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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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이라 평가받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호평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이에게는 혹평을 받으며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한다. 또 어떤이에게는 최대의 찬사를 받기도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서평을 보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는다. 이 책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 나도 혹평을 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다양한 관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바라보기로 했다.

 

1. 색골(色骨)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를 집어들었을 때,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조르바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인이기 보다는 색골이다. 여성의 육체에 탐닉하는 전형적이 색골이다. 이 책을 넘기며 2~3페이지 마다 조르바은 여성에 육체, 그중에서도 엉덩이와 가슴에 탐닉한다.

 

"조르바가 저 과부는 누구인가요?"라고 묻자, 콘도마늘리오는 "씨받이 암말이지요." -114

"두목, 저것 좀 보쇼 저 잡년이 궁둥이 흔드는 것 좀 봐요. 삐뚤빼뚤! 꼬랑지에 기름 잔뜩 오른 암양같군"-38

"애야, 내가 저렇게 많은 계집아이들은 남겨 놓고 죽어간는데 울지 않게 생겼니?"-92

 

이러한 말들은 조르바가 직접하거나 조르바가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내뱉은 말들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긴다. 철저히 마초적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어떻게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머리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조르바와 같은 마초가 자유인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자유인은 너무도 많다. 특히 군대에서 그러한 인간들을 많이 만났다.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여기며 노골적인 표현을 섞어 여자를 후리고 다닌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새로운 여자와 잠자리를 갖게 되면 새로운 훈장을 받은 것마냥 자랑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각하는 자유인이 바로 색골들이란 말인가!

조르바는 여성 중에서도 과부에게 유난히 집착한다. 과부는 언제나 정복 가능하며, 그녀들을 혼자 밤을 지내도록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는 조르바의 주장은 황당하기까지하다. 여성에 대한 존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든 조르바의 표현은 듣기에 거슬린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러한 조르바를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조르바, 내 몽당 당신에게 주고 말고요. 당신이 한것 ... 여자 꿰어 차고, 머리를 물들이고, 돈을 쓰고 한거. 당신이 다가져요. 노래나 부릅시다.!"-207

 

돈많은 갑부의 허세가 녹아 있는 문장이다. 계집질하며 자신의 돈을 허락도 없이 낭비한 조르바를 좋아하는 작가는 과연 정상적인 인간인지 의문이든다.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한 조르바! 그리고 주인이 없기에 쉽게 성적 대상으로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과부를 탐닉하는 조르바! 돈많은 갑부의 환심을 사서 그의 돈을 마음대로 유용하는 조르바! 그를 자유인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인생을 무계획적으로 사는 망나니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2. 이드(조르바)와 슈퍼에고(화자) 사이

'그리스인 조르바'는 실존 인물 조르바를 모델로 쓰여졌다. 화자가 갈탄을 채굴하러 크래타에 간 것도 실제 있었던 일이라 한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화자(작가)의 관계는 너무도 친밀했다. 조르바가 하는 모든 행동을 그는 사랑스러운 관점에서 묘사하고 긍정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돈을 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화내지 않고 조르바와 노래를 불렀다. 그때 불현듯, ‘그리스인 조르바와 화자가 같은 인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르바와 화자는 두명이 아니라 한몸에 있는 두가지 존재라고 보면 이 책의 서술이 쉽게 이해된다. 조르바는 화자의 가슴 속에 꿈틀되고 있는 욕망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이드라고 한다. 그리고 화자는 자아(에고)나 슈퍼에고(도덕 등)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화자는 티베트 승려의 수행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본능을 억누르려한다. 그러나 자신의 저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욕망의 물결은 잠재울 수 없다. 즉 조르바는 세상의 윤리를 비웃으며 자유롭게 여성들을 탐닉한다. 윤리에 갖힌 자아와 욕망에 충실한 조르바 사이에서 갈등이 펼쳐진다.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이러한 싸움은 욕망(조르바)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다. 결국, 화자는 과부를 안아주라는 조르바의 충고를 실천에 옮긴다. 그리고 화자의 몸에서 풍기는 과부의 비누냄새를 맡은 조르바는 기뻐한다. 욕망의 승리인 것이다.

