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어둡다. 암흑향이라니... 암흑이라면 캄캄함이고, 향이라는 한자어는 마을, 고향이라는 한자어니까, 제목을 풀어쓰면 캄캄한 마을 정도가 되겠다.


  표지 디자인 역시 검은 테두리에 하얀 바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암흑이라고 해서 전부 까맣지는 않으니... 암흑은 빛을 예비하고, 빛은 다시 암흑을 예비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빛들은 어둠 없이는 우리에게 올 수 없지 않은가. 빛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어둠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 제목인 암흑향은 어두운 마을이라는 의미보다는, 이 어두움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하나같이 어려워서, 또 한자도 많아서, 그리고 고대신화(우리나라나 서양의)들이 맥락없이 (시인에게는 맥락이 있을지 몰라도 내게는 맥락이 없다. 단지 그러한 사건들, 사람들, 존재들, 이야기들을 뒤섞어놓은 듯한 느낌만 있을 뿐) 섞여 있어서, 시집 자체가 암흑향이다. 내겐 조연호 이 시집이 아주 어두운 마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더듬더듬 나아가야 하는, 한 줄기 빛을 애원하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한다.


이 암흑향인 시집에서 어떤 빛을 찾을까? 찾으려고 노력하면 찾을 수 있을까? 이 시집에 유난히 적()이라는 한자어 제목을 단 시가 네 번 나오는데, 이 '적()'이라는 한자어는 부적이라는 뜻이다.


부적, 귀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니고 있거나 집에 붙이거나 하는 물건 아닌가. 즉 부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귀신과 재앙을 늘 의식하고 산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런 세상에서는 귀신과 사람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시집 첫 시인 '적()'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죽어 또 귀신이 된 너와 만나 즐거웠다' (9쪽) 

그렇게 시는 귀신과 함께 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둠이 빛과 함께 할 수밖에 없음을 같은 시에서 '더러운 얼굴로만 깨끗한 얼굴을 닦을 수 있다는 걸 거기서 배웠다'(9쪽)고 하고 있다.


조연호의 시는 독자에게 어떤 애교도 없다. '시'라는 시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는 /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12쪽)


이렇게 조연호 시는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 애교가 없는 시를 다른 말로 하면 독자들의 마음에 드는 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자를 위해서 쓴 시가 아니라 시인이 쓸 수밖에 없는 시를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시인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또는 무의식 저변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잡아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 시를 읽는 우리는 그 시에서 또다른 암흑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디 암흑향인 곳이 이 시집만이랴. 더 많은 암흑향들이 있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암흑향에서도 아주 작은 빛을 찾아 삶을 꾸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떠올랐다. 특히 검은색 계열로 칠해진 그림들. 그 그림들에서 암흑향을 보는데, 마냥 암흑만은 아니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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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15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스코!
그의 그림에서도 향기가 날까요?
세계가 거기에 담겨있다고 하니!
오랜 응시는 감동을 자아낸다던데 여행자는 그럴 시간이 없죠 ㅠ

kinye91 2022-02-15 11:0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림은 잘 몰라서요. 다만 오랜 응시를 통해 감동을 받을 순 있을텐데...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네요.

초란공 2022-02-15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와 함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2-02-15 14: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시집.


  한때 테트리스라는 게임이 유행했었다. 레고 블록 같은 여러 모양의 막대들을 빈 자리에 맞추는 게임.


  그 막대들을 여러 방향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카멜레온은 보호색으로 유명한 동물이니... 둘이 어떻게 연결이 될까 했더니, 변화다. 아니 이 시에서는 변신이다.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변화나 변신이나 자신이 지녔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라진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변신이라고 하니까 왠지 안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보면 그런 생각이 옳았음을 알게 된다.


