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 확 줄어들었다. 전면등교, 정상등교라는 말이 나왔지만, 코로나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 듯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2년이 지나 3년째, 학교라는 곳에 휴일을 빼고는 매일 등교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휴일이 아닌데도 원격수업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등교하지 않게 되었다.


  그랬더니 학력저하 운운하면서, 원격수업의 질이 나쁘다고, 원격수업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이곳저곳에서 큰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문제는 오로지 학력인 것처럼. 더 다른 문제들이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성적, 성적이다.


그래, 학생 때는 공부를 해야지. 공부도 때가 있는데, 하는 말들이 있지만, 과연 학교가 아이들 성적만 책임지는 공간이었던가. 학교는 성적을 올리기 위한 공간이기보다는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장소 아니었던가.


자기와는 다른 학생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 또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과 갈등하고 화해하면서 어우러지는 방법, 교사라는 어른들, 그것도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치거나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교사들을 만나면서 사회 적응력을 키우는 장소. 그런 장소가 바로 학교 아니었나.


어떤 사람은 자조적으로 학교는 아이들의 식사(잠) 장소이자, 사교 장소라고 말한다. 밥 먹고 친구 만나러 학교에 온다고...교육기능보다 탁아기능이 더 강하다고... 이게 자조적으로 할 말인가? 오히려 학교는 이래야 하지 않을까?


친구와 만나고 놀고, 같이 밥 먹는 장소. 그런 학교...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그런 학교라는 장소를 잃고 오로지 성적, 성적만 하는 공간으로서의 학교만을 생각하게 되지 않았는가.


도처에서 들리는 학력저하 운운하는 말들은 학교를 오로지 성적으로만 존재하는 곳으로 여기고 있지 않나. 코로나로 인해 등교하는 날수가 줄어들어 학생들이 서로 어울리고, 다양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런 만남,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함기석 시집 [수능 예언 문제집]을 읽으며 우리나라 학생들이 갇혀 있는 수능이라는 감옥을 다시 생각한다. 수능으로 대변되는 성적, 성적, 그리고 그 성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학교. 아니다. 학교는 그래서는 안 된다. 예전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책도 영화도 있지 않았던가.


학교는 학생들이 행복할 수 있는 장소이자,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장소다. 그래야 하는데... 오로지 수능이라니.. 수능에 갇힌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시집을 읽다보면 너무도 잘 알게 된다.


'오전 8시, 마시면 배탈 설사 나는 흰 우유 같고' (모의고사 보는 날-10쪽)라고 표현할 정도로, 수능이 아닌 모의고사 자체도 학생들에겐 견디기 힘든 존재다. 그러니 이런 청소년들은 어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우리한테 그동안 뻥쳐서 미안했다는 / 사과나무나 한 그루 심으시지'(사과나무-17쪽)라고... 하지만 어떤 어른도, 특히 권력을 쥐고 있는 어른들은 더더욱 학생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니 학생들은 '아, 전국 모의고사 날은 / 전국이 모의해서 고등학생을 사망시키는 날 / 갑자기 내가 정육점 식당 갈고리에 걸린 / 9등급 고깃덩어리 같았다' (우울해서-25쪽)고 표현하게 된다.


더 많은 시들이 있지만, 이 시집 1부만 어른들이 제대로 읽어도 지금처럼 교육제도를 유지하지는 않을테다. 감정이 있는 어른들이라면... 적어도 아이들이 공각기동대라는 영화에서 킬리언 소령이 했다는 말인 '나의 정신은 인간이다 그러나 / 나의 육체는 인공 신체다'(공각 기동대-36쪽)를 비틀어서 '나의 육체는 인간이다 그러나 / 나의 정신은 인공 기계다' (공각 기동대-37쪽)라고 하게 하지는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학교는 오로지 성적을 위해서 학생을 가둬놓는 공간이 아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온갖 실험들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소, 또 많은 실수,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장소다. 그러니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애오라지 성적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잃고 있음을 생각하고, 교육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시집 1부를 읽으면 지금처럼 학교가, 교육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4부에 가면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의 아픔이 오롯이 전해지는 시들이 많다. 아직도...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힘들게...지내고 있으니...  그러니 수능이 끝나면 교과서는 쓰레기가 되고 말지... 이 시처럼.


       책 무덤


수능 끝난 학교 옥상에

책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 있다

알록달록 형광펜으로 칠해진 수많은 책이

수백 마리 가오리처럼 쌓여 있다

책 무덤 속에서 들려온다

글자들 우는 소리, 천둥 치던 여름밤 빗소리

절망에 빠져 흐느끼던 친구들 목소리

하늘은 옥상 난간까지 내려와 잿빛 수의처럼 펄럭이고

수능 마친 책들이 봉분처럼 쌓여 있다


함기석, 수능 예언 문제집, 창비교육. 2020년.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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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므로, 먹을거리를 담는 밥그릇은 우리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다.