모든 만남은 영원할 수 없다. 조르바와 화자는 헤어진다. 욕망이 충족되었으니 욕망에 대한 갈망은 전처럼 강할 수는 없다. 조르바와 헤어진 화자는 조르바가 독일에 올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르바를 찾아가지 않는다. 결국 조르바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화자는 욕망에서 해방된다. 계율을 어겼다고 모두가 파계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계율을 어기고 더 위대한 스님이 된 원효처럼 화자는 과부와 잠자리를 가지고 나서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었다.

 

3.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조르바

그리스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존재가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그리스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적인 신부를 죽였다. 그런데, 거리에서 그 신부의 자녀를 마주치자 조르바는 자신이 가진 돈과 바구니까지 그 아이들에게 준다. 조르바는 그리스 민족주의 열풍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지만, 민족주의라는 열풍이 때로는 불쌍한 아이들의 아버지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르바는 적들에게 쫓기다가 어느 과부의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과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육체도 탐닉한다. 과부가 다음에 또 오라고 말했다. 조르바는 그 마을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그때 그 과부도 죽었을 것이라고 조르바는 추측한다.

아마도 조르바는 이때 과부의 목숨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에 유난히도 과부에 탐닉하는지도 모른다. 성적으로만 과부를 탐닉한 것이 아니다. 맨손으로 칼을 쥔 놈을 상대로 결투를 했다. 과부를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성당에 들어가려하는 과부를 크래타의 남자들이 돌을 던지며 죽이려했다. 그녀가 성당에 들어가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그녀를 내쫓으면 될 것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광기에 사로잡힌 크래타 남성들은 과부를 죽이려했다. 목숨을 걸고 그녀를 위해서 싸운 것은 조르바였다. 그는 승리했으나 그녀를 살리지 못했다. 조르바는 다시 한번 과부를 살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결정적 기회를 잃어버렸다.

조르바가 사랑했고, 미래까지 약속한 부블리나 부인이 죽어갔다. 물론 그녀도 과부이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아! 정말 죽고 싶지 않아"를 외친다. 그런데, 크래타 사람들은 냉혹했다. 그녀 앞에서 ", 어서 서둘러, 어서 죽어야지. 이여편네야"라고 말하고, "그래야 우리도 뭐하나 가져갈 것 아닌가"라는 말을 죽어가는 부블리나 부인 앞에서 말한다. 그녀가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크래타 사람들은 그녀의 물건과 가축들을 하나둘 가져갔다. 크래타인들에게 과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는 그녀의 물건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라며 기뻐했다.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가 크래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스 독립 전쟁 과정에서 과부를 살리지 못한 그는 목숨을 걸고 한명의 과부를 살리려했다. 그러나 그는 살리지 못했다. 심지어는 자신과 미래를 약속한 과부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조르바에게 과부는 성적 욕망의 대상이기 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사랑해야만하는 존재였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갖혀있는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그이기에 고상한 표현을 사용하지 못했고, 그래서 노골적인 뒷거리의 용어로 그녀들을 묘사했을 뿐이다.

 

 

조르바는 성당을 싫어했다. 조르바와 화자가 하룻밤 묵었던 수도원에서는 살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조르바는 수도사를 저주했고, 수도사의 소굴인 수도원을 격멸했다.

