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의 전두환 평가를 읽으면서 5공 당시 일을  알아보려고 그 무렵 나온 책이나 정기 간행물을 뒤적이고 있는데 1985년 전후로 나온 한국 현대사 관련 책이나 정기간행물 특집에서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우리는 지난 30~40년전의 일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그 당시 30~40년 전이면 해방 무렵에서 한국전쟁인데,그렇다면 20년이 더 지난 지금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제 3공화국 말에서 유신 초기까지입니다.3선 개헌에서 유신,긴급조치 시대.그렇지만 역시 대답은 똑같습니다.이러저러하다고 말은 많이 하고 뭔가 들은 풍월은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제대로 공부하거나 아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무렵 특히 굵직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은 역시 유신 선포입니다.1972년 10월 17일.아무도 모르게 진행된 극비작전.국정감사를 진행 중이던 국회의원은 이 날 난 데 없는 계엄선포와 대통령 특별 담화를 듣고 국회가 해산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3선 개헌에서 시작된 장기집권의 막바지 결정타.최근 이 당시의 사건에 대한 회고록이나 인터뷰 등을 대충 훑어보고 있는데 역시 공부는 직접 이런 사료들을 정독하면서 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워낙 이 시대에 대해서 들은 풍월이 많아서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을 뿐 무슨 사건 하나  제대로 말할 수 있는 배경지식이 별로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지요.

  특히 유신 시대라고 하면 유신의 철권 통치와 이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이라는 도식을 우선 설정해 놓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시 권력층 내부의 투쟁에 대해서는 그냥 간과하기 마련이지만 이 문제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지요.특히 김종필과 반 김종필 파의 암투가 절정에 달한 1971년의 4인방 몰락 이후 김종필 세력과 이후락 세력간의 알력은 유신을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암호입니다.왜 김종필은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유신 선포 직후 모 기관에 끌려간 13명의 국회의원 중 가장 오랫동안 구타와 고문을 당했던 최형우.그는 1972년 8월 임시국회 때 김종필 측근으로부터 드골 식 장기집권 계획이 권력내부에서 추진 중이라는 것을 폭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대 정부 질의에서 실제로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이걸 질문합니다. 이 당시 정부에서는 비밀리에 대만 총통제와 드골 대통령제,스페인 프랑코 등을 연구하는 팀이 있었고 갈봉근,한태연 두 교수가 브레인으로 이 팀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아마 최형우의 이 질의를 듣고 유신을 추진 중이던 핵심들은 가슴이 덜컥 했을 것입니다.그래서인지 고문하던 이들은 그 정보를 누구한테서 들었느냐고 엄청나게 괴롭혔구요. 

  김종필은 3선 개헌 때도 반대하다가 나중엔 대세를 따르겠다는 듯이 순응합니다.유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박정희는 3선 개헌 지지를 호소하면서 이번이 마지막이고 이제 후계자를 기르겠다고 합니다.그 후계자가 바로 나라고 생각한 김종필.그러나 장기 집권이 시작되면 대권의 꿈은 물 건너 가버리기 때문에 유신에 대해 상당히 저항했다고 합니다.하지만 역시 유신이 기정사실화 되니까,나라를 위해서 어른(김종필은 늘 박정희를 어른이라고 합니다)에게 좀 더 기회를 드리자...하고 순순히 물러나지요.그래서 당시 공화당 의원 중  끝까지 3선 개헌 반대를 고수하며 아예 공화당을 탈당한 소수 중 한 명인 예춘호는  "박정희는 김종필을 불신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권력게임의 미묘함을 알 수 있는 사연이지요. 

  이 시기 관료들에 대해서는  그 동안 경제관료 위주로 공부했습니니다만 역시 이데올로기를 맡은 교육관료들에 대해서도 알아보려고 합니다.특히 유신이념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두 명의 문교장관 유기춘과 황산덕.유씨는 유신이념의 반대자는 대학에 있을 필요가 없다며 학생운동과 이른바 정치교수들에 대해서 가차없는 칼날을 휘둘렀습니다.그가 장관으로 일하던 때에 학도호국단이 고교 이상의 모든 학교에 구성되었지요.너무나 열심히 일했는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그 후임이 황산덕.그 역시 유신만이 살 길이라는 교육지표에 충실했습니다.유기춘이 열렬하고 활동적인 성격이었음에 반해 황산덕은 성격이 말이 없고 점잖아서 보살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하지만 그가 법무장관 재직 시절엔 그 악명높은 인혁당 재건위-민청학련 사건이 있었고 사형선고 한 날 교수형이 집행되는 세계사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그리고 사상범이 형기를 마쳤더라도 다시 투옥할 수 있는 사회 안전법의 제정에도 참여했지요. 

