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읽으면 제목이 되는 시를 찾아본다. 어떤 시집은 제목이 된 시가 실려 있고, 어떤 시집은 시구절에서 제목을 따오기도 한다. 


  이 시집 제목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시를 찾아보았는데, 시구절을 따와서 제목을 삼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별'이란 시에 '나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이란 구절이 있다. 


 '나'로 시작했으니 '사랑'이라고 쓰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사람'이라고 했을텐데, 시집 제목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보다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이라고 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만큼 이 시집에는 사랑이 흐르고 있다. 바로 사랑, 존재에 대한 사랑이 시집 전체에 넘쳐 흐르고 있어 읽으면서 마음이 찡해지곤 한다.


'죽은 별'은 과거다. 과거를 건지는 일은 현재에 과거를 가지고 오는 일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과거. 그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에 되살리는 일. 어쩌면 시인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잊고 묻어버린 과거를 다시 살려내어 우리들에게 가져오는 역할. 그 일은 바로 사랑일 수밖에 없다.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기에.


이 시집 1부에는 시인의 가족사가 담겨 있다. 시로 쓴 가족사라고 할만큼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첫시인 '지킴이의 노래'가 1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편의 서사시라고 해도 좋다.


시집 2부로 가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속도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속도에 집착해서 잃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리다 우리가 뒤에 두고 되돌아보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속도로 인해 다른 존재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2부는 부제를 '속도에 대한 명상'이라 정하고, 한 편 한 편 속도로 인해 잃어가는 존재들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사랑이 없다면 이런 시를 쓸 수가 없다.


세상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이런 '속도에 대한 명상' 연작을 쓰게 했다고 할 수 있따.


3부에 실린 시들은 풍자시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이 많은데, 역시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풍자는 곧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풍자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다. 이렇게 시인은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이 중에 속도에 관한 시... 속도로 인해 생명이 얼마나 속절없이 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짤막한 시.


  목격 - 속도에 대한 명상1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반칠환,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시화시학사. 2003년 1판 7쇄. 59쪽.


지금까지는 이래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제동이 되는 것을 보게 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했더라도... 앞으로는... 


그래서 이 시가 더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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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별다른 불편 없이 또 별다른 두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두려운 세상이라면.

 

  공정한 세상라고 할 수 있나? 그럼에도 내가 느끼지 못했다고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아니다. 내가 느끼지 못해도 누군가에게는 공포스러운 세상일 수도 있다. 바로 내가 편안하게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두운 거리를 어두움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을 지니고 걷는 사람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또는 성폭력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니고 걷는 사람에게 같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두려운 세상에서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당하거나 했던가. 그런 세상을 마치 없는 듯이 아주 극소수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듯이 이야기 해서는 안 된다.

 

기사로만 접하는 사실과 시로 만났을 때는 느낌이 다르다. 이소호가 쓴 시는 예전 황지우가 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로 끌어와 쓴 황지우. 신문기사를 모아서도 시로 만들어냈던 그의 모습을 이소호 시에서 보게 된다. 이 시 '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이란 시도 그렇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기사화 됐던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그냥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시를 통해서 누구의 삶이 이렇게 불안정하고 위협을 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 누구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시에는 각 번호마다 설명이 달린 주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시를 복사한 그림을 보면, 시 내용 곳곳에 있는 숫자들이 그 누구에게 상처를 주는 칼, 창과 같이 느껴진다.

 

주가 없을 때보다 주가 있는 시로 보는 편이 시의 내용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인쇄가 약간 삐딱하게 됐는데... 그래도)

 

 

 

 

 

 

 

 

 

 

 

 

 

 

 

 

 

 

 

 

 

 

2021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20년. 181쪽. (주는 182-184쪽에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섬뜩해진다. 아니 부끄러워진다. 여전히 이런 일이 뉴스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 시에 있는 주가 38개인데, 38개의 칼을 맞는다면 사람이 견딜 수 있을까. 아니 언제 어디서라도 칼이 날아올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시는 이런 세상이 있음을, 그것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이런 세상을 우리가 바꾸어야 한다고.


