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디카詩 한국문학 명저총서
이상옥 지음 / 국학자료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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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디카시'로 검색해 본다. 과연 디카시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는가를 살피는 방법이다. 하나의 장르로 디카시가 자리잡았다면 검색했을 때 많은 책들이 있어야 한다.

 

'디카시'라고 치고 검색을 하니 제법 많은 시집들이 디카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다. 이젠 디카시는 시의 하위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디카시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이상옥이다.

 

처음으로 디카시라는 말을 썼고, 또 디카시에 관한 잡지들을 냈으며, 지방이나 서울에서 디카시 축제를 열기도 한 사람이니, 그의 작품을 시발로 해서 많은 디카시들이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디카시는 사진과 시가 화학적 작용을 해서 하나로 융합한 장르다. 시 따로 사진 따로 놀거나, 시나 사진 중 어느 하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 시와 사진이 합쳐져 다른 존재로, 즉 디카시라는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디카시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 책에서는 디카시에 대한 많은 논의를 모아놓았다. 이상옥 시인이 그동안 디카시에 들인 노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글들이다.

 

그 중 하나, 디카시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디카시는 시인의 상상력이 아닌, 자연이나 사물의 상상력, 즉 신의 상상력으로 시적 형상이 구축되어진, 아직 문자언어의 옷을 입지 않은 '날시(raw poem)'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그 형상을 문자로 재현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52쪽)

 

자연이나 사물이 말을 걸어오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걸어온 말을 시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디카시다. 그러니 사진이 먼저 있고, 시가 나중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연이나 사물에서 느끼는 감정을 사진과 시로 표현하는 것이다.

 

문자에 갇힌 시가 아니라 문자를 넘어선 시, 그것이 바로 디카시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은 지금 시대에는 디카시는 우리 삶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대상이 있다면 언제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그 말에 대해서 문자로 표현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면 되니 말이다. 이것이 디카시가 지닌 장점이다. 그러니 디카시의 문자 표현은 짧다.

 

물론 길수도 있지만 짧게 표현했을 때 더 효과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즉 사물이 내게 걸어오는 말의 울림을 짧을수록 더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카시의 운율은 시조의 운율을 닮아간다고 한다.

 

시조는 짧은 길이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데 (평시조가 3장 6구 45자 내외라고 하니, 짧다.) 디카시 역시 한 컷의 사진과 문자 표현 속에 많은 것을 담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디카시와 친해지면 주변을 잘 살피게 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디카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디카시를 쓰는 사람은 자연이나 사물과 사람의 매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디카시가 정립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시가 너무 난해해지는 이때 우리 삶 속으로 시를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디카시를 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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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3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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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3 1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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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디드 범우고전선 4
볼떼르 지음 / 범우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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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남들이 [깡디드]를 인용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읽게 된 책.

 

어떤 계몽적인 내용이 들어 있을까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당시 유럽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고, 전쟁이라든지, 돈에 대한 욕심, 종교적 타락, 사기 등을 깡디드가 여행을 하면서 겪게 되니, 당시 사회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도라도에서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많이 갖고 온 깡디드가 그 돈으로 자신과 관계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는 하지만, 돈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그 돈을 보고 몰려드는 인간 군상들에 대한 비판.

 

여전히 신분 질서에 얽매여 있는 사람도 있고, 세상은 낙관적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대에 사람들이 우선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먹고 살 것은 스스로 마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이 책의 끝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깡디드가 삶에 대한 답을 얻으려 노승에게 갔다가 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한가해 보이는 노인에게 들은 말.

 

일을 하고 있으면 세 가지 커다란 불행이 우리에게서 멀어지지요. 그것은 즉 권태, 타락, 궁핍이랍니다. (176쪽)

 

그렇다. 현란한 탁상공론은 필요없다.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의존도 또 신에 대한 믿음도 많이 사라진 시대, 깡디드에 나오는 성직자들은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들이니, 종교의 타락도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시대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깡디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린 우리의 뜰을 경작해야 합니다라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깡디드가 도달한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자기 손으로 노동을 해서 자립하는 삶. 그 삶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쟁의 비참함을 서술함으로써 전쟁을 비판하고, 돈을 보고 덤벼드는 온갖 사기꾼들을 서술함으로써 금전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며, 타락한 성직자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종교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성에서 쫓겨나 시작된 여행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끝나는데, 뀌네공드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과정, 결국 돌아오게 되지만, 돌아온 다음에 깡디드는 다른 존재가 된다.