 모두가 아는 체하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하는 말이 있지만 유신 전후의 역사에 대한 우리들 역시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박정희는 60년대 초기만 해도 다른 사람을 불러 놓고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지만 점점 자신이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지다가 유신 이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주장만 계속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점점 독불장군이 된 것이지요. 

  유신을 정당화한 지식인들에 대해서 알아보면 그들 중엔 박정희 초기에 비판적인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좀 전에 언급한 황산덕이 대표적입니다.그는 군정을 비판하다가 62년에 투옥되기도 했고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여 대학에서 파면되기도 했습니다.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니 유신 당시 악명 높은 시국사건 때 유신옹호의 선두주자로 변신하더군요.우연히 당시 자신의 행위를 해명하는 글도 입수했는데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국가에 봉사했다고 주장했구요.1990년대 중반 재야 민주화 세력들이 대거 민자당에 입당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자유당을 비판하다가 공화당에 참여한다거나,공화당 초기에 비판하다가 유신 무렵엔 옹호자가 된다거나,박정희 땐 반정부 투쟁하다 5공 때는 민정당 의원이 된 이들도 꽤 많습니다.<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좌익서적이라고 욕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 책에 실린 논문의 저자인 김학준도 5공 때 국회의원이 되더니 노태우 정부 땐 청와대 대변인까지 하지 않았습니까.그 책에 논문이 실린지 2년이 되지 않아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이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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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3-1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기존에 세워진 틀에 의해서만 본다면 못보고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 많겠군요.
사실 저도 조금만 까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제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3-14 16:29   좋아요 0 | URL
현대사는 저널리즘의 영역이지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은 외국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그대신 학문적인 손질을 거치지 않는 날 것 그래로의 자료가 많지요.고정관념을 치우고 검토한다면 얻을 것이 많을 것 같아요.

[해이] 2009-03-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승연입죠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09-03-15 14:23   좋아요 0 | URL
그러면 그렇죠.

Mephistopheles 2009-03-16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의 이번 페이퍼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체제를 갈아타고 일명 변질자가 된 사람들이 과거에나 현재에나 많기도 많다는 사실이네요. 전 이런 생각도 합니다. 체제를 갈아타고 변절자의 딱지가 붙어도 정작 자신만은 바른 선택을 했다고 줄곧 주장하는 모습. 이거 아무리 좋게 봐도 자기최면으로 밖에 안보여요. 우리나라에만 유독 이런 인물들이 많은 걸까요. 아님 다른 나라에도 이런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지 궁금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3-17 21:58   좋아요 0 | URL
바른 선택을 했다고 주장하는 해명성 글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나라도 소신을 꺾은 이들이 많지요.일본에서도 1933년에 무더기 전향이 있었고 중국의 양계초,강유위도 복고주의자가 되었지요.

노이에자이트 2009-03-1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향에 관심이 많습니다.탈레랑은 물론이고 독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요. 제 성격이 상당히 냉정한 편이라서 여러 사례를 모으는 데 차분하게 임하고 있습니다.단지 일본에서는 대량전향에 대한 학문적인 분석이 꽤 깊은데 우리나라도 이제 그래야 할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세계 여러나라에서 비슷한 사례를 모아보려고 합니다.물론 이런 연구에는 역시 냉정한 학문적 객관성이 필요하겠지요.
함석헌이나 장준하에 대해서는 최근 사상계 인맥들에 대한 연구가 진척된 상황이라서 저도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특히 이들이 5,16초기 박정희 및 혁명주체 세력과 맺은 관계에 대해서.

