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크레이그 주연 20부작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라기에 큰맘 먹고 구입한 책인데 드라마 방영 소식은 들리지 않고 책만 남았다. 처음엔 핍이 주인공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갈수록 핍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서 이게 뭔가 싶었다. 나중에 그들 모두가 핍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나서야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과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이해되었다.


대학 졸업 후 간신히 취업한 직장에서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핍은 오늘도 상사의 눈을 피해 엄마와 통화하느라 정신없다. 핍은 유일한 가족인 엄마가 자신을 키워준 건 감사하게 여기지만, 엄마가 예나 지금이나 경제 관념이 없고 정신이 불안정한 데다가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게 부담스럽다. 핍은 자기 또래 여성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이 남자 저 남자와 연애도 해보고 싶고 젊음을 맘껏 누리고 싶지만, 현실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데려갈 집조차 없다. 


핍은 현재 여러 사람들과 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일종의 셰어 하우스다), 어느 날 동거인 중 한 사람인 아나그레트가 핍을 불러세운다. 아나그레트는 유명한 인터넷 무법자인 안드레아스 볼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볼프의 '선라이트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핍은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현재 직장보다 더 많은 돈을 준다는 말에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때까지만 해도 소설의 중심 인물이 핍인 줄 알았는데 점점 안드레아스 볼프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안드레아스 볼프는 동독 정부의 핵심 인사인 아버지와 교수인 어머니 슬하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체제에 대한 불만 때문에 번듯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안드레아스는 청소년 상담사로 일하다 한 여자아이를 알게 되고, 그 여자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려다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후 안드레아스는 자신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더 큰 범죄를 기획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동독의 정보기관인 슈타지의 정체를 폭로하는 일을 하게 된다. 안드레아스는 위키리크스처럼 각국 정부 또는 기업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는 일을 해 주목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인터넷 세계의 무법자라는 악명을 얻게 된다. 소설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핍과 안드레아스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현대 사회의 어두운 실체를 보여준다. 


........


이 소설에는 인터넷과 페미니즘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소설에 나오는 모든 문장이 곧 저자의 입장 또는 견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하다. 


만약에 마르틴이 포르노를 안 본다면 아마 포르노를 안 보는 유일한 독일인일걸. 인터넷 포르노는 독일 남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독일 남자들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주변을 통제하려 들고 자신이 가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어. 마르틴은 내가 인터넷으로 여자 친구들을 잔뜩 만나니까 자신은 인터넷 포르노를 보는 것일 뿐이라고 하더라고. (36쪽) 


그가 폭로하는 정보 대부분이 여성 탄압과 관련돼 있음을 알고 핍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 그는 인터뷰나 보도 자료에서 늘 공격적 페미니즘 성향을 드러냈다. 아나그레트가 여자들끼리의 모임을 선호하고 지금도 여전히 볼프를 존경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92쪽) 


"그래봤자 다 허튼소리일 분이야. 나는 이렇게 부패한 세상에 순수한 빛을 비추고 다른 남자들의 성차별주의를 비난하는 사람이다, 이거잖아. 볼프는 여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여자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남자로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소름 끼치는 부류야." (338쪽) 


톰은 묘한 혼종 페미니스트였다. 행동만 보면 나무랄 데 없는 페미니스트인데 개념적으로는 페미니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예전에 톰은 레일라에게 "나는 페미니즘이 남녀 평등주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페미니즘 이론에 완전히 공감할 수가 없어. 여자들이 남자들과 동등하면 안 되는 건가. 왜 꼭 여자들은 남자들과 다르고 남자들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339쪽) 


안드레아스의 관점에서는 네트워크에 사회주의를 적용한 것이 바로 인터넷이었다. (656쪽) 


