 입장에서 그리고 대영제국 입장에서 그 수도인 런던이 폭격 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던 영국이고 처칠 자신이 해군장관 출신이기 때문에 그는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한 이후 프랑스 해군의 군함이 독일 수중에 들어가는 걸 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칠은 북아프리카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에 전함을 보내 영국에 프랑스 군함을 맡기도록 하던지 아니면 프랑스 전함을 침몰시키도록 명령합니다. 프랑스 군함은 결국 영국 전함의 함포사격으로 침몰됩니다.

처칠 자신이 제2차세계대전 종전을 위한 협상인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와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그가 제국주의자라는 평가가 생경해 보일 수 있으나 그는 분명 대영제국의 이익을 위해 제국주의적 힘을 휘두르던 영국의 거물정치인임이 분명합니다.

그가 영국의 귀족출신이었고 단 한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적이 없다는 발언은 다른 아닌 그의 부인 클레멘타인(Clementine Churchill)에서 나왔습니다.

흥미로운 정치가인 건 분명하고 그에 대한 전기가 영어권에 엄청나게 출간되는 것도 그런 연유라고 추정합니다.

다섯째, 저자의 저술동기가 흥미롭습니다. 저자가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뒤 뉴요커들이 2002년 9/11테러 이후 겪은 그들의 경험을 그 이전에 느까지 못했고 그래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로부터 공습을 받은 영국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가 궁금해서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어권 사람들의 한계이기 때문에 결국 찿는 다른 사례가 영국의 경우이고 이건 미국이 진주만 공습이후 최초로 본토공격을 받은 사례가 9/11테러라고 느끼기 때문일 겁니다.

이들은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서울 용산에 얼마나 많은 폭탄들이 투하했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미 추정컨테 그들에게 ‘잊혀진 전쟁 (the forgotten war)’인 한국 전쟁은 관심사항이 아닐겁니다.

한국 독자가 어떻게 느끼던, 일단 서론에서 밝힌 저자의 집필동기는 대부분의 미국 지식인 혹은 주류에 속하는 미국인들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권 이외의 새계에 대부분 관심이 없고 따라서 매우 적은 수의 미국인과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중국 등에 관심을 가진다고 추정합니다.

끝으로 책의 분량에 대한 것입니다.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본문이 총 10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국의 여타 장르 소설들처럼 아주 짤막한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총 507쪽이니까 분량은 상당한 편이지만 내용이 재미있어 잘 읽히는 편입니다. 상당한 영국영어가 포함된 건 당연합니다.

마지막에 저자는 특히 어떤 책들과 아카이브가 특히 유용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처칠의 개인비서가 쓴 회고록이 특히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애서 전시에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는지 살펴보는데 유용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영국수상 처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영국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이면의 이야기이기도하며 명 연설가 (orator)로 유명한 처칠이 행한 연설과 미국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물자와 병력 파견에 대한 외교비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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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주류경제학자의 저서라 사실 저자에 대한 설명은 불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단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주류 경제학자이시고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학애서 연구를 하시는 분입니다.

조셉 스티그리츠라는 분의 책을 처음 접한 건 대학시절 재정학(Economics of the Public Sector)강의를 들었는데 그 당시 재정학 교재의 저자였습니다.

그 이후 세계화가 한창 유행일 때 세계화에 대한 비판서인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WW Norton,2008)’을 읽었을 때입니다.
주류 경제학자인데도 비판적이고 상식적인 분이라는 인상을 이 책을 읽고 받았습니다.

그 이후 이 책이 세번째로 읽은 책입니다.

저자에 대해 좀 더 부연설명을 하면 주류 경제학자(mainstream economist)에 한명으로 손꼽히는 분이고 MIT에서 현재 수리경제학을 정립시킨 사무엘슨(Paul Samuelson)에게 배운 분이지만 경제학 이론의 한계와 함께 경제학이 수를 다루는 학문이 아닌 사람과 사회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입장에서 비판을 서슴지 않습니다.

정보의 비대칭성 (the asymmetry of information )을 연구한 대표적인 분이시기도 하고 실제 이 내용이 이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the Great Recession)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종언을 고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 책의 배경이 됩니다.