 

"그래요 두목, 내 수중에만 들어오면 수도원은 기적의 공간이 될 겁니다."-319

 

위선적인 수도승을 바라보며 타락할대로 타락한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심지어 조르바는 자하리아에게 수도원에 불을 지라고 부추긴다. 자하리아는 수도원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조르바는 아마도 과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크래타인의 저변에는 크리스트교의 왜곡된 윤리의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수도승과 수도원은 저주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화자는 곳곳에 불교적 언어를 사용해서 크리스트교를 우회적으로 공격했다. 겉으로는 고상한척, 사랑으로 세상을 이끄는 존재인척하지만, 실제로는 불쌍한 중생을 착취하는 크리스트교의 윤리에서 맞서서 조르바는 싸웠다. 그는 자유인이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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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9 17: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도 명작이라고 해서
결국 읽기는 했었는데...

요즘에는 맞지 않는 캐릭이라
그런지 소화해 내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강나루 2022-07-29 18:13   좋아요 1 | URL
저도 읽는 중간중간에 여러번 포기하기 싶었어요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최영우.최양현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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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우리를 운명지웠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 최영우는 태어났을 때부터 조국은 없었다. 일제의 식민지배 속에서 그에게 항일 의식을 심어준 선생님도, 친구도, 부모도 없었다.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미약했다. 최영우는 일제의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다가 전쟁범죄 혐의로 수용소에 갖혀지내며 한탄했다. 자신에게 독립운동을 해야한다는 가르침을 준 사람이 없기에 식민지 백성으로 차별을 받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남방의 포로감시원을 지원했다. 그것이 전쟁 범죄자 혐의로 이어지리라고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23년생 최영우의 삶을 따라가노라면, 답답함과 함께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인 처녀의 모습을 보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를 느꼈던 그가, 자신의 상관에게 총뿌리를 겨누어야겠다는 의기는 없었던 것일까? 포로들과 대화하던 중에 '너 조선인이지?'라는 포로의 질문에 '아니, 난 일본인이야'라고 비겁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조선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기에 식민지 조선에 내던져진 최영우에게 강렬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그의 삶을 보면서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사람이 사는 곳에 사랑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청년 최영우는 후푸카스 여인과 연애를 한다. 국경과 민족을 넘어 남방의 포로감시원이된 식민지 조선의 청년과 인도네시아의 후푸카스 여인과의 애틋한 사랑은 아슬아슬하기만했다. 청년 최영우는 그녀와 함께 한국으로 올 것인가, 현지에 남을까 등등의 다양한 상상을 한다. 안타깝게도 최영우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포로 감시원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인도네시아 현지에 남는 용기있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 만약 그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일본군을 탈출해서 인도네시아 후푸카스 여인과 함께 밀림으로 도망쳤다면, 그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는 운명의 사슬을 끊어내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영우는 그러하지 못했다. 일본을 위해서 총을 잡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포로를 감시했을 뿐인데도 연합군은 그들을 전범 취급 했다. 수용소에 갖히고 치피낭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변했다. 조선 땅을 떠난지 5년만에 고향 남원의 구선동으로 돌아왔지만, 서도역에서 만난 당숙모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그도 당숙모를 알아보지 못했다. 역사의 풍파가 두사람의 모습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최영우는 사냥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활발하고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좁은 역사의 선택지를 벗어 던지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그의 삶은 그를 냉소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민족 독립을 위한 삶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의 삶의 선택지에는 독립운동이라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랑을 선택하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역사가 휘두르는 칼날 위에서 희생되어야만 했다.

 