발가벗은 채 변기에 앉아 있는 어느 집 아내의 업로드된 이미지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구분이 사라졌음을 알렸다. (...) 기계로 인해 인간의 뇌는 피드백 회로로 축소되고, 각자의 개성은 대중적 일반성으로 매몰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6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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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부터 이제까지 일본에 수십 번 넘게 다녀왔지만 홋카이도만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딱히 흥미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십 대의 어느 날, 오지은의 <홋카이도 보통열차>를 읽고, 홋카이도에 가게 된다면 그 때는 무조건 보통열차를 투고 홋카이도를 한 바퀴 빙 도는 여행을 해보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기차 여행, 그것도 보통열차를 타고 하는 기차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면 홋카이도에 갈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몇 주 전 엄마와, 나,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계기는 언제나처럼 홈쇼핑 채널을 보던 엄마가 홋카이도 여행 상품이 저렴한 가격에 나왔다며 나와 여동생을 꼬드긴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돈 없고 시간 없다고 안 간다고 했을 텐데, 엄마가 말한 가격이 내 생각에도 너무 괜찮아서 가겠다고 하고 며칠 안에 여행사와 계약하고 결제까지 마쳤다. 홋카이도 여행 하면 무조건 기차 여행이라는 내 결심이 너무도 간단히 무너진 것은 아쉽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평생 가볼 기회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모처럼 효녀 노릇도 해보자 싶었다.




문제는 여행 시작 이틀을 앞두고 엄마가 이런 말을 꺼내면서 벌어졌다. "2박 3일은 너무 짧은 것 같지 않니? 이왕 가는 거 3일 정도 더 있다 왔음 좋겠는데... " 동생은 프리랜서이고 나는 며칠 더 휴가를 쓸 예정이었기에 3일 정도 일정을 늘려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비행기 티켓 구하고, 3일 더 묵을 숙소를 구했는데... 오.마.이.갓!!! 하필이면 우리의 일정과 아라시 삿포로 돔 콘서트 일정이 기가 막히게 겹쳐버렸다(참고로 아라시는 일본의 국민 아이돌 그룹. 내년에 은퇴한다고 전격 발표한 터라 콘서트 열기가 장난이 아니다). 


덕분에 삿포로 시내는 물론 근교의 숙소까지 가격이 평소 3~4배로 올라서 돈은 돈대로 깨지고, 그나마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서 여행 직전까지 엄마랑 공항에서 노숙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이 때부터 불안한 징조를 감지했어야 했는데...





여행 첫째 날. 새벽 다섯 시에 공항에서 가이드 만나 미팅하고 일곱 시에 출국하는 일정이라서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네 시에 공항버스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참고로 이 전날 밤에도, 새벽에도, 아고다에서 숙소 잡느라 동생이나 나나 잠을 못 잤다.


인천공항을 떠나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로 오타루에 갔다. 오타루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날씨가 흐렸지만, 내게 오타루는 '눈(雪)'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환하고 쨍한 날씨보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오타루 운하를 산책하는 동안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큰 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타루는 항구 도시답게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는데 여행사에서 준비해준 식사는 그닥 맛있지 않았다(한국에서 먹는 일반적인 스타일의 초밥 정식 정도?). 차라리 그 돈으로 내가 음식점 수배해서 먹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타루의 명물인 오르골당 앞에는 르타오를 비롯한 카페, 디저트 맛집 거리가 있다. 오르골당을 구경하고 나온 우리는 르타오를 시작으로 눈에 보이는 카페, 디저트 맛집마다 들어가 봤는데 대략 6~70퍼센트의 확률로 시식 행사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초콜릿, 쿠키, 케이크 등 오타루의 유명한 디저트는 거의 다 공짜로 맛본 듯하다 ㅎㅎㅎ (엄마 왈, 여행 중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ㅎㅎㅎ) 


가이드가 엄청 유명한 커피집이 있다고 해서 평소에 마시지도 않는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해 마셨는데 엄청 맛있지는 않았다(차라리 그 돈으로 스벅 커피를 마실 걸...). 이후 가이드 때문에 바가지 쓴 일이 몇 번인가 더 있었는데(가이드가 추천해서 구입한 요거트가 돈키호테에서 훨씬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다든가, 면세점에서 엄마가 구입한 약을 환불해주지 않겠다고 한다든가... -> 결국 환불 받았다), 안 그래도 패키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데 엄마 등쌀을 못 이기고 억지로 갔던 나로서는 이 또한 참으로 실망스런 일이었다.