2009-03-25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병주가 1991년에 쓴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서당1991)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논한 일종의 역사평론 같은 저술인데 이승만,전두환은 비교적 평가가 후하고 박정희는 굉장히 평가가 박합니다.특히 이 책에선 전두환을 옹호하는 것이 두드러집니다.꽤 긴 글이므로 주요골자가 나와 있는 부분만 발췌합니다. 번호는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1.거듭 말하거니와 그에겐 당초 정권을 잡겠다는 야심은 아예 없었다.상황의 전개 과정에서 주변의 인사들이 그런 권유를 했을지도 모르고 그의 부하 가운데선 그런 마음으로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 자신은 결단코 정권에 야심을 품고 상황을 조작하지도 않았고 사실 조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본인의 말도 그러하거니와 상황 자체를 검토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2.그는 어떤 상황에 처했어도 맡은 바 과업을 최선의 효과를 노려 최선의 방책으로 최선의 능력을 다했을 뿐이다.최선의 노력을 다함으로써 전두환 장군은 최규하 대통령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어려운 난제를 앞두고 최 대통령은 자기가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이 사람이면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전 장군을 신뢰한 까닭에 그 막중한 대업을 그에게 승계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3.전두환이 야심이 없었다면 왜 정보부장 서리까지 맡았는가.국보위의 상임위원장이 되었겠는가,하는 반문이 있겠지만 아까 말한 대로 당시의 정세 속에서 최선을 다하려니까 결과가 그렇게 되었을 것이란 대답 이외엔 할 말이 없다.또 이런 반문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3김씨를 정치의 마당에서 퇴장시킨 5,17조치는 확실히 그의 야심이 묻어 있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하고.이에 대해선 노태우 대통령이 민정당 대표위원 시절에 한 말을 대치할 수 밖에 없다.나라를 누란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한 정국과 사회정세가 정돈되길 백년하청 기다리듯 기다릴 수는 없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3김씨 또는 재야세력은 그냥 두어도 어떤 해결이 날 것인데 괜한 짓을 했다는 괘씸한 생각이 들겠지만 호전적인 북한을 옆에 둔 상태에서 국가안보를 우선하는 의식에 철저한 군인들이 그처럼 유장할 순 없는 것이다. 

 4.그리고 5,17조치는 전두환 일개인의 의사만으로 된 것이 아니다.현 대통령 노태우를 비롯하여 전체 군인의 의사가 집약된 처사이며 신중한 최규하 대통령의 의사도 보태진 결단이었다.당시 북한이 남한 땅에 뿌린 불온문서가 수천만 장에 이른다는 신문기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5,17초치가 바람직스럽다고까진 말하지 못해도 불가피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5.광주사태는 전국민이 통탄할 일이고 걱정해야 할 일이어서 어느 정권 어느 개인의 책임을 추궁해서 될 일이 아니다.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으로 해석된 오늘에 와서는 규탄될 문제가 한두가지에 끝날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진압할 당시  군 지휘관이나 병사들은 그 당시 그것이 민주화 운동이란 의식을 가졌을 까닭이 없다.과잉진압 수단을 방지하기 위해선 당국의 성의 있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란 앞으로의 경각이 요망될 뿐이다. 

   전두환 집권 직후 그의 전기인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쓴 작가 천금성은 나중에 그 당시 전기 쓴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지만 이병주는 전두환이 몰락한 이후에도 끝까지 이런 글을 남긴 것을 보면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작심하면서 글을 쓴 것 같습니다.아마 더 오래 살았더라도 이 신념은 변치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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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9-03-11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16 쿠테타때 전두환 전대통령이 육사생도 쿠테타 찬성 행진을 주도한 것을 알고 있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3-11 21:51   좋아요 0 | URL
5,16초창기에는 사상계 인맥 상당수가 박정희를 지지했습니다.함석헌이나 장준하까지도요.리영희,임헌영 대화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지요 .전두환이 행진 주도한 것도 사실입니다.이 당시 우리나라 정치지형은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비로그인 2009-03-1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식으로 하자면 히틀러에게도 당시 정권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겠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3-11 21:52   좋아요 0 | URL
박정희의 매카시즘을 그렇게도 비판하는 사람이 전두환에겐 지나치게 관대합니다.

바람돌이 2009-03-1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두환이 직접 쓰도 저것보단 못쓰겠네요. 개인의 신념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부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노이에자이트 2009-03-12 22:41   좋아요 0 | URL
백담사 가기 전에 전두환이 발표한 글도 이병주가 써줬습니다.