책장을 덮고 상념에 잠겼다. 나는 최영우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물었다. 그 대답에 선듯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인생의 선택지에 놓인 운명을 따라갈 생각만 했지, 나의 정답을 서술해갈 생각은 하지 못해왔다. 죽음을 앞두었을 때, 어제 못 먹은 빵이 생각나기 보다는 도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한다. 나의 인생에 내가 알지 못하는 역동적인 도전이 있을 수도 있다. 마치 최영우가 독립운동이라는 길을 알지 못했듯이 말이다. 혹은 생각만하다가 자신의 꿈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최영우가 일본군을 탈출해서 사랑하는 연인과 인도네시아에 남아 사랑을 이루지 못했듯이 말이다. 최영우의 삶을 보면서 나의 삶이 오버랩된다. 그래, 선택지를 고르려하지 말고, 나의 인생을 서술해나가자. 생각만 하지 말고 소중한 것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넣고 그곳에 뛰어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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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9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 대부분이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최영우라는 사람과 비슷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특히나 그들의 의식이 형성될 1930년대 후반 이후가 되면 일제의 세뇌교육은 강도를 더해가고, 그것의 부당함을 알려주기에는 탄압이 너무 심했고요. 어디서든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간다는건 어려울 뿐 아니라 상당히 행운에 속하는 주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강나루 2022-07-10 10:10   좋아요 1 | URL
˝어디서든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간다는건 어려울뿐 아니라 상당히 행운에 속하는 주변의 도움이 있어야한다.˝라는 말에 깊은 공감이 갑니다.^^

scott 2022-08-10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루님 이달의 당선 추카!
비 피해 없으신지요.
서울 연 이틀 무섭게 폭우가 ㅠ.ㅠ

이 책 최영우 담아 갑니다 ^^

강나루 2022-08-12 07:36   좋아요 0 | URL
다행히 비피해는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할 수 없어서 그것이 불편했습니다.

scott님도 비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2-08-10 16: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영우 아니고 최영우!
당선 축하드려요~^^

강나루 2022-08-12 07:37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저도 우영우를 보았는데 재미있어군요^^

mini74 2022-08-10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축하드립니다 ~

강나루 2022-08-12 07:37   좋아요 0 | URL
mini74님 감사합니다.
mini74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8-10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08-12 07:3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이하라 2022-08-10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비 피해 없는 편안한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강나루 2022-08-12 07:38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님도 비피해 없으시고,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8-11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08-12 07:39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thkang1001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bookholic 2022-08-11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늘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금요일, 주말, 광복절 쭉~~ 즐거운 시간 되시길...^^

강나루 2022-08-12 07:39   좋아요 0 | URL
bookholic님 감사합니다.

이번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8-12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08-23 19:53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해요^^

러블리땡 2022-08-12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ㅎㅎ 파친코 읽고 있는데 뜬금없지만 리뷰 보니까 왠지 이 책도 관심가네요 ^^

강나루 2022-08-23 19:53   좋아요 0 | URL
책이 얇아서 금방읽을 수 있어요.^^
 
팬데믹 제2국면 - 코로나 롱테일, 충격은 오래간다
우석훈 지음 / 문예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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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기대한다.그런데, 과연 그럴까? 신석기인이 구석기 시대로 돌아갈 수 없듯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세대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너무도 많은 변화가 우리에게 밀물들어오듯이 들어왔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회식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회식 없는 사회 생활이 나에게 너무도 행복한 시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곤하게 여러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88만원 세대'라는 책으로 유명한 우석훈의 '팬데믹 제2국면'을 꺼내어 읽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19로 시작한 변화가 어떠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 올지 궁금해서이다. 그 변화가 행복한 변화이길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첫장의 제목은 '우리는 선진국의 간다'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가장 모범적으로 극복한 나라,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들어섰다는 체감을 하고 있다. 장미빛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을 갖기에 좋은 제목이다. "우리가 겪는 변화는 우리의 연봉이 평균적으로 올라간다는 것"(61쪽)이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데, 우석훈은 "우리 나라 안에서 소득이 오른 것을 체감하기 쉽지 않다."라고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모두의 월급이 오른다는 말은 물가도 그만큼 오른다는 말이다. 나라가 선진국이 되더라도 국민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한다. "부자 나라의 가난한 국민"이 늘어날 것이란다. 여기에 팬데믹이 주기적으로 계속 된다면, 팬데믹 양극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를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어떠한 변화가 올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팬데믹 충격 이후 산업의 패턴을 A,B,C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서 매우 좋아질 산업인 A형, 충격은 받지만 제자리로 돌아올 B형, 어떻게 해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C형으로 나눌 수 있다. 위기를 겪었는데,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흉년에 싸게 나온 땅을 사서 만석꾼이 되는 사람도 있다. 대공황 시기, 낙엽 수준으로 떨어진 우량주식을 쓸어 모아 부자가 된사람도 있다. 위기는 기회를 낳기도한다. 