저녁은 여행사에서 천엔씩 돌려주고 삿포로 시내에서 각자 먹으라고 해서 호텔 주변에서 먹을 만한 곳을 찾아봤다. 삿포로에서 유명한 음식은 미소라멘, 징기스칸, 수프커리, 해산물 요리 등등인데 엄마가 징기스칸, 수프커리는 낯설어서 싫어하시고, 해산물 요리는 점심에 먹어서 싫다고 하셨다. 엄마는 우동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삿포로는 우동이 유명한 동네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 흔한 마루가메, 하나마루 우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호텔 근처의 라멘집에 들어갔는데, 여기가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유명한 집이었던 모양이다. 나와 동생은 맛나게 먹었는데 엄마는 짜다고 하셔서 아쉬웠다.






둘째 날에는 노보리베츠, 쇼와신잔, 도야호수 등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도시를 떠나 자연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나무도 풀도 서울과 다른 느낌. 일본 본토와도 달랐다. 전날과 달리 날씨도 엄청 엄청 좋았다. 햇빛의 강도도 서울과 달랐다. 덕분에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여행 내내 두드러기가 올라오기도 했다(햇빛 알레르기 있는 분들은 선크림 꼭 바르고 긴팔 옷 챙기세요). 


노보리베츠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온천 지대라는데 족욕 한 번 못해봐서 아쉬움이 남는다(일정상 족욕탕 근처까지밖에 못 가봤다). 쇼와신잔이나 도야호수도 잠깐 보고 사진 찍고 지나가는 정도. 패키지 여행이 이렇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는데, 막상 내 돈 내고 경험하니 속이 많이 쓰렸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가이드가 마유 크림을 권해서 귀얇은 엄마가 한 통을 샀다. 그거 바르면 화상도 낫고 물집도 낫고 온갖 피부 증상은 다 낫는다고 해서 여행 내내 열심히 발랐는데 딱히 효과는 못 봤다.


이 날 식사는 호텔에서 먹은 조식 뷔페를 제외하고 다 별로였다. 점심은 쇼와신잔 앞 휴게소에서 무슨 볶음 요리 같은 걸 먹고, 저녁에는 대게 뷔페라는 데에 갔는데 내가 생각한 대게 뷔페가 아니었다. 살도 없고 맛없고 질기고... (대게가 싫다고 처음부터 튀김이나 샐러드를 가져다 먹었던 내 동생이 위너...!) 밤에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가 젤 맛났다. 홋카이도 한정 삿포로 맥주였던가(삿포로 맥주 박물관에나 가볼 걸!).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은 패키지 여행이지만, 그래도 연로한 부모님들 모시고 다닐 때에는 패키지 여행이 좋기도 하다. 일단 가격이 상당히 저렴한 편이고, 출국할 때부터 입국할 때까지 가이드가 책임지고 인솔해준다는 것도 좋은 점이다. 일정 내내 버스로 이동해서 체력 부담이 줄고, 캐리어 가지고 다니느라 힘 뺄 필요도 없고. 아는 것 많고 말 잘하는 가이드를 만나면 여행 내내 지루하지 않기도 하다(이번에 만난 가이드 분도 입담이 대단했다 ㅎㅎㅎ).


낯선 사람들과 몇 날 며칠 같이 다니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었는데, 막상 해보니 딱히 부담스런 일도 아니고, 의외로 내 또래나 나보다 젊은 사람들도 많이 있어서 신선했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나라를 여행할 때는 패키지 여행도 괜찮겠다.


