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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땅과 하늘이 만나는 곳. 다른 말로 하면 땅의 끝. 그리고 새로운 공간의 시작.

 

지평선에 서 있다는 얘기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다른 곳을 바라본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른 곳으로 비약을 하기 위한 장소. 그곳이 바로 지평선이다.

 

'지평선에 서서'는 굳이 이렇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 서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지평선을 땅으로 해석해도 된다.

 

땅에 서 있다는 것은 곧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얘기다. 현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이러한 공간 중에서 근원적인 공간으로 시인은 '밭'을 들고 있다.

 

'밭'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공간이자, 우리의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공간이고, 우리의 노동력으로 달라지는 공간이다.

 

이 시집은 "지평선에 서서"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밭시 연작이라고 봐도 된다. 1부가 밭시의 연작으로 되어 있고, 밭에서 시인은 온갖 생명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밭'

 

어느 사이 우리는 이 밭에서 얼마나 멀어졌던가. 텃밭이라고 하여 도시에서도 요즘은 밭을 일구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네 삶의 일부분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바로 '밭'이다.

 

'밭'과 멀어질수록 우리는 땅과 멀어지고 땅과 멀어질수록 척박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결국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땅이다.

 

그런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회는 전망이 밝지 않다. 땅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살림'의 대상이다.

 

그래서 시인은 '밭'에서 시작한다. 밭은 이곳과 저곳을 가르는 공간이자 이어주는 공간이고, 삶의 종착점이자 출발점이다.

 

지금 온갖 추상적인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 말들 중에서 밭만큼 진실한 말이 어느 말인지 찾아야 한다.

 

살림의 말, 그 말은 바로 '밭의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밭'을 아는 사람, 그를 시인은 농부라고 한다. 그런 농부는 우리 시대의 성자다. 시를 보자.

 

무신론자

- 2000년 밭詩 20

 

그는 종교가 없다

그는 기독교도 불교도 모른다

마호메트를 아느냐고 물으면

아이들이 먹는 무슨 과자냐?고

머리를 긁적, 오히려 묻는다

 

하지만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향하여서는 경배한다

 

물사마귀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그는 농부다.

 

김준태. 지평선에 서서. 문학과지성사. 1999년. 31쪽

 

이렇게 밭과 어울리는 사람. 그는 농부다. 성자다. 우리는 모두 농부다. 그런 농부들,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을 시인은 '도서관'이라고 부른다. 누구든 세상의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귀하디 귀한 존재...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모두 하늘이다. 그 하늘과 같은 존재, 바로 밭이다. 그리고 밭에는 모든 것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밭이고 하늘이고 도서관이다.

 

사람의 몸을 노래함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무진장한 도서관이다

장서량이 수천만 권을 넘는

사람의 육신은 그리고 저마다

별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영혼은

아무도 허물어뜨릴 수 없는

지상과 하늘 사이 불켜진 도서관이다

오오 읽어도 읽어도 바닥이 나지

않는 사람의 따스한 몸과 그의 눈물

너무나도 벅찬 기쁨과 숨결의 드높음!

혹은 깊음이여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어린아이에서부터 죽음을 앞둔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누구나

모두 수천만 권의

장서량을 내장한

도서관이다.

 

김준태, 지평선에 서서. 문학과지성사. 1999년.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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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으로부터 두 번째 돌아오는 갑오년.

 

국사 시간에 배운 동학혁명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부이다시피 한 나에게, 동학은 서학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상 정도로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봉준이라는 인물과 함께 실패한 혁명으로 기억되고 있었는데...

 

이번에 녹색평론 135호를 읽으며 동학이 단순히 서학에 대한 반대만으로 만들어진 사상이 아니었으며, 전봉준이 지도자로 나선 이유도 조병갑의 횡포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농민을 위한 사상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사상,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상, 그런 사상이 총합된 것이 동학인데...

 

그 때도 그랬지만 농민은 지금도 살기 힘들다. 그들을 위한 정책은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정책이라고는 농민을 홀대하는 정책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갑오년 동학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리의 농업에 대해서 생각한다. 식량 자급률이 채 30%도 안되는 나라에서 온갖 개방으로 더욱 어려워지는 농촌 현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먹지 않고 살 수 있으랴. 앞으로는 식량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데... 생존에 관련된 농업을 홀대해서는 안되는데...

