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 - 에코페미니스트의 행복혁명
강남순 외 지음, 여성환경연대 기획 / 시금치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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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농사짓는 라봉 님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좀 더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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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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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왜 끌렸는지 한두 마디로 설명하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차별과 억압과 무지와 위선에 맞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우리 대신 우리보다 앞서 싸워준 이들이라고 하겠다. 글을 깊이 읽은 내 친구는 그들을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글보다 먼저 사진 속 표정과 미소와 주름살들을 먼저 '영접'하곤 했다고 말했다. 나는 낯선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책머리에 중에서)


어린 시절 나는 위인전 읽기를 좋아했다. 어떻게 하면 위인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해서 위인전을 읽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들이 '어쩌다' 위인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시류에 영합하고 주류에 편승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더 잘 산다. 그런데도 굳이 남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 비주류를 자처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를테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이라든가, 왕마저 자기를 견제하는 걸 알면서도 전장에 나선 이순신이라든가,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따르며 편하게 살지 않고 혹독한 예술가의 삶을 택한 황진이라든가,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목숨을 내던져가며 독립운동을 감행한 수많은 열사들, 의사들의 마음... 나는 이들이 굳이 이렇게 살다간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고 여전히 궁금하다. 


<가만한 당신>의 저자인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도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안고 있지 않았을까. 이 책은 저자가 2014년부터 연재하고 있는 동명의 기획물 중에서 서른다섯 편을 선별해 묶었다. 저자는 인권과 자유, 차별 철폐와 페미니즘, 조력 자살과 동성혼 법제화 등 우리 사회에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가치를 위해 투쟁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부고 기사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지면을 통해 소개해왔다. 처음엔 부고는커녕 종이 신문도 읽지 않는 나로선 콘셉트도 낯설고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 또한 생경했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업적은 결코 낯설지 않다. 그중에는 내가 오늘날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왜 쉽고 편한 길을 두고 어렵고 불편한 길을 택했을까. 왜 자기 "생을 거의 완전연소"하면서까지 고단하게 살았을까. 그 답이 있을 거란 기대를 안고 책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ABC 블로그의 한 칼럼에서 그는 "장애인을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냐"라고 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아니라 전면적 캐릭터로서 장애인을 본 적 있느냐고, 몇 번이나 봤냐고 물었다.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시청이나 도서관 혹은 극장에서 장애인을 얼마나 자주 보느냐고도 물었다. (중략) "내 장애인 친구는 자기가 성인이 되면 죽거나 장애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를 지닌 성인을 단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이다." (p.35-6)


책에 나오는 이들 대부분은 (당연하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사회의 차별과 불합리에 맞서는 삶을 살았다. 호주의 코미디언 겸 방송인이자 칼럼니스트였던 스텔라 영(1982-2014)은 불완전골형성증이란 희귀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1미터가 되지 않는 키에 골절상을 달고 지내야 했지만 장애인 인권운동가이자 인기 코미디언 겸 방송인, 칼럼니스트로 맹활약하며 눈부신 삶을 살았다. 영국의 여성인권운동가 데니즈 마셜(1961-2015)은 어렸을 때 지속적으로 양부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양할아버지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집에서 도망쳐 나온 그녀는 이후 영국 젠더폭력 피해 여성 구제 단체 '이브스'를 설립했고 자신처럼 성폭력, 가정폭력에 시달린 여성들뿐 아니라 강제 성매매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구제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처럼 고통받는 이들을 돕거나 이들을 대변해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용감하고 위대하다.


1970년대 이와나미 문고에서 열린 한 연구회 일화도 있다. 당시 우자와는 근대경제학의 모델과 수식으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명쾌하게 분석해 경제, 사회학자들을 매료한 뒤 칠판에 커다란 X표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모델로는 일본 사회의 진정한 모습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경 파괴나 공해 등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 모델에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p.85)


기득권층으로서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데도 굳이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는 삶을 택한 이들도 있다. 우자와 히로후미(1928-2014)는 일본의 최고학부인 도쿄대 교수라는 지위와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의 높은 명성을 누리며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에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 <나리타란 무엇인가> 등 일본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폐해를 지적하는 책을 연이어 발표하며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각종 기업 및 단체로부터 괴롭힘과 협박을 당하고 외출할 때마다 경찰의 비호를 받아야 했다. 근대경제학을 옹호하지 않고 오히려 한계와 폐해를 지적하는 연구방향 때문에 결국 노벨경제학상도 수상하지 못 했다.