여행사에서 마련해준 식사는 하나같이 별로였지만, 숙소는 정말 기막히게 좋았다. 삿포로 오도리 공원 인근에 위치한 삿포로 프린스 호텔이라는 곳이었는데, 위치도 좋고 객실 상태도 좋고 조식 뷔페도 훌륭했다. 노천 온천이 있어서 저녁에 엄마, 여동생과 셋이서 온천하면서 피로를 푼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근처에 오도리 공원이 있어서 도착한 날부터 오도리 공원을 열심히 산책했다. 마침 오도리 공원에서 라일락 축제를 하고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숙소만으로도 본전은 건진 기분이다.






여행 셋째날부터 마지막 날까지는 삿포로에서 머물렀다. 여행 셋째날은 패키지 여행을 마무리하고 자유 여행을 시작하는 일정이었는데, 패키지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면세점 쇼핑을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야겠다고 사정을 하셨다(면세점에서 나눠주는 마유 비누를 꼭 받아야겠다고 하셨던가...). 그래서 면세점까지 따라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면세점에서 엄마가 가이드와 면세점 직원의 말에 홀랑 넘어가 거액의 쇼핑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패키지 여행 팀과 인사하고 우리끼리 지하철 타고 숙소로 돌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니조 시장에서 카이센돈 먹고 시내 구경하다가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꺼내셨다. 오늘 면세점에서 산 물건들 전부 환불하고 싶다고. 그 때부터 나와 동생은 면세점에 전화하고, 면세점에서 환불이 안 된다고 해서 왜 안 되냐고 따지고, 어찌어찌 상급자랑 통화가 되어 폐점 시간까지 오면 환불을 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아내고, 폐점 20분 전에 호텔에서 택시 타고 면세점까지 가서(택시 기사가 면세점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구글맵을 보여주며 사정사정을 했다...) 폐점 직전에 면세점에 도착했다. 이 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다리가 떨린다. 환불에 성공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엄마와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이튿날인 여행 넷째날. 오전에는 홋카이도 대학 구경하고 오후에는 삿포로 역 쇼핑몰을 구경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돌연 여행온 걸 후회한다고 말해서 나와 동생 모두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우리야말로 엄마가 오고 싶다고해서 무리해서 온 건데 엄마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엄마는 삿포로에 며칠씩 있는 것도 지겹고 돈도 너무 많이 드는 것 같다고 했다. 나야말로 엄마 때문에 일부러 휴가내고, 잠 못자고 여행 준비하고, 엄마 위주로 일정 짜고 여행하는 건데 이런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고 눈물이 났다. 대체 왜 온 거니...ㅠㅠㅠ



   



그 밤 이후로는 엄마와 나, 여동생 모두 서로 폭발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남은 일정을 해냈다. 삿포로역 쇼핑몰에서 엄마가 그렇게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우동도 사드리고, 호텔 근처에 예쁜 공원이 있어서 밤낮으로 산책하고, 엄마가 힘들다, 재미없다 하면 숙소로 모셔다 드리고 나와 동생만 따로 나와서 둘이 여행했다(진작 이럴 걸). 


사실 몇 년 전에도 엄마, 나,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교토, 오사카 여행을 한 적이 있고 그 때도 비슷한 트러블이 있기는 했다. 그 때는 셋이서 하는 해외 여행이 처음이라서 그런 줄 알았고, 이번엔 트러블 없이 잘해내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니 엄마와 다시 여행하는 일이 있을까 싶고(엄마가 나랑 여행하고 싶을까? 나는 엄마랑 여행하고 싶을까?), 행여라도 엄마와 다시 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하나 싶다.




* 나만 엄마와 여행하고 트라우마가 생긴 게 아닌가 보다.

곽민지 작가가 부모님과 여행하고 쓴 <걸어서 환장 속으로>라는 책이 있는데

제목부터 공감대잔치다.