2009-03-11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2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9-03-1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사태는 전국민이 통탄할 일이고 걱정해야 할 일이어서 어느 정권 어느 개인의 책임을 추궁해서 될 일이 아니다." 창의적인데요! -_-

노이에자이트 2009-03-12 22:42   좋아요 0 | URL
진정으로 통탄해야 한다는 느낌보다는 논점 흐리기의 전형적인 사례지요.
 

  저는 국내외 원로들의 회고담 종류를 즐겨 읽습니다.특히 그들의  인간관계를 알고 나면 아...이 사람과 이 사람이 이런 인연을 맺었군...하고 놀라게 될 때도 있습니다.리영희와 임헌영의 대담집 <대화>에는 소설가 이병주와 어울려 다니던 리영희의 일화가 아주 재미납니다.이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사실 리영희는 이 책에서 "이병주가 유신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바뀐 뒤 어울려 다니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병주는 상당한 재력가로 유명합니다만 그렇게 돈을 벌게 된 과정이 좀 특이하더군요.리영희에 따르면 이병주가 교편생활하던 학교에서 종을 치던 학생이 김현옥이었습니다.나중에 5,16이후 출세하여 서울 시장이 된 김현옥(원조 불도저)이 이병주를 챙겨주면서 이병주는 큰 저택도 마련하고 인심좋게 주변사람들에게 술과 요리도 내고 하면서 호기롭게 돈을 썼다고 합니다.이병주는 체격도 좋고 얼굴도 잘 생긴 데다가 씀씀이도 커서 리영희도  그 덕분에 고급 요리점이나 술집도 갑니다.이병주의 저택에 가 본 리영희는 어마어마한 그의 서재에 놀랐다고 하는데 나치관계 외국문헌을 많이 모아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고도 하네요.그의 소설에 나치에 대한 일화가 가끔 등장하기도 하는 게 그런 사연때문이기도 합니다.하지만 리영희는 이병주가 5공화국 들어 박정희 시대를 그린 정치대하소설 <그 해 5월>을 신동아에 연재한 것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최근 한길사가 이 책을 다시 내더군요.이병주 특유의 해박한 독서 경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이 소설 여기저기에 수 많은 국내외 사상가,역사적 사건이 풍부하게 버무려져 있습니다. 

  이병주가 지인들과 함께 고급 요리집이나 술집을 갔던 체험담은 이 소설에도 나와 있습니다.주인공 이사마가 바로 이병주의 분신.사마는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에서 딴 것입니다.이사마가 가는 요정을 겸한 요리집이 있는데 장사가 굉장히 잘 됩니다.이사마의 지인이 그 곳 주인인  김마담에게 장사가 번창하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데 그 대답이 참 걸작입니다.그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시대적 배경은 1965년 8월이라는 점을 감안하십시오.

  "여기 드나드는 손님은 대개 인텔리 여성과 유명 여성에게 컴플렉스 같은 걸 가지고 있는 모양이에요.여대생이나,무슨 탈렌트다,배우다,가수다 하면  사족을 못쓰거든요.그러니까 우리집  아이들은 전부 여대생이고 배우예요.물론 사실이 그럴 리는 없지요.전 학생은 받아주지 않아요.그러니까 우리집 애들 가운데 여대생은 한 명도 없어요.전부 가짜지요.그대신 교육을 시키지요.어려울 거 없어요.영리한 아이들만 골라 놓았으니까요.손님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척하구요.말을 적게 하라고 해요.가끔 영어나 프랑스어를 섞는 거예요.손님의 넥타이를 보고 '오오 트레 식'이라구 하구요,가끔 잔을 주면 수줍은 척 '메르시'라고 하는 거에요.그러면 너 불어 전공이냐고 묻게 되죠.그러면 머리를 숙이고 대답을  안하는 거에요.그런 식으로 연극을 하면 이런 데 오는 손님들은 감쪽 같이 속아넘어가서 제 풀에 반해 버려요.보고 있으면 참으로 웃겨요.교양은 없는 데다가 모두들 잔뜩 아이큐만 높거든요.그 맹점을 이용하는 겁니다.인사동 거리에 가서 리어카에 담겨 있는 싸구려 청자나 백자를 사가지고 와서 그걸 술잔이나 술병으로 쓰고 쟁반으로 쓰면서 굉장하게 소중하게 다루고 있으면 그것 이조백자지,고려청자지,하고 물어요.그럴 땐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귀중품인 듯  다루면 판판이 넘어가요.다른 요정보다 배나 높게 술값을 받거든요.그러니까 이 집을 굉장히 고상한 집으로 알아요.술을 사는 사람이 꼭 이 집으로 모셔야만 대접이 되는 것처럼 전략을 쓰는 겁니다.게다가 저의 집에선 일체 현금을 받지 않아요.현금을 받지 않아도 떼이지 않을  만한 예약손님만 받아요.조금 있으면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 전략이 유효해요."  "그런데 이 집에 오는 손님은 대개 어떤 부류요?"  "잘난 척하는 사람,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자기주제를 모르는 사람,항상 들뜬 기분으로 사는 사람,사기가 몸에 배어서 그것이 정상인줄 아는 사람,대개 이런 사람들이지요."   