 

허황된 관념을 좇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다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적어도 일을 하면 권태, 타락, 궁핍은 멀어지게 할 수 있을테니. 그러나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다. 적어도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자유의지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는 것. 어쩌면 볼테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장소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 정치가들의 책무이고, 지식인들이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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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6 09: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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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6 1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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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우리교육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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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는 과학소설로 유명한 작가다. 그의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들이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에게 많이 다가왔는데...

 

이 소설 [아이, 로봇]은 로봇소설의 고전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다. 아주 오래 전에, 1940년대에 쓰인 작품이니 얼마나 오래 된 작품인가. 그때는 컴퓨터가 원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지금 시대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또 알파고가 바둑에서 이세돌을 이기고, 지금은 인간들이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도 이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생각할거리를 많이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총 8대(단위를 나타내는 말을 고르기가 힘들다. 기계를 나타내는 '대'라는 말을 쓰기도 그렇고, 사람을 지칭하는 '명'이라는 말을 쓰기도 그렇기 때문이다)의 로봇이 등장하는데, 이 책의 순서대로 읽으면 로봇의 발달 순서를 알 수 있게 짜여져 있다.

 

우선 이 소설에서는 유명한 로봇 3원칙이 나온다. 로봇들이 거부할 수 없는 원칙 세 가지. 이것들이 지켜져야 인간들이 기계에 종속당하지 않을 수 있는데, 과연 그럴까? 이 3원칙이 잘 지켜져도 인간들이 기계에 종속당하는 일은 생기게 된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읽다보면 웃으면서도 무언가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데서 알게 된다.

 

우선 로봇 3원칙을 보자.

 

제1원칙 :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어떻게 로봇에게 위험이 되는지, 또 인간들이 이 3원칙으로 인해 늘 로봇을 잘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 3원칙으로 인해 로봇에게 이용당하고 속기도 하는지가 소설 속 로봇의 이야기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 산업혁명 시대에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같이 로봇을 거부하는 '인간을 위한 사회' 회원들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 소설집 마지막에는 이 3원칙에 더해서 하나의 원칙이 더해져야 함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을 역자 후기에서 아시모프가 나중에 0원칙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0원칙은 '로봇은 인류가 위험에 처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별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인류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니 말이다. 환경 파괴와 같은 경우.

 

처음 '로비'라는 로봇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사람과 로봇이 이렇게 서로를 위하면서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것에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런 로봇만 존재한다면, 인간들이 굳이 인간보다 힘도 세고, 빠르고, 판단도 좋은 로봇을 거부할 리가 없다.

 

그러나 '스피디'라는 로봇에 가면 로봇 3원칙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즉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적인, 또는 그 상황에 가장 알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로봇이 나온다. 인간의 자율성과 로봇의 자율성이 차이나는 간격인데, 이 간격은 곧 메워지게 된다.

 

생각하는 로봇이 나오고, 이 로봇이 자신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로 인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큐티'라는 로봇인데, 이 로봇은 자신의 추론을 활용하여 신을 만들어내고, 자신은 예언자가 된다. 마치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로봇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로봇에 이어서 대장 노릇을 하는 로봇(데이브)도 나오고, 이번에는 거짓말하는 로봇(허비)도 나온다. 그런데 로봇이 거짓말 하는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밖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 인간을 위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지만, 그것이 극한으로 가면 자존심이 강한, 즉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로봇(네스터 10호)도 나온다. 인간과 무엇이 다른가.

 

여기에 지금의 인공지능과 같은 로봇이 나온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심지어 우주선까지 만들어내고 원격조정하는 로봇(브레인). 지금 우리가 꿈꾸는 인공지능 시대를 소설은 이렇게 앞서서 구현하고 있다.

 

이미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로봇 다음에 올 로봇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인 로봇이다.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그러나 인간보다 더 깔끔하게 인간 사회에 적응하는 로봇(바이어리)이다. 시장이 되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로봇까지 나오니... 어찌 이 소설을 과거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상상하고 또 현실로 만들어내는 로봇이 많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로봇들로 인해 일어날 문제점도 선취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을 위한 사회' 회원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연구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을 위한 사회를 위해서 아닌가.