아무튼 나는 저렴한 가격에 혹해 오랫동안 품어온 로망 하나를 포기한 죄(!)로 여태껏 기술한 몸 고생, 마음 고생을 했고, 이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홋카이도에 다시 다녀오리라는 새로운 로망이 생겼다(안 좋은 기억 때문에 두 번 다시 안 가기에는 홋카이도가 너무 공기 좋고 쾌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물론 그 때는 엄마도 여동생도 동반하지 않고 나 혼자 가야지. 그 때는 오지은 작가처럼 혼자서 홋카이도 보통열차 타고 여행해야지. 게살이 듬뿍 들어 있는 에키벤도 먹어보고 오비히로의 디저트 가게를 누비며 스탬프 투어도 해봐야지. 밤하늘의 별이 보이는 게스트하우스에도 묵어보고, 세상의 끝 같은 해안가에 서서 다시 이곳에 오게 해달라고 손을 모아 기도해야지.



이렇게 써놓고 엄마가 또 여행 상품 저렴한 거 나왔다고 하면 통장 깨고 엄마랑 패키지 여행 갈지도 몰라, 나란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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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평론가가 2014년에 발표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읽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다. 평론가가 쓴 책은 어렵다는 편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내 독력(讀力)이 지금만 못했기 때문이었는지, 하여간 여러 번 읽기를 시도했다가 끝까지 못 읽고 중간에 관뒀다. 다행히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끝까지 다 읽었다. 읽다가 못 읽겠으면 전처럼 중간에 관둬야지, 라고 생각한 게 오히려 끝까지 읽는 힘이 된 것 같다(글 한 편의 길이가 짧기도 하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저자가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들 중에 짧은 글들을 모으고 손봐서 엮은 책이다. 90편 조금 못 되는 글들을 슬픔(1부), 소설(2부), 사회(3부), 시(4부), 문화(5부)로 나눠 배치했다. 지난 7,8년의 글을 모아보니 슬픔에 대한 것들이 많아서 제목에 '슬픔'이라는 단어를 넣었다고 한다. 슬픔에 대한 글을 유독 많이 쓴 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때문이기도 하고 2017년 1월 23일 저자의 아내가 수술을 받은 일 때문이기도 하단다. 


저자는 슬픔에 관해 쓴 글을 모은 제1부에서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일의 어려움 혹은 불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해 공감한다, 연민한다는 식의 표현을 쓴다. 하지만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백 퍼센트 공감하거나 연민하는 일은 어렵거나 가능하지 않다. 예컨대 부모를 잃은 사람의 슬픔은 부모를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자식을 잃은 사람의 고통은 자식을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똑같이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 해도 각자의 관계와 경험은 저마다 다르기에 쉽게 공감하거나 연민하기 어렵다(이를테면 부모와 사이가 좋았던 사람이 부모를 여읜 경우와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부모를 여읜 경우).


그렇다고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위한 노력을 영원히 포기해야 하는가. 그건 절대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고 직접 창작하고 공유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서로의 슬픔을 공부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슬픔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두운 영혼에 잠식되고 만다. 세월호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 앞에서 피자며 짜장면 따위를 폭식했던 인간들과 다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죄없는 국민 수만 명을 학살하고도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칭하는 몰인격한 존재가 되고 만다.


건축학을 잘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면(紙面)이 곧 지면(地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글을 짓는다. 건축을 위한 공정 혹은 준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중략)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중략)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5쪽)


케어란 누구에게 시간을 주는 일 (6쪽)


아내가 수술을 받은 날 우리는 병실에서 껴안고 울면서도 나는 아내와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고 그 슬픔으로부터도 아내보다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 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8쪽)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앎' 그 자체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 (38쪽)


소설이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진다. 삶의 진실이라는 게 이렇게 미세한 것이구나 싶어 겸손해지고, 내가 아는 건 그 진실의 극히 일부일뿐이구나 싶어 또 쓸쓸해지는 것이다. (57쪽)


내 사랑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운명에 의해서, 또 한 번은 나에 의해서. (76쪽)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이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115쪽)


대통령(大統領)이 대통령(大痛靈)이면,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204쪽)


