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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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정원의 부고를 받은 준희는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간다. 장례식장에서 준희는 또 다른 친구인 부영과 경애의 얼굴을 찾지만, 찾지 못한다. 정원, 준희, 부영, 경애 네 사람은 삼십여 년 전 같은 대학 신입생으로 만나서 같은 하숙집에서 지내며 인생의 한 시기를 함께 보냈다. 네 사람은 성격도 다르고 관심사도 달랐고, 나중에는 사는 곳도 바뀌고 진로도 갈라졌지만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나고 서로의 생일은 꼭 챙겼다. 그랬던 이들인데, 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른 두 사람은 부고를 받고도 무시하게 되었다.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 <각각의 계절>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중 첫 번째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준희는 자살한 친구의 부고를 받고 혼자서 장례식장에 가는데, 나도 같은 경험이 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면서 친구 생각도 많이 났지만, 그 친구를 비롯해 인생의 한 시절을 함께 보낸 다른 친구들 생각도 많이 났다. 소설 속 친구들처럼 나와 그 친구들도 한때는 매일 얼굴을 보고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다 했던 사이인데, 언제 어떻게 우리는 이렇게 멀어졌나 하는 생각에 아쉽기도 하고 그립기도 했다. 


두 번째로 마음에 남은 단편은 <무구>다. 소미는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대학 동창 현수의 계정을 발견하고 현수가 일하는 부동산 중개업소가 있는 U시로 간다. 그때부터 소미와 현수는 종종 만나서 함께 만둣국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그 일대를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소미는 현수가 소개해 준 U시의 땅을 빚까지 내서 사게 되고, 그후 현수와 연락이 끊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소미의 감정에 이입해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면 전화위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그런데 정말 소미가 복을 '얻은' 게 맞을까... 아리송아리송. 


2021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기억의 왈츠>도 좋았다. 정년퇴직하고 혼자 사는 '나'는 동생 부부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근교에 있는 식당에 간다. 처음 가보는 곳인 줄 알았던 식당은 뜻밖에도 사십 년 전 '나'가 대학원생일 때 선배와 동기 그리고 경서와 함께 왔던 곳이었다. 경서는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나'를 특별하게 여겼고, 당시 집안 문제로 불안했던 '나'는 경서의 호의에 기댔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두 사람은 엇갈리고 말았는데, 노년에 이르러서야 그 크기와 밀도를 깨닫게 되는 사랑의 이야기가 애틋하고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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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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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나의 눈부신 친구>, <어른들의 거짓된 삶> 등을 쓴 이탈리아의 여성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산문집이다. 산문집이라고 해서 저자의 일상이나 개인적인 생각, 감상 등을 기록한 신변잡기적인 성격의 책을 상상했는데, 읽어보니 전혀 달랐다. 주로 어떤 책을 읽으며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는지, 그 후 어떤 식으로 글쓰기를 하면서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작가와 어떤 책의 영향을 받아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소개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자서전과 작법서가 혼재되어 있는 형식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때 남성 작가들의 책을 주로 읽었던 저자는 자신은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처럼 위대한 글을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베네치아의 여성 시인 가스파라 스탐파의 시를 읽고 남성 작가처럼 쓰려고 애쓸 필요 없이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 거트루드 스타인, 에밀리 디킨슨 등 수많은 여성 작가, 시인들의 글을 읽으며 '여성으로 산다는 것'과 '여성으로서 글을 쓴다는 것'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특히 이탈리아의 여성주의적 관점의 사회이론가 아드리아나 카바레로가 저자의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드리아나 카바레로의 책 <바라보는 타자와 서술하는 타자>에는 여성인 두 친구가 등장한다. 한 친구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들려준다. 이제까지 친구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던 친구가 어느 날 그동안 들은 이야기를 글로 써서 친구에게 선물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선물받은 친구는 기뻐한다. 저자는 이들의 관계를 보면서 여성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친구('꼭 필요한 타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너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네가 나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하기 위함이다.") 


그때까지 주로 1인칭 시점으로 글을 써왔던 저자는 이후부터는 여성인 두 친구를 중심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레누와 릴라라는 두 여성의 오랜 우정을 그린, 저자를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대표작 <나의 눈부신 친구>(를 비롯한 '나폴리 4부작')이다. 저자의 초기 대표작인 '나쁜 사랑 3부작'의 창작 과정도 자세히 나오는데, 이 내용도 상당히 흥미롭다. 작품을 쓰게 된 배경과 집필하는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 등이 주로 나오기 때문에 저자의 작품을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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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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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정세랑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꼈지만, 나는 정말 역사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한다. 그냥 역사 소설도 좋고 그냥 미스터리 소설도 좋지만, 스스로 창작한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다양한 가정을 해보고 참신한 가설을 제기하고 이를 미스터리라는 장르적인 방식으로 그럴 듯하게 풀어내는 역사 미스터리의 접근법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윤채근의 <고전환담>을 읽으며 실제 역사에 기반해 재구성한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시 한 번 느꼈다. 저자는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7년부터 <신동아>에 한국형 팩션을 연재해왔다. 저자는 판타지나 미스터리 등 다양한 소설 기법을 동원해 우리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을 극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책에는 총 28편의 소설이 실려 있고, 각 소설의 끝에는 창작의 토대로 삼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 문헌이 언급되어 있다. 