즉, 시장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시장을 그대로 놔두면 시장이 스스로 조정이 되어 균형점 (equilibrium)을 찿아간다는 시장주의 경제학은 실제 시장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시장주의자들이 1980년대 미국의 경우 레이건 행정부때부터 시작하여 시장의 규제완화(deregulation)을 진행하고 감세(tax cut)을 단행하여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켜(small government) 정부가 지출하는 공적 투자(public investment)를 축소시켜 미국의 경우 각 주립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 기관에서 저소득층과 중산층 가정 자녀들의 수학기회가 줄어들고 졸업해서도 등록금에 대한 부채로 앞날의 전망이 예전보다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 월가에서 2008년 금융위기를 몰고 온 주범들인 대형은행의 CEO들은 자신들의 은행이 무리한 투기로 파산위기에 몰려도 미 정부와 FED를 통해 공적자금을 투여받았는데도 책임을 지고 해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적자금의 상당액을 보너스로 챙겼다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은행가들은 자신들의 단기업적주의와 탐욕스런 파생상품 투기(speculation)에도 자신들 은행의 덩치때문에 당국이 파산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Too Big To Fail) 이렇게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큰 은행은 파산상태가 되면 정부 당국에 자신들의 파산이 경제에 미칠 영향, 얼마나 많은 인원을 해고해야 하는지를 정부 당국에 설명( 사실상 위협)하며 공적 자금을 요청하고 다음 경제위기가 닥쳐도 그 행동패턴을 바꾸지 않습니다.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bail out)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moral hazard 상태이죠.

책의 모든 내용을 모두 요약할 순 없고 저자가 가장 한탄했던 첫 마디는 이전에 ‘기회의 나라(the country of opportunity)’였던 미국은 더이상 기회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자수성가해서 성공이 가능한 나라 미국은 이제 없다는 겁니다. 1대99의 불평등이 만연해서 계층의 상향이동이 불가능해졌다고 진단합니다.

책이 2013년 출판되었어도 그리고 지난 3년간의 코로나 팬데믹 (COVID Pandemic)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해도 현재 경제상황은 사실 이 책에서 진단하는 경제상황을 그 기반(base)로 합니다.

사실 이 책이 미국경제 상황을 마국경제학자가 2013년 기준 진단한 것이고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를 경제적 이론적으로 진단한 것으로 현재와 다른 상황은 아래의 몇가지입니다.

첫째,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정책으로 저금리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으로 현재의 고금리 상황과는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현재 분석가들은 코로나 이전 양적완화시기를 포함하여 지난 30여년간을 특이하게도 금리가 매우 낮았던 시기로 진단하기도 합니다.

두번째, 미국의 부동산 버블의 꺼져서 생긴 2008년 금융위기는 월가의 탐욕이 드러난 것과 함께 수많은 마국인들이 집을 잃고 직장을 잃어 실업상태가 지속되던 상황이었습니다. 즉 기업이 물건을 생산해도 돈이 없는 국민들이 살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수요 (demand)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저자가 정부의 재정지출(fiscal policy)을 강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2023년 현재는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미국과 서구가 중국 러시아 등과 진영대결을 시작했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글로벌 공급사슬 (global supply chain)이 끊어지면서 특히 반도체를 중심으로 하는 전략적 품목에 대한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서구와 러시아의 대결구도를 더 공고하게 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앤데믹으로 전환된 초기에는 공급쪽 제약으로 경제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경제적 요소 뿐만 아니라 정치적 가치적 요소마저 중요하게 되고 수요쪽 공급제약에 따른 물가인상과 인플레이션을 미 FED가 금리인상으로 대응해 급속히 수요마저 식기 시작했습니다.

21새기 첫 20년은 지속되는 경제위기와 격변으로 20세기 첫 20년 못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미에 나온 정책제안이 학자의 제안이라 이상적이라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제언입니다.

끝으로 이 책은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불평등의 댓가 (열린책들,2020)

끝으로 통화주의자(monetarist)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첨부합니다.

저자는 시장이 스스로 작동한다는 프리드먼의 자유시장주의가 사실상 그 시효를 다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즉 2008년 금융위기 (the Great Recession)로 인해 프리드먼의 자유시장주의는 사실상 부정(discredit)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저자는 1930년대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 시장의 실패 (market externality)로 본 반면 프리드먼은 이를 정부의 실패( government externality)로 보았다는 상반된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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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강원대 장경호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입니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1896.2-1897.2)만큼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고종은 재위시 경운궁에 기거하면서 경운궁 주위의 외국 공관 특히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많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힘없는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때로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때로는 본인의 신변 안전을 위해 외국 공사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사실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과는 1871년 발발한 신미양요( 辛未洋擾)를 통해 적대적인 관계로 처음 접했고, 그 이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가 1866년 대동강에서 평양군민에게 불탄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쇄국정책 시기 조선은 미국을 양이(攘夷)로 인식하고 결코 미국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청의 주일 참사관이었던 황준헌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전한후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영토확장 야심을 보인다고 본 청의 외교관은 먼 곳에 있는 미국은 아시아에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보았으며 중립적이고 평화적인 나라로 보았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과 구미국가 최초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을 체결합니다.