어렵고 지루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거나 그것을 칭찬하는 평론가를 볼 때 화가 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들로부터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가장 대중친화적인 소설이나 영화라고 칭송되는, 그러니까 쉽고 재밌기만 한 작품을 보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작품들이 나를 포함한 대중을 '아무 생각 없이 재미만을 탐닉하는 소비자' 정도로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아서다. 나는 거기서 '지갑을 열어. 그리고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즐겨. 넌 원래 그렇잖아.'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3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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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경의선책거리에서 열린 세계 책의 날 행사에 다녀온 지 오늘로서 일주일이 지났다. 작년 세계 책의 날 행사는 우천으로 취소되었기에 올해 행사가 무척 기대되었다. 다행히 올해는 날씨도 좋고(행사 후반에는 비가 내린 듯하지만) 참가한 출판사나 관람객도 많아서 성황리에 잘 마친 듯하다.


주최측으로부터 장미꽃 한 송이와 책 한 권도 선물받았는데, 선물받은 책이 마음에 안 들어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니 어떤 분이(아마도 행사요원이었던 듯하다) 책을 2만원 상당의 책 교환권으로 바꿔주시고 계셨다. 냉큼 달려가 가지고 있던 책을 반납하고 교환권을 받아서 읽고 싶었던 책 두 권을 샀다. 


그 중 하나가 북유튜버 '겨울서점' 김겨울 님의 책 <독서의 기쁨>이다. 책 읽는 장소, 책 읽는 자세, 책 읽을 때 사용하는 도구, 책에 밑줄을 긋는지 안 긋는지, 필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등등 책과 관련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책 중반에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독서 역사를 회고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공부 외에 허락된 유일한 오락이 독서였고, 그게 취미이자 습관으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렀다는 고백에 깊이 공감. 중고등학생 때는 참고서 사고 남는 돈을 모아서 책 사고, 대학생 때는 알바해서 번 돈으로 책 사고, 현재는 버는 족족이 책을 산다는 고백에도 '이건 내가 쓴 글인가' 싶었다.


저자는 전자책 어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TTS 기능을 이용해 책을 '듣기'도 한다는데, 눈으로 읽을 때 쉬이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면 귀로 들어보라는 조언에 솔깃했다. 줄간격이 좁아서 오랫동안 멀리했던,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을 전자책으로 구입해 읽어볼까 생각 중이다. (겨울서점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GPfjyMkN7uAmzfRpXL-AxQ)





어젯밤엔 Y 인터넷서점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통해 알게 된 웹툰 작가 의외의사실 님의 책 <퇴근길엔 카프카를>을 읽었다. 만화라서 금방 읽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정말 금방 읽었다. 근데 만화라서 금방 읽었다기보다는, 만화에 나오는 책들을 대부분 읽었기 때문에 금방 읽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이 책은 저자가 민음사 블로그에 연재한 <의외의사실의 세계문학 읽기>를 엮은 것이다. 연재 기간 동안 저자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한 권씩 읽고 해당 문학 작품에 관한 만화를 그렸다. <체호프 단편선>, <등대로>, <오셀로>, <죄와 벌>, <위대한 개츠비>, <픽션들>, <순수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페스트>, <오이디푸스 왕>, <보이지 않는 도시들>, <변신, 시골의사>, <나를 보내지마>까지 모두 열세 편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필사적으로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교롭게도 저자가 고른 열세 권 중 두 권빼고 다 읽었다(!!).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인지 다 알고 읽으니 아무래도 책장이 술술 넘어갈 수밖에.


당연하게도 읽지 않은 책에 관한 만화는 상대적으로 찬찬히,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으로는 <이방인>밖에 읽지 못했는데, 알베르 카뮈의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저자가 소개하는 작가의 생애나 작품에 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이런 인용문이 나온다.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에서, 264쪽)


요즘 한창 A형 간염이 유행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것 - 잘못된 전통이나 관행, 조직의 적폐 등등 - 은 병균이고 부자연스러운 것 - 건강, 청렴, 순결성-은 일정 정도의 의지와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경지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닿았다. 소설 자체의 줄거리나 내용을 보면 딱히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뭔가 주제 사라마구 느낌?), 대체 이 문장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궁금해서 이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은 강추 도서이므로 큰 사이즈로 첨부한다.