   

  "정치적 노동 바깥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디지털 경제의 충격을 줄이는 일과 팬데믹 충격을 줄이는 일이 같은 방향이라는 점이 중요하다."-191쪽

  

  팬데믹은 4차 산업 혁명으로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4차 산업 혁명에 연착륙할 수 없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는듯하다. 사회가 급속히 비대면 사회로 진입하면서 충격파는 더욱 커질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서는 모든 인간이 호모 데우스(신이된 인간)가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기술의 발달이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호모 데우스가 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간의 비극이 펼쳐질 수 있다. 중세 사회에 불어닥친 패스트가 중세를 해체하고 근대로 나가게 했듯이,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어가고 있다. 


  저자 우석훈은 재난 자본주의, 자영업에게 불어닥친 1차, 2차 구조조정, 지방대의 위기, K자 회복 등등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석훈이 제시한 수 많은 문제 상황과 이에 대한 나름의 대책을 살펴보며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기회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된다. 재난 자본주의에 맞서고, 자영업에 불어닥친 구조조정을 슬기롭게 넘기며, 지방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모으면서 새롭게 판을 짤 수 있다. 저들이 팬데믹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기회로 삼듯이, 우리도 서민을 위한 나라로 대한민국을 재설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공감과 단결이 필요하다. 서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대한민국을 재설계한다는 원칙에 합의해야한다.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에 길들여진 우리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설계하는 원칙에 합의할 수 있을지 의문이들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석훈이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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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결정하는 한 문장
백건필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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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한문장'이라는 책은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글을 쓸때도 타인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한문장을 쓰고 싶었다. 보충수업 강좌명을 지을 때도 학생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강좌명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이책을 펼쳐들었다. 

  저자 백건필은 심리학을 비롯해서 다양한 카피라이팅 저작들을 농축시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한문장'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의 말들 중에서 "관찰을 반복하면 통찰에 이르고 통찰을 반복하면 현찰에 이른다."라는 말은 가장 인상 깊었다. 보통은 관찰하기 보다는 상상할 것을 강조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달리, 관찰을 통해서 통찰에 이르자는 저자의 말은 매우 강력한 울림을 주었다. 해답은 책상위에 있지 않고, 현장에 있다는 진실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광고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광고에서 제시하는 할인 혜택부터 시작해서 제품이 조기 소진될 수 있다는 말들이 모두 백건필이 제시한 '마음을 훔치는 카피라이팅'기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광고의 카피라이팅을 평가하게 되었다. 역사를 소재로한 영화를 보면서 역사적 고증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분석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제는 광고를 보면서도 그 수준을 평가하게 되었다. 아는 만큼 세상을 보게된다. 이제는 광고도 달리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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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 거대 농축산업과 바이러스성 전염병의 지정학
롭 월러스 지음, 구정은 외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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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스, 메르스,코로나19로이어지는 새로운 전염병 유행의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그때 그때 창궐하는 새로운 전염병을 두려워할뿐, 예전에는 없었던 전염병이 창궐하는 근본원인을 고민해보지 않았다. 아무런 죄도 없는 돼지, 소, 닭들이 산채로 압매장당하는 모습을 담은 뉴스를 보면서도 그 근본 원인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더 이상 근본원인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박쥐의 몸속에 수천년 동안 아무런 탈없이 잠들어 있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깨운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바이러스를 불러 낼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이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저자 롭 월러스는 비장하게 서문을 써 내려갔다. 미국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쌍둥이 빌딩이 알카에다의 비행기 테러로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바로 그 자리, 그라운드 제로를 언급하며 거대 농축산업과 대결하는 자신의 결의를 다진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9.11 이후로 130만 명을 죽인 이 절대 권력은 자신의 핵심 교리를 모욕하는 자들에게는 더 없이 무자비하다. 그러나 나는 그 결과를 기꺼이 대면할 준비가 되어있다."-19쪽


