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욕이 있었는데, 개 처지에는 이런 욕은 치욕이리라. 왜냐하면 자신들은 그냥 본성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아마도 개 입장에서는 '사람만도 못한 개'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일수도 있겠다.


  오로지 자신만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 다른 동물들이나 존재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이 살아가는 인간.


  인간만의 지구가 아닌데도 마치 자신들이 독차지한 듯이 살아가는 인간. 그래서 지구가 파괴되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세계 곳곳에서 멸종이 되고, 자연이 파괴되고 있음에도 인간은 여전히 성장, 성장, 개발, 개발을 외치고 있다.


아니 도대체 언제까지 성장하겠다고... 인간이 개발하는 만큼, 그들이 외치는 성장률만큼 지구가 늘어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구는 분명 유한한데, 인간의 성장 욕구는 무한하니, 이 차이에서 벌어지는 지구 파괴... 그러니 자꾸만 본성을 잃고 인간에게 매여 살 수밖에 없는 동물들이 하는 가장 심한 욕은 '이런 인간만도 못한 것들'이라는 말 아닐까 싶다. 


갑자기 이런 말이 생각난 이유는 유용주 시집을 읽다가 '개 두 마리'란 시를 만나고부터이다. 이 시 끝부분에 가기 전까지는 왜 제목이 개 두 마리인지 몰랐는데,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비꼼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 좋은 현상을 '견'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때 견은 보다는 의미의 한자어와 개라는 한자어의 발음이 같은 데서 왔다.


개한테는 미안하다. 그들이 이런 말을 들을 필요는 없는데, 예전부터 사람과 가장 가까이 살던 동물이니, 개라는 말을 좋지 않은 의미로 쓰고 있음을 너그럽게 양해해주었으면 한다.


개 두 마리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까지 살았다 여름에 아버지 본적지로 이사했다 어머니 고향은 여수 바닷가이다 경상도 보리 문뎅이라고 야유했던 코찔찔이들이 금방 불알친구가 되었다 사춘기 시절에 식당 주방이나 공장, 시장에서 일을 할 때 물건이 없어지면 나를 지목했다 전라도 깽깽이라고 놀렸다 전라도 놈들은 의리가 없다고 흰소리해댔다 강릉 유가는 서울살이가 고달팠다 서울에서 18년, 군대 3년은 양평에서,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다음, 서산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서울 선배들은 자민 놈이 올라왔다고 놀렸다 아내는 충청남도 사람이었고 당연히 처가는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큰집은 부산, 누나와 조카들은 40년 가까이 인천에서, 동생은 아이들과 수원에서 숨쉬고 있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태어난 게 죄였다 우리 안의 편견과 선입견은 숨어 있다가 틈만 나면 튀어나온다 내 아이는 어디 출신인가


유용주,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 문학동네. 2018년. 32쪽.


이 시에 나오는 개 두 마리는 바로 '편견과 선입견'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출신지에 따라서 판단하는 나쁜 습성. 동물들은 적어도 이런 편견과 선입견은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개 두 마리라는 표현은 개를 그렇게 보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습관적으로 썼던 비속어를 한자어로 차용했다고 보면 된다.


사람들이 지니기 쉬운 안 좋은 습성이 바로 '편견과 선입견'이다. 학생들이 입시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이유도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대학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다. 세상에 학창시절에 문제 잘 풀던 학생이 사회생활도 잘할 거라는 편견과 선입견.


또 특정 지역 사람들은 어떨 것이라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쉽게 하는 그런 지역 감정들. 또 세대에 따라서 구분하는 관점들... 세상에 나이가 같으면 생각도 행동도 같은가? 태어나 사는 마을이 같으면, 또 같은 학교를 나오면 서로 같아지는가? 아니다. 같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말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언론에서 또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서 너무도 쉽게 남발이 되기 때문에, 은연 중에 사람들 머리 속으로 들어와 박히기도 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쓰는 말들 사이에 이런 표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계속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내 안에 '편견과 선입견'을 키우고 있지 않은가.


요즘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개들은 가족이다. 그러니 '개'라는 말은 욕설로 쓰기 힘들어졌다. 마찬가지로 사람 사는 세상에서 민주화된 세상에서 지역, 학벌, 연령, 성별은 차별이 되면 안 된다. 이것들이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시에 나오는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시인은 그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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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삶을 크기로 재고, 비교할 수 있을까? 네 삶은 위대한 삶이고, 내 삶은 그렇지 않은 삶이라고 이야기하거나 그 반대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삶을 그렇게 나눌 수 있을까?