<퇴근길엔 카프카를>을 다 읽고도 잠이 오지 않아서 읽은 책이 <박완서의 말>이다. 이 책도 Y 인터넷서점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김하나 작가님이 입이 닳도록 찬사를 보내셔서 구입했는데 정말이지 너무너무너무 X 100000 좋다. 필독서로 지정해야 함.


이 책에는 박완서 작가님이 1990년대에 했던 일곱 번의 인터뷰 혹은 대담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여러 지점이 흥미로운데, 첫째는 '작가의 탄생' 면이다.


박완서 작가는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문학 소녀였고, 서울대 국문과에 진학하기도 했던 박완서 작가가 결혼 후 평범한 전업주부로 지내다 마흔이 되어서야 <나목>으로 등단해 소설가로 커리어를 쌓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더욱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결혼 후에도 한국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남성 작가들이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읽을 때마다 '이런 여자가 어딨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진짜 여자, 현실의 여자, 살아 있는 여자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계기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이 엄청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는 알게 된 것이었다. 알려진대로 박완서 작가와 박수근 화백은 젊은 시절 미군 PX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사이다. 박완서 작가는 박수근 화백이 얼마나 고생하며 생계를 잇고 그림을 그렸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박수근 화백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거래하며 엄청난 돈을 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박수근 화백에 관한 논픽션을 쓰기로 했고, 쓰다 보니 한계에 부딪쳐 픽션으로 장르를 바꿨는데, 그렇게 탄생한 <나목>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둘째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1931년생인 박완서 작가는 페미니즘을 알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다고 말한다. 여자라서 집안에서 차별받은 적도 없고, 아들딸 구분 없이 교육시킨 어머니 덕분에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의 몸으로 국내 최고 학부까지 입학했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부당하고 불공평한 지가 눈에 더 잘 들어왔고, 나중에는 상대적으로 덜 부당하고 덜 불공평했다고 여겼던 자신의 삶에도 엄연한 차별의 요소가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전쟁 통에 아버지와 오빠가 죽고 엄마와 딸인 나만 남자, 엄마가 "집안이 바로 되려면 네가 죽고 오빠가 살아남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한 식이다. (이는 사노 요코가 한 경험과도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가부장제 안에서 엄마가 딸을 온전한 딸로서가 아니라 아들 대신, 또는 아들이 되지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경험은 나 역시 한 적이 있고 지금도 하고 있기에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본인은 페미니즘에 관해 잘 모른다고 말하지만, 말씀 하나하나가 페미니즘 개론서에 나올 법한 문장들이고, 어떤 발언은 2019년을 살고 있는 현대 여성들도 미처 가닿지 못하는 생각들이라서 귀감이 되었다.


"사실 기득권을 쥔 쪽은 깨어날 필요가 없는 거구요. 남자가 기득권자인 건 확실하잖습니까? 그 점은 정권의 관계하고도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경우 절대로 정권을 쥔 쪽이 그냥 내놓는 법은 없었잖습니까? 결국 빼앗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려면 조금은 더 슬기롭고 표독스럽지 않으면 안 돼요. 달래지 않아도 주는 사람은 없어요." (93쪽)


"말로써 쉽게 남녀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젊은 여자들, 만만한 남자를 만나서 쉽게 평등을 이루려는 약은 여자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135쪽)


"페미니즘을 의식했다기보다는 남자들이 쓴 인기 있는 소설의 여성상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이건 남자가 원하고 바라는 여성이다 생각해서 여성의 실제 모습을 보이고자 한 것이었죠. 남자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환상적으로 처리된 것에서 벗어나 실제 여성의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 주체적인 소설이 바로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145쪽)


"효부는 있어도 효녀는 없거든요.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를 들어보면 시어머니가 방문했을 때에는 극진하게 해드리고, 친정어머니가 다녀가실 때에는 찬밥 같이 먹고 차비 5000원을 드릴까 말까 고민했다고 해요. 이런 것을 우리 스스로 미덕이라고 느낍니다. 효란 자기를 길러준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우러나는 가장 인간적인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효자는 효부 아내만 두면 저절로 되는 거예요. 남자도 여자 부모에게 똑같이 할 수 있나요?" (164쪽)