  막대한 자본을 무기로 세계 식량 산업을 거머쥐고 있는 거대 농축산업과 대결은 가시밭길이다. 그는 과거 수구 정권이 진보 인사를 탄압하듯이 그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장미가 넘치는 서문을 쓸 정도로 그는 인류를 절멸 시킬 수있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바이러스의 숙주인 거대 농축산업과의 싸움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인 문제일까? 거대 농축산업 덕분에 우리는 싼 가격에 고기와 야채를 먹을 수 있지않은가? 공장식 가축 사육은 무엇인 문제인가? 거대 농축산업이 더욱 커진다면 지구상에서 기아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거대 농축산업의 팽창은 소규모 자영농을 몰락시킨다. 몰락한 그들은 살기 위해서 임야를 개간하며 야생 동물과 접촉한다. 때로는 살기 위해서 야생 동물을 사냥하다가 그들의 몸속에 있던 바이러스에 감연된다. 병원균으로서는 새로운 숙주를 얻는 행운 에 당첨된 것이다. 거대 농축산업은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서 수려한 밀림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왕국을 짓는다. 그 왕국에서는 닭이 60일을 살았지만, 이제는 40일을 살게 된다. 가슴살이 비대해지며 스스로의 발로 일어설수 없는 기형의 닭들이 조그만 닭장 속에서 빨리 살이찌고 재빨리 도축된다. 바이러스는 새로운 숙주의 몸에서 또다시 새로운 숙주를 만나는 여행이 시작한다. 어린 닭은 면역력이 낮기에 쉽게 집단 감염을 시킬 수 있다. 그러나 빨리 도축되기에 바이러스는 살아남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여야한다. 그러는 과정속에서 고병원성 바이러스가 탄생한다. 한순간에 그들은 닭들과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죽음에 이르게한다. 

  놀라운 사실은 바이러스 사이에서, 혹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사이에서 서로 번식을 돕는 놀라운 공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예로 헤르페스 바이러스와 HIV 바이러스가 서로 번식을 도울뿐만 아니라, 심지어 박테리아가 사람이 만들어 놓은 틀 숙에서 섞이고 짝을 이룰수도 있다. 박테리아들 끼리는 서로 유전정보를 주고 받으며 빠른 진화의 과정을 겪는다. 인간이 쫓아가기에는 그들의 진화 속도는 너무도 빠르다. 인류는 그들을 우습게 보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농촌의 마당에서 자라난 가축들은 나름데로 면역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은 오랜동안 이루어진 진화의 혜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장식 축산업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형적 가축들은 그러한 혜택을 누릴 수 없다. 더욱이 거대 농축산업은 수직적계열화를 통해서 전염병의 세계화를 이룰수도 있다. 여기에 기후변화가 더해지면서 야생 동물이 보유하고 있는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유입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항생제로 이를 막을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내성을 진화시킨 병원균이 등장하고, 이전에 간염 시키지 못했던 종에게 병원균이 점프하여 감염시키고 있다. 바이러스는 영리하고 재빠르다. 그래서 저자 롭 월러스는 지리학자 제이슨 무어의 말을 빌어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안에 전염병을 품고 있는게 아니라 그 자체가 전염병이다."(300쪽)라고 일갈한다. 자본은 바이러스를 불러들인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치명적 위협이 될텐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인류를 위협하는 인수공통전염병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저자 롭 월러스는 'One Health'를 제안한다. "자연, 인간, 동물의 건겅은 모두 이어져있으므로 인수공통전염병을 막기 위해서 환경과 농업까지 고려해 총체적으로 접근해야한다."(177쪽) 그렇다. 지구도 하나의 거대한 우주이다. 동물과 사람, 동물과 자연, 자연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동물, 자연, 인간을 별개의 통제 그룹으로 보는 인간의 오만함과 이기심을 거두지 않는다면 인류는 인수공통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One Health'를 인정한다면, 인간은 공장식 사육, 유전자 변형 작물 재배 등의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농축산업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깨달을 정도로 자본은 현명하지 않다. 