 

그러므로 이 소설에 나오는 문제점들에 대해 깊이있게 고민해 봐야 한다. 너무 무서운 상상을 할 필요는 없지만, 또 인공지능 시대를 무작정 거부해서도 안 되지만, 적어도 발생할 위험에 대해서는 수많은 토론을 거쳐야 한다. 그런 토론 주제로 이 소설은 유용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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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세자의 진짜 공부 라임 틴틴 스쿨 9
설흔 지음, 유준재 그림 / 라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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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다. 책을 펴낸 목적으로 보면 청소년들을 위한 소설임에 분명한데, 읽으면서 과연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현세자의 진짜 공부라고 하면, 우선 소현세자부터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두 가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소설은 그냥 헛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책 속에 갇힌 글들, 사건들, 인물들.

 

소현세자를 알기 위해서는 병자호란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소현세자가 귀국한 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이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있는데, 무더위가 극성인 현재에 나타난 소현세자를 소설의 서술자는 존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말을 건, 알고 있는 존재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찾아야 한다. 이것도 작가가 제시한 공부다)은 조선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몸은 검게 변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211쪽)

 

아마도 독자들로 하여금 이 부분을 찾아 더 공부하라는 의미, 즉 소설로 끝내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전쟁, 그리고 그 뒤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공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래서 이 소설의 말미에 있는 말은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 아픔을 청소년들이 이해한다면 이 소설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리라.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치욕의 역사를 깨끗이 잊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실패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반복된 슬픔의 역사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이니까요. (214쪽)

 

소설은 이중의 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에 만난 두 사람이 있고, 이들 중에 존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 이 슬픔은 어떤 슬픔인가?

 

소설에서는 강화도 앞 바다의 장면이 몇 번 나온다. 그 장면을 통해 서술자인 내게 일어난 비극을 유추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도 싫은, 그러나 꼭 기억해야만 하는 그날의 사건을.

 

  병자년 전쟁 때 강화 앞바다에는 형형색색의 머릿수건들이 둥둥 떠다녔다지요. 머릿수건의 주인들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창과 칼에 찔리거나 화살과 포탄에 맞아 죽었는데도 머릿수건들만큼은 가라앉지도 않고 강화 바다를 오랫동안 둥둥 떠다녔다지요.

  나는 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종이배에도 의지하지 못했던 내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211쪽) 

 

바다와 가족, 죽음... 침몰... 하지만 작가는 내가 겪은 비극을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내 비극을 통해 소현세자를 등장시키고, 병자호란에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드러내고자 할 뿐이다.

 

이름없는 민초들이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불을 내기도 하고, 나라를 탈출하기도 하는 등 얼마나 그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그러나 국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 잘 살게 되었는지, 결국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백성들이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했던 소현세자는 그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라는 것.

 

청나라에 반대한 신하를 낙점해 청나라로 보내는데 인조가 결정한 신하는 겨우 홍문관 교리와 수찬에 불과한 윤집과 오달제였다고 한다. (소설 175쪽)

 

이들이 어떻게 주범이 될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과연 왕을 움직일 만큼 권력이 있었을까? 소설 속 소현세자는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을 지목했을 거라고 한다. 이들은 그 직위로 보아 충분히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지목해 청나라로 보내면 국내에서 계속 왕 노릇을 해야 할 인조가 신하들에게 계속 충성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그러니 인조는 조정에서 중책을 맡지 않은, 아직은 권력의 핵심에 들지 못한 신하들을 지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러니 전쟁의 참화는 위로 갈수록 적어지고 밑으로 내려올수록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소현세자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이런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 그것에 대한 공부, 그것이 진짜 공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공부가 현실에 적용이 되어야 진짜 공부가 되는데, 소현세자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

 

소현세자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나는 그런 아이가 되지 못했습니다. (중략)

  아,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나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역사의 죄인일 뿐입니다. (208쪽)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지... 소설에서 서술자를 죽임을 당한 나로 설정한 것이 그 한 이유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실을 고발했지만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심양장계》,《소현동궁일기》,《소현심양일기》등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어떤 이의 죽음이 등장하는 순간까지만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궁금하겠지만 제 입으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어 스스로 찾아낸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겠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5쪽)

 

소설을 읽으며 소현세자가 하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찾고, 또 소현세자와 짝이 되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나'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가 나와 있는데, 이것이 힌트다.

 

아마도 요즘 청소년들의 검색 능력으로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찾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나'를 서술자로 택했는지도 고민해야 한다. 소설 속 현재에서도 진실은 가려져 있으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어느 세상이나 필요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역사에 흥미를 느껴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면 작가의 목적이 성공한 것이리라. 단지 관련 자료를 찾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을 보고,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진짜 공부가 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더더욱.