저자는 만일 우자와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 활동에 전념했더라면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노벨경제학상도 수상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환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었지만 사회를 위해 자신에게 더 유리한 자리를 포기했다. 그는 학문의 보수적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자신이 설정한 경제학자로서의 경계를 지켰고, 그건 그에게 노벨상으로도 채울 수 없는 커다란 야심이었다." 자신이 사회의 차별과 불합리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어도 간접적인 피해를 인식하거나 피해자인 타인의 아픔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같이 투쟁했다는 점에서 이들 또한 용감하고 위대하다.


<월경의 꿈>에는 하렘의 여성들이 춤을 추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부드러운 춤사위를 자랑하던 '미나'라는 여인에게 화자가 요령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 모양이다. 미나는 "저 여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화가 나 있고, 그 분노의 인질이 되어 있어. 그건 슬픈 운명이지. (비록 여기는 감옥이지만) 더 열악한 감옥은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이야"라고 답한다. (p.281)


파테마 메르니시(1940-2015)는 현재 지구 상에서 여성의 인권이 가장 낮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집에는 여성들의 감옥으로 불리는 하렘이 있었고 여기에는 그녀의 외조모와 어머니, 친척 여성들이 '갇혀' 있었다. 이들은 나이가 들고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어도 남자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혼자 외출하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언젠가 그녀의 어머니는 "이른 새벽 인적 없는 거리를 걸어볼 수만 있다면...... 그 무렵 도시의 색깔은 푸르스름하겠지? 아니면 노을 질 때처럼 불그레할까?" 하고 물었다. 하렘의 여자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유학하며 어머니와 달리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이슬람 문화권에서 온갖 성 억압 제도들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바쳤다. 돈 있지, 학벌 좋지, 꿈에 그리던 자유 얻었지. 나 같으면 실컷 돈 쓰고 하고 싶었던 것 해보면서 살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메르니시는 말했다. "더 열악한 감옥은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이라고. 더운 여름에 히잡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외출할 때 남자 가족을 동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른 새벽 인적 없는 거리를 걸을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뭘 하고 뭘 보고 뭘 느끼든 오로지 비용만을 따지고 사회적 인정을 고려하는 나야말로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 갇혀있는지도 모른다. 제 발로 걸어 나온 감옥으로 다시 들어간 그녀야말로 진정 자유롭고 주체적인 영혼인지도. 옳다고 믿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눈 돌리지 않은 이들이야말로 지옥 같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천국에 더 가깝게 만든 진정한 위인들이 아닐까. 결코 '가만한' 삶을 살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가만한' 삶을 살고 있는 나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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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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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35인 한 명 한 명의 삶을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내용도 좋고 문장도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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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 욕쟁이 꽃할배의 더 까칠해진 시골마을 여행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빌 브라이슨 지음, 박여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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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주로 책을 읽는 편이다.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텔레비전은 안 본 지 오래되어 어떤 프로그램이 인기이며 유행하는 농담이 뭔지도 잘 모른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면 끽해야 인터넷이나 SNS를 하면서 낄낄대는 정도인데 요즘에는 인터넷이나 SNS에도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이 많아서 꺼려진다. 나 편한 시간에 내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최고다.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산책2>은 기분전환하고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전 세계적으로 1600만 부가 넘는 책을 판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가장 재미있게 글을 쓰는 기자 겸 작가'로 평가받는 빌 브라이슨의 이 신작은 저자가 20년 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것을 기념하여 쓴 <발칙한 영국 산책>의 속편이다. 이번에 저자가 선택한 여행 루트는 영국 최남단 보그너레지스에서 최북단 케이프래스에 이르는 자칭 '브라이슨 길'. 저자가 들른 곳 중에는 대도시도 드물거니와 사람들이 익히 하는 관광지, 여행지도 많지 않아 여행 가이드북으로서는 다소 미흡하지만, 영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아 오랫동안 거주하며 영국의 문화와 풍습을 익혀온 저자가 20년 만에 영국을 종단하며 관찰하고 생각하고 느낀 바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실 이 책은 '재미가 쏠쏠하다'라는 표현이 가볍게 느껴질 만큼 엄청 웃기다. 빌 브라이슨이 원래 독설과 유머의 대가로 유명하긴 한데, 이 책의 소재가 영국의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보니 동네마다 구별되는 특색이 딱히 없기도 하고 특별한 사건사고도 없었던 탓인지 저자는 뭔가 꼬투리 잡을 만한 요소나 그냥 지나치기 힘든 사건이 생기면 어떻게든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온갖 과장을 덧붙이고 상상력을 발휘해서라도. 