  그런데 밥그릇이 빛난다는 말을 시인이 하고 있다. 매일 닦아서 빛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바깥 부분의 빛남이 아니라 안쪽의 빛남이라면, 이는 밥그릇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채워지지 않은 밥그릇, 빛을 흡수하지 못하고 반사하기만 하는, 텅텅 빈 밥그릇. 한번도 풍족하게 채워지지 않은 밥그릇.


  그런 밥그릇조차도 지키려고 아등바등댈 수밖에 없는 존재. 최종천 시집을 읽으며 밥그릇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 풍족하지 않은 밥그릇조차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밥그릇은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한다. 내 밥그릇에 밥을 채워주는 존재에게 묶여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최소한 내 밥그릇이 비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주 조금밖에 주어지지 않는 밥그릇을 걷어찰 수도 있어야 하는데, 이 시를 읽으며 기본소득을 생각한다.


       투명

 

혀로 빛나게 핥아놓은 밥그릇에는

허기가 가득 차 있다

허기는 투명하지만 잘 보인다

뼈가 앙상한 것을 보면

이빨은 이제

밥그릇도 씹어먹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개들이

씹던 목줄을 뱉어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 손가락을 철망 안으로 넣어주었을 때

녀석은 절대로 물지 않았다

내가 밥을 준다는 투명한 의식이

녀석을 밥그릇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두 끼나 세 끼를 주고 싶지만

나는 사장의 명령에 따라 한 끼만 주고 있다

나는 회사의 수위

개는 밤에 내가 할 일을 대신한다

사원들이 퇴근할 때, 개집 문을 열어놓아

불투명한 밤을 투명하게 밝혀놓아야

안심하고 잠잘 수가 있다

간밤에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감들 사이에서 녀석이 잡아놓고

다 먹지 않은 의문 하나가 피를 흘리고 있다

내가 받는 임금은 아주 적다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

그러니까, 개밥 정도인 것이다

개의 그 깊은 낮잠 속에 고여 비치는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최종천,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 2007. 32-33.


노동자들의 소득을 유리지갑이라고 하기도 한다. 소득이 확연히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출 것이 없다. 사실, 얼마를 버는지 다 알려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적은 소득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 시 제목이 '투명'이다. 


없으니 투명할 수밖에... 이제는 누구라도 자신의 밥그릇이 이렇게 빛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밥그릇이 보장된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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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정 하면 개인이 지니는 서정성과 사회의식을 시에 잘 융합시킨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몇 안 되는 시를 읽었을 뿐이지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란 시와 '꽃덤불'이란 시를 읽으면 개인의 서정과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이 시 속에서 잘 어우러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시들을 읽은 기억이 있기에, 그리고 몇몇 구절들이 머리 속에 남아 있기에 신석정 유고시집이 헌책방에 나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구입할 수 있었다.


  적어도 실망을 안기지는 않을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최근에 부안을 다녀왔는데, 신석정 시인이 부안 출신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의 생가를 들르지 못한 아쉬움도 있기 때문이었다.


유고시집 제목이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이다. 내가 노래하고 싶다는 말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말인데, 이는 개인 서정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개인적 감정을 단순히 토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신석정 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내 감정에서 우리들 감정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나만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 잘사는 사회여야 하기 때문이다.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피 묻은 발자욱이사

새삼 돌아볼 겨를도 없다

아아라한 만첩청산을

만첩청산을 굽이돌아

철 철 철 흘러가는 

저 푸른 강물을 보리로다.


가슴 깊이 간직해 둔

눈물겨웠던 이별 또한

구름과 더불어 왕래하는

구김살 없는 저 학두루미의

학두루미의 노래에 부쳐

하늘 멀리 보내도 좋으리라.


다만 오는 날을 위하여

벅찬 설계를 가다듬어야 하거늘

오염된 문명을 믿을 수는 없다.


그 문명 속에 허덕일 수도 없다.

소슬한 솔바람 소리로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리라.


별들의 참한 이야기

잇따라 들려오고

꽃그늘에 오고 가는

너그러운 햇살이 지키는 속에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우리 부신 꿈과 생시뿐이로다.

                                           -전북일보 1973.1.1.


신석정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창비. 2007년. 130-131쪽.


벌써 50년 전에 쓰인 시... 지금 우리 상황에서 다시 이 시를 생각해 보면 과연 우리는 지금 무슨 노래를 부르고 싶을까?


우리가 거쳐왔던 안 좋았던 과거들을 뒤로 하고, '벅찬 설계'를 하고 있는지, 또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고 있는지...


'별들의 참한 이야기 / 잇따라 들려오고 / 꽃그늘에 오고 가는 / 너그러운 햇살이 지키는 속에'라고 그렇게 우리에게도 봄은 오고 있는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부신 꿈과 생시'를 노래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여전히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 삶의 환희... 그런 세상. 그래서 이 시에서도 개인의 마음을 넘어서 우리로 나아가게 된다.


나만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잘사는 세상. 그렇게 과거를 딛고 미래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세상.