 

그렇다면 소설에서 말하는 그 사람의 죽음,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보자... 검색했더니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정명수가 임금을 모독하고 조선 관료들을 업신여기며 횡포를 부리자 1639년 세자시강원 필선 鄭雷卿이 조선에서 바친 은자와 배, 감 등 세폐 물품을 정명수와 김돌시가 몰래 횡령했다는 혐의로 청으로 하여금 처단하도록 꾀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결국 근거 없는 모함으로 몰려 정뇌경은 처형당하고 이후로는 청역들이 일마다 말썽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병자호란 직후(1637~1644) 朝淸 관계에서 ‘淸譯’의 존재  김 남 윤  25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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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적 인간 - 시와 예술의 힘에 대하여
고영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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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예술을 몸에 새긴, 그것을 인문이라고 한다면, 인문적 인간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술적 인간이다. 인간으로서의 무늬를 지닌 인간이 바로 인문적 인간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인문은 사람의 무늬다. 사람의 무늬가 무엇일까?

 

사람이라는 말에서, 삶을 안다는 말을 유추해내는 사람도 있고, 사람 인(人)에서 서로 기대는 존재임을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말로 정의하든,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하든, 홀로 살아가는 존재는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라는 말에는 이렇게 함께 함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인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의 무늬는 바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 서로 만들어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 관계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고영직은 이 책에서 시와 예술을 통해서 인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세상은 비빌리힐스(비빌里Hills)다.  얼핏 읽으면 미국 부자 마을인 비벌리 힐스(= 베벌리 힐스라고 읽는다고 한다. 나는 비벌리 힐스가 더 친숙하다. 영어로 Beverly Hills 이렇게 쓴다고 하니...) 를 떠올리는 말인데...

 

두 가지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는 미국 부자 마을처럼 사람들이 잘 사는 마을을 연상시키는 것-그렇다고 돈이 많은 부자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의미에서겠지만 풍요와 행복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과 도대체 무슨 뜻이지 하고 생각을 하게 하는. 이 말의 뜻을 이 책 뒤에 있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빌 언덕'이라는 우리말에 마을(里)과 언덕(Hills)을 뜻하는 한자와 영어를 조합해 재미있게게 표현하고자 한 말이다. "마을(里)에는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내지는 "마을(里) 자체가 비빌 언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자 한 조합어이다.

  우리 사는 삶터가 '비빌리힐스'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네 삶터는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줌'의 존재론을 구현하고, 내면의 야생성을 회복하는 장소의 혼으로서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323-324쪽)

 

이 비빌리힐스야 말로 인문학이 살아 있는 마을 아니겠는가. 비빌리힐스를 만든 사람들 몸에는 인문이 새겨져 있지 않겠는가. 고정된, 이미 새겨져서 어찌할 수 없는 무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면서 더 만들고 칠하고 고쳐가는 그런 무늬들.

 

이 무늬를 만들어 가는데 사람만큼 큰 역할을 하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만들어가는 무늬. 그런 사람들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존재가 바로 시를 비롯한 예술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예술은 자신의 내면으로만 침잠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신의 내면을 넘어서 밖으로 향해야 한다.

 

예술은 결코 자위 행위가 아니다. 자위를 넘어 서로를 위로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행위여야 한다. 그런 시와 예술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고, 이런 예술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예술비평만 하지 않는다. 예술과 사회, 사회와 사람이, 사람과 예술이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로 맞물려 있다. 이 맞물림을 통해 무늬가 만들어진다.

 

이런 무늬를 인식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적 삶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인문적 인간이다. 저자 고영직은 바로 그런 세상을 꿈꾼다. 아니 거창하게 세상이라고 할 것도 없다.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자신이 만나는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그가 꿈꾸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마을이다. 마을, 사람 무늬, 즉 인문적 인간들이 살아가는 장소인 것이다. 인문적 인간들이 살아가는 마을, 그 마을이 바로 '비빌리힐스'다.

 

고영직이 꿈꾸는 '비빌리힐스' 아직은 멀리 있다. 그러나 멀리 있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비빌리힐스'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여기에 있는 우리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지금-여기에서 만들어가야 함을 깨달은 인간, 그 인간이 바로 인문적 인간이고, 그런 깨우침을 시와 예술을 통해서 할 수 있다는 것, 해야만 한다는 것이 고영직의 주장이다.

 

다양한 글이 실려 있지만, 그 글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비빌리힐스'로 만들자.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그래서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여기에 있는 '나우토피아'를 만들자는 것. 그런 일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고, 그런 사람이 인문적 인간이라고.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가끔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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