 

그렇다. 동학은 과거의 사상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를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이번 호였고.

 

계속되는 "기본소득"

 

이번 지방자치제 선거를 통해서 쟁점으로 떠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경기도의 '무상버스'이야기와 달리 더욱 파급력이 큰 것이 기본소득 아니겠는가.

 

유럽에서는 좌우 이념에 상관없이 기본소득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고, 나름대로 공감을 얻어가고 있는데, 이 참에 우리도 기본소득을 쟁점화하여 공론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기본소득이 단지 녹색당의 주장만이 아니라 복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 아니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공론화될 필요가 있다. 

 

유토피아는 멀지 않다. 이번 호에도 나오듯이 가장 힘든 사람이 덜 힘들게 살게 만드는 사회,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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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물은 끊임없이 흐르면서 변화를 추구한다면, 산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품어준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한다.

 

이성선 시인은 산을 좋아했던 시인이다. 그의 시는 산 속에서 삼림욕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마음이 상쾌해지고 따뜻해지는 시. 요즘같이 어수선한 때, 마음이 어두운 때 한여름 더위에 내리는 소나기같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1999년에 산시 연작으로 54편을 모아놓은 시집인데... 2013년에 다시 펴냈다고 한다.

 

내가 구입한 시집은 1999년판. 헌책방에서 산 책이다. 이 시집을 보는 순간 무조건 손에 집어들었는데, 그만큼 이성선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전철 안에서 읽기에도 편하게 짧은 시들이 모여 있고, 다시 읽어도 언제나 마음에 와닿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또 느끼게 하고 있다.

 

지금 시대 산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시를 읽으며, 복잡한 도회지의 삶을 떠나 산 속에서 신선한 공기 내음을 맡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니 좋다.

 

문답법을 버리다

- 산시 17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 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이성선, 산시. 시와시학사. 1999년. 34쪽

 

물 위에 달빛 붓으로

- 산시 31

 

가랑잎 종이 위에다

평생 이름을 적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슬픔이더냐

차라리 실컷

물 위에 달빛 붓으로 글을 쓰겠다

 

이성선, 산시. 시와시학사. 1999년. 51쪽.

 

이렇게 자연과 일치된 삶을 노래한다. 인위적인 것이 판치는 세상에서 시인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자연과 하나될 것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야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각박해지는 마음을 추스리고 싶어 펼친 시집. 그래,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된다. '구름이 산을 밟았구나 /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구나'(서 있으면서 가는 나무 - 산시 54. 2연에서)라고 노래하는 시인.

 

자연은 서로에게 아픔을 주지 않는데,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으니, 산은 모든 것을 품어주고 그 넉넉한 품으로 산을 보는 사람들, 산에 든 사람들, 산에 오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넉넉하게 받아들여주는데...

 

나는 왜 이리도 각박할까? 모든 인위적인 것에 마음을 아직도 쓰고 있으니... 잠시 인위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산을 바라볼까?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가까이에 산이 보이니 말이다. 저 산은 내게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은 그렇게 산을 대신해서 내게 말을 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 시인이 들려주는 산의 노래... 그 노래를 들으며 산이 내뿜는 피톤치드 그것을 내 맘 속에 깊이 들이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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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나날들이다. 세상이 이토록 어두워졌는데, 빛은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한 순간에 역사의 바퀴가 멈추더니 힘겹게 올라왔던 진보라는 언덕에서 뒤로 미끌어져 내려가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약속은 생명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이 어기는 약속은 불가항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하면서 비정상이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강한 자들이 행위는 정상이고, 약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행동하면 비정상이다.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불과하다. 과연 이것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될까?

 

제왕적 권력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발휘가 된다. 단지 정치 분야만이 아니란 얘기다. 대기업에서 제왕적 권력은 대기업 총수에게 있다. 달랑 몇 %의 지분만을 가지고도 온갖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교장이라는 제왕적 권력이 있다. 모든 것이 교장의 마음에 달려 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 이런 것은 없다.

 

군대에서는 지휘관의 명령이 절대적이다. 불복종이란 없다. 그것은 범죄다. 그러니 지휘관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영혼이란 저 멀리 보내버려야 하는 존재다.