    테트리스와 카멜레온


컴퓨터 오락인 테트리스를 할 때마다

변하는 세상의 모습 한눈으로 보지

키를 누를 때마다 자유자재로

변신, 변신, 변신을 시도하는 블록들

변신, 변신을 거듭하며

벽돌담 쌓듯이 척척 아귀가 맞는 블록들

나도 그들 닮을 수는 없을까

푸른 빛 보호색으로 감싸

내 자신 위장시킬 수는 없을까

완전무결하게

플러그 뽑힌 채로 마음의 버튼 누르기만 하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세상의 모습과 우울한 생각들도

변신, 변신, 변신을 시도

내 마음은 기쁨

내 마음은 사랑

내 마음은 평화

철철 넘치는 내 마음은 자유

한때 우리들 세계의 전부였던 신념과 철학도

변신, 변신, 변신을 시도

자본주의꽃처럼 피어나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는 없을까

테트리스 테트리스 테트리스

카멜레온 카멜레온 카멜레온


차정미, 테트리스와 카멜레온. 푸른숲. 1994년. 28-19쪽



세상이 변함에 따라 변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의 변화에 빠르게 발 맞추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적응하면서 잘산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도 변신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는 반어다. 그런 변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세상의 모습과 우울한 생각들'에서 시인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변신은 그런 생각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데에 있다. 신영복 선생이 한 말처럼 시인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때문에 세상은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변신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세상에 자신을 맞춘다.


신영복 선생의 말을 다시 빌리면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은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부귀와 영달만을 추구할 뿐이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들은 변신의 귀재다. 그리고 변신의 귀재들이 넘치는 사회에서는 힘없는 사람들은 더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들은 변신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형식적인 민주화를 실질적인 민주화로 착각하고, 이제는 그런 민주화 운동은 할 필요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정치계를 좌우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 정치계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모여 있으므로... 그 지혜로 시류에 맞게 변신들을 잘해왔으므로. 변신의 귀재들만 모였으므로, 그들은 자본주의꽃처럼 피어났고,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세상은 얼마나 변했는지.. 그들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었는지 생각해 보자. 그들은 자신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렇게 변신의 귀재들이 모여서 세상을 바꾸었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나? 시인은 그런 질문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그 점을 알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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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걸이에 걸린 양'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양의 털로 옷을 만드니, 옷걸이에 걸린 양은 옷걸이에 걸린 옷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어반복이다. 옷걸이에 걸린 옷이라고 하면. 옷걸이란 말 자체에 이미 옷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옷보다는 양이 더 좋겠고, 양털은 식물성보다는 동물성을 의미하니, 이때 양을 양털로 만든 옷이 아니라 바로 그 옷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확장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옷걸이에 걸렸다는 말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하지만 제약을 받고 있음을 말하고,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결국은 옷걸이에 걸릴 수밖에 없는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옷걸이는 옷장 속에 있으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옷장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는 옷장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옷장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현대문명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산다고 착각한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사고 쓰고 버린다고 여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현대문명의 한 부분이 아닐까? 현대문명이 그렇게 할 수밖에 만들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시들을 보면. 시들이라고 한 이유는 특이하게도 [옷걸이에 걸린 양]이라는 시집에 같은 제목의 시가 7편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같은 제목의 시를 계속 반복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마치 지하철 2호선의 순환선처럼 돌고돌고 하는 삶일 뿐이다. 옷걸이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다시 옷걸이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삶. 시인은 이렇게 내용을 통해서도, 또 형식을 통해서도 현대문명의 삶은 결국 옷걸이에 걸린 삶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벗어나 살 수 없듯이 결국 시작과 끝이 있는 삶인데,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그 틀 속에서 다른 삶을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다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시 속에서 찾기 힘들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며 틀 속에 갇힌 삶이긴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두더지 앞니


  앞니의 성장이 멈춘 두더지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산언덕 아래 살았다 마을의 지하 생활자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무료하게 지하 셋방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이유도, 달빛도 없는 밤 족제비를 피해 바위 아래에서 한없이 자라나는 이빨을 갈아 없애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 두더지는 어느 밝은 대낮 지상으로 나왔다가 눈멀어 잡혔고 장독대의 빈 작은 항아리에서 살다 죽었다 나는 지하의 집과 지상의 집과 항아리의 집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다만 두더지의 앞니가 계속 성장하기만을 기대했을 뿐이었다.