  삶에 '작다'는 말이 적용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삶이든 그 삶은 자신에게는 가장 큰 삶이고, 가장 위대한 삶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폄훼되거나 무시당할 수 없는 존귀한 삶.


  하지만 사람들은 위대한 삶이라는 말을 쓰고, 또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삶을 훌륭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 눈에 드러나 보이는 삶들. 또 그렇게 드러내려고 하는 삶들이 많고, 그런 사람들은 남 눈에 잘 띠게 된다. 또 이런 사람들 삶에 눈을 주게 되면 자기 삶에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 삶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삶들이 지금까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왔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삶이 없다면 과연 큰삶이라고 하는 삶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위대한 삶은 보이지 않는 삶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수치나 돈으로 환산이 되지 않는 노동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삶에서도 이런 그림자 노동과 같은 삶이 있다. 그런 삶이 있음으로 해서 다른 삶들이 돋보이거나 존재할 수 있는데도, 잘 보이지 않는 삶.


시를 읽다보면 이렇게 놓치고 있던 삶을 만나게 된다. 그 삶을 우리 눈에 보이게 만들어주는 시들이 있다. 이번에 읽은 윤일현의 시집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에는 그런 시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나비'란 시를 읽으며 그림자 노동과 같은 삶을 보게 되었다.


    나비


나비의 삶은 곡선이다


장독대 옆에 앉아 있던 참새가

길 건너 전깃줄까지

직선으로 몇 번 왕복할 동안

나비는 갈짓자 날갯짓으로

샐비어와 분꽃 사이를 맴돈다


아버지는 바람같이 대처를 돌아다녔고

엄마는 뒷산 손바닥만 한 콩밭과

앞들 한 마지기 논 사이를

나비처럼 오가며 살았다

나비의 궤적을 곧게 펴

새가 오간 길 위에 펼쳐본다

놀라워라 그 여린 날개로

새보다 더 먼 거리를 날았구나


엄마가 오갔던 그 길

굴곡의 멀고 긴 아픔이었구나


윤일현,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 시와 반시. 2019년. 14-15쪽.


사람들 삶에만 해당하는 시가 아니다. 내 삶에서도 크다고 여겨지는 일들, 작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많은데,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 풍부한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내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소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사실. 그렇게 눈에 확 들어오는 삶들과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나를 만들어왔던 삶들이 지금 나를 있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시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크고 웅장함을 추구하는 삶도 좋지만, 그 삶이 있기 위해서는 나비처럼 작고 여린 존재가 수없이 많이 작은 거리를 왕복하면서 이루어낸 삶이 있음을... 그런 삶을 바라보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시를 읽으며 이렇게 보이지 않던, 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 시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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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좋을 때 그때를 있게 만든 존재를 잊기 쉽다. 그냥 지금에 취해서 마냥 그랬다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좋음에는 좋지 않음이 반드시 있고, 좋지 않음에는 좋음이 따를 수 있다.

 

  활짝 핀 꽃을 보면서 그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보태준 존재들이 있기에 꽃이 필 수 있다는 사실.

 

  마찬가지로 내 성공은 나만의 성공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 그것이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수많은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지금 내 성공이 있게 된 것이다.

 

그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지금 막 피어난 꽃에게 시인은 이렇게 당부한다.

 

 꽃이 피는 너에게

 

사랑의 시체가 말했다

 

가장 잘 자란 나무 밑에는

가장 잘 썩은 시체가 누워 있다고

 

가장 큰 사랑의 눈에는

가장 깊은 슬픔의 눈동자가 있다고

 

봄나무에게서 꽃이 피는 너에게

 

김수복, 외박, 창비. 2012년. 14쪽.

 

성공이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이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 지금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건 너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 덕이라고... 그 점을 명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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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로 배달시키는 일이 많아졌다. 도로 곳곳에서 배달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속도, 속도, 빠르게 빠르게... 조금만 늦어도 배상을 해야 하는 상황. 무조건 빨라야 한다. 배달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도로 상황이 어떻든, 교통 규칙을 지켜야 하든 말든, 오로지 빠르게 제 시간에 배달이 되어야 한다. 그게 규칙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빠를 수 있나? 빛보다 빠를 수 있나? 빨리 빨리를 외치다 제 삶의 여유를 잃고 오로지 빠름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현재 느리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여유가 있다. 그렇게 빨리 빨리를 외칠 필요가 없는데도 그들은 이윤을 위해서 빨리 빨리를 외친다. 자기가 아니라 남에게. 빨리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힘든 사람들에게 자기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서 또는 자기가 좀더 편하기 위해서.