 

이런 사회는 밤이다. 어둡다. 이런 어두움 오래 되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더 이상 빛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냥 어둠 속에서 보이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해야 한다. 그 빛이 있는 한 어둠은 어둠으로만 존재하기에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빛의 역할... '삶창'이 하고 있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말라고. 빛을 향해 나아가라고...

 

삶이 보이는 창 97호를 읽다.

 

특집 기사가 "불 좀 꺼주세요!"다.

 

이 특집을 보고 지난 대선 예비경선에서 나온 한 후보의 구호가 생각났다. 그 구호는 서정적인 구호이지만 상당한 힘을 발휘한 구호였다.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릴 구호이기도 했고.

 

바로 '저녁이 있는 삶'.

 

참 당연한 말인데, 왜 이 구호가 그리도 가슴에 와닿았을까?

 

저녁이 있는 삶.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또는 혼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삶. 그런 삶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밤중에서 불야성을 이루는 대도시는, 그들이 저녁을 누리기 때문에 불야성이 아니라 퇴근을 하지 못하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기에 불을 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 산업화, 그리고 세계화가 된 지금,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다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삶은 저녁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 우리가 진정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 점 때문에 그 구호는 마음에 맴돌았고,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다. 불을 꺼야 한다. 저녁을 확보해야 한다. 일중독이라는 병에 걸린 우리는 치유하고 싶어도 살기 위해서 이 병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일중독이라는 병은 쉽게 벗어던질 수가 없고, 이 일중독이라는 병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인식을 바꾸는 일이 바로 '불을 끄는' 일이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에서 '돌봄 교실'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초등 1,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앞으로는 초등학생 모두에게 이 '돌봄 교실'을 적용하도록 하겠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참 좋은 발상같다. 좋은 정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맞벌이로 일을 하기 때문에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학교에서 돌보아 준다... 참 좋은 발상...

 

그러나... 아니다. 이는 앞뒤가 바뀐, 본말이 바뀐 정책일 수밖에 없다. 아이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또 늦은 시간에도 학교에서 보내야 한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가 너희를 돌보아 줄 시간이 없으니 학교에서 돌보아 주마. 이게 뭔가? 그럼 부모는 아이를 돌볼 책임이 조금 가벼워지니 더 열심히 일해라라는 말인가.

 

이렇게 초등학교 돌봄 교실이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면 맞벌이를 하는 대다수의 가정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은 없다.

 

일에 지쳐 늦게 들어온 부모는 피곤에 절어 있고, 학교에서 너무도 많은 시간을 보낸 아이 역시 지쳐 있을테니, 부모나 아이들이나 서로 지쳐 밤에 얼굴 한 번 보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일이 반복이 될텐데...

 

어떻게 저녁이 있는 삶. 함께 어울리며 정을 쌓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된 정책이라면 돌봄 교실을 확대할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정책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선진국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것을 법으로 명문화해야 할 것 아닌가.

 

부모들의 노동시간이 준다면 자연스레 돌봄 교실은 필요가 없고, 각 가정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될텐데 말이다.

 

"불 좀 꺼주세요!"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노동 식간을 줄여주세요." 근로기준법에 있는 그대로 하루 8시간 노동만 하게 해주세요. 아니, 발전하는 세계적 추세에 맞게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 정도로 줄여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그런 돌봄 교실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어요. 바로 이 말 아니겠는가.

 

삶창 97호.

 

 

저녁이 있는 삶. 그것이 어떤 삶인지 깨우쳐준 특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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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계절이다.

 

정치의 계절이란 말보다는 사실 선거의 계절이라는 말이 더 맞는 듯하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이미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었으니, 선거의 계절이 시작되었음에는 틀림없다.

 

지방자치 선거에 교육감 선거까지... 우리의 실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선거가 6월에 치러진다. 이 선거를 통해서 4년이 결정이 되는데...

 

정치의 계절이라는 말이 어폐가 있는 것이 정치는 우리의 삶 내내 붙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에서 절대로 자유로와 질 수 없기 때문에 정치는 따로 계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를 우리가 실감하게 되는 때가 바로 선거가 치러지는 때이니 만큼, 지금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치의 계절이라는 말을 써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언어가 삶을 좌우할 수 있으니, 정치의 계절이라는 말보다는 선거의 계절이라는 말을 쓰는 편이 좋을 듯하고, 직접민주주의 대신 간접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선거는 유일하게 시민들이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나이나 성별, 신체장애의 유무 등에 의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고 헌법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년의 나이를 한 살 낮추는 것에 대해서는 심한 반발이 있는데...