주창윤, 옷걸이에 걸린 양, 문학과지성사. 1998년. 82쪽


이 시에서 '다만 두더지의 앞니가 계속 성장하기만을 기대했을 뿐'이라는 말... 이는 옷장에 갇혀 있는 삶, 항아리 속에 갇혀 있는 삶일지라도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자신만의 의지를 버려서는 안 된다 말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현대문명에 갇힌 삶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는 희망으로 시집을 맺고 있다. 


한편 한편의 시들이 현대문명 속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자율성을 지닌 존재,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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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05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은 [장판에서 푸코읽기]에서도 소제목으로 ˝양떼들˝이라는 비유적 단어를 쓰기에 ˝양˝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했었는데 kinye님께서 ˝옷걸이에 걸린 양˝ 뜻풀이 너무나 공감가게 해주셨네요^^

kinye91 2022-02-05 12: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22-02-06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06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목이 참 자극적이다. '오'라는 감탄사부터... 무엇에 대한 감탄인가? 이때 감탄이 좋은 쪽의 감정일 수도 있지만, 안 좋은 쪽의 감정일 수도 있다. 마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는 소리. '오'


  '그자'라는 말에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사람'이 아닌 '그자'다.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다. 그러니 '그자'라고 한다. 


  '입을 벌리면' 문장이 끝나지 않았는데 끝났다. 앞의 주어인 '그자'와 연결지으면 결코 긍정이 될 수가 없다. '그자가 입을 벌리면' 내게는 해로운 감정, 좋지 않은 일만 생긴다. 그러니 제발 그자의 입을 다물게 하라.


  이렇게 외치고 싶지만 그자는 입을 다물지 않는다. 그자는 끊임없이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토해낸다. 뱉어낸다. 입은 언어를 제외하고는 안으로, 밑으로 내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반대 역할을 할 때 우리는 무척 부정적이 된다. 싫어하는 마음을 지닌다.


생각해 보라. 입에서 안으로, 또 내려가지 않고 밖으로 위로 나오는 물체들을... 이럴 때 쓰는 말, 내뱉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자는 누구일까? 왜 그자가 입을 벌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기나. 그만큼 그자는 입을 벌리고 수많은 것들을 뱉어내지 않았던가. 시집 제목이 된 시를 보자.


어떤 고백


  고백컨대 나는 그를 저버릴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뼈마디 앙상한 손으로 내 심장을 숙주 삼아 동맥과 정맥의 뒤바뀐 운명을 노래하는 그를 저주해본 적이 있다 듬성듬성 이 빠진 폐허를 과부 가랑이마냥 벌리고 헤벌쭉 웃는 그를 오, 심장 따위를 헐값에 넘겨버린 적이 있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안개도 아니고 권태도 아닌 것들이 쥐 썩는 냄새처럼 속절없이 부풀어올라 내 망루 끝을 새나갔다 그때면 세계의 바깥이 암담하여 미래의 애인마저 저주스러웠다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케르베로스가 지키는 문 저편에서 죽은 자들이 죽지 못해 구더기처럼 기어올라왔다


  썩은 내장을 거슬러 위장을 지나 식도를 타고 사력을 다해 터져 나오는 독거미 독거미들, 기어코 존재의 망루 밖에 게워지는 천 년 전의 어떤 고백, 만 년 전의 어떤 비명이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김지혜,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열림원. 2006년. 41쪽.


해석은 포기다. 이해도 포기다. 그런데 마음에 남아 있다. 마음 속에 담아두기로 한다. 언젠가 이 시가 마음에서 머리로 올라올 때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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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레길 또는 둘레길을 걸으면 가끔 길을 잃는다. 갈림길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우리나라 길에서 이정표는 이상하게도 중요한 지점에 없는 경우가 있다. 다 와서 또는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라 헤매게 된다.