누구는 누가 될 수도 있다고. 이것이 꼭 특정 성별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라고. 특정 성별, 또 성적 지향 때문에 이렇게 공포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누구나의 어제와 오늘은 이럴지 몰라도 내일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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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며 시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시집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없는 시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었다. 시집을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시 한편 한편을 유기체로 이해하고 감상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런 시들이 마음에 남아 시를 더 좋아하게 하기도 했는데, 이번 이원하 시집은 시 한편에서도 연과 연들이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감정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치 하룻밤 꿈 속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그 일이 어떤 연관성도 지니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꿈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충격으로 다가와 어떤 꿈은 기억에 오래 남고, 어떤 꿈은 기억에서 사라져, 꿈을 꾸었다는 느낌만 남아 있게 되는데...

 

이원하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샀지만, 제목이 된 첫시를 읽으면서 어떤 통일성을 기대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이렇게 감정들을 나열해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할까?

 

사람들 감정이 하나로 정리될 수 없음은 명확하고,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엄청남을 알려주고 있지만, 적어도 시인은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려주어야 하지 않나.

 

무의식을 그냥 무의식으로 내보내는 역할이 아니라 무의식을 의식으로 걸러 내보내는 역할,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이원하 시집에 실린 시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할까? 아주 예민한 시인의 감성을 언어로 표현해 우리가 그런 감성을 이해하지 않더라도 그냥 느끼게 하는 걸까? 감성의 넘침. 그런 시들을 읽으면서 그 넘침에 우리들이 흠뻑 젖기를 바라나?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를 이루는 낱말들은 한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낱말들을 합치면 '새싹눈물'이 된다.

 

새싹은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고, 눈물은 감정의 넘침이다. 그러니 이 시집은 전체가 감정의 넘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제목이 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가 마음에 와 닿는다.

 

제주 역시 동떨어진 섬 아닌가? 여기에 '혼자 살고'라고 했으니 외로움도 있겠고,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의 분출 또한 있을테고, '술은 약하'다고 했으니, 조금만 마셔도 자신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 이렇게 넘치는 감정은 모든 것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감정의 투사가 사람들을 부드럽게 할 수도 있다. 자신만이 존재하지 않고, 함께 존재해야 함을, 심지어 무생물에게서도 감정을 느끼게 되니 어찌 함부로 살 수 있겠는가?

 

이원하 시집을 읽으며 그런 감정들의 넘침을 생각하는데... 이 시를 자꾸 곱씹어보게 된다.

 

나무는 흔들릴 때마다 투명해진다

 

나무는 신처럼

하늘과 가깝고 수염도 자라고

늘 같은 자리에 머물지만

내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

 

한순간도 내게

솔직해질 용기를 줄 리 없다

 

편애도 없다 편애도 없는 건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침마다 손이 따뜻한 이유다

관심을 얻기 위한 온도다

 

온도의 숫자를 하나둘 올리다가

내 손가락이 몇 내가 접혔을 때쯤

손에 불이 날까

 

불은 모르고 손은 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소리는

손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손은 모르고

나는 안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년 1판 8쇄. 118-119쪽.

 

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감상만 하면 된다. 누구든 자신의 마음대로 이 시를 감상하면 되지 않겠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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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아이들에게 넌 커서 뭐가 될래?라는 질문을 한다. 학교에 진로 교육이 들어오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공부하고, 고민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질문해 보라는 취지겠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런 질문에 답할 시간이 없다. 오로지 시험을 향해 달리고 있을 뿐. 왜 자신이 공부를 해야 하는지 묻지도 않는다. 그냥 하라고 하니까 할 뿐.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렇다.


  학교에서 시달리고, 학원에서 시달리고, 엄청나게 많은 숙제 속에서 도무지 질문을 할 시간을 마련하지 못한다. 질문은 얽매임에서 벗어났을 때 나오는데, 아이들을 옭아매고 있으면서 왜 너희들은 질문을 하지 않느냐고 타박한다. 질문을 할 시간 여유를 주지도 않으면서.


그러니 아이들을 좀 여유롭게 놓아주자. 정말로 심심해서 다른 여러 가지를 찾아볼 수 있게. 그렇게. 청소년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시간을 주고 있는가? 그래서 아이들이 질문할 시간을 갖게 하는가? 질문이 있어야 답을 찾을텐데... 시험지에서 찾는 답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답을 찾는, 아니 답을 만들어가는 그런 생활을 하게 해야 하는데...