봄... 우리 사회에도 진정 이런 봄이 왔을까... 그래서 우리는 시인이 원하던 것과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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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생명이 다했다고 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넘겨준다. 그래서 수많은 삶들이 계속 후대에 쌓이게 된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어쩌면 의식하지 않아도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왔던 삶들이 우리 삶에 덧씌워져 있게 된다.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후생유전이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아니면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개인 유전자 단위를 넘어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밈(Meme)'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2007년 30주년 기념판 제5쇄. 330-349쪽을 읽어보면 '밈'에 관해서 알 수 있다)


나는 나로 살아가지만 이 나에는 수많은 다른 나들이 들어 있는 것. 그래서 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 유일성은 다른 존재들과 관계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 나라는 유일성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 된다.


유병록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특히 '습관들'이라는 시를 보면 더 나에게는 과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태어나기 전부터 몸에 새겨진 습관은 / 내 몸에 살았던 타인의 흔적' (105쪽)라는 시구를 통해, 도킨스가 말한 '밈'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 나는 나대로 살아가지만, 그런 나에는 수많은 남들이 있음을, 그런 남들이 나에게로 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 '나'를 만들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습관들'이란 시에서 '밈'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렇게 과거 사람들로부터 '밈'이 형성되는 과정을 '사자死者의 서書'라는 시에서 만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그런 '밈'을 눈에 보이게 시인은 표현하고 있다. 좀 살벌한 시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밈'을 보여주는 시도 드물다 싶은 생각이 든다.


 사자死者의 서書


거기에서는

죽은 자의 피부를 벗겨 가까운 사람들이 나눠 가진다더군

아끼는 책을 장정하고 이름을 새긴다더군


죽은 자는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태어나 글을 익히면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한다더군

그를 대부로 삼는다더군


거기에서는

몇권의 책을 장정하며 성인이 된다더군

결혼을 서약할 때는 책에 손을 얹고

여기 장엄한 생을 두고 맹세합니다, 말한다더군


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더군


거기에서

죽은 자는 몇권의 책이 된다더군

문자의 외투가 된다더군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


삶에 관한 의문이 드는 저녁에 쓰다듬는

한권의 책이 된다더군


유병록,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2014년. 16-17쪽.


그러니 나보다 앞서 산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영향을 준다. 비록 그와 내가 직접 만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습관들'이란 시를 보면 시인은 '습관은 / 앞서 지나간 자들이 남긴 계율 / 나는 나를 번복하지 못한다' (105쪽)라고 표현하고 있다.


굳이 과학을, 도킨스의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과거에 그대로 종속되어 있지도 않지만.


사람이 저마다 유일한 존재인 이유는, 이러한 과거로부터 들여온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에게 수많은 책들이 있고, 그 책들을 통해서 나는 삶을 살아가고, 또 나 역시 나중에 그러한 책이 된다.


도킨스의 '밈'을 이보다 구체적으로, 사람의 육체로 표현해 낸 시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유병록의 이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를 읽을 때 '습관들'과 '사자의 서'를 함께 읽으면서 도킨스의 '밈'을 생각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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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은 사람에 대한 시집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에 대한 시들.


  사랑하고 미워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하나였다가 둘이 되는 그런 사람들. 살다 죽는 사람들.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사람들. 잊힌 사람들.


  그렇데 이 시집은 바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이란 무엇일까?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될 수는 없는 존재.


  사람은 사람을 만나 함께 서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겨서도 안 된다. 사람과 사람은 함께 하더라도 공간, 틈이 있다. 완전히 붙어 있지 않다. 그 틈이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자신을 잃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자어를 보자. 사람 인(人). 서로가 서로를 받치고 있지만, 결코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자기 자리에 서서 상대를 만날 뿐이다. 이 공간, 이 사이, 이 틈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하되, 따로 가고, 따로 서 있되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사라 시집에 나온 사람에 관한 시들 중에 '사람들'이란 시가 있다.  


 사람들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일 때


'들'에는 언제나 틈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장


사람들은

함께 모여 하나이지만


뒤따라가는 사람이

앞선 사람을 잠시 놓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비바람이 일어

그 틈에서

보이지 않는 아픔이 자라는 것은 무언지


모든 '들'에는 틈이 있어

바람처럼 사람이 드나드는

사람들 틈에서


광장이 그래서 숨을 쉬나


이사라,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문학동네. 2018년. 58쪽.


'그 틈에서 / 보이지 않는 아픔이 자라는 것은 무언지'라고 하지만, 그렇다. 다른 존재를 만날 때 순전한 기쁨만으로 만날 수 있을까? 가장 사랑하던 사람도 언제 기쁨만으로 만나지는 못한다.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가끔 벌어진 틈을 보게 되고, 그 틈을 통해 아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아픔으로 인해 더욱 굳건하게 함께 할 수가 있다. 


그래 사람'들'은 틈이 있어야 한다. 그냥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만나고 있는 그런 상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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