  자본은 현명하지 못하지만, 교활하다. 정치도 자본의 힘에 종속되어 있다. 교활한 자본의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미국에서 사람이 돼지에게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도 정부는 그 돼지를 검사하려면 소유자의 허락을 받아야한다. 그뿐만 아니다. 돼지 바이러스 검사 결과가 연구자에게 제공되지도 않는다. 자본의 힘에 종속되고 그들에게 휘둘리는 정치권을 보면서 우리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든다. 

  정치는 자본의 힘에 굴복할 뿐만아니라, 스스로 체제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 과학의 논리를 외면한다. 중국만이아니다. 인도네시아도 H5N1의 쌤플제공을 고부했다. 미국도 정치적 이유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왜곡한다. 저자는 '나프타 독감'이라는 용어를 창조했다. NAFTA 체결로 인해서 악성 바이러스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급속한 전파가 가능해졌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유행이 가능한 것은 소규모 농장의 몰락과 다국적 거대 농축산업의 융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 권력은 이러한 진실에 눈을 감고 있다. '너희 나라의 잘못'이라며 팬데믹의 원인을 호도하며 자신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바이러스 사육은 보지 못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중국이 보여준 모습은 다른 국가에게서도 관찰되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가장 역겨운 사실은 "시스템의 실패가 오히려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242쪽) 즉, 공장식 대규모 가축 사육 시스템이 맹독성 바이러스의 진화를 촉발시키고 이것이 위생규정 강화로 이어진다. 강화된 위생규정을 갖추기 힘든 소규모 농가는 몰락하고 맹독성 바이러스의 천국인 대규모 가축 사육 시스템은 더욱 강하게 확장한다. 거대 농축산업의 교활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거대 농축산업과 바이러스의 공생관계를 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절망감이 밀려온다. 


  이 책을 읽으며 거대 농축산업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있을까?, 바이러스와 싸워서 인류는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절망적인 질문이 밀려왔다. 거대 농축산업과의 대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저자는 콕번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헤시오도스와 오비디우스가 탄식했던 '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다. 상황을 바꾸면 풍요가 있다. 세상은 뒤집힐 수 있다.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다. 우리가 어디를 보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안다면 황금 시대는 우리 안에 있다."-345쪽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어디를 보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려면 나 혼자만 어디를 보고 무엇을 생각해야하는지 알아서는 부족하다. 내 이웃과 함께 할 때만이 '황금 시대는 우리 안에 있다.' 만일 내 이웃과 함께 진실에 눈뜨지 않는다면, 남북전쟁 이전 쓰레기 장에서 7블럭 떨어진 곳에서 노예가 길어온 물을 마시고 죽은 3명의 미대통령(제임스 포크, 재커리 테일러,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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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6-28 0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강나루님 리뷰 반갑습니다. 이 책 언제 읽었던지...가물랑 하려던 참에 강나루님 리뷰도 다시 리마인드.
저는 롭 윌리스가 꽤 강한 기질(그걸 반항심이라하면 그의 저항정신을 가볍게 표현한 것 같고....)을 가진 학자구나 하며 흥미로웠던 기억이 나요.

‘황금시대는 내 이웃과 함께 할 때만....‘그런 대목이 있었군요.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고 접수해갑니다. 덕분입니다

강나루 2022-06-28 04: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학문의 세계는 진실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롭 윌리스의 책을 통해서 다시한번 깨달았습니다. 진실과 대면하는 용기는 정치인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네요.^^