 1960년대 중반의 골빈 남자들이 이렇구요...참고로 말하면 저는 이병주의 소설은 물론 평론이나 수상집도 꽤 재밌게 읽지만 그의 역사관이나 한국 대통령의 역사적 공과에 관한 해석에는 동의 못하는 부분이 많음을 밝혀둡니다.그래도 소설 읽는 맛은 느낄 수 있게 쓰는 재질은 빼어난 작가임엔 틀림이 없고,특히 자신이 직접 체험한 위와 같은 이야기는 양념구실을 충분히 해줍니다.<그 해 5월>이 신동아에 연재되다 끝난 것은 1988년 8월호입니다.장장 6년간을 연재했는데 이후 그는 사망하는 1992년까지 소설을 계속 씁니다만, 걸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이 <그 해 5월>이 마지막이라는 게 중평입니다.특히 말년엔 전두환의 심정을 글로 쓰겠다고 직접 나서서 세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지요.박정희의 독재를 그토록 비판했던 그가 왜 전두환을...하는 의아심.사망 직전에 그는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책을 한 권  내놓습니다. 그의 전두환 옹호의 골자가 들어있는 책인 <대통령들의 초상>(서당 1991)입니다.요즘 이병주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만 그의 말년에 일어난 이런 사실은 언급하지 말자는 묵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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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9-03-07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사실은 언급하지 말자는 묵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부 사정도 훤하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3-07 16:34   좋아요 0 | URL
작년에 한겨레21,신동아 등에 실린 이병주 생애를 다룬 글 모두 그걸 언급하지 않았죠.한길사는 이병주 전집을 내고 있으니 당연히 그런 걸 굳이 밝힐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도도 있겠구요.

비로그인 2009-03-0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저도 남자지만 참 단순한 동물들이네요. 남자들이 갖고 있는 판타지가 뭔지 정확히 알고 있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3-08 14:25   좋아요 0 | URL
그런 골빈 남자들은 그렇게 속아 넘어가면서도 자기들은 세상사에 훤한 현명한 인간으로 자처하고 있을 걸요.

Kir 2009-03-08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마담의 장사수완이 탁월하군요. 요즘도 같은 형태는 아닐지라도 저런 인간들, 꽤나 많을 것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3-08 14:26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그러면서도 똑똑한 척은 다 하고,자식들 앞에선 온갖 도덕군자 같은 이야기는 다 하고 다닐 걸요.

Ritournelle 2009-03-0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탈자가 있네요. 1966년에 취임한 서울시장은 김현욱이 아니라 김현옥이 맞습니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봤을 때 김현욱이 아니라 김현옥이 맞는 것 같습니다. 손정목 선생님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도 김현옥 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네요(207~217(

노이에자이트 2009-03-09 22:26   좋아요 0 | URL
정확한 지적 감사합니다.

순오기 2009-03-09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병주씨가 그런 인연으로 잘 살게 되었군요.
재미있네요~ 장안에 저 잘난줄 아는 사람들이 결국 김마담의 수완에 놀아난 건가요?ㅋㅋ

노이에자이트 2009-03-09 23:28   좋아요 0 | URL
원래 집안 대대로 지주이기도 했답니다.학력도 좋구요.
다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죠.
 