첫 번째 소설 <왜장 와카자키의 고백>부터 흥미진진하다. 왜장 와카자키(야스하루)는 임진왜란 때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과 맞붙었던 왜군의 우두머리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다. 와카자키는 자신의 적장이었던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증오가 혼재된 독특한 회고담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저자는 이에 착안해 와카자키의 목소리로 이순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토로하고 이를 통해 임진왜란의 진상을 알리는 참신한 방식과 내용의 팩션을 창조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소설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다룬 <우리들의 위험한 이웃>이다. 정여립 모반 사건은 조선 선조 때 정여립이 역성혁명을 주장했다는 빌미로 동인 세력을 몰아내고 서인 세력이 조정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는 조선 시대의 붕당 정치에 대해 배웠다면 누구나 아는 사건인데,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정여립 모반 사건의 숨은 주역으로 일컬어지는 길삼봉이라는 협객이 실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라면...? 


엉뚱한 상상 같지만, 실제로 허균은 젊은 시절 서자 출신 건달패들과 즐겨 어울렸다는 기록이 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의 빌미가 된 모반 사건의 실제 주동자는 길삼봉이고 정여립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설도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사랑이라면 도톤보리 운하에서>는 18세기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간 화가 최북이 오사카의 유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허구이지만 조선의 풍속화와 일본의 우키요에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을지 상상해 보는 일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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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서블 - 일상 기록을 통해 꿈을 현실로 만드는 법
김익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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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다이어리도 노트도 열심히 안 써서 내년에 쓸 다이어리를 장만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베스트셀러 <거인의 노트>를 쓴 대한민국 1호 기록학자 김익한의 신작 <파서블>에 따르면 "기록을 한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역으로 성공한 사람 중 기록을 하지 않는 이는 없다." 열심히 기록해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과 기록을 통해 꿈을 찾고 성공을 거머쥔 사람의 차이는 '생각'과 '실행'이다. 


기록 전문가로서 저자는 수년에 걸쳐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 대부분이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기록을 일상화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중에 성공한 사람은 일부에 그쳤다. 원인을 분석한 결과, 저자는 흔히들 쓰는 연간 기록으로는 기록의 본질 중 하나인 '실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년 뒤의 나를 상상하는 건 막막하지만 1달 후의 나는 상상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은 연 단위가 아니라 월 단위로 이루어져야 한다. 


기록을 잘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쓰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이 없다는 건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똑같이 길을 걸어도 어떤 사람은 그냥 걷는 반면, 어떤 사람은 주변에 못 보던 가게가 생겼는지, 사람들 옷차림이 어떤지, 꽃이나 나무가 피었는지 또는 졌는지 등을 살피면서 걷는다. 후자처럼 자신의 관심사를 알고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꾸준히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하루가 다르고 한 달이 다르고 일 년이 다르고 인생이 다르다. 


매일매일이 똑같아서 기록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기록이 필요하다. 기록이란 '과거와 오늘의 차이를 감각적으로 구분하는' 행위다. 매일 출퇴근하고 등하교 하는 평범한 일상일지라도 어제와 오늘 먹은 반찬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 본 영화나 드라마가 다를 것이다. 이렇게 어제와 다른 오늘을 찾아내고, 그중 유난히 자신의 마음을 잡아끄는 대상이나 사건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기록하면 된다. 


책에는 이 책의 핵심인 '한 달 일상 기록'의 구체적인 방법이 자세히 나온다. 이 중에 인상적이었던 점은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기록한 내용을 한 주의 마지막 날에 돌아보면서 지난 일주일을 회상하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마치 영화를 보듯 지난 시간을 돌려보면 생각력을 키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주일을 열심히 산 자기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효능감이 높아진다. 내년, 아니 당장 이번 달부터 이 책에 소개된 기록법을 실천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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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가 1
사노 유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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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가'는 차이나타운처럼 생긴 화려하고 복잡한 거리다. 바로 이 거리에서 '극락가 해결 사무소'를 운영하는 타오와 알마는 표면적으로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트러블 슈터(문제 해결사)로 일하지만, 이면에선 '마가(禍)'가 관련된 괴기 사건을 해결하며 살고 있다. 어느 날 평소대로 사무소 근처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던 타오와 알마는 음식점 주인의 딸 야야로부터 요즘 들어 행방불명자가 늘고 있고 자주 길바닥에서 고양이나 동물 변사체가 발견된다는 소문을 듣는다. 


발견된 변사체들은 전부 커다랗게 물린 흔적이 있고, 피가 빠져서 바짝 말라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근처에서 사람이 사라졌다. 얼마 후 알마는 거리를 걷다가 행방불명된 친구 유키를 찾는 소년 루카를 만난다. 루카로부터 유키가 사라졌을 때 역시 길바닥에 까마귀 시체가 있었고 그 부근에 유키의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는 말을 들은 알마는 보통 사건이 아니며 어쩌면 '마가(禍)'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확신한다. 


사노 유토의 만화 <극락가>는 요괴와 액션, 스릴러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작품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해결 사무소 같지만 사실은 사람을 습격하고 먹어 치우는 이형의 존재인 마가를 다룬다는 점이 흥미를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쾌활하고 엉뚱하지만 그 누구보다 마가를 소탕하는 일에 진심인 알마, 그리고 겉모습은 시크하고 도도하지만 사건 앞에선 그 누구보다 열혈인 타오의 조합이 좋다. (<원피스>의 캐릭터들에 비유하면 알마=루피, 타오=조로+상디 같은 느낌이랄까.) 


1권에는 에피소드 두 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는 실종된 친구를 찾는 소년의 이야기이고, 다른 한 편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 모두 가족으로부터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학교나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그런 두 사람을 유일하게 보살펴주고 인정해 준 사람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두 사람 주변에 마가가 나타난 걸 보면, 실은 마가가 고독과 분노, 절망과 죄책감을 먹고 사는 괴물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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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05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