그래서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여야 하고, 먹고 사는 것이 남아 도는 사람들은 더 남아돌게 하기 위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빨리 움직이게 한다. 자신은 느긋하게 있으면서.


빨리 움직여야 살 수 있는 사람과 느리게 움직여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가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을까? 배달 음식을 시켜도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면서 받는 경우보다는 이제는 배달 음식이 왔다는 문자만 남기고 문 앞에다 놓고 가게 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계산이야 예전에는 직접 배달하는 사람에게 주었지만, 지금은 배달을 시키는 순간, 배달료까지 다 계산이 되니, 얼굴을 마주 볼 일이 없다.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


주창윤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특히 1부'너무 늦었다 역으로 가는 쿠팡 트럭' 속에 있는 시들을 읽으며. 줄여서 '배민'이라고 부르는 '배달의 민족'이라는 배송 업체,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배민 라이더'에 대한 이야기들과, 로켓 배송이라고 자랑하는 쿠팡에 속한 배달하는 사람들 이야기.


그들은 배달하는 사람, 빨리 움직여야만 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배달 받는 사람들은 느리게 움직여도 되는 사람.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살고 있는 세계가 다른, 그들이 처한 세계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안드로메다로 배달을 나간다. 갈 수 있을까? 안드로메다가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로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빛의 속도로도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250만 광년이 걸린다고 한다. 시속 1만 광년으로 달려도 250년이 걸리는 곳. 그런 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들이 집으로 돌아와 편안히 쉴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들이 안드로메다에 배달을 빠르게 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배달해야 하는 저쪽과 쉴 수 있는 이쪽의 거리. 안드로메다와 지구의 거리... 그 거리에서 빠르게, 빠르게, 삶을 소진해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집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특히 제목이 된,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와 '안드로메다에서 오는 배민 라이더'를 읽으면 마음 한 켠이 찡해 온다.)


결국 안드로메다는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된다. 다른 존재들이 살고 있는 다른 곳. 결코 지금처럼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 이만큼 사람들 사이에 거리가 있다. 그래서 주창윤의 이 시를 읽으면서 빠르게 배달하는 사람들의 고충도 읽혔지만, 거기에 더해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삶이 있음을, 그런 삶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음을. 



사회의 노력이 함께 해야만 안드로메다와 여기의 거리가 좁혀지고, 안드로메다가 갈 수 없는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갈 수 있는 세계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누구는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자기 삶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고, 누구는 가만히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빨리 움직이게 하는 세상. 그들의 빠름으로 자기 안락을 추구하는 세상이 바람직한 세상은 아니고 그것이 개인의 책임은 아니니까, 


제목이 된 시를 감상하면 더 좋다. 이 시에 나오는 기계인간 테레사가 한 말이 실현되지 않도록 하려면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책임을 지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삶들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머나먼 길이다 청량리역에서 안드로메다까지,

별의 여왕에게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마법의 라면을 배달하러

페가수스 별자리를 향해 일만 광년의 속도로 질주한다.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외계인 폭주족들,

향하는 곳이 암흑성운인 줄도 모르고

무한대로 들어간다 큰 코끼리 별과 반딧불 별 사이

스타벅스 커피숍을 지나면

낙태된 자매 별들이 무중력 상태로 떠다닌다.


소행성 벨트를 따라 흘러나오는 미세먼지와

서울에서 뿜어낸 가스가 모여 잉태한

신성新星들 사이에 있는 분식점 은하정에서

라면 한 개와 이천 원짜리 김밥 한 줄을

나는 성급히 먹는다.


천공의 성 라퓨타 계단 아래서 마구 떨어지는 운석들이

우주 아래에 하얗게 쌓인다

기계인간 테레사가

"내 별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 별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군요"라고 말할 때,


나는 이미 밤이 없는 행성을 지나

낮이 없는 행성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주창윤,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2021년. 18-19쪽.



이 시뿐만이 아니다. 2부에 있는 '펀치 머신, 헐歇!' 시들. 3부에 있는 '사우나 출애굽기'에 시들도 좋다. 한 시집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시들이 많기도 드문데, 이 시집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듯이 보여주는 그런 시들이 많아서 마음 속에 콕콕 박힌다.