   이 글은 신영복(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씨가 2001년 4월 19일에 관악 민주포럼(7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한 서울대 출신자 모임)의 창립 1주년 기념강연회에서 한 내용의 마지막 대목입니다.강연의 전체내용은 2001년 신동아 7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대개의 인텔리 출신들은 특히 서울대 출신들은 모든 문제를 논리적으로 접근하려 합니다.다른 사람과의 논쟁도 무조건 논리 정합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려고 하지요.자연히 논의는 논쟁이 되기 쉽고 소모적인 사상투쟁으로 이어지는 경향을 띄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러다 보니 논쟁 자체가 실천이 되고 마는,다시 말해서 실천적 성과는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오리알에다 제 똥 묻혀서 굴러가듯 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껴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논리나 냉철한 이성을 신뢰하지 않습니다.따뜻한 가슴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보지요.인간적 덕성을 가지고 사람을 포용해 나가는 것은 따뜻한 가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일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지요.제가 출소한 뒤에 느낀 것입니다만 소위 운동권 문화를 간접적으로 느낄 기회가 많았습니다.그때 제가 느낀 것은 '저것은 옛날에 내가 하던 걸 여태 하고 있구나'하는 새삼스러운 반성이었습니다.제가 학교 다닐 때는 상당히 까다로운 선배였다고 들었습니다.얼마든지 부드럽게 얘기해도 될 것을 칼로 끊듯이 논리를 세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논의까지 쉽게 사상투쟁으로 넘어가는 식이었지요.광복 전후에도 그런 문화가 팽배했다더군요.콤그룹 등 당시 운동가들은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소모임으로 분산 고립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논의 구조가 직선적이고,또 구성원 간의 관계도 정보에서 조금만 소외되면 굉장한 소외감을 느끼는 그런 구조였다고 합니다.참으로 잘못된 전통입니다.문제는 지식인 일반적 경향이 이러하다는 데 있습니다.아주 좋지 않은 작풍이지요.이제는 반성하고 그런 것들을 좀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 강연은 신영복 씨가 주로 시민,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대학물을 먹은,특히 인문사회 과학 쪽 독서를 한다고 나름 자부하는 사람들 일반에게도 생각해 볼 기회를 줄 수 있는 내용이라 제가 인용해 보았습니다.제가 예전에 어떤 성직자가 "저 목회자는 설교할 때 언변도 좋고 독서도 많이 해서인지 해박하다.하지만 설교하면서 세치 혀로 사람을 내친다.저걸 고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갈 것이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신영복 씨는 신뢰에 바탕한 연대를 강조했고 거기에 필요한 덕목을 위에서 지적한 것입니다. 

  작년에 강준만 씨가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진보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지만 성질이 더러워서 인간말종으로 유명한 모 씨가 있다...".그런 인간말종이라면 아무리 사상적인 동지고 뭐고 우선 정나미가 떨어질 것입니다.그런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할 리가 없고 당연히 신뢰를 얻지도 못할 것입니다.이 세상은 칼이나 몽둥이를 휘둘러서 만드는 적보다 말이나 글로 남을 내치면서 만드는 적의 수가 훨씬 많지요.저도 수양이 덜 되어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나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어쩌면 책을 통해서 배우는 지혜보다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배우는 지혜가 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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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3-0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과 노이에자이트 님의 말씀, 모두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포스트를 읽은 다음, 아래의 '누가 더 나쁜 놈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남을 판단한다거나 이분법적인 악성 논리라는 생각은 잠시 유보해두고 자신이 특정 상황에 던져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감성 연습 내지는 이지 연습 mental exercise 으로 삼으면 유익할 것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3-04 00:03   좋아요 0 | URL
우리가 현란한 언어의 유희에 빠지면서 자칫 차가운 머리만 추구하는 인간이 되는 게 아닌가 늘 반성해 봐야 하지만 참 어렵군요.인간은 자기합리화를 하기 위해서 이중기준도 적용하고 핑계도 대는 등 참 복잡한 동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2009-03-04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6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주임 2009-03-0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득 임지현 선생님의 "우리안의 파시즘"이 떠오르네요,
이념의 진보, 참을수 없는 생활의 보수......

노이에자이트 2009-03-06 23:45   좋아요 0 | URL
또 그 반대도 있겠죠.임지현 대 강준만 논쟁도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줍니다.