셋째는 '기분 나쁜 인터뷰어에 대처하는 태도'다. 김하나 작가님도 팟캐스트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에는 아주 기분 나쁜 인터뷰어가 둘 나온다. "남자의 경우에는 군대라는 게 있고 더러는 운동권에 휩쓸리기도 하고 반항도 하게 되는데 여자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거든요.", "아버지와 오빠로 대표되는 남성의 부재라는 것이 선생님에게 뭔가 운명적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같은 발언은 인터뷰어의 현실 인식과 역사관, 나아가 인성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발언이라고 생각하는데, 박완서 작가는 대놓고 화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주 굽히지는 않는 태도로 인터뷰를 이어간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일본어 세대인 작가가 우리말에 대해 느끼는 애정의 깊이다. 얼마 전 다른 책에서 박완서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나 투르게네프 같은 작가들의 책을 일본어로 읽었다는 글을 읽고 새삼 놀랐다. 생각해보니 박완서 작가는 1931년생이고 일제 강점기에 학창시절을 보냈으니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어로 된 책을 읽었던 건 당연하다. 해방 후 작가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우리말로 쓴 글을 배우고 시조나 가사 같은 전통 문학을 공부하며 국문학도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깊은 만큼 글을 쓸 때에도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했다는데, 앞으로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게 얼마나 공들여 쓴 단어이고 문장이고 글인가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책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90년대까지만 해도 얼마나 책이 잘 팔렸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들도 많이 나와서 흥미로웠다. "세칭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20판에서 30판씩 꾸준하게 팔리고", "<서 있는 여자>는 한 여름에 2,3만 부씩 팔린다.", "지금이야 소설 같은 거 10만 부쯤 팔리는 게 우습지만" 같은 발언을 보며 세상이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새삼 느꼈다. 요즘은 1만 부도 안 팔리는 책이 허다한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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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19-04-30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의 글을 참 좋아하는데, 꼭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키치 2019-05-01 09:45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8년 알라딘 서재의 달인/북플 마니아로 선정되었다는 소식 듣자마자 선물이 언제올까 기다렸는데 드디어 왔습니다. 선물은 도라에몽 다이어리와 피넛츠 일력, 모비딕 머그입니다. 도라에몽 다이어리가 화면보다 예뻐서 완전 심쿵 ㅎㅎㅎ 사이즈도 큼직해서 실용적일 것 같아요.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그나저나 예전에는 리뷰/페이퍼/TTB 각 분야에서 달인/마니아를 따로 선정했는데, 이제는 서재의 달인과 북플 마니아도 통합해서 선정하네요. 그만큼 마니아로 선정되는 분들의 수가 줄고, 마니아 선정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뜻일 텐데, 과연 저는 올해에도 알라딘 서재의 달인/북플 마니아로 선정될 수 있을까요 ㅎㅎㅎ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듭니다 ㅠㅠㅠ


선정되신 분들 모두 축하드리고, 알라딘 서재지기 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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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1-0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라에몽 다이어리와 피너츠 일력, 좋은 것 같아요.
키치님,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밤 되세요.^^

키치 2019-01-03 07:1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

syo 2019-01-0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축하드립니다!! 저하고 완전히 똑같은 구성으로 받으셨네요^-^ 컵은 랜덤발송인 것 같던데

키치 2019-01-03 07:16   좋아요 0 | URL
syo 님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 한 해도 좋은 책 많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

카알벨루치 2019-01-02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하곤 컵만 달라요 축하합니당 ^^

키치 2019-01-03 07:16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메오 2019-01-02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컵 종류가 여러가지군요 ^ 축하합니당^^

키치 2019-01-03 07:16   좋아요 0 | URL
컵만 랜덤이군요 ^^ 감사합니다!

해피클라라 2019-01-04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