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적 낙관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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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물을 돌보는 '식집사'는 아니지만, 식집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아한다. 이유가 뭘까 곰곰 생각해 봤는데, 대상의 안녕을 바라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 애정과 노력을 들이는 모습이 숭고하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소설가 김금희의 두 번째 산문집 <식물적 낙관>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저자는 출간 직후 공개한 네이버 오디오클립 '김금희 라디오'에서 칠십 개의 식물을 키우고 있다고 고백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칠십 개라니. 하루 한 번씩 물만 줘도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은데, 그걸 몇 년째 '하는' 마음이 대단하다.


저자가 식물에 빠져든 시기는 마음이 힘들었던 때와 거의 비슷하다. 전업 작가가 되기 전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던 저자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사무실에 있는 식물들에게 물을 줬다. 팬데믹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전보다 심한 고독과 우울, 무기력을 느낄 때에도 식물들을 보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식물을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무리 열심히 돌본다 해도 모든 식물이 뜻대로 잘 자라지는 않는다. 잘 자라고 있는 식물도 부분적으로 상해서 잎을 떼거나 줄기를 잘라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니 힘들다고 비관적인 생각에 지지 말고 낙관적인 생각을 더욱더 움켜쥘 것. 이것이 저자가 식물을 돌보면서 배운 지혜다. 


책에는 저자가 돌보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 외에 식물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 이야기, 저자처럼 식물을 좋아한 작가 이야기(헤르만 헤세, 버지니아 울프 등), 어떤 나무나 꽃을 보고 연상한 추억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의 뒷마당에 심어져 있던 목련나무를 추억하는 글이 특히 좋았다. 뒷마당이라고 해도 어른 두 명이 겨우 설 수 있을 만큼 좁은 곳이라서 어떻게 보면 나무로서는 갇혀 있는 셈이었는데, 그런데도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불화, 장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을 잊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저자는 이때부터 식물이 주는 낙관의 기운을 알았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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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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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 특히 여성 작가를 발견하는 데 있어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만큼 유용한 책이 없는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어슐러 르 귄의 말>의 주인공 어슐러 르 귄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았지만,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다. 이를테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 전 나름 오랜 무명 기간을 겪었다는 것, 도교와 불교 등 동양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불교의 경전인 <금강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등이다.


이 책은 작가 데이비드 네이먼이 어슐러 르 귄을 총 세 번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각의 인터뷰는 어슐러 르 귄의 소설, 시, 논픽션을 주제로 한다. 어슐러 르 귄이 소설과 에세이를 쓴 건 알았지만 시를 쓴 건 전혀 몰랐다. 어슐러 르 귄에 따르면 작가의 스타일은 리듬으로 만들어지며, 리듬을 학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다. 언어는 결국 소리이므로, 소리의 특성을 무시하는 글은 좋은 글이 되기 어렵다.


작가에게 있어 문법은 중요하지만, 문법이 곧 당위성 또는 도덕성인 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문장 수준에서 여성이 지워지는 문제다. 가령 영어에서 남성을 의미하는 단어 man은 사람,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쓰이지만,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 woman은 그렇지 않다. 어슐러 르 귄이 1968년 고정된 성 개념이 없는 행성을 무대로 한 소설 <어둠의 왼손>을 발표했을 때 주어를 he로는 쓸 수 있지만 she로는 쓸 수 없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he나 she로 지칭할 수 없는 개인을 they로 지칭할 수 있게 된 요즘은 해당 작품의 주어를 they로 하여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