비로그인 2009-03-04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 가슴으로부터 발에 이르는 여행입니다.”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댓글로 싸워 이기는 것은 투표하는 것만 못하겠죠.
저희 동네에 분식집이 새로 생긴지 얼마 안됐는데요 거기 사장님은 초등학생 딸을 둔 엄마인데 초등학생 손님들에게 존대를 하는 것 보고 좀 놀랐어요. 그래서인지 손님도 많고 어린 손님들도 얌전히 먹고 가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09-03-06 23:48   좋아요 0 | URL
오...훌륭한 분입니다.우리나라처럼 위아래 따지기 좋아하는 나라에선 위계질서의 아래쪽에 위치한 이에게 예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쟈니 2009-03-0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실천, 행동, 일상에서 늘 고민하는 지점입니다. 얼마전 메일링 서비스로 본 글에서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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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난민촌을 돌아보고
밤이면 호텔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자신이 그렇게도 싫고
위선적일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고통스런 삶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온 내가 죄인이라고 울며
괴로워하면서도 지금의 이 푹신한 침대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몸 따로 마음 따로인
내가 정말 싫습니다.


- 김혜자의《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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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김혜자선생님의 저런 마음이 바로, 실천과 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했습니다.

진보는 분열로,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고 하던데, 진보가 분열하기 쉬운 이유가 바로, 논쟁에 더많이 집중하는 성향이 아닐까 하네요.

몸따로, 마음따로는 필연적으로 진보의 경우에 더 많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진보는 지향하는 바를 높게 설정해서 몸이 따라가려면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하죠.
하지만, 수구 세력은 자기의 이익을 보장하고자 하는 마음(욕심)에 몸이 그저 따라가주면 되므로, 이들에게는 몸따로 마음따로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에구.. 그래도 마음, 생각이 있는 지점에 몸을 데려다놓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바로, 인간의 삶이 아닐까 ^^ 생각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3-06 23:50   좋아요 0 | URL
오호...그런 좋은 글이 있군요.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좋지만 어느 정도 중용을 취하는 게 좋지요.물론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중용이지만요.

Mephistopheles 2009-03-0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보건 보수건 어디까지나 사람이라는 그릇 안에 담긴 형이상학적인 유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페이퍼의 내용이 십분 와닿습니다..^^ 얼음틀과 같겠죠. 얼음틀이 삐죽삐죽하면 얼려 나온 얼음들도 그 모양새이며 틀에서 빼내기도 쉽기 않을 것이고요..^^

노이에자이트 2009-03-06 23:51   좋아요 0 | URL
얼음틀에 대한 비유가 매우 와닿습니다.공감이 가네요.
 

  1번 문항에 관하여

  에드워드 할레트 카<역사란 무엇인가>제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 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노예제도에 찬성하는 이들은 노예주들 중에도 개인적으로 착한 사람이 있었다고 강조해왔다..." 또 저자는 베이컨의 "인습의 완강한 지속은 변혁과 마찬가지로 난폭한 것이다"는 말도 인용했습니다.그런 내용을 읽으면서 질문을 만들어 봤습니다.하지만 애초에 제가 작성한 질문은 "당신이 노예라면 어떤 주인 밑에서 일하고 싶은가?"였는데 질문이 너무 사람을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좀 더 차분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참고로 카가 소개한 재밌는 인용이 있습니다.영어사전 편찬자로 유명한 사무엘 존슨은 "만약 평등의 상태가 계속되면 행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므로 차라리 일부 사람들이 불행한 편이 낫다."고 했고 르네상스 문화를 연구한 야콥 부크하르트는 자기 소유물 외엔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진보의 희생자들의 짓눌린 신음에는 눈물을 흘렸으나 간직할 것이 없는 앙시앙 레짐의 희생자들의 신음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2번 문항에 대하여 

