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국내외 원로들의 회고담 종류를 즐겨 읽습니다.특히 그들의 인간관계를 알고 나면 아...이 사람과 이 사람이 이런 인연을 맺었군...하고 놀라게 될 때도 있습니다.리영희와 임헌영의 대담집 <대화>에는 소설가 이병주와 어울려 다니던 리영희의 일화가 아주 재미납니다.이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사실 리영희는 이 책에서 "이병주가 유신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바뀐 뒤 어울려 다니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병주는 상당한 재력가로 유명합니다만 그렇게 돈을 벌게 된 과정이 좀 특이하더군요.리영희에 따르면 이병주가 교편생활하던 학교에서 종을 치던 학생이 김현옥이었습니다.나중에 5,16이후 출세하여 서울 시장이 된 김현옥(원조 불도저)이 이병주를 챙겨주면서 이병주는 큰 저택도 마련하고 인심좋게 주변사람들에게 술과 요리도 내고 하면서 호기롭게 돈을 썼다고 합니다.이병주는 체격도 좋고 얼굴도 잘 생긴 데다가 씀씀이도 커서 리영희도 그 덕분에 고급 요리점이나 술집도 갑니다.이병주의 저택에 가 본 리영희는 어마어마한 그의 서재에 놀랐다고 하는데 나치관계 외국문헌을 많이 모아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고도 하네요.그의 소설에 나치에 대한 일화가 가끔 등장하기도 하는 게 그런 사연때문이기도 합니다.하지만 리영희는 이병주가 5공화국 들어 박정희 시대를 그린 정치대하소설 <그 해 5월>을 신동아에 연재한 것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최근 한길사가 이 책을 다시 내더군요.이병주 특유의 해박한 독서 경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이 소설 여기저기에 수 많은 국내외 사상가,역사적 사건이 풍부하게 버무려져 있습니다.
이병주가 지인들과 함께 고급 요리집이나 술집을 갔던 체험담은 이 소설에도 나와 있습니다.주인공 이사마가 바로 이병주의 분신.사마는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에서 딴 것입니다.이사마가 가는 요정을 겸한 요리집이 있는데 장사가 굉장히 잘 됩니다.이사마의 지인이 그 곳 주인인 김마담에게 장사가 번창하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데 그 대답이 참 걸작입니다.그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시대적 배경은 1965년 8월이라는 점을 감안하십시오.
"여기 드나드는 손님은 대개 인텔리 여성과 유명 여성에게 컴플렉스 같은 걸 가지고 있는 모양이에요.여대생이나,무슨 탈렌트다,배우다,가수다 하면 사족을 못쓰거든요.그러니까 우리집 아이들은 전부 여대생이고 배우예요.물론 사실이 그럴 리는 없지요.전 학생은 받아주지 않아요.그러니까 우리집 애들 가운데 여대생은 한 명도 없어요.전부 가짜지요.그대신 교육을 시키지요.어려울 거 없어요.영리한 아이들만 골라 놓았으니까요.손님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척하구요.말을 적게 하라고 해요.가끔 영어나 프랑스어를 섞는 거예요.손님의 넥타이를 보고 '오오 트레 식'이라구 하구요,가끔 잔을 주면 수줍은 척 '메르시'라고 하는 거에요.그러면 너 불어 전공이냐고 묻게 되죠.그러면 머리를 숙이고 대답을 안하는 거에요.그런 식으로 연극을 하면 이런 데 오는 손님들은 감쪽 같이 속아넘어가서 제 풀에 반해 버려요.보고 있으면 참으로 웃겨요.교양은 없는 데다가 모두들 잔뜩 아이큐만 높거든요.그 맹점을 이용하는 겁니다.인사동 거리에 가서 리어카에 담겨 있는 싸구려 청자나 백자를 사가지고 와서 그걸 술잔이나 술병으로 쓰고 쟁반으로 쓰면서 굉장하게 소중하게 다루고 있으면 그것 이조백자지,고려청자지,하고 물어요.그럴 땐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귀중품인 듯 다루면 판판이 넘어가요.다른 요정보다 배나 높게 술값을 받거든요.그러니까 이 집을 굉장히 고상한 집으로 알아요.술을 사는 사람이 꼭 이 집으로 모셔야만 대접이 되는 것처럼 전략을 쓰는 겁니다.게다가 저의 집에선 일체 현금을 받지 않아요.현금을 받지 않아도 떼이지 않을 만한 예약손님만 받아요.조금 있으면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 전략이 유효해요." "그런데 이 집에 오는 손님은 대개 어떤 부류요?" "잘난 척하는 사람,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자기주제를 모르는 사람,항상 들뜬 기분으로 사는 사람,사기가 몸에 배어서 그것이 정상인줄 아는 사람,대개 이런 사람들이지요."
1960년대 중반의 골빈 남자들이 이렇구요...참고로 말하면 저는 이병주의 소설은 물론 평론이나 수상집도 꽤 재밌게 읽지만 그의 역사관이나 한국 대통령의 역사적 공과에 관한 해석에는 동의 못하는 부분이 많음을 밝혀둡니다.그래도 소설 읽는 맛은 느낄 수 있게 쓰는 재질은 빼어난 작가임엔 틀림이 없고,특히 자신이 직접 체험한 위와 같은 이야기는 양념구실을 충분히 해줍니다.<그 해 5월>이 신동아에 연재되다 끝난 것은 1988년 8월호입니다.장장 6년간을 연재했는데 이후 그는 사망하는 1992년까지 소설을 계속 씁니다만, 걸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이 <그 해 5월>이 마지막이라는 게 중평입니다.특히 말년엔 전두환의 심정을 글로 쓰겠다고 직접 나서서 세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지요.박정희의 독재를 그토록 비판했던 그가 왜 전두환을...하는 의아심.사망 직전에 그는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책을 한 권 내놓습니다. 그의 전두환 옹호의 골자가 들어있는 책인 <대통령들의 초상>(서당 1991)입니다.요즘 이병주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만 그의 말년에 일어난 이런 사실은 언급하지 말자는 묵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