1880년대까지 러시아의 동진과 러시아의 연해주 식민지 추진은 청에게도 일본에게도 안보 상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해양세력인 신흥국 미국과 연대해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공사관이 설치된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처음엔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으나 점차 친일로 기울게 됩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진주하게 되고 심지어 일본군은 경복궁에 군사를 둘러싸고 사실상 고종을 경복궁에 가두어 버린 일이 발생합니다 ( 경복궁 점령사건,1894).

청과의 텐진조약에 따라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러 온 청군과 함께 조선땅에 온 일본군은 무단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무력시위를 하며 침략을 본격화합니다.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대해서는 단독 저서가 있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푸른역사,2002)

아무튼 일본의 무력시위에 위협을 느낀 고종의 신하들은 고동을 경복궁에서 피신시키기 위해 춘생문 사건(1895)을 일으켰지만 탈출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이 미국공사관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주장은 사실 직접적 정황이나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후 일어난 아관파천의 전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도피 이후 친일내각을 구성했던 김홍집이 군중에 살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고 친러파와 친미파가 득세하게 됩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불행하게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아관파천 이후에도 특히 미국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지속하고 조선의 중립화 방안에 대해 미국의 거중조정(居中調停)을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위 제 1조인 미국의 거중조정 조항을 고종은 진심으로 대하고 낙관적으로 해석한 것이었으나 미국은 단지 의례적 조항으로 보았습니다.

1898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 isolationism)에서 벗어나 점차 아시아의 이권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미 아관파천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조선이 들어가게 된 것을 안 미국은 조선이 중립화를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자 이를 반대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일본과 더 밀착하게 됩니다.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1890년대 당시 모두 조선에서의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이후 더욱더 일본과 밀착되었고 사실상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게 되고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의 이권이 개입된 중국을 전쟁터로 하지 않기로 일본과 외교적 합의를 하는 치밀한 전략을 추진합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권은 중국에서 더 크고 조선은 크지 않아 조선 땅이 전쟁터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인종주의자로 알려진 대통령으로 조선은 미개하고 일본은 선진적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하등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제국주의적 대통령이었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의 종전을 위해 포츠머츠 회담을 주선하고 협정을 추진하여 철저한 친일로 일관했습니다.

고종이 미국을 너무 선의(善意)로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 결국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고종 당시 조선에 와 있던 미국인들은 모두 이 미지의 나라에서 철저히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은 특히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하고 청국에서의 이권을 담보하기 위해 평안도의 의주와 용암포의 개항을 요구하였고, 러일전쟁 와중에 고종은 이를 허가합니다. 평안도에는 미국이 운영하는 운산 광산을 비롯해 많은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미 19세기 말부터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고종이 미국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이용해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인들의 이런 성향은 기본적으로 2023년 현재도 변함이 없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특히 구한말의 중요한 친한인사로 구분되어 온 미국 선교사이자 외교관 알렌 ( Horace Allen)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애서 나온 인용으로 봐서 그는 철저하게 미국 국무부의 지침을 따르는 미국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외교관일 뿐입니다. 결코 친한인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 한국의 직업 외교관들이 국가이익에 철두철미하게 봉사하는 이 미국 외교관의 모습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현재 한국 외교관들이 정말 국익을 위하는 건지 의심이 됩니다. 대통령부터 국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을 두둔하고 있어 이해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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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좋은 근대외교사 관련서를 읽었습니다. 재미역사학자이신 故 김기혁(1924-2003)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신 김범선생께서 옮겨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427쪽에 달하는 이 책은 원래 영문으로 쓰여져 1975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 캠퍼스( University of California,Davis)에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하고 1979년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된 책을 다시 한글로 옮긴 것입니다.

아무래도 박사학위 논문이다보니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지 전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와 고종의 전기 치세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외부적으로 청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침탈을 받기 시작한 시기이고 러시아가 동진(東進)을 계속해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만들고 청과 재정 러시아의 국경분쟁이 지속되고, 러시아의 연해주 영향력 행사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항이 만들어지던 시기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고 서양식 정치 경제개혁을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서양의 국제관계인 조약체제를 받아들입니다.

일본은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인 중국을 우위에 두는 조공(朝貢)체제에 도전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사할린 관련 협상을 진행하고 타이완을 침공합니다.

일본이 중국의 전통적 질서에 도전한 또 한 예는 메이지 일본이 류큐(琉球)왕국을 일본에 합병한 것입니다 이 섬나라는 중국과 반조공 관계에 있었고 메이지 이전 사쓰마(薩摩)번에 복속되었지만 일본이 중앙집권 정치체제를 구축한 후 합병해 버린 겁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많이 강조되지 않지만 메이지 일본은 이미 1910년 조선을 병합하기 이전 류큐와 에조치(蝦夷地, 형 홋카이도)를 병합하고 타이완에 부대를 보내 침공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일본은 청과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1871)을 맺어 전통적인 조공관계가 아닌 조약관계로 청과의 국제관계를 다시 시작하며 청과 대등한 위치에 섰으며, 이후 전함을 이끌고 조선에 나타나 문호개방을 요구합니다.