길거리에 무심히 쓰레기를 버리는 청소년들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점원도 빌 브라이슨의 눈에 걸리면 얄짤없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네티즌도 물론 '저격 대상'이다. 저자는 이스트서식스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동네인 파보로소를 구글에 검색했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보로소 카페에 대해 혹평한 것을 보고 놀랐다. 어느 여행객은 파보로소에 다녀온 소감을 '완죤 실망'이라고 썼다. 이걸 본 저자 왈. "맞춤법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멍청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공공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말길 바란다. 우리는 옛것과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맞춤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무엇을 남기고 지킬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에 관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건 옳지 않다. 트립어드바이저의 댓글 식으로 말하자면 '심이 걱정슬업다'". 


이 책을 통틀어 제일 좋아하는 대목은 빌 브라이슨이 보그네에서 버스에 탔다가 만난 청년에 대한 인상이다. "모자챙은 다리미로 누른 듯 평평했으며 앞에는 반짝이는 홀로그램이 부착된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모자 정면에는 대문자로 'OBEY(복종하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어폰은 요란한 음파를 그의 텅 빈 두개골로 보내고 있었다. 그의 두개골 속 공간은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별과 별 사이만큼이나 공허할 것이다. 그 공허한 두개골 속을 한참 여행하다 보면 건조한 티끌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그의 뇌다." 말을 섞은 것도 아니고 청년이 무례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예술적으로' 욕을 하다니. 이쯤 되면 저자의 별명이 '욕할배'인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고 빌 브라이슨이 시종일관 우스갯소리만 하고 욕만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영국을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공책을 꺼내 영국의 좋은 점들 목록을 생각나는 대로 적다가 끝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복싱데이(영국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쉰다), 시골의 술집들, 커스터드가 들어간 잼 롤리폴리, 심지어 "넌 개불알 같은 놈이야"라는 말이 친근감이나 감탄의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이나 지뢰밭에서 다리 한 쪽이 날아가도 '내 뭐랬어. 이럴 거라고 했잖아'라고 말할 듯한 영국인들의 성품마저도 저자의 눈엔 사랑스럽다. 


저자는 영국의 이러한 매력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변하거나 사라져가는 것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한다. 영국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영국에 살고 싶어서 시민권을 취득하기까지 한 자신의 눈에 비치는 영국의 장점들을 정작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만 살아온 영국인들이 모르는 것에 저자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갑자기 이 지점에서 로버트 할리가 한국에 관한 책을 쓰면 어떤 내용이 실릴지 궁금해진다). 


변하거나 사라져가는 것이 영국뿐이랴. 저자가 태어난 미국도, 내가 사는 한국도 끊임없이 변하고 무엇이 계속 사라진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변화를 멈추거나 사라지지 않게 막는 일이라기보다는 변하기 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잊지 않고 추억하는 일뿐이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빌 브라이슨처럼 말이다. 부디 빌 브라이슨도 오래오래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좋은 책을 많이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사랑하는 영국이 지금보다 더 변하기 전에, 그가 아끼는 영국의 매력이 더 사라지기 전에 영국에 가보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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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 1 - 권력의 기록
하이옌 지음, 전정은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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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 대량의 수도. 진귀한 물건이 가득하고 왕의 기운이 넘치는 이곳은, 성문마저 다른 곳과는 달리 유난히 우뚝하고 튼튼했다.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드는 사람들 틈에 푸른 덮개를 씌운 쌍두마차 하나가 눈에 띄지 않게 끼어 있었다. 마차가 한들거리며 느릿느릿 나아가다가 성문에서 몇 장(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가리개가 걷히고, 새하얀 옷을 입은 깔끔한 생김새의 젊은이가 내렸다. 그는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고개를 들고 성문 위의 '금릉'이라는 글자를 바라보았다. (p.11)


올해 상반기에 나는 중국 드라마 <랑야방>에 푹 빠져 있었다. 전에도 중국 드라마를 본 적이 있지만 <랑야방>은 차원이 달랐다. 총 54부에 걸쳐 '떡밥'을 하나씩 하나씩 전부 다 수거하는 짜임새 있는 줄거리는 미국 드라마의 그것을 연상케 했고, 절제된 듯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연출은 일본의 시대극을 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중국 사극 특유의 철저한 고증과 화려한 복식을 보는 즐거움은 극대화되어 동서양 드라마의 장점을 모두 합친 듯했다. 삼십 년 넘게 살면서 본 드라마 중에 가히 최고라고 부를 만했다.