한상권이 쓴 청소년시집을 읽다가 이 시를 읽고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너무 단일한 길만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았는지...


『무소유』를 읽는 시간


『무소유』를 읽다가

종이 치자 너는

복도로 따라 나왔다.

저는 그분처럼 살기 싫어요.

급할 땐 버스에서 내려

택시라도 타야 하는 거잖아요.

물론 그렇지.

다리를 다쳐 병원 가려는데

택시비 아끼려 걸어갈 순 없잖아요.

당연하지.

하지만 어떤 날은

주변을 돌아보며 손 내밀며

천천히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잖아.

언제는 앞만 보고 달리라면서요.

문제는 집착, 그것이

저녁 강의 물살보다 앞서면

밤낮없이 세운 강의 역사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거지.

너는 너에게 무슨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갈 생각인데?


셈법이 복잡한 건 싫어요.

닥치고 돈 벌 거예요.


『무소유』 법정 스님 수필집


한상권, 그 아이에게 물었다. 창비교육. 2018년. 초판 2쇄. 46-47쪽.


이렇게 질문을 하는 학생이 이 시집에 많이 등장한다. 질문을 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만의 생각을 지닌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학생들이 질문을 하게 만드는 시적 화자는 바람직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질문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고 받아줄 수 있는 어른. 그런 어른이 필요한 시대이기도 한데... '닥치고 돈 벌 거예요'라고 말하지만, 아마도 이 시 속에 등장하는 학생은 한번 더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질문을 하고 있으니...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닥치고 돈 버는' 사회가 아니라, 돈을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돈으로 인해 생활이 힘들어지게 해서는 안된다.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사회에서 자신의 배당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 그런 배당을 정책으로 실현하도록 한다면 적어도 돈때문에 다른 일을 포기하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또한 '닥치고 돈 벌 거예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 세상이 되리라.


그런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도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은 어린이, 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우리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상권 시집을 읽으며 '그 아이에게 물었다'는 말을 '우리에게 물어야 한다'고 바꿔 생각해 본다. 우리 역시 어느 순간 질문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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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ms1123 2021-12-1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이에게 물었다..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청소년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청소년들이 직접 쓴 시라면 더욱 그 마음을 알게 되겠지만, 시인이란 존재는 본래 철이 없는 존재라, 청소년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 청소년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시집들 중에서 어른이 쓴 시들이 많은데, 누가 썼느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마음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청소년시집을 낸 시인들 중에 교사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청소년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직업이 교사일테니.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느끼는 마음들을 많이 느꼈을테니


이 시집을 쓴 이정록 시인도 교사다. 시집을 읽다보면 학생들을 이해해주는 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가 쓴 시 '의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의자가 되어주라는 어머니 말씀을 시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런 시인이 교사라면 학생들이 언제라도 와서 쉬면서 기댈 수 있는 의자가 되어 주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시인에게는 지금 청소년들이 살아갈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졌으리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서 지내게 될 사회가 그들에게 즐거움과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 세상을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슬픈 종착'을 보면 정말로 이래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슬픈 종착


규직이는 좋겠다.

서른 살쯤이면 너를 더 좋아할 거야.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살 거야.

약사 세무사가 꿈인 친구도

검사 변호사 감리사 사업가가 꿈인 애들도

다들 주문처럼 네 이름만 부를 거야.

규직아, 오, 정규직아.


이정록, 까짓것, 창비. 2017년. 44쪽.


이런 상황이 슬픈 종착이 아니라 지금 청소년들에게는 슬픈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나이가 거의 서른으로 되어가는 지금, 그들에게는 정규직이라는 말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낱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때가 아니라 지금, 그것을 인식하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슬프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사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청소년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을 먼저 알게 하고 있지 않은지.


슬픈 종착이 아니라 이미 슬픈 출발을 하게 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되는데...


청소년 시집을 읽으며 희망보다는 불안을 느끼다니... 아니,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후대가 살아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이 시에서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사로서 청소년들을 만나는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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