  이때 사람들 발자국이 많이 나 있는 길로 가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발자국이 많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갔다는 이야기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은 올레, 또는 둘레길이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보이는 길을 찾기가 힘들어진 요즘, 앞서 간 사람들은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자국을 남기는데 그 자국이 바로 리본들이다. 나뭇가지나 전봇대 또는 담장 틈에 리본들을 묶여 놓는다.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인지 잘 모를 때 길바닥을 보지 않고 -사실 우리나라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도 웬만하면 포장이 되어 있다. 아스팔트 아니면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으니, 발자국을 남기기는 이제 힘들다. 그래서 선인들의 발자국을 좇아가다란 말보다는 선인들의 리본을 따라가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 눈 높이에 있는 앞을 보게 된다.


색색의 리본들이 이리로 오면 된다고 길을 알려준다. 그렇게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게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준다. 고창환 시집을 산 이유는 제목이다. 제목이 '발자국들이 남긴 길'이다. 사람들이 자꾸 다녀서 발자국들이 포개지고 포개지고 또 연결이 되면 길이 된다. 그런 길을 따라가면 나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된다.


요즘처럼 사회적 거리두기 운운하는 때, 이런 발자국이란 낱말을 만난 자체도 반갑다. 그래서 망설임없이 구입. 읽기 시작. 이 시집 도처에서 발자국들이 나오지만, 발자국은 발자국으로 남겨두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발자국으로 이해하기로 하다.


시인은 우리들에게 언어를 통해서 발자국을 남겨놓는 사람이니, 시를 읽는 일은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일.


고창환 시인의 언어 발자국, 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만난 시가 '내 동료 K 선생'이다.


 내 동료 K 선생


바르게 사는 일이 찬밥인 세상에서

그는 기꺼이 찬밥을 택했다

나는 아무래도 찬밥이고 싶지 않아서

목구멍에 걸린 밥알을 애써 삼키며 살지만

그는 찬밥도 거침없이 삼킨다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지키면서 사는 일이 어디 쉬운가

상한 밥알까지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세상 앞에서

기꺼이 찬밥이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사는 길은 셋뿐이다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우며 살거나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기꺼이 찬밥이 되는 것이다

바르게 살려면 찬밥이 되어야 하고

찬밥이 되지 않으려면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워야 한다 나는

목구멍의 밥알 선생이고 그는 찬밥 선생이다


고창환, 발자국들이 남긴 길. 문학과지성사. 2000년. 67쪽.


'찬밥과 상한 밥과 목구멍에 걸린 밥', 이렇게 세 종류의 밥이 나오는데, 세 유형의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쉽게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배제된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 시에서 '찬밥'이라고 하면 밥 종류라고 하기보다는 남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목구멍에 걸린 밥'은 살기 위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상한 밥'은 앞뒤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찬밥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니,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는 사람이다.


너만 잘났냐? 부터 시작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고이지 않는다 등등... 적당히 어우러져 살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목구멍에 걸린 밥'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중간만 가라는 말, 나서지만 말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하다못해 우리가 남이가, 좋은 게 좋은 거야란 말도...


그래서 '찬밥'이 되는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실제로 경외하여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틈이 없어라고 하거나 저 사람에게선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찬밥'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꼭 인간미가 없는 사회는 아니다. 그들은 바르게 살 뿐이지 인간미를 잃고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목구멍에 걸린 밥이나 상한 밥을 먹는 자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찬밥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그에 동조하는 부류들이 열심히 그 말들을 실어나르기 때문일 수 있다.


상한 밥을 먹는 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합리화하는 족속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족속들. 이들에게 찬밥은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을테다.


상한 밥을 먹는 자들에겐 찬밥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밥인지 생각하면 되니까.


정치인들이 서로를 상한 밥까지 먹는 인간들이라고 비난하곤 하는데, 모두가 상한 밥을 먹으면서, 하다못해 목구멍에 걸린 밥조차도 안 되는 족속들이면서 '찬밥'이 되고자 하는 이는 너무도 드문 이 현실에서... 누가 누가 상한 밥을 잘 먹나 경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 시 읽어보자.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선거들에서 우리는 어떤 밥을 선택해야할지, 시인이 시를 통해 남겨준 발자국을 보자. 우선 보기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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