 

아직도 한창 배우고 있는 고등학생에게 무슨 선거권이냐부터, 학생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겠느냐는 말까지...

 

그래서 18세로 투표권을 낮추자는 말은 어림없는 소리로 치부되고, 아직도 실행이 되고 있지 않다. 대학입시에 매진해도 시원찮을 고3이 무슨 투표냐고? 그런 시간이 있으면 공부나 하라고?

 

그런데... 그런데... 왜 공부를 하지? 대부분의 학교 교육목표가 민주시민 양성 아니던가. 민주시민은 어떤 사람들이지? 자신들에게 관계된 일에 자신들의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노예에 불과하지 않는가. 아니면 판단불능의 사유가 있는 어떤 특정한 집단이거나.

 

교육감 선거를 예로 들어보면 문제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육감은 4년동안 그 교육청의 교육행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교육부 장관보다도 교육감에 의해서 일선 교육현장은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

 

그 단적인 예가 서울시교육감 아니던가. 전임 교육감은 혁신학교에 중점을 두고 교육정책을 펼쳤다면, 후임 교육감은 혁신학교를 지우려는 교육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교육감에 따라 학교 현장은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학교 현장의 중심축 중의 하나가 바로 학생들이다. 학생으로만 국한시키지 않으면 바로 그 나이 또래의 청소년들이다. 청소년들의 대다수를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제도권 밖에 있어도 교육정책의 영향은 제도권 안이나 제도권 밖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교육감 선거에 학생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교육감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학교교육의 범위는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초,중,고등학교 교육에 해당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판단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지, 청소년들이 판단능력이 떨어진다고? 과연 그런가? 그럼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어른들은? 왜 그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문제삼지 않는가. 투표권을 주느냐 마느냐는 판단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로 투표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문제는 단지 투표만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정치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주시민교육"이 목표인 사회과가 교과목으로 버젓이 자리잡고 있지만, 그것은 말 뿐이다. 그리고 시험용일 뿐이다. 오로지 시험을 위한 교과로 존재하는 사회과. 이런 상태에서 청소년들의 정치의식은 발달할 수가 없다.

 

제대로 된 정치교육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른이 되었다고 정치의식이 성숙한 시민이 되는가? 그런 경우가 있는가?

 

정치의 후진성, 그것은 정치교육의 부재를 이르는 말이다. 젊은이들에게 왜 너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느냐고 질책을 많이들 한다. 그것도 다른 때에는 잠잠하다가 선거때가 되면 각 당의 당리당략에 따라 이런 말이 나온다.

 

왜 정치에 관심이 없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언제 제대로 정치에 대해서 민주시민의 역할에 대해서 가르친 적이 있는가?

 

학생들이 "안녕하십니까"란 대자보를 붙이자 그것은 학생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교육당국이 앞장서서 떼어버리는 현실에서, 무슨. 

 

그래서 이번 "민들레 91호"에서는 특집으로 '정치가 꽃피는 교육'을 들었다. 시의적절하게 잘 다룬 기획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싶다면 학생들(청소년들) 너희들은 어리니까, 공부해야 할 나이니까 정치에 관심두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학생들(청소년들)이니까 제대로 정치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라고 해야 한다.

 

정치에 직접 참여하게도 해야 한다. 물론 집행권을 주지 않더라도, 그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결정을 하게도 해봐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옛날에는(지금보다도 더 후진적이라는) 15세가 넘으면 이미 어른 대접을 받았다. 춘향이의 나이를 생각해 보라. 그리도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던 춘향이의 나이는 그 때 16세였다. 또한 옛날에 소년 진사들... 뭐... 이런 과거에 나이 제한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민들레 이번 호를 중심으로 학생(청소년)의 정치교육에 대해서, 정치 참여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한다. 마냥 어리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또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시민이 양성될 수 있다.

 

학생(청소년)들에게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을 할 때에만, 선거 때만 반짝하는 정치계절이 아니라, 늘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정치라는 사실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민들레 이번 호가 상기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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