펀치 머신에서는 이리저리 치이는 현대인의 삶을, 그리고 지친 몸을 싼 값에 쉬게 할 수 있는 사우나 풍경을 통해서 빠름 속에서도 쉼이 있어야 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렇듯 지금 우리 사회 현대인의 모습이 이 시집에 오롯이 들어 있다.


이 시집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삶이 어디에 있도록 해야 하는가? 삶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물을 수 있는가? 개인의 삶에는 사회의 책임이 따라야 하지 않는가? 내 빠름, 내 편안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더 빠름을, 더 힘듦을 요구하는 사회가 바람직한가?  


덧글


너무 감사하게도 시인에게서 이 시집을 받았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한 말 


'언어의 안개를 명징하게 걷어내고 싶었다. / 날 것을 명쾌하게, / 표면적으로, / 그냥 입에 녹듯이,'라고 하고 있듯이 내게 명쾌하게 다가온 시집이다. 


선물을 받은 시집이지만, 시에 대한 감상은 오로지 내 몫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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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론보다 이 시 하나가 페미니즘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집 제목이 된 '여왕코끼리의 힘'도 페미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고, 그러한 여성성을 부드러움과 일치시키고, 그것이 다시 비어있음과 포용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 시집에서도 그러한 여성성에 대해서 다룬 시들이 많다.


  강함을 추구하는 사회는 배제를 전제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약한 것들을 배제하고, 또는 드러나지 않게 하는 사회. 그래서 강함은 딱딱함과 연결이 되고, 딱딱함은 포용성 없음으로, 다양성보다는 단일성, 획일화를 추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덕경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단단함은 곧 죽음이라고. 이걸 우리 생각에 연결시키면 사고의 경직성은 생각의 죽음이니,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그 사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된다고. 그리고 이런 사회는 여성성을 추구하는 사회와는 다른 사회라고.


이 시집에 실린 '연금로(練金爐)'라는 시를 보면 여성성이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그러한 여성성이 실현되지 않는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이론서보다도 더 명확하게 이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를 보자.


     연금로(練金爐)


여자가 여자에게로 면면히 물려주는 유품입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이빨이 들어갑니다

칭기즈칸의 창, 나폴레옹의 칼,

히틀러의 전자포, 루스벨트의 핵폭탄,

식민지에 복제 인간을 대량 사육하고 싶은

남자의 채찍이 들어갑니다


수천만 년 불뚝이는 육식성 근육질들

무쇠 가마 안에서 물엿 끓듯 오래 달여져

펄죽펄죽, 퍽, 퍽,

연금로 안에서 공기 방울을 터트립니다

뎅글뎅글한 헷살들이 터져 나옵니다


붉은 해저궁 같은 연금실 공간에

순금 노을이 햇살을 굴리며 여울질 때


거름망을 통과한 사내아이들이 걸어 나옵니다

순한 쌍떡잎 언뜻언뜻 비치며


......................................그럼에도

역사는 전환점에 다다르지 못한 것 같고,


들춰 보면 늘 고통의 벽화입니다

퉁겨져 나올 듯 어깨뼈가 불거진 아프간 아이들

조막손이로 줄줄이 태어나는 체르노빌 아이들

철조망을 붙잡고 사라진 지평선을 내다보는

킬링 필드의 아이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아이들


나는

연금술 이론 자체를 엎어 버릴까, 말까, 생각합니다

이미 내벽이 얇아지고 군데군데 헐어 버린

오래된 연금로를 깃털 업는 어깨 위로 치켜들고


조명, 여왕코끼리의 힘. 민음사. 2008년 1판 2쇄. 40-41쪽.  


'연금술 이론 자체를 엎어 버릴까, 말까, 생각합니다'라고 절규하는 시인의 목소리. 이는 아직도 세상은 이 시의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힘들고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이 연금로가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고, '내벽이 얇아지고 군데군데 헐어 버'렸다고 버려서는 안 된다. 고쳐야 한다. 이런 연금로 없는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시인도 그 점을 안다. 그러니 이 시집 제목이 바로 힘센 남성성을 거느리고 평화를 유지하려 한다는 내용을 담은 '여왕코끼리의 힘'이지 않겠는가.


다만, 아직도 강함과 배제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연금로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들이 연금로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버리게 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라고...


시 앞부분에서 제시했던 엄청난 폭력성들을 계속 겪을 것이냐고, 우리 후손들에게 그런 세상을 물려줄 것이냐고?  시인의 이 시는 어떤 이론보다도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여성성'이 중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이때 여성성은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여성성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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