어슐러 르 귄은 정치적으로 전쟁과 폭력에 반대할 뿐 아니라 창작에 있어서도 전쟁이나 폭력과 관계된 표현을 지양한다. '갈등이 창조를 낳는다', '삶은 전쟁이다' 같은 상투적인 표현도 갈등을 당연시하고 전쟁을 미화한다고 보아 경계한다. SF와 판타지 문학을 하나의 장르로 평가절하하는 관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문학은 원래 신화, 전설, 민담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어떤 작품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깎아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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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아 만든 천국
심너울 지음 / 래빗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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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후기에 '(MBTI) N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판타지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즐기고 나서 이에 푹 빠져 현실 세계에 마법이 진짜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걸 읽고 '그래서 내가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나 게임에 좀처럼 몰입을 못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MBTI상 N의 반대인 S성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S라서든 아니든 판타지 설정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하는 나지만, 이 소설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마법과 마력이 존재한다는 설정만 제외하면, 이 소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사회상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명목상의 계급은 없지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서울 사는 사람과 지방 사는 사람,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등 다양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구분하고 이에 따라 차별하고 혐오하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허무한은 이런 세상에서 A-등급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2001년 창원 출신. 바닷가에서 회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부모를 둔 자식으로서는 과분한 스펙이다. 이 스펙으로 한국에서 제일 이름난 대학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무한은 입학식을 치르기도 전에 좌절한다. 마력만 따지면 자기보다 훨씬 못한 아이들이 돈 많은 부모를 둔 덕분에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을 받아서 자신과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과 다르게 돈 걱정 없이 사는 동기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던 무한은 자신의 마력이 엄청난 상품 가치를 지녔다는 걸 알고 위험한 선택을 내린다. 이 밖에도 마력 때문에 위기에 빠진 2군 야구 선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력을 연구하는 연구원인 딸, 마력을 상쇄하는 힘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여자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된 형태로 이어진다. 판타지의 힘을 빌려 현재의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 이런 소설이라면, S인 나도 앞으로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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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3
아모스 오즈 지음, 윤성덕 외 옮김 / 민음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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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의 이스라엘. 일라나는 학교에서 폭행 사건을 일으킨 아들 보아즈의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 남편 알렉스에게 편지를 쓴다. 미국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알렉스는 곧바로 돈을 주고 싶어하지만 알렉스의 변호사는 일라나의 현 남편 미쉘이 우파 단체에 소속된 시온주의자라는 점을 들며 거절을 권한다. 이 와중에 보아즈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미쉘은 전 남편과의 편지 교환이 잦은 아내 일라나를 의심한다. 일라나는 알렉스의 돈을 받는 건 괜찮지만 알렉스와 편지를 교환하는 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미쉘에게 실망한다. 부모들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동안 보아즈는 점점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가 1987년에 발표한 소설 <블랙박스>는 등장인물의 편지를 이용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서간체 소설의 형식을 따른다. 소설의 배경인 1970년대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화도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편지로 소통하는 모습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각 인물의 사연이나 생각, 감정 등을 더욱 밀접한 위치에서 알 수 있어 좋았고, 편지에 기록된 내용뿐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해독하는 재미도 있었다. (중심인물인 일라나 - 알렉스 - 미쉘이 주고받은 편지도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알렉스와 그의 고용인(변호사)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웃음을 주었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일라나와 그의 전남편 알렉스, 현 남편 미쉘, 알렉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보아즈를 중심으로 한 가족 소설로 읽히지만, 각각의 인물이 이스라엘의 역사 또는 현 정치 세력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역사 소설 또는 정치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부유하고 상대적으로 현대적, 진보적인 알렉스가 유럽계 유대인 아쉬케나지를 상징한다면, 전통적, 보수적인 미쉘은 북아프리카 출신 미즈락히를 상징한다. 이들의 자식인 보아즈는 둘 중 어느 누구의 길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데 이는 작가인 아모스 오즈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아모스 오즈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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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불가능
신은혜 지음 / 제철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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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31일 친구와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저자는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내기를 했다. 1년 동안 인생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도전해 이기면 상금 50만 원을 받는 내기였다. 첫 번째 도전 과제로 운전 면허 취득을 정한 저자는 그 해의 열 달이 지나도록 시험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회사 일이 바쁘고, 틈틈이 여행도 다녀야 하고, 재미있는 영화, 드라마가 너무 많다는 핑계로 미루고 또 미뤘기 때문이다. 그런 저자와 달리 친구는 스스로 정한 과제를 거의 다 해낸 눈치였다.

그제서야 다급해진 저자는 문제집을 주문하고 학원에 등록했다. 과연 저자는 친구와의 내기에서 이겼을까.


신은혜의 <가능한 불가능>은 SBS 라디오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의 코너 중 하나인 '김혼비의 취향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책이다. 충동적으로 친구와 일 년에 하나씩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에 도전하는 '할 수 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저자는 총 9년에 걸쳐 운전을 비롯해 피아노, 영어, 수영, 하와이 1년 살기, 방통대 입학, 한국어 강사 교육, 글쓰기 등을 해냈다. 어느 것도 만만하지 않은데, 결코 길지 않은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냥 초보자도 아니고 자신에게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결국에는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니 매우 큰 자극이 되었다. 성과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각 단계의 과정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각각의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북으로도 훌륭하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저자가 그때 그때 마음이 동해서 도전한 일들이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있어 디딤돌 역할을 한 것이다. 저자가 운전을 배우고,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곡 'Summer'를 연습하고, 중학교 때 포기한 영어를 공부할 때만 해도 자신이 몇 년 후 퇴사하고 하와이로 갈 줄은, 그곳에서 친구를 차에 태우고 운전하고, Summer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하와이 대학교에서 영어로 강의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런 식으로 삶의 궤적들이 연결되는(connecting the dots) 전개가 좋았고, 그러한 전개가 (허구가 아니라) 저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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