조약의 관점에서 이 책의 중심은 그래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1875)입니다.

미국의 페리제독의 통상요구로 개항해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던 일본은 그들이 서양 당했던 그대로 조선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고 그들이 서양에서 배운 그대로 전함을 끌고 나타나 무력시위를 합니다.

대원군 집권기는 이 보수 정치가의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독자에게 주는데 이는 조선왕조의 말기 상황을 알아야 이해가 되는 정책입니다. 대원군은 19세기를 온통 지배했던 외척의 세도정치( 勢道政治)에 염증을 느낀 인물로 양반의 과도한 힘이 욍권을 짓누르는 걸 졸 수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양반들의 근거지인 사원을 철폐하고 양반들의 특권을 불리는 정책을 편 이유고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중건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철저하고 보수적인 왕족으로 유교주의자인 대원군은 18세기부터 조선에 들어온 서학(西學)과 천주교를 이단시했고 조선의 전통을 망친다고 생각한 인물입니다. 외교에서 중국과의 전통적 조공책봉관계를 중시한 대원군과 유교세력들은 따라서 조선이 개항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고종은 생각아 달랐고 청의 이홍장(李鴻章)의 조언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확장을 경계하며 사실상 그가 주도한 협상에 따라 미국 영국 독일 등 서구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해 외세의 조선침탈을 막기 위한 외교적 장안을 마련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가지 주목할 사안이 있습니다.

첫째, 일본과 관련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본의 공사관이 부산의 왜관이 아닌 한성과 인천에 새워졌다는 건 일본의 조선 침탈에 큰 의미를 지나는 사실입니다.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일본의 모든 외교업무는 부산에서 이뤄졌고 조선은 일본 외교관의 한성 주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부산만이 일본과의 유일한 교류 창구였습니다.

하지만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을 계기로 일어난 대원군의 정권 찬탈시도와 청군과 일본군의 조선 상륙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을 협박하다시피 하며 한성에 일본공사관을 설치하고 부산이외 원산과 인천을 개항시킵니다.

전통적으로 쓰시마(對馬)가 부산의 동래부사를 상대로 진행된 일본 막부와 조선의 통상관계는 구한말에 이르러 조선 중앙정부와 메이지일본과의 조약관계로 바귀었고 청과의 조공관계의 의미가 퇴색했습니다. 일본은 수백년동안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한성과 인천 그리고 원산에 접근하게 되며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두번째는 이홍장이 추진한 조선과 미국 영국 독일과의 수교조약 조인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국제관계에 무지한 조선의 관리들은 사실상 이홍장의 조언에 따라 구미각국과 수교를 진행했고 조미수호조약의 경우 초안까지 이홍장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태 단 책에서 보지 못한 내용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이홍장과 조선 그리고 미국을 중재한 어윤중과 김윤식들 초기 개화파의 역할은 너무나 수동적이었습니다.

청은 조공체제하의 종주국으로서 여태까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깨고 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해 조선의 개항을 위한 조약을 구미각국과 체결한 것입니다.

아무리 명목상의 사대이고 중국을 상국으로 받들어도 조선은 자체적으로 통치될 수 있다고 한들, 결국 조선은 구한말 힘이 없어 청의 내정간섭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사대부가 중국을 섬기고 일을 안하고 힘을 기르지 않아 생긴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19세기 조선을 주무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일가 등의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명가가 아니고 조선의 멸망에 일조한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축재를 하기 위해 군대를 기르지 않고 서학신자라는 이유로 반대파인 남인의 싹을 잘라버린 결과의 여파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추측컨데, 한국사학계에서 변방에 속하시는 해외의 연구자의 글이기 때문에 40여년이 지나도록 한국어 출판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직장생활하시다가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신 것도 그렇고 전형적인 역사학자로 사신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거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배운 내용과 비교해보면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있어 낯설었습니다. 무척 밀도가 있는 내용이어서 구한말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가 없으면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김범 선생이 옮긴 또 다른 재미 역사학자의 책을 소개합니다.

조선 변방과 반란,1812년 홍경래 난(푸른역사,2020)

저자인 김선주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옮긴 책입니다. 조선 양반들의 서북지역( 평안도지역) 차별로 왜 그 지역 지배층이 중앙에 반란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북 지역은 청으로 가는 연행사가 지나는 길목이고 오랜세월 조선의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외세의 영향도 많이 받아 한국의 기독교 중심세력들이 원래 처음 자리잡았던 곳이도 합니다.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라 해방이후 한국의 주류세력에게도 그리고 지식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지역입니다. 단순히 북한의 수도가 있는 북한의 중심지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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