<랑야방>은 드라마 <랑야방>의 원작 소설이다. 2011년 중국 온라인 소설 연재 사이트에서 큰 인기를 끈 뒤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2015년 중국에서 동명의 드라마가 제작, 방송되어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드라마 <랑야방>은 국내에도 수입되어 중화TV 개국 이래 최고의 시청률을 갱신하며 '중국드라마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배경은 가상의 나라인 양나라. 주인공 매장소는 무술의 고수들을 여럿 거느린 강호의 종주이자 "그를 얻는 자, 천하를 얻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돌 만큼 지략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랑야방의 서열 1위다. 그런 매장소의 목표는 단 하나. 죽마고우이자 양나라의 황자인 정왕을 황위에 등극시키는 것이다. 마침 양나라의 황위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태자와 예왕이 매장소를 자신의 책사로 모시려고 경쟁하는 틈을 타 매장소는 양나라의 수도 금릉에 입성하고 정왕의 곁에 다가간다. 과연 그는 무슨 이유로 정왕을 황제로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매장소는 사실 12년 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소년장수 '임수'의 다른 이름이다. 12년 전 간신들의 음모로 인해 임수의 아버지 임섭이 이끄는 적염군 7만 대군이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임수였다. 임수는 얼굴과 신분을 바꾼 채 강호에서 실력을 다지며 복수를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무르익자 임수는 역적의 아들이 아닌 '기린재자' 매장소로서 금릉에 입성하여 킹메이커 노릇을 한다. 그런데 그가 택한 사람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태자도 아니요 황제를 쏙 빼닮았다고 칭송받는 예왕도 아닌 일곱째 황자 정왕. 성격이 무뚝뚝해 황제가 미워하는 데다가 적염군 사건과 관련이 있어 황위와는 거리가 먼 정왕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매장소는 자신의 진짜 정체마저 숨긴 채 그를 돕는다. 죽마고우에게 권모술수밖에 모르는 책사로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를 도와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절절할까. 그러나 그 마음을 충분히 느낄 여유도 없이, 매장소가 장장 12년에 걸쳐 준비한 복수극은 숨 가쁘게 진행된다. 


흔히 원작 뛰어넘는 리메이크작 없고 소설 뛰어넘는 영화나 드라마 없다고 하지만 이 작품은 다르다. 드라마 <랑야방>의 아우라가 워낙 강해서 이 작품만큼은 드라마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길 권한다. 드라마 <랑야방>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치밀한 플롯과 뛰어난 연출, 복식의 대비를 소설로 느끼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그 대신 드라마 <랑야방>을 보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드라마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드라마에 나오지 않은 세부적인 설정이라든가 배우들의 연기로는 충분히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나 생각이 소설에는 잘 나와 있다. 12년 만에 금릉에 입성한 매장소가 느끼는 회한이라든가 소경예, 언예진 등 가까운 사람들을 자신의 복수극에 끌어들여야 하는 안타까움 등이 작가의 문장으로 자세히 서술된다. 매장소와 그의 호위 무사 비류의 관계는 드라마보다 소설에서 훨씬 애틋하다. 애틋하기로는 매장소와 정왕의 관계가 더한데 비중상 1권보다 2,3권에 더 자세히 그려질 듯하다. 


드라마 <랑야방>을 세 번 정주행한 다음 <위장자>, <후궁견환전>, <소년 양가장>, <타래료 청폐안> 등 몇 편의 중국 드라마를 이어서 보고 나서 한동안 중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식었는데 소설 <랑야방>을 읽으니 드라마 <랑야방>을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마 소설 <랑야방 2>, <랑야방 3>을 읽고 나서도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고 중독성이 강한 줄거리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드라마다. 드라마 <랑야방>의 감동을 새롭게 발견하고 싶은 독자에게 소설 <랑야방>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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