이런 문항은 바로 우리의 일상에 많이 부딪히는 현실을 다룬 것입니다.제가 이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게 된 것은 윌리암 힌튼 저 강칠성 역<번신>(풀빛1986)을 읽고 나서였습니다.이 책은 중국내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7~1948년 중국 해방구에서 벌어지는 혁명사업에 참여하는 농민들을 취재한 르포인데 이 방면의 고전적 명저입니다.특히 지주에 대한 투쟁과 함께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억압을 반대하면서 남편과 시댁식구들을 규탄하는 집회 모습이 꽤 자세히 나옵니다.재밌는 것은 여성들이 남편과 시어머니를 함께 인민재판하는 광경인데 효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자신을 합리화하는 남편 이야기가 있고,재판 중에 잘못을 뉘우치면서 어머니를 규탄하는 남편 이야기도 있습니다.중국인에게 듣기로는 이 동네에서는 시어머니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하지만  저 쪽 동네에선 친정 어머니가 며느리(내게는 올케)에게 못된 시어머니로 규탄 받아 재판에 끌려나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도 있었다네요.제가 한때 중국여성해방운동에 관심이 많아서 이 책을 구해서 읽었어요.나중에 엘리자베스 크롤의 책도 읽을까 했는데 게을러서인지 아직도 못 읽고 있습니다.원래 제가 할 질문은 우리나라에서 그런 인민재판이 열린다는 가정을 세워 만든 것이었는데.워낙 독한 내용이어서 그냥 거두어 들였어요.효도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깨뭉개는 질문이었는데 여러분이  그런 시각에서 질문을 한번 만들어 보세요. 

3번 문항에 대하여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버밍햄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 나오는 유명한 내용이에요.킹 목사가 불법시위를 했다고 구속되는데 그의 투쟁노선을 비판하는 이들이 법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성직자가 그러면 되겠느냐.등 말이 많아지자 옥중서신으로 답한 글에 나옵니다.킹 목사는 당연히 부당한 목적을 위해서 정당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나쁘다고 합니다.저는 서른이 넘도록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독배를 들었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하네요.강정인<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문학과 지성사)에는 그런 거짓말이 교과서에 실리게 된 사연을 자세히 분석한 논문이 있어요.극단적인 법치주의로 인민을 통제하기 위해 그런 내용을 주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학교에서 배우는 거짓말이라는 용어가 실감나는 순간이었죠. 

4번은 김우창 씨가 1988년 신동아 9월호에 쓴 '혁명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라는 제목에서 그대로 따왔습니다.이 글은 김우창 씨 특유의 길면서도 치밀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구조적  폭력을 갈아엎기 위해 혁명적 폭력을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김우창 씨는 이 글 외에도 이 문제를 다룬 글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한 것 같습니다.애초에는 도스토예프스키 <악령>에 나오는 도발적 문제제기를 다루어 볼까 하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카라마초프의 형제>나 <죄와 벌>에 비해 이 소설을 그다지 많이 안 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쳐 간단히 이런 질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질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2번은 워낙 민감한 문제를 제기하면 불편할 것 같아서 많이 다듬었고.나머지는 거의 책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그리고 1번도 몇 번이고 고치다가 결국 평범한 질문이 되고 말았습니다.굳이 너무 불편한 질문을 만들어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제가 밝힌 위의 책이나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제 질문에 답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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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3-0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를 소개해주셔서 그때 서점을 뒤져봤는데 구하질 못해서 아직 못읽고 있네요. 학교에서 거짓말 가르치기 보다 살면서 한 번쯤은 겪을 수 있는 질문을 함으로써 학생들이 자신의 길을 찾게끔했으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3-01 20:38   좋아요 0 | URL
박홍규 씨 책 중에 소크라테스를 다룬 책이 있는데 거기서도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음을 지적했습니다.하지만 워낙 세뇌가 철저해서 작년 촛불시위 때도 준법정신을 강조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코마개 2009-03-02 11:50   좋아요 0 | URL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권창은, 고려대 출판부
이게 같은 책일겁니다. 강정인 교수의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의 공동 저자로 되어 있는 사람인데, 판본을 바꾸어서 나온거라고...

노이에자이트 2009-03-02 23:36   좋아요 0 | URL
예.그 저자 역시 소크라테스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우리의 편견을 계몽하는 글로 유명하지요.

쟈니 2009-03-02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질문에 답을 달려고 하다가 머리도 아프고 해서 그냥 뛰어넘었습니다. 행동과 생각에 대해 저도 요즘 고민이 많은 상황이라서요.
제 생각대로 행동하면 뭔가 제가 손해를 꽤 보는 거 같고. 그렇다고 제가 손해를 보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니, 평소 지론에 위배되는 것 같아 할 수 없어서, 그래서 생각을 따르다 보니 손해를 보고, 열을 받는 상황이 지속되네요.. 생각을 바꿔야 할지..

노이에자이트 2009-03-02 23:39   좋아요 0 | URL
자신과 무관한 일에 관해선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자신이 얽혀있는 일이면 그럴 수가 없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고민이 해결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